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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작가연구 스크랩 한국근대회화 10인전
rose 장혜숙 추천 0 조회 104 08.12.19 13: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근대회화 10인전

 

1. 김환기

 

산, 달, 매화, 사슴, 여인, 새, 항아리…. 확실히 그가 즐겨 그린 소재들은 한국적이며, 본질적으로는 동양적이다. 그 중에서도 그가 특히 애착을 가진 것은 이조백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조백자에 대한 그의 열정은 거의 광적이어서 일제 말인 1944년부터 육이오가 나기 직전까지 거의 매일 한 점씩의 도자기를 구입해 들였다 한다. 이를테면 이조백자를 그에게 있어 '꽃이 존재하기 전의 꽃의 모습' 같은 것이었다.

"조형의 미를, 민족을 나는 도자기에서 배웠다. 지금도 교과서는 바로 우리 도자기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는 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새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도자기에서 오는 것들이요, 빛깔 또한 그러하다."

이조백자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환기의 데뷔작은 '이과회'에서 응모하여 입선한 <종달새 노래할 때>(1953)로 알려져 있다. 1938년에 김환기는 동경 자유미술가협회전에 <론도>라는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이되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이 작품은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한 원조로 기억되며, 유럽화가들의 기계적이며 기하학적인 추상 기법에 비하여 훨씬 동양정신에 근접해 있다는 후대 평론가들의 후한 평판을 얻게 된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김환기의 작품은 어느 도록에도 실려 있지 않다. 아니, 세계의 어는 전장 속에서도 추상 미술이 꽃을 피웠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실존이었으며 그 극한이었다. 이 기간 중 김환기가 이뤄낸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혼과 재혼이었다. 42년 그는 첫부인과 이혼을 하며, 44년 수필가 김향안 씨(한때 이상의 부인)와 재혼을 하게 된다.

김환기에게 해방 공간은 행운의 시점으로 다가온다. 옛주둔군의 수도에 유학한 이력들이 이제 빛나는 훈장으로 빛을 발하?? 되는 것이다. 그는 국립 서울대학의 미술학부의 강의를 맡게도 되고, 국전 심사 위원과 서울시 문화 위원 일을 보게도 된다. 이즈음 그는 유영국, 장욱진들과 함께 '신사실파'를 조직, 그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1963년 미국에 건너간 金煥基는 1974년 뇌출혈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그림 ‘무제’(1972년 작)는 국내 경매에서 3억9000만원에 낙찰됐다. 근현대미술작품의 국내 경매 사상 최고 액수였다. 한편 외국 경매에서는 박수근의 작품들이 3억∼4억원대에 팔리며 국내 작가 중 최고가를 형성해왔다. 박수근의 ‘절구질’은 1997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38만7500달러(약 4억3000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김환기씨의 작품을 볼수있는곳:http://deepen.namom.net/

 

출처 : 여러곳에서~




 

2. 박생광

 

70대 후반에 불화, 무속화 등의 토속이미지들을 단청의 강렬한 빛깔로 재해석한 채색화풍을 창안한 화인 박생광은 ‘인생역전’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거장이다. 오랜 일본유학과 현지 화단활동 탓에 70년대까지 왜색풍 화가라는 혹평 속에 잊혀지는 듯 했던 그는 말년 단청의 강렬한 오방색을 절묘한 바림으로 융화시킨 특유의 화법으로 극적인 자기변신에 성공한다. 81년 서울 백상기념관의 개인전과 타계한 해 열린 85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의 특별초대전을 통해 단숨에 한국화단의 큰 별로 재기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76년 작 <밤의 매화> 같은 것은 반추상 구도의 작품이다. 특히 70년대 일본체류 시절 채색을 절제하고 그린 작품들은 신일본화풍의 영향으로 정교한 배치와 색면분할적 화면이 엿보이는데, 80년대 새 안료기법을 개발하며 그만의 채색화풍을 성취하기까지 복잡한 내면적 고뇌와 숱한 암중모색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1970년대 말 이후 한국적 미감인 오방색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전통을 수용하고 계승 적용하려는 작가들의 관심이 커져 가는 것과 함께, 치기 난만한 발상이나 대담하고 강렬한 원색의 채색효과를 자신의 창작 활동에 수용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화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생광이 그 대표적 화가들이다.
특히 박생광은 80년대에 이르러 민족정서를 기반으로 한 채색화의 신경지를 이룩해냄으로써 수묵위주의 한국화단에 채색화의 가치를 일깨워줌과 동시에 일본화의 아류로서의 오명을 불식시켰다. 그는 전통적 불화, 무속, 민화와 같은 형식을 원용하여 강렬한 원색으로 소재를 재구성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면효과를 창출했다

 


 

3. 박수근

박수근(朴壽根 : 1914∼1965) : 서양화가, 소박하고 일상적인 서민의 삶의 모습을 한국적인 서정성으로 표현한 화가. 주요작품 <나무와 두 여인>, <모자(母子)>, <절구질하는 여인>, <농악> 등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당시 넉넉했던 집안 형편은 그가 보통학교에 들어갈 즈음 어려워졌고 그 이후로는 계속 가난으로 인한 고단한 삶을 살았다.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화가가 되고자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하여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을 하게 되었고 이후 거듭 선전에서 입선하였다. 화가로서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25동란 후 박수근은 한동안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후 국전에 수 차례 입선과 특선을 하였고 이 때부터 가난한 이웃을 소재로 하여 평면적이고 독특한 마티에르(질감)를 가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갔고 화가로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57년 심혈을 기울여 그린 대작 <세 여인>이 국전에서 낙선한 것에 크게 낙심한 나머지 과음을 계속하여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간경화도 심해졌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계속 작업을 해갔으나 건강이 더욱 나빠져 196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것은 박수근 자신의 철학과 그림에 대한 생각이 담긴 유일한 말로 여기에서 그의 작품의 주제와 특징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박한 우리네 서민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일하고 있는 여인이나 장터의 풍경, 할아버지와 손자 등 생각만으로도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그들을 박수근은 그리고자 하였다.

그들의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화강암의 거친 질감을 화폭에 옮겨왔고 그 위에 공간감을 무시하고 극히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한 평면화된 대상을 모노톤의 색채로 그려내어 마치 바위에 각인된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된 그의 작품에서는 숭고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박수근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서구예술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속 실력을 쌓아간 것이 오히려 그 자신만의 시각과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가 된 것이다.



 

4. 변관식

 

1910년 11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조석진이 교수로 있는 서화미술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25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수묵화풍을 접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사생하는 등 새로운 화풍의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얻은 실경에 대한 애착으로 향토색 짙은 독특한 실경산수가 발전하게 된다.

광북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관여하기도 했다.

1956년 국전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그는 수상자 선정과정에서 혼탁한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자

점심식사자리에서 냉면 놋대접을 집어던져 심산 노수현의 눈두덩을 찢고 말았다.

당시 '연합신문'에 국전심사의 불공정성을 폭로한 글을 기고한 후

그는 두번 다시 심사위원을 맡지 않고 재야 화가로서 화업에만 몰두하고 지냈다.

 

그의 화풍은 마른 붓질을 더해 짙고 거친 분위기를 보이는 특징이 있다.

관념속에 이상화한 산수가 아닌 현실의 산수를 그린 실경산수화가이며

또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미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는 변관식은 정선 이후

금강산 그림을 가장 잘 그린 작가로도 꼽힌다.

 

그와 함께 근대 전통회화의 거목으로 꼽히는 청전 이상범이 모범생같은 삶 속에서

안온하고 순응적인 농촌풍경들을 그렸다면 변관식은 기개가 넘치는 강렬한 그림들을 그렸다.

개인사에서도 저항적인 풍모가 강했다.

인간사의 속됨을 싫어했고 방랑벽이 심했다.

평생 야인을 자처한 그의 그림은 아름답고 편안한 청전 이상범의 그림에 가리어 생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의 사후에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장한 '소정양식'의 요체는 먹을 엷게 찍어 윤곽을 만들고

그 위에 먹을 켜켜이 올려가는 적묵법과 진한 먹을 튀기듯 찍어 선을 파괴하는

파선법의 질박한 터치, 여기에 역동적이고 파격적인 구도, 해학적인 인물상 등은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한국인의 심성에 더없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소정의 산수화는 조선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실경 산수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돼 청전 이상범과 더불어 근대 한국화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된다.

 

 

 

 

5. 이상범

 

청전 이상범은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30대후반에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록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표적인 한국 근대 미술가를 뽑을 때면 항상 그는 첫번째로 손꼽힌다.

그가 이처럼 유명한 것은 산수화에서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고

 우리 근대 미술의 자부심을 살려줬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개성과 창의력은 우리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민족 공통의 정서와 미의식을 자극하고 국민적 공감력을 지닌

한국적 풍경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게 생각된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이상범의 산수화를 보고 심취하여 "산도화3"에서 그 감흥을 읊었던

것도 그의 작품세계가 가장 향토적이며 전통적인 저어가 어린 풍경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이상범은 미술의 사회적 기반이 아직 취약했던 근대기에 관변 화가라는 제한된

의식세계 속에서도 개인과 민족은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자각 위에서 새로운 전형의

한국적 풍경을 이룩하고 대중적 친밀성을 획득한 국민화가인 것이다.

http://www.yisangbom.com/index.html

 

 

 

6. 오지호

 "한국적 인상주의 회화의 개척자"

그의 작업은 특히 서구적 취향에서 벗어나 우리의 자연미와 풍부한 색채, 밝은 빛의 재인식이라는

예술적 여과 과정을 깊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를 일컬어 '무등산의 별' '무등산 산신령'등의 무등산 호칭이 연결된 말을 붙이는 것도

그의 자연주의적 삶의 태도와 회화와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1950년대 이후부터 제작된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오지호와 무등산' 혹은 '무등산과 오지호'라는 등식관계를

성립시킨 화가로 평가받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특히 일반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국한문 혼용론자로 1969년에는 어문교육연구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 "한글로만 교육하면 천재도 천치가 된다"는 극단적인 국한문혼용론을 펼치기도 했다.

 

 

 

http://www.ohchiho.co.kr/

 

 

7. 유영국

 

유영국 화백은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제1세대 작가이다.

1930년대 후반, 당시로선 가장 실험적인 추상미술을 시도하여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 추상미술의 발판을 놓았으며, 이후 꾸준히 추상에 바탕을 둔 자기세계의 심화를 보여준 작가이기도 하다.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적 패턴에 의해 성립되기 때문에 더없이 간결한 인상을 준다.

삼각과 원, 그리고 일정한 직선의 띠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 놓는 여러 기하학적 면 분할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구성요건은 대단히 간결하면서 동시에 차가운 논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하학적 추상이 차가운 추상으로 관념되어 있듯이.

 

 

 

8. 이응노

 

고암 이응노 화백이 한국화의 현대화에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국내보다는 프랑스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 유명 평론가로부터 추천을 받기도 했고,

마티유, 폰타나, 타피에 등 세계적인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또한 1964년부터는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며

동양화를 전수하는데 큰 기여를 해왔다.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다.

동양화의 현대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던 그는 동양화의 필의를 끝까지 잃지 않았고

추상의 작품에서도 동양과의 맥을 놓지 않았다.

아쉬운 것은 제한된 공간 내에 시기별 대표작들로 전시를 구성하면서 고암이 말년까지

꾸준히 제작했던 수묵화의 깊은세계를 다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이다.

 

동베를린 사건과 윤정희,백건우 남치사건..두번씩이나 정치의 희생양이 되었던 그는

국내 화단에서는 금기시되는 작가였다.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회고전을 통해 그의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고국에서 전시되었지만 그는 전시회 기간 중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끝내 그리고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사망했다.

옥중에서도 밥알과 신문지를 섞어 반죽해 조각을 만들고 화장실 종이에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은 나에게는 죽음을 의미 한다"고 했다.

전시 때문에 도쿄까지 왔다가도 고국에 들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선생은 조국을 향해 선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부인 박인경 여사는 전한다.

 

http://blog.naver.com/yj8383?Redirect=Log&logNo=90012116756  외 여기저기..

 

  

김해의문화의전당에서  원본 크기의   '군상'  을 보면....

검은 사람들의 움직임 하나하나 따라가는 재미와 역동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9. 이중섭

 

소설 속 주인공으로....내 기억에 인식된 화가...

 

 

 

이중섭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만큼 유명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5세이후 어릴 적부터 고구려시대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바라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던 이중섭은

가난에 절어 절망하던 순간까지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놀랍게도 민족동란의 참혹함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판잣집 골방에서 콩나물시루처럼 웅크린 상태에

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이나 부두에서 일하다 말고도 그렸다. 잘 곳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렸으며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 그렸다. 때론 허무해서 또 때론 외로워서도

그렸다. 피난시절 세상을 전전하면서도 유화 2백여 점과 은지화 3백여 점 등 총 5백여 점의

작품들을 그렸다. 이 같은 사실들은 그에게 있어 그림은 곧 생존과 생활과 생애의 전부였음을 말

해주는 대목이다.

 

이중섭과 일본유학시절을 함께 했던 한 노 화가는 소에 관한한 누구도 이중섭을 따라올 수 없을 것

이라며 그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우직한 소가 좋았고 그것을 그림을 그림으로서 자신의 항거적 마음

을 강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를 살던 이중섭이 속를 통해 강한 민족성을 표현했다고

보여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신병을 앓으며 가난에 허덕였던 말년에 그려진 소에는 분노와 좌절의 느낌이

물씬하다. 이 중 사망하기 2년 전인, 1954년 무렵 그려져 현재 홍익대박물관에 소장 중인 대표잔 '흰소'

는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독특한 작품이다. 검은 빛과 흰빛이 아울러진 거칠고 굵은 붓질은

거의 울분에 가깝다.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추사 김정희 추사체와 흡사하다.

 

헌데 이중섭이 소보다 더 자주 그리고 애착을 보인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다.

'은지화'에 나타난 아이들이 막연히 1946년 태어나자마자 죽은 첫째 아들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중섭은 원래부터 아이들을 사랑했다. 초창기부터 그의 그림엔 아이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봄의 어린이'도 그 중 하나다. 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금속막을 긁어 새기고 연필선으로 메운 것은 상감기법이나

화감암에 새긴 선묘와 연결 지을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민화나 분청사기에 실현된 여러 가지 기법을 종합하여

응용한 그림이기도 하다.

이것은 종이에유채로 그려졌으며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로 유쾌하게 뛰어 놀고 있는 동작들을 담고 있다.

허나 그림과 화가의 삶은 다른 것일까. 원산에 살던 그는 이 당시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되는

고통을 겪고 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의 표지를 그렸다가 일본성이 짙다하여 문초를 받는 등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중섭은 술을 자주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신병원 어느 차가운 병실 귀퉁이에 쓰러져 쓸쓸하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추앙해 마지않는 근대미술의 대가 이중섭의 40년 짧은 생애는 그렇게, 애처롭게 막을 내린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었고 그를 죽인 것은 평소

어지간히도 간수하지 못하던 몇 푼의 돈이었다. 또한 그를 아끼는 주변인들이 그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사람들 역시 주변인이었다.

 

10. 장욱진

 

 

장욱진 화백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 달, 나무, 가족 등 주변의 일상적인 이미지를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표현하여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상적인 소재를 아주 절제된 형태로 순진무구하게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동심처럼 맑은 그의 정신세계가 작품속에 투영된 것이다 .

 

" 장욱진 성생에 관한 이야기는 시작도 막연하고 끝맺음 또한 막연할 것 같다. 그와 마주하고 앉으면,

서론을 접어놓고 말이 시작되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도중에 끝나 버리고 만다.

삼십 년 전 그림에서 이미 끝나 버린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 그는

시작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

 

- "장욱진의 그림과 삶 - 내일은 그림을 그려야겠다" , 최종태/서울대미대조소과교수 글中-

 




 

 

 

kevin kern - sundial dream

<김해시문화의 집 자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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