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집, 1995년, 문학동네.
이 책에는 김승옥의 단편소설 15개가 실려 있으나, 이 독후감에서는 ‘무진기행’과 ‘서울의 달빛 0章’만 다룬다.
이 <무진기행>은 1964년 김승옥이 23살 정도인 대학생 때 쓴 작품이다. 그 나이에 이런 소설을 쓰다니!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주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으나 헤어지고 나서 돈 많은 제약회사 집안의 이혼녀와 결혼했다. 그 회사에 주주총회가 있기 전 몇 일 동안을 이용하여 주인공은 자기 고향인 무진을 여행하는데, 이 소설은 그 몇 일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쓴 것이다.
앞부분에 이 무진(霧津)의 명산품이 안개라고 나온다. 1960년대 내가 어렸을 때는 저 바닷가의 무진만이 아니라 내 고향 김포에도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했다.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는 오전 늦게까지 대지를 점령하였고 몇 미터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아주 짙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대개 안개가 끼는 날은 오전에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나면 낮에는 으레 햇빛이 강한 맑은 날이 되었다. 이런 안개를 지금은 도회지로 변한 김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데 저 무진에서는 지금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김포도 안개가 많이 끼는 것이 어찌 알려졌는지 이 무진기행이 ‘안개’라는 영화로 제작될 때 그 촬영지가 김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1960년대에 이런 영화촬영은 아주 볼거리여서 많은 사람들이 뚝방에 모여들어 촬영현장을 끼웃거렸고 아이들도 어른들 사이에 껴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저 촬영광경을 바라보았다. 김포 넓은 평야지대에서 영화촬영이 시작되었는데 안개가 부족했던지 한쪽에서는 스탭들이 정월대보름날 쥐불놀이 하는 것과 같이 깡통에 무엇을 넣고 빙빙 돌리며 연기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영화가 나중에 김포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보았는데 그 촬영장면은 조금 밖에 안 나왔다고 투덜대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안개가 배경이 되었을 뿐 주제는 ‘하루 밤의 꿈같은 사랑’이야기다. 서울서 머리를 식히려 내려온 주인공에 매달리며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음악선생인 한선생과 주인공이 성관계를 맺고 더 이상의 관계를 진행시켜 보려는 상황에서 서울에서 아내로부터 빨리 올라오라는 전보를 받은 주인공은 한선생에게 미련을 담은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리고 서울로 떠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이야기인데...
그 안개가 자욱한 그 무진은 주인공에게는 고향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이런저런 어둡고 쓰라린 추억과 상처를 되살아나게 하는 곳이었다.
“무진에서의 나는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였었다. 더러운 옷차림과 누우런 얼굴로 나는 항상 골방 안에서 뒹굴었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대열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비웃으며 흘러가고 있었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는 긴긴 악몽들이 거꾸러져 있는 나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하였었다.”
이번 여행은 안타깝게도 두 사람에게 한 가지 더 상처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남녀관계는 하루 밤에도 만리장성을 쌓을 수가 있는 것이라 뭔가 뜨겁고 간절한 무엇이 있어 더 진행될 듯하다가 ‘자! 이번에는 여기까지!’를 선언하면서 이 소설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난다. 그 어느 시대에도 사랑은 있었지만 그 사랑이 제대로 된 결실을 이루기보다는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훨씬 많은데 이 사랑도 그러하다. 서울로 가고 싶어 매달리던 그 여선생은 상처만 받고 아픔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이런 스토리보다도 이 소설의 사람들의 심리와 주변상황에 대한 세세한 묘사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디테일에 있고 악마도 저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많이 인용되는 무진의 안개 모습이나,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통금 사이렌 소리와 한밤의 개구리 울음 소리들이 시각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이 한선생에게 서서히 다가서는 마음이 손에 잡힐 듯하다.
““조금만 바라다 주세요. 이 길은 너무 조용해 무서워요.” 여자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여자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나는 갑자기 이 여자와 친해진 것 같았다. 다리가 끝나는 바로 거기서부터, 그 여자가 정말 무서워서 떠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바라다 주기를 청했던 바로 그 때부터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얼마 전까지 그 여자와 주고받던 얘기들을 다시 생각해 보려 했다. 많은 것을 얘기한 것 같은데, 그러나 귓속에는 우리의 대화가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 그 여자는 서울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그 여자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는 문득 그 여자를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나는 <어떤 개인 날>의 그 이별을 생각하며 말했다. 흐린 날에는 헤어지기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쫒아버렸다”
<서울의 달빛 0章>도 결국은 사랑이야기다.
<무진기행>에도 수음(手淫)이나 개들의 교미(交尾), 처녀성(處女性)이 언급된다. 그렇지만 그 소설에는 꼭 그런 외설적인 얘기 없어도 소설의 흐름이나 작품성을 해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울의 달빛 0장> 이 소설에는 성적인 표현이 더 노골적이고 성에 관한 언급이 더 많이 나온다.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서 희롱하는 짓거리, 음부에 대한 이야기, 성교와 성병, “남성을 입에 넣고 애무”하는 이야기... 그렇다면 앞의 <무진기행>과 달리 이러한 성적인 언급이 이 작품에는 필수적인가? 그렇다! 이 소설에서는 성적인 얘기는 알파요 오메가다.
1977년에 그래도 권위가 있는 ‘이상 문학상’을 받은 이 소설이 전체적으로 왜 외설적이고 퇴폐적인가? 하기야 우리 사회가 겉으로는 근엄하지만 뒤로는 많이 퇴폐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소설은 리얼리즘을 추구한 소설인가?
그렇다! 이 소설은 “탐욕스런 청춘, 이기적인 중년, 발기되는 노년들이 물처럼 공기처럼 빈자리를 메우려는” 퇴폐적인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가 주를 이룬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가 그랬겠지. 같은 시대에 같은 서울대를 다닌 이청준은 좀 지적이고 품위있고 좀 깊이가 있는 소설을 썼는데 김승옥은 왜 이런 경향의 소설을 썼을까? 하기야 그런 김승옥이 기존의 관념과 기대를 타파하고 3류 소설가들처럼 이런 외설적인 것을 소재로 실재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정면으로 조명했다는 것이 파격적이고 어쩌면 그래서 문학적으로 더 의미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또한 그런 이유로 김승옥 작품들은 영화화 될 수도 있었겠다.
이 소설은 퇴폐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부모덕에 부족함 없이 잘 살 사고 있는 주인공은 부산에서 서울 오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여배우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
자기 부인이 다른 남성들과의 성관계가 많은 여성이라는 것을 첫날밤에 확실하게 확인하고, 많은 남성과의 잦은 성관계와 불임수술로 인하여 생긴 습관성 유산 증상이 있고, 성병도 앓고 있고... 하기야 남자 주인공도 문란한 성생활과 성병 감염 경험이 있어 cool 하게 퉁치고 대충 잘 살고 있었는데, 여자는 친정의 어려운 경제 살림에 도움을 주고자 룸싸롱에 호스테스로 나갔다가 아주 우연히도 남편과 마주친다. 그 정도가 되면 이혼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이혼 수속을 밟으면서 남자는 많은 방황을 하게 된다. 쓸데없이 비싼 차를 사고 더 문란한 성생활을 하고.
“눈만 뜨면 내 사고의 초점은, 강력한 모터로 움직이는 모터처럼 아무리 멎게 해도 억센 힘으로 내 의지를 밀쳐내 버리며 자동적으로 한 점으로만 집중하며 나를 목마르게 하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여자의 음부로만. 오직 여자의 음부로만. 눈만 뜨면 내 앞에 마주서는 이미지는 여자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서 꿈틀거리고 느끼고 생활하고 울며 잠드는, 알맞은 볼륨을 가진 생명체 음부였다.”
이러한 문란한 성생활에 대한 서술이 많이 나오는데 현실의 공허함을 뭇여성들과의 성교를 통해서 해소하려는 방식에 대하여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으나 참 별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소설의 주인공들은 좀 특이한 사람들이겠지!
어차피 이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음에도 주인공은 안 주어도 되는 위자료를 주려하고, 이혼 후에도 ‘이따금 그 여자의 팔과 부딪치면 내 왼팔이 어깨에서 손끝까지 마비된 듯 무거워지는 느낌을 주는 그 여자’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여자는 주인공이 주는 위자료 통장을 냉정하게 찢어버리면서 사라져 버린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다.
“나 역시 그 여자와의 완전무결한 몌별(袂別: 작별함, 헤어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증오의 고통도 함께 찢겨져버린 것이다”
여자에 대한 주인공의 미련은 이렇게 완전무결하게 찢겨진다. 결혼생활 중에도 주인공은 여자의 과거를 포기했고, 기꺼이 이혼을 통해서 여자의 현재까지도 포기하면서, 여자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차지하고 공유하고 싶은 아주 조그마한 소망조차도 무참하게 거절당한 것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미련을 돈을 미끼로라도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었는데... 이 소설의 전체적인 경향은 타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그럼에도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엿보인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이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저러나 이 남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위의 두 소설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소설들도 다 1960~70년대의 산물들이다. 그러니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은 좀 더 소설속의 분위기들을 더 깊게 실감하게 된다. 이 소설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험악하고 거칠던 시절, 성이 노골적으로 모욕당하고 매매되고 약자들이 폭력에 대책 없이 노출되던 그런 시절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 소설들은 그러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으며 우리들의 삶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첫댓글 다음 모임에 대여 부탁드립니다^^
햇볕님! 이 책은 학교에서 빌린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