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군대에서 제대한 후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군을 다녀온 후 나는 우연히 집 뒤편 마당에서 우연히 청자파편을 발견했다.
그 파편은 일반적인 청자와는 달리 기와형태를 하고 있었다. 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소쿠리를 가져와 청자로 된 기와 조각들을 모아놓았다.
훗날 이 청기와 파편은 오늘날 강진청자 산업이 있게 한 발판이 될 줄은 이때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강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나온 최순우, 정양모씨가 대구면 사당리 일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기록에만 남아있었던 청기와의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사람은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가 소쿠리에 청자편을 들고 가는 나의 어머니를 발견했다. 소쿠리에는 내가 주워 모은 청기와 파편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최순우 과장과 정양모 학예관보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고려시대 사용됐던 청자기와가 기록에만 남아있을 뿐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미스테리로 남아있었기때문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큰 발견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나의 집 곳곳에는 이런 청자기와 편을 비롯한 청자 조각들이 그냥 널려있었다. 마당과 부엌 곳곳에 파편들이 땅에 박혀있거나 묻혀있었다. 나는 땅에서 몇조각을 파내 소쿠리에 모아두었던 것인데 그것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의 집의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1964년 9월부터 10월까지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나의 집 앞마당을 팔 수록 암기와와 수막새 기와 등 다양한 청기와들이 쏟아져나온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였다.
이후 1966년부터 1968년까지 2~4차 발굴조사가 계속 이어졌다. 청기와뿐만 아니라 귀신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기와와 용마루 끝에 붙이는 장식 기와, 청자타일 등 다양한 종류들이 일제히 출토됐다.
발굴작업이 시작되면서 나도 옆에서 발굴단의 일을 도와주었다. 발굴된 청자편들을 모아 소달구지에 싣고 가서 구백화물을 이용해 박물관에 보내주기도 했다. 이렇게 발굴단의 일을 도우면서 고려청자가 강진 대구면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는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게 됐다.
이때 발굴이 본격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전에는 여기저기에서 버려졌던 창자편들이 귀한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이는 청자편의 유출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을주민들이 논과 밭에서 나온 청자편을 모아 관광객들이나 골동품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파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60년대 이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청자에 대한 보호나 보존 등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 가치를 몰랐기에 일본인들이 반출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고 60년대이후로도 보호에는 무관심했던 탓에 당전마을 곳곳에 널려있었던 귀한 청자편들이 모두 사람들에게 유출됐던 것이다.
이때 출토됐던 유물들을 모아 보존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청자발굴은 청자에 대해 막연한 생각뿐이었던 내가 맥이 끊어진 청자를 다시 한번 재현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일 계기로 시작된 청자재현은 오늘날 강진 청자산업의 기틀이 됐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정리=오기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