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이하
반전평화팀)이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사무국으로 '이라크 통신'을 보내왔다. 반전평화팀은 지난
달 28일 11명의 팀원이 모두 이라크로 입국했다. 6일엔 국내 반전평화팀 4진이 출국을
앞두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들이 보내온 이라크 현지의 생생한 현장 분위기를
전해 싣는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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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7일 처음으로 출국한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 1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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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권우성 |
| <이라크
통신 제2신: 2003년 3월 1일>
평화를 위한 행진, 전운이 감도는
바그다드 - 박기범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원
어제 첫날, 우리가
들은 것과 다르게 정부 요원이나 가이드의 통제는 심하지 않았다. 정부 요원들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우리 팀이 하고자 하는 뜻을 알기에 크게 경계하지 않은 것
같다.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엄격하게 규제하고, 심지어는 그 각도까지
제어받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어제 하루 우리는 아주 자유로웠다. 심지어는 사담 후세인의 동상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이 없었다. 운이 좋아서 좀더 편한 요원들을 만난 건지 어떤 건지….
아무튼 무척 다행스럽고 잘 된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긴장을 너무 놓은
탓이었을까? 우리는 오늘 예정된 휴먼쉴드 집회 합류를 위해 몇 사람이 따로 남아 피켓을
만들기로 했다. 요원들이 '왜 사람 수가 모자라느냐'고 물으면 그이들은 몸이 좋지 않아서
호텔에서 쉬면 좋겠다는 대답을 준비하고 말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요원들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가이드도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뿔싸!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더 엄격한 통제와 감시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들어온 우리에게까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후세인 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통제와 감시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기는 하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오후의 거리 행진에도 참여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 다행히 요원들이 그것을
막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만든 피켓과 깃발을 들고 휴먼쉴드가 묵고 있는 숙소 앞으로
떠났다.
승로는 얼굴에 물감으로 'peace'라는 글자를 넣어 그림을 그렸고,
짧은 스포츠 머리 바탕에 아예 'NO WAR'라는 글자를 새겨온 은국이는 그것이 더 눈에
띄도록 물감색을 칠했다.
티그리스 강에 가로놓인 다리를 건넜다. 다리 난간에는
어제 보지 못한 플래카드 몇 개가 눈에 띄었다. 다리를 건너자 곧 휴먼쉴드 숙소가 나왔고,
peace라는 글자를 그려 넣은 자동차를 보았다. 어제, 우리끼리 시내를 다니며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설렘, 흥분, 가슴
벅참…어느덧 대열의 중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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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15일 요르단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전평화집회. 국제 반전평화 공동행동에 맞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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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사람들이 모여든 자리에 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겨우 자동차 한 대를 보았을 뿐인데, 그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 머나먼 곳, 철저하게 폐쇄되고 통제된 나라, 그리고 언제
폭격이 시작될지 모르는 공포의 땅에서 우리와 한 마음으로 찾아와 있는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있다는 흔적을 보았을 뿐인데도 말이다.
원래 약속한 시간은 오후
3시. 우리가 그 앞에 닿은 건 3시 30분.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 길을 따라가면 곧
만날 수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5분, 10분…길이 막혔다.
차를 돌려
골목을 돌아 나오니 바로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 보였다. 나이가 많은 노인부터 어린아이를
목에 태우고 있는 사람까지, 그리고 살빛이 검은 사람부터 하얀 사람까지 나이나 성별,
옷차림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팔을 흔들기도 했고,
작은 종이에 구호를 적어 나오기도 했고, 여기저기에서 누군가 앞서 소리를 외치면 자유롭게
그것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 팀 또한 행렬의 가운데로 섞여 들어갔다. 무리에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손짓을 하며 우리를 환영했다. 깃발을 펴고, 피켓을 들어 우리도
나란히 한 줄을 이루었다. 사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집회나 행진 같은 것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기에 무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어수선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너무 준비가
모자라지 않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살짝 주눅드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이 대열 가운데로 들어가자 많은 외국의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우리 앞에 모여들었다. 다소 분주한 마음으로 우리는 일단 발을 맞추어
나란히 대열을 따라 걸었다. 멀리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선창하는 구호에 입을 맞추어
따라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따로 크게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대열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 올랐다.
인도에는
많은 이라크인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어 보이거나 저희들 말로 무어라 말을
건넸다. 어제 거리에서 본 앵벌이 아이들을 닮은 아이들이 행진 대열에 들어와 그 사이를
뛰어다녔고, 우리 둘레를 쫓으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어느 정도 대열 합류에
적응이 되어 앞뒤를 둘러보니 우리처럼 팀을 이루어 움직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로서는 시간에 쫓긴다고 급하게 준비한 피켓과 깃발인데 사람들 눈에는 크게 띄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머리에 글자를 새긴 은국이와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을 한
승로까지….
언제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를 눈부신 하늘에 메아리친
"Peace"
어느새 행진을 하는 무리 가운데에서 우리는 가장 주목받는
열이 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쌌고, 두터운 연대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냈다.
가슴이 벅찼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눈길을 받는다 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이 땅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로 의미 있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우리의 작은 의지, 그것을 이 땅에 모인 온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설렘, 흥분, 가슴 벅참.
우리 줄
왼편에서 걷던 허혜경씨가 목청을 돋아 물었다. "What do you want?"
우리는
대답했다. "Peace!!"
허혜경 씨가 다시 물었다. "When do you want it?"
이번에는 우리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Now!!"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그 평화는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호였다. 우리의 외침, 우리가 이곳에 온 까닭이었다. 허혜경씨의 질문이 되풀이 될수록
대답하는 사람들의 대답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이번에는 선창하는 사람이
"No"라고 외쳤고, 나머지 사람들은 주저 없이 "War"라 대답했다. 누군가 다시
"Yes"라고 외치면 우리는 "Peace"라고 대답했다.
피쓰, 피쓰, 피쓰!
돈 어택 이라키 칠드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이 아플 만큼 부신 하늘에 대고 그것을
외치는 일 뿐이었다. 언제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르는 저 눈부신 하늘에
대고.
이 해맑은 눈동자의 아이들이 한순간 잿더미 속에 묻히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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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15일 국제 반전평화 공동행동 집회에 나온 요르단의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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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시위 대열의 행진은 타흐리 광장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들이 광장을 둘러 한 줄로 늘어섰고, 그 행렬은 하나의
인간 띠가 되었다. 저마다 다른 얼굴빛, 다른 옷차림,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긴 띠를
만들며 섰다. 저마다 가지고 나온 피켓이나 깃발, 플래카드들을 허리춤에
둘렀다.
거기에는 외국에서 온 평화활동가들뿐 아니라 우리를 환영해주는 바그다드
시민들까지 함께 모여들었다. 그리고 신기한 듯, 재미있는 듯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얼굴을 내미는 개구쟁이 아이들. 띠를 이룬 대열 곳곳에서 앞에 나선 사람들이 입모아 외칠
구호를 말했고, 우리는 한 목소리로 '돈 어택 이라키 칠드런!'을 외쳤다.
나
또한 내 곁에 와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돈 어택 이라키 칠드런!'을 외쳤다. 살갗이
검은 사람, 흰 사람, 우리와 같은 동양인이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피쓰와 노워를 외쳤다.
머리와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서양의 할아버지
한 분은 기타를 들고 나와 평화를 노래했다. 사람들이 그 곁을 둘러싸고 함께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했다. 우리는 평화를 원했다. 우리 개개인은 비록 아주 작은 힘조차 없을지
모르지만 용기를 내어 이땅을 찾아왔고, 목숨을 내거는 마음으로 호소했다. 부디, 제발 이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지 말라고, 이 해맑은 눈동자의 아이들을 한순간 잿더미
아래 죽어가게 하지 말라고.
그 자리에서는 모두가 친구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눈이 맞으면 누구라도 반갑고 고마웠다.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되는
만큼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눈빛으로라도 한 마음을
나누었다. 자연스레 집회를 정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취재했고, 서로가 서로를 카메라에
담았다.
알려야 한다, 그리고 기록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고향 나라에서는 이 곳 이라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낱낱이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얼마나 소박하며 마을은 얼마나 평화로운지, 이 땅에 일어나게 될 전쟁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것인지.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평화활동가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모여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들을 어서 본국으로 알려야 한다. 그리고 기록해야 한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아무래도 일어날 것만 같은 이 땅의 전쟁이 무엇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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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
집회에 나온 요르단의 민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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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사람들은 다들 바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두려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장면을 지켜두려고 바쁘게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애초부터 하나였던 마음들을 다시금 다지고 새로이 가꾸었다. 더러는
흥분하여 말을 토했고,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이 세상 너머에서나 지을 것 같은 웃음을 얼굴에 지었다.
광장
한쪽에서 그렇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한국에서도 오늘 반전평화집회가 있었겠구나하고
떠올랐다.
어땠을까, 사람들은 많이 모였을까? 현식이 형과 성규가 고생이
많겠네. 겨레아동문학회와 기차길옆 공부방 선생님들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들까지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한국에서 애쓰는 분들 모습 떠올리니
미덥고 든든하다. 여기 바그다드로 들어와서는 소식 한 번 제대로 띄우지 못했는데…. 보고
싶다.
"천진난만한 이라크의 아이들… 전쟁이 나면 저들의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진다"
사람들이 뒤섞여 바삐 움직이는 사이, 나는 광장
분수대 아랫편에 있는 잔디밭으로 뛰어내려갔다. 사람들이 띠를 이루며 서 있을 때 내 둘레에
와 까불던 아이 둘이 그 아래에 있었다. 두 아이는 바람이 삼분의 일쯤 빠진 축구공을
가지고 공을 찼다. 둘 다 맨발. 발등이 아주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는
아이들이다.
한 아이가 공을 차 넣으면 한 아이가 공을 막았다. "헤이!",
"헤이, 보이!"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손을 높이 들고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패스, 패스
미 더 볼." 아이가 공을 차 주었고, 나도 그 공을 받아 다시 아이에게 찼다. 셋이서
멀찍이 떨어져 차고, 받고, 뛰어다녔다.
그러더니 한 녀석 제 자리에서
뛰어올라 머리로 받는 시늉을 하면서 그리고 공을 띄워 달라 한다. 까부는 모습이 아주
귀엽다. 멀리서 공을 띄워 올려주면 쫓아가 머리로 받고, 다시 띄워 올리면 머리로 받고.
한 번 더, 한 번 더, 원쓰 모어.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나던 이라크 청년들도
끼어 들더니 자기에게 패스 좀 해 달라고 손짓을 했다.
차고 받고 달리고,
다시 차고 받고 달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한 순간 광장에 모였던 아이들이 떼로
달려왔다. 아마 그때까지 광장 위에서 외국인들이 벌인 행사에 눈이 팔려 그 둘레를 서성이던
아이들이 그제서야 잔디밭을 보고 우르르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아이
녀석들이 수십 명 들러붙으니 정신이 없었다. 공을 몰고 달리는 대로 수십 명 아이들이
우르르 쏠리곤 했다. 여기 저기에서 '헤이, 미스터!'하고 나에게 손짓했다. 행복했다.
기껏해야 삼십 분 남짓이었지만 그때처럼 즐겁게 공을 차 본 기억이 없다. 나는 더 신이
나서 숨이 차는 줄도 모르고 공을 찼고, 그럴수록 아이들은 함께 신이 나 함께
달렸다.
잔디밭 위를 구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드는
아이가 있었다. 그렇게 삼십 분쯤 뛰었을까? 어느새 우리 팀을 감시하는 정부 요원이
쫓아내려와 그만 하라고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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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반대" 피켓을 들고 집회에 참여한 요르단의 시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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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그만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 정부
요원들과 광장으로 올라서 버스를 가는 길까지 아이들은 떠나지 않고 계속 쫓아왔다. 아니
아이뿐 아니라 청년과 나이 많은 아저씨도 있었다.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내게 하는
말이 "유 아 마라도나, 유 아 까를로스". 어느새 그 무리에서 내 이름이 마라도 나와
까를로스가 되었다. 사실 나는 축구같은 운동을 잘 할 줄 모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저 신이 나서 뛰어다녔더니, 못해도 창피할 것 없이 뻥뻥 차고 했더니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리 보인 모양이었다. 하긴 나중에 광장으로 올라오는 길에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광장으로, 버스가 있는 길로 갈 때까지 나를
둘러싸는 십 여명의 아이들, 사람들. 아이들은 나하고 눈을 맞추려고 자리에서 뛰어올랐고,
팔과 허리에 매달렸다.
마치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광장으로
나오기가 싫었다. 버스에 올라타기가 싫었다. 그 곳에서 아이들하고 해가 지도록 축구만
했으면, 배가 고파 쓰러질 때까지 그렇게 뛰어다녔으면…. 그런데 내가 오늘 아이들과 뛰어
놀던 잔디밭 또한 언제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른다. 아까처럼 아이들이 그렇게 뛰어 노는 머리
위로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다. 도무지 거짓말 같기만 한, 너무너무
끔찍한….
숙소에서 전해 들은 '이라크 전 임박설'… 각국의
취재진과 이라크 평화팀이 빠져나가고 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난 뒤, 신부님은 어제 들었던 강경남 기자의 이야기를 한층 더 현실감있게 느끼시는
모양이었다. 오늘 집회, 온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인 마음만 생각하면 더
없이 마음 벅차지만 실은 놀란 부분도 있었다.
백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
이것뿐인가? 과연 지금 이 땅에 남아 있는 외국인, 평화활동가로 들어와 있는 외국인이
이것뿐인가? 언젠가 은국이에게 들은 얘기가 처음 IPT(이라크 평화팀)에서 목표한 것이
10만 명이라 했다. 평화지킴이로 들어온 온 나라의 사람이 10만 명만 된다면 이 전쟁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계획이다. 그런데 백 명도 채 되지 않다니.
"전쟁은 임박해 있다, 3월 7일 개전설이 확실한 것 같다, 아까 나온
취재진을 보아도 웬만한 곳은 다 빠져나갔고 얼마 남지 않았다, 기자들이 빠져나갔다는 것은
확실한 정보이다. 평화활동가들도 상당수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그리고 개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국에서 조작하고 부추겨 준비하는 반 후세인 세력의 폭동이다. 폭동이
일어나면 그 혼란상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폭도들에게 가장 큰 타깃은 바로 외국인이다,
우리가 본 시내의 모습은 이 나라 실상의 일 부분도 안 된다, 바그다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엄청난 빈민굴이 있다. 그 곳에서는 벌써 호롱불을 준비하고 식량을 재워 놓으며
전쟁 준비를 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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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요르단의 민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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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이곳 소식통의 말을 빌은 신부님의
걱정.
애초 A팀이 3월 5일에 빠져나가고, B팀은 3월 중순 개전이 임박해
올 때 나가자던 계획에 비추면 상황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몇 사람은
암묵적으로 개인적 결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숙소에 들어와
나름대로 휴식을 취하며 맥주를 사다 마시며 가볍게 웃고 떠들기도 했지만 서로들 보이지 않게
동요를 하고 있다. 차마 꺼낼 수 없는 이야기, 꺼내기 힘든 이야기. 아무래도 며칠 안에
우리 모두는 또 한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정리가 되든,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리든.
저녁에 바깥에 나갔다 온 팀원 몇이 호텔에서 결혼식하는 걸
보았다고 얘기해주었다. 사람들이 전통 춤을 추었다 했고, 그 가운데 꼬마 아이들이 춤추는
모습은 우리 나라 애들하고 아주 똑같다며 무척 귀엽다 했다. 그리고 그 말끝에 누군가 한
마디를 더 보태었다. "요즘 이 나라에 결혼식이 무척 많대요, 그게 아마 전쟁이 다가오니까
다들 서둘러 결혼이라도 하는 거겠죠…."
<이라크 통신 제1신:
2003년 2월 28일>
평화로운 도시, 거짓말 같은 전쟁
-박기범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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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15일 요르단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전평화집회에 나온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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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 이라크에서의
첫날밤. 여기에 오니 믿기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이토록 평화로워 보이는 땅에 우리는 왜
그렇게 들어오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던가. 이토록 평화로워 보이는 땅에 정말
미사일 폭격이 일어나기나 할까?
오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정리 회의를 할 때
한 기자가 몇 가지 정보를 얻어와 알려주었다. 우리가 들어 예상하고 있던 개전 시기가
상당히 앞당겨질 것 같다는 것.
전쟁 임박? 기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이곳에서는 3월 7일 이후로 위험하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3월 중순 정보와는 다르다. 그 근거로 중순 이후에는 40˚C 이상 날씨가 되고 모래
폭풍이 몰아쳐오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전쟁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 밖의 보이지 않는
정보들로 하여 각국의 기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웬만하면 기자들은
2주 이상 여유를 두고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현재는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다. 일본의
경우 거의 모든 기자들이 빠져나갔고 이라크 내의 자국민이 있는지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만약 개전이 되면 이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이 날 거라 예상하는데
길어야 2주 정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사일이 1분에 3000두를 발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으며, 지금은 이곳 호텔이나 대사관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이미 전쟁 이후를 다 준비해 놓고 있는데, 폭격이 쏟아지는 아수라장 속에 미국이 미리
준비해놓은 조작으로 반후세인 세력의 폭동이 예기된다.
게다가 지금은 경찰뿐
아니라 민간인도 총기를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폭동이 나면 아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랬을 때 폭동 세력의 가장 큰 목표는 대사관이나 외국인이 되기 때문에
호텔이나 대사관 할 것 없이 모두 위험한 상태다.
정리 회의를 하며 처음 꺼낸
이야기는 이라크에 첫 발을 밟으며 얻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의아해했다.
이토록 평화로운 모습이라니, 도무지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나라라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오히려 며칠 머물었던 요르단에서보다 사람들은 더 친절했고, 더 순박해 보였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반가이 인사를 건네었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도 손을 흔들었다. 시장 골목의
사람들은 아무 일 없는 듯 자기 생업에 바빴고, 거리 곳곳과 공터에 보이는 아이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공을 차며 놀았다.
'관광비자'로 입국한 화창한 날씨의 바그다드
이곳에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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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에
입국하기 전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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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우리는 첫날 현지 적응을 위해
(그리고 관광 비자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짜여진 시내 관광을 했다. 관광
비자를 얻어 들어온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통제를 받아야 한다. 다섯 사람에 가이드 하나와
비밀 경찰 한 사람. 우리가 암만에서 전해 듣기만 해도 이라크에 들어오면 사진 찍는 각도
하나하나까지 철저한 통제를 받는다고 했다. 혹여나 찍어서는 안 되는 정부 시설 따위를
찍으면 '조용한 초대'(공안 당국의)를 받게 된다고 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일단 가이드와 비밀경찰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면서 그들의 신뢰를 얻어 융통성을
얻어내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시내 구경을 하라면 시내 구경을 해야 하고, 관광지
방문을 하라면 관광지 방문을 해야 했다. 잘못하면 우리는 모두 '조용한 초대'를 받을지
모른다. 이곳 이라크는 한 해에 10만 명 이상을! 처형하는 나라이고, 이곳 국민들조차
후세인이나 정부를 비판하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라크에 도착해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놓인 나라에 왔다는 것만 해도 그러하며,
또한 우리 곁에는 늘 비밀경찰이 따라붙는다는 것도 그랬다. 그리고 짧게는 닷새, 길게는
열흘, 우리는 암만에 머무는 동안 이 나라의 꽁꽁 막힌 국경을 넘기 위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암만에서 저녁 여덟 시에 떠나 13시간 30분을 달려왔다. 추운 자동차 안에서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눈을 떠 차에서 내렸을 땐 이미 바그다드.
거짓말처럼 이곳은 따뜻했다. 햇살이 아주 밝게 내리쬐었고 하늘은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무어 그깟 날씨 하나 가지고 이리 놀랐을까 싶기도 하지만 바로 국경을 대고 있는 요르단만
해도 폭설의 아주 추운 날씨이던 걸 생각하면 따뜻한 날씨마저 어리둥절하게
했다.
정류장에 내려 호텔 버스를 기다리던 시간. 나는 겨우 할 줄 아는
인사말 '앗쌀라무알라이꿈'을 건네었고, 정류장 일꾼들은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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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단의
청소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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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그리고 아이들. 어서 이라크 시내가
보고 싶어 까치발을 딛고 담장을 내다보니 한 아이가 궁금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 보았다.
다시 '앗쌀라무알라이꿈'. 아이가 웃었고, 우리도 웃었다. 나와 우리 팀 사람들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아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손을 뻗어 과자를 건네주니 아이가 아주 좋아라
웃는다.
무어라 더 말을 나누고 싶지만 아이는 영어를 잘 하지 못했고, 우리
팀 사람들은 아랍어를 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의 눈빛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궁금한 마음, 무언가 반가운 마음, 그리고 무언가 더 말을 나누며 더 곁에 있고
싶은 마음. 아이의 이름은 마호메드, 열두 살. 아이에게 집이 어디냐 물으니 바로 정류장
건너편이었다. 손짓을 써가며 들어가 보아도 되냐고 물었고, 아이는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이 아버지가 나왔다. 앗쌀라무알라이꿈. 아이 아버지 또한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겼다. 아이의 동생이 아버지를 대문을 빼꼼 열고 내다보았다. 동생의 이름은
니자르, 열 살. 그리고 아이네 어머니나 이모, 고모로 보이는 여인들이! 하얀 터번을
둘러쓰고 나왔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우리는 서로 활짝 웃어 보이는 얼굴로 마음을
전했다.
마호메드네 집. 요르단에 머무는 동안에도 무척이나 이곳 사람들이 사는
집을 가보고 싶어했다. 집 안의 구조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엌이나 방의 모습은 어떨까?
마호메드 형제와 아이의 식구들이 모두 환대해 주어 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 조금은 어두운
실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는 것이 한눈에 짐작되었다.
마루와 부엌,
아이들네 방, 어른들의 침실. 마호메드의 아버지는 침실로 들어가더니 솔담배를 가지고 나와
'있쯔 꼬레'하며 크게 웃었다. 평화롭고 정다운 마호메드의 가족, 내가 이라크에 와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어쩌면 며칠 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모두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이 땅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
입국 첫날 만난 이라크의 민중들, 그들을
전쟁의 검은 바람 앞에 내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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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단의
청소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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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첫날 우리는 바그다드 시내를 거닐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관광 코스로 정해진 쇼루주 시장으로 가는 길. 티그리스 강은
그야말로 평온하게 흘렀고, 다리를 건너 중심지로 들어서니 흡사 우리나라의 남대문이나 동대문
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길가에 물건을 내다 놓고 파는 사람,
자전거로 짐을 싣고 달리는 사람, 조금 한적한 길가가 나오면 아무 데서나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모스크 시장에 내려 육교를 건넜다. 우리 나라 여느 곳에서도 흔히 보아오던
것처럼 아이를 안은 여인이 손을 내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낯선 외국인을 보면서 좋아라
따라 다니는 아이들. 나는 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모두 눈에 담아 두고 싶어 가만 가만
눈빛을 맞추었다.
목에 건 사진기로 그 애들 얼굴을 찍었다. 손등 발등에 때가
찌들었지만 눈빛만큼은 호기심에 빛나는 아이들. 함시스, 이만, 사닥, 함제, 재슴,
마하메드, 미나 메이슨, 아길, 아딜, 알리….
사진기 앞에 붙어서는 아이들을
찍고 나면 꼭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마쓰무카?", 캄 우무루카?" 이가 빠진 아이,
얼굴이 검은 아이, 담배를 팔러 돌아다니는 아이, 그리고 앵벌이를 하는 아이. 나뿐 아니라
우리 팀원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아이들을 안아주고,
아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시장을 다 돌아나오려는데 처음 육교에서 만난 아이들
셋이 그 때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에이그, 녀석들. 설마 시장 바닥을 놀이터처럼 노는
아이들인데 집이야 잃어버릴까, 외국인이 신기해서 쫓아다니는 거겠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이들이 무언가를 요구했다. 돈을 달라는 것이구나. 뒤늦게 주어서는 안 되는
건데 싶었지만 그 순간 나도 당황하여 작은 지폐를 하나씩 건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팀원 몇도 그 아이들에게 돈을 주었다 한다. 무언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아 마음에 많이
걸렸다.
쇼루주 시장에서 자동차를 타고 옮겨간 곳은 '올드 바그다드'라는
마을. 어디를 가거나 아이가 없는 곳은 없다. 아이에게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본성일까? 이곳에서 또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건 아이들이다.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길.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집들. 골목마다 나와 놀고 있는
아이들.
사진기를 가진 팀원들이 아이들 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너도나도 자기를
찍어달라며 둘러싸고, 그렇게 시작된 행렬이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을 다 빠져나올 때에는
엄청난 수가 되었다.
큰길과 맞닿은 골목 끝은 확 트인 광장. 우리 일행을
쫓아온 아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다하, 헤르메스, 삐떠, 메스오드, 샤미르,
자하라, 후세인, 야슬, 사라모하메드, 미나, 샤자드, 무스타파, 라일, 제멘, 마나르,
리그데, 시엔, 레힘,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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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덮인
요르단의 수도 암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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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그때는 하나하나 이름을 물어볼 수도,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아이들이 많았다. 이제 그만 우리 일행은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야
했지만 아이들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넓은 길에 들어서면서 커다란 행렬을
이루었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신이 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우리 또한 신이
났다. 아이들과 한 줄로 손을 잡고, 손뼉을 치기도 하고, 발을 맞추어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시작했을까? 내가 섞인 무리의 저쪽 건너편에서 아이들이 입을 맞추어
"피스, 피스"를 외쳤다. 최혁 선배가 있고, 다른 팀원들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똑같이 손을 브이자로 들어올리며 "피쓰, 피쓰, 피쓰, 피쓰…".
아주
자연스러운 행진이었다. 아이들은 더욱 신이나 함박 웃는 얼굴로 '피쓰,
피쓰.'
아이들을 선동하지 않았느냐고?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설령 아이들이
'피쓰'라는 영어 단어를 몰라도 그건 중요치 않았다. 평화니 전쟁 반대니 하는 말을 했다
해서가 아니라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한 목소리로 하나가 되었다는 게 그저 놀랍고 기쁠
나름이었다.
누가 과연 우리의 그 행렬을 보았다면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숙소에 돌아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웠던 것만큼이나 안타까움이
차오른다. 아까 쇼주루 시장에서 만난 앵벌이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렇고. 이곳 올드 바그다드
마을에서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매달리던 아이들을 생각해도 역시
그렇다.
혹여나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한국전쟁 직후 미군을 따라다니며
"기브미 검, 기브미 쬬꼬렛"을 외치던 그것과 닮지 않았을까? 혹시 우리는 그 아이들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잘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우월감이 배어 있지는 않았을까? 고급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주고, 선물로 가지고 간 뺏지를
나누어주고….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티없는 웃음이 떠오를수록 더욱 마음이
조이는 것 같다.
바그다드에 짐을 푼 첫날, 우리는 많은 이라크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을 보았다. 무척이나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들, 반기는 얼굴과 정감 있는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사람들. 설령 이라크 정권이 용서받지 못할 압제를 한다 해도, 그리고
사실 후세인 정권이 끔찍한 독재를 저지르고 있지만 그 누구도 평화로이 살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을 마음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해맑게 웃는 이 땅의 아이들을 전쟁의 포화
아래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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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단의
청소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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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 오늘 내가 둘러본 이 평화로운 도시에
일 분에 삼천 개나 되는 미사일을 쏘아댄다고? 오늘 우리를 그토록 편안하게 맞이해준 이
도시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두 피흘리게 만든다고? 그리고 우리가 탄 자동차를 끝까지
둘러싸며 함께 하고 싶어하던 그 아이들마저 한 순간에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나라, 이 도시가
며칠 후면 잿더미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어느 나라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땅인데.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전쟁 상황을 그려보면 더욱 끔찍하고
두렵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휴먼실드(국제평화단체) 숙소에 들러 앞으로
있을 반전 집회의 계획을 체크했다. 바로 내일 오후에도 각국의 반전평화팀이 다 모여서 하는
집회가 있다. 그리고 호텔에 돌아와 또 하나 들은 소식은 앞서 임 기자가 말한 전쟁
임박설.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또한 얼마 없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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