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英祖大王의 思母曲 昭寧園(소령원)
요즈음 MBC 월화 드라마 同伊(동이)가 인기다. 동이는 바로 조선 26대 국왕 영조대왕의 生母 淑嬪崔氏(숙빈최씨)다. 그녀의 출신 성분에 대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다보니 여러가지 추측들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 온다. MBC 드라마에선 崔同伊란 이름과 함께 검계의 수장 딸로 나온다. 이것도 다 작가의 꾸민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 중에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 입궁한 후 우연히 한밤중 왕궁 순찰에 나선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아들 연잉군(영조)을 낳아 일약 내명부 최고 품계인 嬪(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아들 영조가 직접 쓴 淑嬪崔氏神道碑銘에 생모 숙빈최씨는 1670년(현종 11년)11월 6일 해주최씨 崔孝元의 딸로 태어나서 1718년(숙종 44년)3월 9일 49세로 生을 마감했으며 그해 5월 12일 양주 고령동 웅장리 墓向(묘향) 언덕(현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번지 일원)에 안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墓號(묘호)가 바로 昭寧園(소령원)이다.
숙빈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 毓祥宮(육상궁)은 종로구 궁정동에 있다. 영조 원년(1724년)에 세워 淑嬪廟(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년)에 승격하여 육상궁으로 改名했다. 육상궁을 7宮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1908년 육상궁 경내에 역대 왕들의 生母로서 왕비에 오르지 못한 나머지 6人의 神位를 모신 祠堂(사당)을 옮겨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7宮은 모두 사당이 5 채이다. 그것은 영조의 生母 사당인 육상궁과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된 왕 眞宗의 생모 정빈이씨의 사당인 延祜宮(연호궁)이 한 건물에 들어 있고, 또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된 왕 莊祖(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사당인 宣禧宮(선희궁)과 정조의 후궁으로 純祖의 생모 수빈박씨의 사당인 景祐宮(경우궁)이 한 건물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 왕가의 家系를 기록한 璿源系譜紀略(선원계보기략)에 의하면 숙종은 3妃 3嬪에 6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왕비는 광산김씨 김만기(사씨난정기를 쓴 김만중의 형. 김춘택의 조부)의 딸 인경왕후(1661-1680), 계비는 인현왕후(1667-1701.궁녀가 쓴 인현왕후전의 주인공) 민씨, 제2계비는 인원왕후(1687-1757) 김씨이다. 정실인 왕비들에겐 후사가 없고, 단지 요절한 공주 2명만 두었다. 嬪인 희빈장씨(1659-1701)가 경종과 盛壽 형제를, 숙빈최씨가 永壽와 영조와 이름 미상의 아들 3형제를, 명빈박씨가 延齡君(연령군) 하나를 두어 모두 6남이나 경종과 영조와 연령군을 제외한 나머지 세 아들은 요서했다.
선원계보기략에는 희빈장씨를 玉山府大嬪(옥산부대빈)으로, 숙빈최씨를 毓祥宮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崔氏(육상궁화경휘덕안순수복숙빈최씨)로 기록하고 있다. 육상궁은 廟號(묘호.사당 이름), 화경, 휘덕, 안순, 수복은 시호, 숙빈은 내명부 호칭이다. 후궁인 嬪에게 내려진 시호(임금이 내린 號)가 무려 네 개나 된다. 조선 왕가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것은 모두 아들 영조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올린 것으로 영조의 사모곡의 한 표현이다.
숙빈최씨는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어려서 궁중 나인으로 입궁하여 내명부 최고의 품계인 빈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신분이 수직 상승한데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기록이 없어 모르긴 해도 그 총명함과 지혜가 뛰어났음엔 틀림 없다. 仁顯王后傳(인현왕후전)에는 무수리 신분으로 인현왕후 생신날 자기 처소에서 謝氏南征記(사씨남정기)를 읽다가 우연히 숙종을 만나게 됨으로써 역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평범한 나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높은 안목을 지닌 국왕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을 정도라면 미모와 지적 수준을 갖추었음에 틀림 없다.
숙빈최씨의 후손 중 국왕이 5 명(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이다. 고종과 순종은 養孫 계통이다. 이들 중 가장 聖君으로 존경 받는 인물은 아들인 영조와 曾孫子인 정조이다. 이 두 국왕은 조선 27대 국왕 중 敬天勤民하여 泰平盛代를 연 대표적인 군왕이다. 흔히 英正 시대로 일컬어지는 약 80여년이 조선의 泰平天國, 르네상스시대였다. 그래서 숙빈최씨가 더욱 돋보인다.
소령원은 경내가 넓다. 後宮의 묘역 치고는 왕릉 규모의 크기다. 어쩌면 한 位만 모신 점에선 최대 규모일 것만 같다. 그것은 아들 영조가 그렇게 조성하였다. 진입로는 유명 사찰과 같이 巨木 숲 길이다. 입구 좌측 둔덕에 신도비각을 시작으로 비포장 숲길을 따라 걷노라면 철제 임시문이 나온다. 열고 들어가면 정자각이 반갑게 맞이한다.
MBC 월화 드라마 同伊를 즐겨 시청하던 중 문득 동이의 萬年幽宅(만년유택)인 소령원 생각이 나서, 장마가 잠간 그친 틈을 타, 이곳을 방문하여 이곳저곳을 찍고 나름대로 해설해 보았다.
(2010.7.5 글/사진~ 김장환 님)
▲소령원 진입로
▲소령원 안내 표지판
▲저 멀리 墓園이 보이기 시작한다.
▲참도와 정자각
▲정자각
▲정자각은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돌아 간다고 생각했다.
▲수복방(守僕房).
陵이 아닌 園에 수복방이 남아 있는 곳은 소령원이 유일하다. 능참봉(종9품의 벼슬) 집무실인 셈이다.
▲정자각 안에서 바라본 墓園
▲ 조선국 화경 숙빈 소령원 園碑閣
정자각에서 묘원으로 올라가는 길 방향에 있는첫번째 비각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영조가 직접 쓴 어필이다. 영조 29년(1753) 영조는 어머니 숙빈에게 和敬(화경)이란 시호를 올리고 昭寧墓를 昭寧園으로 승격시켰다. 어머니 墓를 園으로 승격시키는데 무려 29년이나 걸린 셈이다. 아들 영조의 극진한 효심을 엿볼 수 있는 비각이다.
▲소령원 묘원
▲소령묘 묘비각
정자각에서 묘원으로 올라가는 길 방향에 있는 두번째 비각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영조가 직접 쓴 어필이다. 소령묘가 조성될 당시에 세워진 비각이다. 아들 영조는 어머니의 무덤 호칭이 일반 사대부와 같은 墓인 것이 심히 유감이었다. 그래서 재위 29년만에 드디어 소원인 園으로 이름하기에 이른다. 아마도 조선 陵園 가운데 능원 비각이 둘인 것은 소령원밖에 없을 것이다. 이 소령원 호칭에 얽힌 전래 이야기가 많다.
▲소령묘 묘비각의 墓碑銘. 숙빈 해주 최씨 소령묘.
▲소령묘 묘비각 비석 후면 비문. 소령묘비
▲소령묘 묘비각도 6.25의 참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탄흔이 깊게 파여 그 날의 비극을 들려주고 있다.
▼이하는 소령원 봉분과 석물들이다.
▲ 왕릉에 우거진 숲은 계획적으로 조성했다. 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상징했다.
또 십장생의 하나로 왕조의 지속적 번영을 뜻한다
▲묘비석 후면 銘文
▲소령원 神道碑閣(신도비각). 소령원 진입로 초입에 있다.
신도비는 국왕이나 종2품 이상 관원의 무덤 동남 방향 큰길가에 세운 石碑이다. 이 소령원 신도비는 영조 즉위 원년(1725)에 생모인 淑嬪崔氏神道碑銘을 직접 지어 錦平尉(금평위) 朴弼成에게 비석에 새기게 하였다. 숙빈최씨 사후 7년만의 일이다.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번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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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이를 다시 보는 느낌입니다.
교수님동이 열심히 보시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