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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62) 2025. 11. 19
유예된 심판
왕상 21:20-29
<하나님의 심판>
‘이세벨’의 음모대로 나봇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아합에게 말했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기 위해 내려갔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 범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셔서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19절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아합에게 전해야 할 첫 번째 말씀은,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입니다(‘살인’과 ‘강탈’이라는 두 가지 죄목).
그 죄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될 것이라”는 저주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한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백성의 억울한 죽음을 그냥 수수방관하는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심판하셔서 억울한 이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의 권력자들이 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귀담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순종하는 엘리야>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마자 그길로 아합을 만나기 위해 이스르엘로 내려갑니다.
20절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엘리야를 본 아합은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고 말합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그가 평소에 얼마나 엘리야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는 최악의 인물로 비쳤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적대적 태도가 갈멜산 사건 이후로도 계속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합니다(18:17). 하나님이 엘리야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말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아합이 여전히 회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어리석고 완악한 사람).
“네가 나를 찾았느냐”는 말은 갑자기 나타난 대적에게 들켰다는 어감(語感)이 서린 말입니다.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이 나의 잘못을 알고, 지적하기 위해서 찾아왔구나”, 속된 표현으로 “아이고 이 원수가 또 나타났구나” 또는 “하필 이 작자에게 걸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괴롭게 되었구나”라는 뜻입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엘리야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대뜸 아합의 죄를 지적합니다.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네가 네 자신을 팔아’라는 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죄를 짓는 순간, 자신을 죄의 종으로 팔아넘기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죄의 종’이 되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죄의 종’이 되어 사탄이 시키는 일을 하거나 ‘순종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게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올바른 선택을 하여, 우리 몸과 마음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죄에 팔아 ‘죄의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
그러면 엘리야가 아합에게 전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1~22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매인 자나 놓인 자’는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든 막론하고,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는 다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왕조를 열었으나 불과 2대째에 가서 부하의 모반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인물들입니다(15:25-31, 16:8-14).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은 바아사의 반역으로 완전히 멸족되고 말았습니다(왕상15:29).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가문 역시 시므리의 반역으로 완전히 몰살하고 말았습니다(왕상16:11). 그와 똑같은 일이 아합의 가문에도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즉 아합이 속한 오므리 왕조에 대한 심판의 예고입니다.
결국, 아합은 하나님이 허락하지도 않은 아람과의 전쟁을 스스로 일으켜서 전사하고 맙니다. 그리고 개들이 그의 피를 핥는 일이 실제로 벌어집니다(왕상22:38). 이세벨은 이스르엘 왕궁에서 떨어져서 비참하게 죽었고 개들이 그녀의 시체를 먹어버립니다(왕하9:36). 그리고 오므리 왕조는 아합의 아들 요람 때에 예후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몰살하고 맙니다(왕하10:11, 대하 22:8). 모두 하나님이 선포하신 재앙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1) 네게 나를 노엽게 했다는 것입니다(22). 그의 개인적인 범죄, 곧 탐욕으로 인한 살인과 강탈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잘못이 있습니다.
2) 개인의 잘못을 넘어,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왕국의 지도자의 첫 번째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1) 육적인 보호 –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보호(국가 안보),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보호(경제).
2) 영적인 보호 –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책임을 방기했습니다. 개인의 잘못을 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을 우상숭배 하도록 이끈 죄요(16:31-33, 이세벨과 결혼), 둘째는 죄 없는 나봇을 죽이게 함으로 ‘사법 살인’을 저지른 죄입니다.
지도자가 받은 책망이 더 큽니다(예수님은 선생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만큼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자기 임의로 만들어 낸 심판은 아닙니다. 단지 앞에서는 하나님께 받은 내용을 전부 기록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저 아합을 향한 대표적인 심판의 말씀만 기록해 두었을 뿐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입니다. 21절에서 엘리야는 자신이 전하는 심판의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21절)이라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즉 이 말씀은 엘리야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이세벨에 대한 심판>
엘리야는 계속해서 이세벨을 향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23~26절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 지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6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아합에 대해서는 개들이 그의 피를 핥을 것이라 말씀하셨지만, 이세벨에 대해서는 개들이 시체를 먹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강하고 엄격하게 적용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합을 충동질하여 이방의 우상을 섬기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이세벨은 시돈 공주 출신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철저한 우상 숭배자로 살아왔습니다. 만일 이세벨이 아합왕의 왕비가 되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녀가 우상 숭배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했습니다. 그것은 탐욕의 동기에 따른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뿌린 대로 거둔 것입니다.
문제는 아합왕 한 사람의 인생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세벨이 들어옴으로써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래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그렇게 한 나라가 휘청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 ‘아모리 사람’(Amorites)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이주하기 이전부터 살고 있던 '가나안의 일곱 족속' 가운데 대표적인 민족입니다(창10:16, 출 3:8, 대상 1:14, 겔 16:3).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음란하고 부정한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수24:15, 삿 6:10).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에서 몰아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창 15:16). 그렇다면 '아모리 사람'의 땅을 인수한 이스라엘은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축출당한 아모리인들의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
<아합의 회개>
그런데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은 아합이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27절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아합이 회개한 것입니다. 뜻밖의 반응입니다.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였습니다.
베옷을 입는 것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슬픔과 애통과 회개와 자복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잘 때도 굵은 베를 벗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풀이 죽어 다녔습니다.
<유예된 심판>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연기하십니다.
28~29절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의 ‘겸비함을 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겸비(謙卑)란 겸손하게 낮춘다는 뜻입니다. 아합이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서 회개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인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과 역사를 통하여, 결과적으로는 아합의 회개가 일시적이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이 순간 아합의 회개는 진정이었습니다. 일부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위선적인 회개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엘리야의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앞선 왕조인 여로보암 왕조와 바아사 왕조의 비참한 결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문도 그들과 같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진실로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은 다음 세대로 연기시켜 주셨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신앙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지도자 한 사람의 바른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합은 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범죄는 전 이스라엘에 미쳤습니다. 그것은 그가 ‘왕’, 곧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습니다. 우상숭배, 사법 살인 등.
(아담의 죄가 전 인류에게 미친 것과 같이, 예수님 한 분을 통해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 같이.)
나라의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 가정의 지도자(부모)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지도자뿐 아닙니다. 누구나 사람은 영향력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신앙이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이 가정과 교회를 살릴 수 있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한 사람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서는 안 됩니다.
아합과 이세벨에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동조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이 바알 신앙을 소개하고, 강요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항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책망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알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임입니다.
물론 이세벨은 자기 몫의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합의 회개에 하나님은 그에게 전한 심판의 말씀을 연기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개하기를, 돌이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고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출34:6 “…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사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진실로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용서해주시는 참으로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것은 한 생명(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연기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4. 심판의 유예는 구원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입니다.
심판을 뒤로 미루어주신다고 해서 심판의 면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잠시 유예되었을 뿐입니다.
아합의 사명이 새로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유예된 하나님의 심판이 다음 세대, 곧 아합의 아들에게 닥치지 않도록 아들들을 교육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들 세대에서도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다면 연기되었을 것입니다.
심판의 유예는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합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았습니다. 그는 이세벨을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아합도 이스라엘도 다시 바울 숭배로 돌아섰습니다.
결국, 아합에게 내리신 벌은 아들 대에 가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에게 죄를 허용하는 면허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안 됩니다.
고후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은 심판보다 회개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악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도록 스스로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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