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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포스코 투쟁을 다녀와서
민주애비 추천 0 조회 116 06.07.26 11:42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휘청거리는 장마의 빗줄기를 헤집으며 나는 달렸다       
함께 가는 동지들이 있었지만 마무런 이야기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포스코 본사 건물안에 갖힌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건설노동자,        
피보다도 더 질퍽한 그 무언가가 내 전신를 휘감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20년동안 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 치던 그 무엇인가가 내 몸을 찢고 밖으로 나갈듯 한 느낌이었다       
       
송도 바닷가를 죽여 들어가던 포항제철 해양 매립지에 방류하던 COG(COKE OVEN GAS) 폐수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의도하지 않았던 슬픈 나의 흔적이 또 떠올랐다       
하루 10시간 30분 근무에 17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다녔던 포스코 협력업체의 기억.       
그러나 나의 입사배경에는 그당시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는 물론이거니와 협력업체에 대해서도 함께 적용하던        
입사규정의 빈틈(병역필)-해고 노동자들의 빈자리-을 열고 들어갔던 것.        
다시 공부를 하려고 서울 구로의 조그만 공장에서 일하며 모아둔 돈으로 낙향?하여 나태한 책장을 넘기던 그 해,       
내가 탈출한 도시에서는 인간답게 살아 보겠다는 노동자들의 의지가 세상을 뒤흔들었고        
그들의 찢어진 작업복을 비집고 들어가듯 나 조차도 알수없는 사연으로 그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나의 사소한 불만에서 시작된 새로운? 고민에 대한 출발지점이었다       
노동의 권리와 인간으로서 당연한 평등할 권리 그리고 노동의 가치에 대한 금전적 한계를 넘어선 힘!       
노동하는 모든 인간은 아름다우며 누구도 일하는 자에게 몸에 걸친 옷 빛깔로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교복을 걸치고 다닐때는 공부가 최고의 가치라 배웠지만 작업복을 걸친 이후로는 노동이 최고의 가치라 깨닫게 되는 지점.       
내 인생에 있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첫번째 방점의 장소요 시점이 되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깨달음은 우습게도 정말 사소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공부가 최우선의 과제였던 시기에 나는 저 노란 병아리(포항제철 직원의 근무복 색깔로 그들의 호칭이 되어 있었다)보다       
공부를 덜 하지도 않았고 선생님의 권유로 인문계 고등학교가 많은 곳으로 유학?을 다녀온 나였다.(공부는 뒷전이었지만)       
그러한 그들이 나 혹은 우리보다 초봉이 10만원이상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는 더럽고 힘든 일을 했고 그들은 간단한 연장 하나를 들고 다니거나 볼펜을 꽂고 일을 지시하고 다녔다       
저들은 포철공고나 어느 공대에서 전문지식을 깨우친 자 들이니 그럴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럽고 힘든 일을 하는 우리에게 작업확인서에 싸인을 해 줄때 깐죽거리거나 아무에게나 하대하는건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작업확인은 받아가야 퇴근을 할 수 있고 퇴근길에 형산강변의 자전거 도로에 늘어선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라도 한 잔 걸치지        
어떤 겨울,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면 자전거가 없었던 나로서는 사무실 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는퇴근버스를 놓치고        
시커멓게 젖은 안전화에 석탄가루 묻은 작업복에 씻지도 못하고 바람부는 형산강 철조망 옆길을 따라 강건너 자전거 도로의 포장마차 불빛을 의지한채 도시락 가방을 껴안고 종종걸음을 걸으며 시커먼 굴뚝 연기를 보면서 제철소를 탈출하다가 울어버린 기억이 있다       
그래 다시 공부를 하자.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노동으로부터 탈출하자!       
그 달, 월급을 받아서 나는 서점으로 달려갔다.        
신문에서 본 의료보험직 시험을 보겠다고 찾아간 경북서림에서 몇 권의 책을 고르다가 노동법이란 제목이 붙은 책을 함께 사게 되었다       
시험 서적보다 더 재미? 있었던 것이 노동법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시기가 맞았던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조합원 가입원서를 쥐어주며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일하던 부서에서는 3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까지의 특장차 운전직이 많았고, 그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보수를 받았는데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작업원들은 대부분 4~50대의 노인?들이 많았다. 호칭이 대부분 김씨아저씨,박씨아저씨,정씨…이었으니.       
그럴즈음 다른 부서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위장 취업자가 노조를 하다가 짤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왔고,…       
우리회사의 노조가 어용이니 민주노조로 바꾸자는게 탄력이 받을 시기였다       
야간대학(결국 학교에 가긴 갔지만 졸업시험도 치르지 않았는데 강제졸업을 당했다)을 다니며 25개월간의 회사생활을 마칠때까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민주노조를 만들어 보려 애썼지만 오늘날까지 어용스런 노조로 남아 있다.       
어쨌거나, 퇴사후에 만나게 되는 시민운동 단체와 90년을 전후한 민중당, 그리고 건설노조,…       
건설노조의 흔적을 파 보라면 지금도 조직하고 투쟁하는 알만한 동지들의 이름보다는 여장부 같았던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권오명 누이와 자그마한 키와 왜소한 몸집에 밝고 환한 미소를 가졌던 박관식 형이 떠오른다       
그들과 함께 탄가루 쇳가루 날리는 아스팔트에 앉아 투쟁가를 부르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흔적들은 내게 있어 동심의 기억만큼 아름답다.

 

새벽을 확인할 수 있는 죽도시장에서 중매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요란한 방울종 소리를 들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두리번 거리다가 사촌 형님을 만나게 되었고 반가운 눈인사로 서로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길을 막아 놓아서 장사가 되지 않는다며 총이라도 있으면 난사하고 싶다는 말도 한다.

죽도시장 장사치들의 흥을 깬 것은 자본의 힘으로 포철왕국을 이끌어 온 자들의 막무가내식 욕심에서 비롯되었으며 주머니가 빈 노동자들이 죽도시장을 찾을 수 없게 된 책임을 포스코에 물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세상을 보는 관점에 대한 논쟁은 20년을 이어왔으니 "노동자들의 주머니가 비어서 그런게지"라는 짧은 한마디로 대화는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그 동지들이 노동자들에게 법으로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인 8시간 노동과 토요휴무제를 관철 시키기 위해 파업투쟁을 벌이다가 발주업체인 포스코의 본사 건물에 우발적으로 진입하게 되고 마침내 갖힌 몸이 되어 9일간의 투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포스코 점거투쟁이 이어지자 포스코가 중심이 된 파업반대 집회가 이어졌다.

포스코는 직원들은 물론이거니와 협력회사에도 반대집회에 강제로 인원동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길거리에 나붙은 수많은 현수막들은 초지일관"포스코 사태 노사간 조속해결"이었으며 낯익은 몇몇 보수단체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생소한 단체들의 이름이 다수였다.

누가 보아도 한 두가지 구호를 정하고 여러 단체의 이름으로 한꺼번에 제작된 현수막이었으며 그 배경은 당연히 포스코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더러운 작태였다.

노사간 조속해결을 위해서 불법 다단계 하도급의 몸통인 포스코는 제 3자요 엉뚱한 피해자라고 강변하고 있다.

<19일,포항 오광장에서 형산강 로터리를 향하는 대로에 5천여 영남권 노동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경찰방패에 맞아 뇌사상태인 하중근 동지를 기리며 자위적 수단으로 안전모를 구입하여 쓰고 있다>


       
그날 오후 3시부터 오광장 대로를 점거한 영남지역 5~6천 노동자들은 하중근 동지를 뇌사상태에 이르게 한 경찰방패에 항의하는 표시로 안전모를 착용한채 집회를 하고 있었으며, 포스코 본사 건물에 갖힌채 투쟁하는 동지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일어선 자리에는 조합원들의 가족들이 앞장서서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도록 만든 여론을 의식한 듯 담배꽁초 하나까지 주워서 자루에 담으며 뒷정리를 했고 수건을 두른 한 아주머니는 버려진 유인물과 담배꽁초를 주울때마다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20여분만에 도착한 형산로터리 협력회관 앞에서는 이동을 막는 경찰에 떠밀려 임신부가 다치는 일까지 생겼다.

집회 지도부와 경찰은 번갈아 가며 길을 내어 줄것과 해산할 것을 요구하는 방송을 몇차례 하다가 몸으로 밀고 지나려는 대오를 향해 경찰은 페퍼포그 차로 최루가스를 발사하면서 동시에 살수차로 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30여분간의 대치과정 속에서 경찰 아니 전투경찰 대오는 방패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결전을 종용하며 집회대오를 히롱하고 있었다.

이 싸움이 재미가 있었던 것일까? 어쩔수 없다면 즐기라고?그래서 그러는 것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성난 노동자 대오와 전투경찰이 싸우면 당연히 노동자가 이긴다.

다만 노동자들은 자위적 수단으로 준비한 쇠파이프를 아우같고, 조카 같으며, 아들같은 이들의 가슴에 쉽게 찌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너희들처럼 차량을 준비하여 싸운다면 물 대신 기름을 쏘거나 뿌릴수도 있지만 권력자들의 손과 혓바닥에 갖힌 아우야,조카야,아들아 우리가 어찌 너희를 쉬 상하게 할 수 있겠느냐? 이러한 마음들이 오랜 싸움속에서 너희를 구했고, 권력자들의 불쌍한 방패막이로 선 너희들로 인해 탄압의 정권은 유지되어 가는 것이라고...

경찰 대오의 위협적인 전투의지에 밀렸는지 행진 대오는 길가에 쌓였던 폐 타이어를 굴려 경찰들의 전진을 막았고 투쟁 지도부에서 어떤 전갈이 있었는지 마이크에선 대오를 뒤로 돌아 서게 했고 22일 전국 노동자대회를 기약하며 마무리 집회를 하겠다는 멘트와 함께 지극히 형식적이라 느껴지는 집회가 마무리 되고 말았다.

 

 

 

 

오늘. 사상 최대의 구속자를 만들어 낸 건설 현장의 불법 다단계 하도급체계가 불러온 역사의 한 지점.       
포항건설 노조의 투쟁은 건설현장의 불법다단계 하도급체계를 박살내고 최저입찰제를 분쇄하는 꺼지지 않는 횃불로 다시 살아 나리라       
동지를 구출하겠다고, 힘겨운 투쟁에 담배 한개비라도 넣어주고 오겠다고 달음질 친 천리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애만 태우다가 돌아 왔지만 포항의 건설 노동자 아니 나의 형제들에게 "다시 투쟁을 조직하자!"는 힘찬 구호만 전한다       

 

차마 더는 버틸수가 없었던게지.

배가 고파서, 목이 말라서,

늙은 노동자의 몸은 쉬이 병에 노출되곤 하지.

포스코 왕국이라는 질긴 장마와

그 왕국의 그늘에 움츠려 살아온 자들의 욕지거리 더위에

못먹고 못마시고는 더는 버틸수 없었던게지.

 

처음부터

 

포스코 본사 건물을 접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쉬이 꺾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엊그제 영남 노동자 대회에서

6천 대오를 이어 갖힌 동지들을 구출하러 갔더라면

그 투쟁을 이어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싸움을 북돋우어 나갔더라면!!!

우리가 시대적 화두로 내건 싸움

비정규직 철폐투쟁!

그 싸움의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수 있었을텐데

노동자!

그 이름의 명예를 다시 세우는 명제가 절박하지 않아서 였을까?

아니면

적들이 말들하는

노동자 계급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또하나의 계급적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일까?

 

그날

포항 오광장 집회에 얼굴을 디밀었던 알만한 얼굴들은

20년 이상 노동운동에 헌신해 온 우리의 동지들이 아니었던가?

이제

지도부라는 위치에 앉은 그들이 풀어 내는 싸움의 방식은

그저

연례 행사에 참석한 내빈마냥

집회에 대한, 투쟁에 대한 의지는 상실한 채

상투화된 선동 언어로 제 얼굴 지켜내기에 다름 아니었을까?

 

오늘

노동자 계급이 중심되는 대중정당?을 가지게 된 우리는

이미 대중화? 되어버린 언론의 여론몰이에 떠밀리어

더이상의 싸움은 얻을 것이 빈약하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이렇게 물러나고 나면

다시 얼마간의 시간을 기약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되세우는 싸움을 준비할 것인가?

 

콩밭

흙더미 속으로 기어든 지렁이는 땅을 기름지게 하면서 제 삶을 다하고

풍성하게 열매 맺을 저 콩은 누가 수확 할 것인가?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본능적인 움직임이며 살아가야  할 존재로서의 목적의지적 당연 행위이다.

살아 가기 위해서 먹거리를 준비하는 노동이 필요하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예의가 되어있는 옷을 걸쳐야 하며 자식을 낳았으니 그 반복되는 삶의 유형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먼저 살아가는 이로서의 책임적 예절을 행위로써 보여 주는 것 아닌가

투쟁을

그저 가끔씩 밀고 당겨 보는 힘 재어보기로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싸움은 이기는 자 만의 역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동지들을 잃어 가면서

우리는 싸워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들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권리의 주체로 다시서기 위함이며

우리가 이기는 싸움은 이길때까지 싸워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있지 않은가

 

다시 투쟁을 조직하자



       
포항,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구호를 가슴에 새기게 해 준 내 청춘의 작업복을 벗어 놓은곳.       
밝게 웃는 얼굴로 마주하지 못하는 현실이지만 경찰의 방패에 찍혀 생사를 알수없는 낯모르는 하중근 동지와 철창에 갖힌 수많은 동지들 그리고, 전국의 노동형제들의 발빠른 투쟁결합의 미비와 외로운 싸움이 힘겨워 내 배고픔보다는 아내와 가족들의 배곯음을 방치할 수는 없어 가스배관을 타고 내려온 동지들, 반성의 신원 확인서를 쓰고 나온 동지들, 투쟁을 접은 것이 아니라 다시 조직하고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서 포스코 건물에서 나왔던 동지들, 우리는 모두 동지입니다.       
때론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심호흡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싸움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싸움이 패배는 아닙니다.       
다시 투쟁을 조직합시다.       
동지들을 사랑합니다       
노동해방의 그날을 향하여,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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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6.07.26 11:48

    첫댓글 작은책을 아시나요? 편집장님이 글을 길게 쓰라고 하셔서 수정해 보았는데 역시 글은 그저 한번 휘갈기는게 제맛이지 짜집고 손대고 하다보면 영 어설퍼지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참으로 위험한 발상인것 같습니다. 무한한 실천과 책임이 뒤따르니까요. 그냥 일하고 열받치면 박치기 하고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데 요즘 주위에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운신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 돌아갈래~~~~~~~!!

  • 06.07.27 02:24

    이렇게 글이 많으면 읽지를 않습니다 노동해방은 언제 올까요?

  • 작성자 06.07.27 16:28

    해방은 오는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또한 투쟁, 그자체가 해방의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 06.08.29 17:27

    나날이 글에 현장의 힘이 실려 성장하고 있구나. 마음에 있는 생각을 문자로 표현한다는게 사실 쉽지 않은데 부럽게 잘 쓰는 구나. 글 들을 잘 모았다가 나중에 책으로 엮어 내는 것도 고려하여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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