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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났나."
미노켄드라가 피냄새에 섞여 흐르는 미묘한 기운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아직 별들이 총총박힌 한밤중, 자신은 악탄의 밤이 끝난 후 각성시켜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벌써 이렇게 된거라면ㅡ
".."
역시 무슨 일이 생겼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막 각성한 거미는 암거미든 수거미든 굉장히 난폭해서 이성을 제대로 구비하기엔 약 열두시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뱀파이어들이 손을 쓴게 아니라면야 또 모르겠지만, 미래안으로 본 미래와 매치해볼때, 그의 이번대 미노카드샤는 아주 악질적인 일에 말려든게 틀림이 없었다.
제논의 몸을 차지하려 드는 케샨과, 케샨의 몸에 깃든 스컬테인을ㅡ..
"네 몸으로 옮겨 봉인하겠다니, 어린 꿈을 버리지 못했구나. 아이야."
람피스의 차가운 불꽃같은 욕망은 알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귀뜸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컬테인이 살아있을 무렵 부터도, 그 속엔 찬 불꽃이 숨어있었다. 다만 그 강인한 이성과, 계산으로 숨어있었을 뿐이지. 케샨은 어째서 그렇게 변해버렸을까ㅡ. 한때나마 마음에 들었던 뱀파이어였고, 성격 소탈하고 즐겁던 그였다. 생명체의 욕심은 끝이 없는것인가. 자신 역시 다르지 않다. 이번대 미노카드샤를 낳기위해 먹은 수거미는.. 자신이 유일하게 낳았다 시피한 암거미 '알타'의 수거미였다. 그 증오어린 목소리로, 감히 내 남자를- 하고 외치던 아이는 한줌의 재로 돌아가버렸다.
'안 그랬으면 제이드한테 완전히 소멸당해버렸을테지만.'
자신 역시 전흡체와 비슷하게, 강한 수거미를 먹고 대를 이어, 또 먹으며 생명과 마력을 유지하는 생리를 겪고 있지만, 이럴땐 그마저 염증이나 이대로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깨를 으쓱하며 미노켄드라는 눈썹을 찡그렸다.
"살려서 돌려보내라. 멍청한 녀석들."
그 아이가 없으면, 자신은 또 다른 수거미를 찾아야한다. 최대한 빠르게, 하지만 지금처럼 힘을 소진한 상태로 자신에게 쉽사리 씨를 넘기고 잡아먹힐 약한 수거미가 있을까 싶다.
분명 검기만 하던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악탄의 밤을 축복하듯,
악테비노의 달이 뜨고, 그 달이 지면.
이 지독한 운명은 어떠한 형태로든 끝이 나리라는 것을-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
방관자에게 미래는, 그저 또 다른 내일이기에.
제논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미 애쉬의 금제마저 풀려 그 반향에 자신의 힘에 무리가 온것은 둘째 치더라도, 케샨 로우펠리온이라는 녀석은 교활하고 또 간교해서 상대하기 힘든 타입이였다. 거기다가 미노켄드라의 수거미, 미노카드샤(수거미반려)까지 각성하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인 것이다. 힘이 딸리는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여기저기서 치고 들어오면 그야말로 난처한 것이다. 그 수거미가 각성하자마자 번식을 위해 암거미를 찾아 떠난다면 또 모르지만, 상황으로 보아 설사 그 거미가 그렇게 하려 한다해도 케샨이 그대로 놓아둘것 같지 않다.
"저 아이를 깨운걸, 후회하지 않겠나?"
"후회? 당신이야 말로, 여유부린걸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케샨의 이마에 알게모르게 식은땀이 맺혔다. 몸의 그릇이 혼의 역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탓이다. 빨리, 저 강인한 몸을 가지고 싶다. 욕망이 몸을 지배한다. 제논 에르베스라는 크로비스 시이르의 전흡체. 그 안을 차지하고 싶다! 또한 그러지 않으면 안됀다. 최근의 격렬한 움직임과 마력 소비로 인해 이미 수명이 다한 몸은, 실상 언제 스러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너덜거린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무기삼아 여유로운척 하지만, 그 여유를 후회해야 하는건 오히려 자신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 네 말대로. 목적은 알아야겠군. 네 목적은 '나'인가?"
"당신의 몸이지."
"떠도는 혼..이라는 이름은 나보다는 네게 적격이겠구나. "
제논은 자세를 거두며 몸을 곧게 폈다. 등에 박힌 두개의 검은 구체나, 상쇄당한 힘의 반향으로 흔들리는 근간은 둘째치고라도, 까드드드득- 우드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점차 형체가 변하기 시작하는 미노카드샤를 보며 침음성을 삼키었다.
한때 미노켄드라를 키우며 그 거미요괴의 강함과 대책없음을 몸소 실감했던 그였기에 더욱 더 참담했다. 애쉬에게는 피해를 주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적인지 아군인지-아니 거의 적이라고 확정한-모를 람피스와 케샨 그리고 미노카드샤를 동시에 상대하며, 애쉬까지 신경쓰는건 무리였다.
정신못차리고 있는 순은의 뱀파이어가 힘을 좀 써주면 좋으련만, 그에겐 지금 닥친 일도 벅차보여 제논은 쓴웃음 지었다. 그의 그녀와 너무나도 닮은 후손은, 이 상황을 견딘다면 그래도 행복해지리라. 최강의 뱀파이어를 옆에 두고 수명의 차별없이 살며 행복해지리라. 물론 그것도 견딜 수 있다면 말이지만.
"끄어어어어어..키에에에에"
으드드득, 우드드득, 뼈가 뒤틀리고 꼬이며 점차 부피를 크게 하는 미노카드샤를 보며 제논이 잿빛 띠를 넓게 풀었다. 드문드문 뱀파이어들이 눈에 띄었지만 딱히 '먹고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저런 나부랭이 몇 더 흡수한다고 이 상황이 나아질것 같지도 않았기에. 제논은 발을 내딛었다. 그의 잿빛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
상황이 안좋게 흘러가고 있다는것은 피부로 느껴진다. 하지만, 애쉬는 그 상황을 인지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이드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은 여전히 울고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는 눈물이 줄곧 쏟아져 옷깃을 적시지만 닦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제이드의 품안은 따뜻하고, 익숙한 향기가 나서 모든것을 잊고싶게 만든다.
제이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애쉬의 비명은 잦아들었으나, 그 눈물은 더해간다. 애쉬의 눈물이 자신의 눈물인양 제이드는 아랫입술을 꾹 깨문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알게 하고싶지 않았다. 천천히,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때, 조용히, 하나씩, 하나씩, 알게하고 싶었다. 영원토록 몰랐으면-하고 바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만약 알게된다면 그렇게 알게하고 싶었다.
쿠르르르릉- 키에에에에 -
각성인가. 제이드는 마치 이 순간 자신과 애쉬를 제외한 그 어떤 일에도 관심두지 않는 다는 듯이 싸늘히 부피를 키우는 미노카드샤를 바라보았다. 람피스에 대한 분노도 사그라든지 오래다. 모두 지워버렸다. 지금의 제이드는 오직 애쉬를 위한 감정만을 남겨두었다. 그 외의 어떤것도 필요 없다. 저 레토의, 자신의 권속에게 속박되고 싶은 마음은- 잔혹하리만큼 절절하다. 자신이 저 권속의 권속이 되어,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업을 이어가며.
제이드는 전투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것을 바라보며 애쉬를 안고 제단 위로 올라갔다. 르우 열두자매는 여전히 그 상황따윈 아랑곳 않는다는 듯 자리잡고 있었고, 아래 상황을 주시하며 기사단에게 연락을 취하던 비온이 허둥지둥 달려온다.
애쉬는-
두려울정도로 얌전하게 그에게 안겨있다. 품안의 이슬처럼 스러질듯이 가슴을 찢는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마치 '그 때'를 연상시켜, 그 얌전함이 도리어 공포가 된다.
"폐하-!"
"열두자매를 물리고, 이 곳을 떠나라."
비온이 홀로 고민해온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간단한 그 명령에 비온은 잠시 멍한표정을 지었다. 레토의 비명, 그리고 각성하기 시작한 거미요괴는 이미 두개의 거대한 다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상황의 추이는 내막을 알지 못하더라도 심각했고, 악탄은 불미스러운 일로 악테비노의 밤을 지내게 될 것이다. 비온은 그럴 수 없다며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제이드는 더 이상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피식 실소지었다. 그에게 중요한건,
애쉬뿐이다.
"르우 열두자매. 물러갑니다."
그녀들은 언제나처럼 은애하는 왕의 명령에 복종하며 허릴 숙이더니, 이 급박하고 살기넘치는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자태로 인사하며 곧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제이드는 애쉬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그에게서 두걸음 물러났다. 각오는 되었다.
애쉬가 자신을 향한 어떠한 비난을 한다해도, 견디고, 참아낼 각오는 되었다. 감히 누가 뱀파이어의 왕인 자신에게 비난을 할까. 분명 1년 전만해도 그리 생각하며 코웃음칠테지만, 그에게 중요한것은 애쉬가 다시 자살 시도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러한 걱정뿐며, 애쉬가 받았을 상처뿐이였다.
"....제이드."
반이라는 미들네임이 아닌 익숙하던 이름은, 애쉬의 입술을 타고 새롭게 의미를 가진다.
그가 증오하던 이름, 그가 원망하던 이름, 그가 복수하려던 그 이름의 주인.
"...후회는 잔뜩 하셨나요? ....폐하?"
한참이나 뜸을 들이나 흘러나온 잔뜩 갈라져, 젖은 목소리는 비웃음을 담는다.
[그렇다면, 후회하세요. 폐하.]
처음으로 불러준 폐하라는 칭호는 그 것을 유언으로 그를 잃게 만들었다. 제이드는 기묘하게 남은 트라우마에 움찔하며 애쉬를 주시했다. 한결 안정적으로 변한 애쉬의 파동이지만 그가 서있는 것 조차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 지금도, 후회한다."
마치 제단 아래로 벌어지는 싸움이나, 그런것과는 별개의 관계 없는 세상이라는 듯이 조용히 이어지는 제이드의 목소리에 애쉬는 비웃음인지 뭔지 모를 냉소를 터뜨렸다.
"날 사랑했어요?"
언젠가 속삭이던 마법같던 언어가, 뇌리에 박혀있다. 증오가 뼛속에 새겨졌듯이, 그 말은 심장에 새겨져 그 심장을 쿵쾅거리게했다.
"...."
"이거야말로.. 정말... 최고의 복수 아닌가요. 내가 당신에게 복수했듯이, 당신이 내게 이렇게 복수한건가요."
제이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말 그대로다. 언젠가 말하던 복수의 대상인 자신에게, 정말이지 그야말로 최고의 복수를 행하고 있는 셈이였다. 자신이 그를 한번 놓침으로서, 절망을 알게하고, 지금 다시 놓칠듯 빠져나갈듯 함으로서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하니까.
애쉬의 목소리엔 악의는 없었다. 다만 진실만이 남아있었다. 애쉬는 저 아래 제단을 내려다보았다. 제논은 그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케샨과의 결판을 짓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제 집채만한 거미요괴의 다리가 다섯개로 늘어났다. 그 다리가 여덟게가 차고, 점차 몸통이 형성되면, 그때부터는 미노카드샤와의 싸움이 시작될것이기에. 속전속결로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처럼 안간힘을 썼다.
인간이 아님을 알게된다- 자신을 따르던 그 꼬마 역시, 자신이 모르던 세계의 존재인 것이였다.
"제이크."
애쉬가 이미 인간의 형체를 하지 않은 미노카드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키오? 어떤 이름이 진짜인지 이젠 모르겠어요. 다... 당신의 짓이죠?"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에 조종당하는 것은, 익숙하다. 내려다보는 시선엔 열기가 없다. 이대로,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전부다 죽어버리고, 자신마저 죽어서 모든걸 잊을 수 있게. 되돌아온 기억의 편린조차 사그라들어 최후의 불꽃처럼 사라질 수 있도록.
눈물은 멎지 않는다. 흘러넘치는 자기혐오처럼.
"아아... 아아.. 그랬는데..."
애쉬가 제이드를 등진채로, 그 아래 펼쳐지는 살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엔 무엇이 담긴걸까. 알 수도 없을 노릇이다. 제이드는, 애쉬의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애쉬는 위태롭게 제단의 끝자락에 서있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애쉬의 억눌린 적의와 함께 흘러나오는 원망. 제이드는 나부끼는 검은 머리칼을 직시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놓치지 않을 아이다. 제이드가 막 걸음을 내딛어 애쉬의 팔을 잡으려 할때였다. 스윽- 그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애쉬는 위태롭게 서있던 자세 그대로 앞으로 기울어지고있었다. 굴러떨어진다면 타박상으로 끝나지 않을 높이의 제단 위에서, 천천히 몸을 '놓는'애쉬의 긴 머리칼을 순간적으로 잡아채며 제이드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짓이지!!"
"......아무것도, 바란적 없었는데."
"애쉬-!!"
애쉬가 다시 사라질듯 몸을 고꾸라뜨리는 순간, 제이드는 끔찍한 과거를 회상했다. 스스로 심장을 후비며 죽을때까지 후회하라며 웃던 그 잔인한 천사를.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
"난, 당신에게 뭐지? 그 날 닮은 '건'뭐야? 당신은 내게서 뭘 원했지? 이렇게 되돌아올 기억이라면, 애초부터 숨기질 말지 그랬어. 그게 아니라면, 아예 영원히 기억할 수 없도록 감추고, 부수고, 없애버리지그랬어!!!!!!!"
애쉬가 소리쳤다.
"날 되살려서, 당신이 얻은게 뭐지?! 나에게 원한게 뭐야? 난 당신에게.. 당신에게 원한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사랑? 애쉬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제이드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그저, 그대로 잊혀지길 바랬는데-.
"난 당신에게 다 빼앗기고도!!! 그래도 당신을 미워할 수 없었는데-!!!!!!!!!!"
미워할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다정한 눈길에, 그 배려에 미워할 수 없었다. 그가 파괴한건 제국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온기는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뱀파이어라는 이종(理種)의 생명체가 되었다고 해도, 아니 그들 사이에서조차 겉도는 레토가 되었다고 해도, 그였기에 미워할 수 없었다.
그 마지막만큼은 그가 자신을 잊지 않길 바랬다.
그는 자신을 망가뜨렸지만, 그랬기에 그에게서 잊혀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외면했고, 자신은 상처입었지만 그래도 살 수 있던건 '그'가 있었기 떄문이다. 치기어린 욕심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보잘것 없는 삶을 늘렸다. 그래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건ㅡ
"난 당신을 미워할 수 조차 없었는데-!!!!!!!"
그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기에. 인정하지 않아도 두근거리는 심장이라거나, 자연스럽게 풀리는 경계라거나. 그 모든 신경이 당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였는데.
그 마지막 마음마저도 짓밟은 당신을, 나는 어떻게 해야해?
"당신이 아무리 나를 짓밟고, 내 나라를 괴롭히며 나를 괴롭혀도, 난 당신을 미워할 수조차 없었어, 당신이 처음 내 이름을 불러줬을때를 기억해? 나는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고, 나한테 키스했을때를, 당신이 나를 떄렸을때를 기억해? 당신에게 치욕당해 수치스러워하던 나를 기억해? 난 전부 기억해. 그리고-...난 당신이 그런걸 기억하길 바라지 않았어. 난 단지 당신이-......."
애쉬가 조소했다.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어느것도 아닌 '나'를 기억해줬으면 했어."
그거면 충분했다.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있어주어서, 원망스러웠지만 안도했다. 하고 많은 세월을 보낼 그의 삶속에서, 나 정도의 인간은 기억해주지 않을까. 인간들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인간에게 버림받고, 뱀파이어들에게 질시와 배척을 받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그때.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당신이 내 모은걸 빼앗고 내 모든걸 채우려 들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것은, 일편 순수하고 어리석던, 집착의 두려움을 몰랐을 그때의 어린 마음.
".....당신이.. 그렇게까지 나한테 집착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괴롭힐걸 그랬지? 난, 당신을 증오해. 그래. 증오해. 왜, 나를 되살렸어? 내가 죽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야 할텐데!!?"
애쉬가 다시 불안정한 파동을 보이며 악을 쓰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묵묵히 애쉬의 그런 고함과, 비난을 감내하며 애쉬를 끌어당겼다. 날카롭게 날이선 애쉬의 손톱끝에 할퀴어져 피투성이가 된 가슴에, 자신의 피냄새가 베어난다. 람피스가 알면- 난리나겠군. 이미 람피스에게 배신당했지만 그럼에도 드는 익숙한 생각에 제이드는 쓰게 웃었다.
할퀴고 할퀴어 이미 옷은 다 찢겨나가고, 피투성이가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놓고 싶지 않았다.
"놔! 비켜-!! 죽어버려어어어!!!!!!!"
크아아아아아앙-!!!!!!
애쉬의 고함과 동시에 제이드는 완전히 각성한 거미의 성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놀랄만할 속도로, 빠르게 젖은 잔털을 말리고 집게입을 째각거리며 위협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집체만한 크기의, 거무죽죽한 거미는 빽빽한 털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것은 시종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목적을 두는 것 처럼, 제단 위의 인영들을 바라본다. 쉿쉿거리는 쇠소리. 쩔껑거리는 집게발, 여덟개의 거대한 다리는 관절에 맞추어져 꺾이었다. 이윽고 그것은 움직인다. 발을 하나 뻗는다. 첫 걸음은 느리지만, 그 이후는 거침없다. 그 크기만큼 빠르게 그것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논과 케샨, 람피스 역시 긴장한게 느껴진다. 하지만.
"죽어버려-!!!! 사라져버려!!!!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란 말야아아-!!!!!!!!!!"
제이드의 시선에 그 거미가 비추어졌다. 정확히 자신쪽을 향해 달려오는 미노카드샤를 바라보며 제이드는 쓴웃음을 삼켰다. 미노카드샤는 다릴 하나 뻗었을 뿐인데 어느새에 제단위로 훌쩍 올라와 있었다. 1년전 보았던, 미노켄드라에게 죽임당한 거미여인과는 크기부터가 다른 성체. 거미 특유의 쉭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애쉬의 발버둥이 잦아진 찰나. 애쉬가 고갤 돌린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보이는 미노켄드라의 수거미, 미노카드샤를 올려다본다.
캬아아아아앙-!!!!!!!
미노카드샤는 정확히 제이드를 노리는 듯이 거대한 발을 들어올렸다. 제단 아래서 올려다보는 제논의 눈엔 기묘한 이채가 서렸다 사라진다. 애쉬는 거대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거미의 위협적 앞발을 넋놓고 바라보다 어느 순간 강한 힘에 제단 안쪽으로 밀려 넘어졌다.
쉬아아아악-!!!! 키야아아아아!
제이드는 가만히 서 있었다. 영원같이 느껴지던 찰나의 순간, 머리카락 한올마저 느린 바람을 타고 흐트러지는 그 짧은 시간, 애쉬는 나동그라진 몸을 일으켜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꼼짝않고 애쉬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엔 그 어떤 원망도, 애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직 슬픔만이 선명하게 뻗쳐나올 뿐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까? 애쉬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렸다. 죽어버려. 죽어버리라 말했다. 그리고, 그는 '서' 있다. 거대한 거미의 앞발이 제이드를 그대로 내려쳤다.
_
어이구야.
제이드, 넌 대체 언제쯤이면 멋진 모습을 보여줄래?
첫댓글 랄까, 세상에. 죽어버리라고 정말 저렇게 자포자기 해버리면 매력없다, 제이드씨. 그나저나 제논님, 기뻐한 거임?!
세상에...애쉬야 그럼 안돼!!! 진심이 아니잖니....제이드 넌 거기 서서 뭐하니!!!
안돼 ㅜㅜㅜ ㅜ ㅜ ㅜ ㅜ ㅜ 얘들아, 너넨 언제쯤 내게 달달함을 선사해줄 참이니...ㅠㅠ
둘다 뭐하는 짓인지, 죽어버려라고 했다고 진짜 죽으려고 하냐! 그냥 듣고 치우지 뭐하러 실천을 해! 언행일치도 안 써야될때가 있는거야!
안되ㅠㅠㅠㅠㅠㅠ
아나진짜...이런 바보커플같으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봐요 폐하!!!!!!!!!!!! 그럼 안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