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늘 우리도
본문 : 이사야 54장 1-10절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중에 ‘너’ 또는 ‘네’가 라는 단어가 무려 24번이 나오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였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70년 동안 노예처럼 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말이 70년이지요. 타국으로 끌려와 노예처럼 살고 있으니, 얼마나 절망적이겠습니까? 그런 저들에게 7절로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하며,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잠시 버렸다’는 말이 뭐에요? 징계를 받아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신다고요?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저들을 불쌍히 여겨 다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인데,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이요,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래 들어가 거하게 될 영광스러운 도성인 새 예루살렘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1. ‘우리의 믿음을 넓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생활을 하기 때문에 제한된 곳에서 억압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바벨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수치와 멸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래서 1절에 “잉태하지 못한 여인, 출산하지 못한 여인, 산고를 겪지 못한 여인, 홀로 된 여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당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버림을 받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랬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저들에게 오늘 본문 2절로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막터’는 ‘거주지’를 말하고, ‘넓히다’는 말은 ‘번성하다, 확장하다’는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장막터를 넓힐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막터를 넓히라’는 말씀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낙심하지 말고, 크고 넓은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비젼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미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 1절에서 뭐라고 하셨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마치 잉태하지 못한 여인과 출산하지도 못하고, 산고도 겪지 않은 여인, 그래서 쫓겨나가 홀로된 여인처럼 비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보면 어때요? 노래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잉태하지 못해, 출산하지 못해 쫒겨난 여인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면 능치 못할 것이 없음을 믿고 노래하는 것’이 ‘믿음’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바벨론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만, 믿음의 터를 넓히게 되면,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 이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선 포로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 주실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네 장막터를 넓히라”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넓어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대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 하나님의 계획이 3절에 나옵니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면, 네 자손은 열방으로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믿음의 장막터를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때론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믿음의 장막터를 넓히는 것을 보시고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축복을 받기 원하신다면, 우리도 믿음을 크게 넓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크게, 넓은 꿈과 비전을 가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도 일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여 오늘 여러분이 기도의 장막터, 예배의 장막터, 믿음의 장막터를 넓힐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일을 하실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함께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뭐에요? ‘지금껏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또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는다’는 말과 ‘과부 때의 치욕을 기억함이 없다’는 말이 뭐에요? ‘옛날에 수치와 치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약속을 하고 계시나요?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입니다. 또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날에 당했던 수치와 치욕을 다 잊어버리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젊었을 때의 수치’는 ‘과거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때’를 말하고, 또 ‘과부 때의 치욕’은 ‘지금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는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각하며 할수록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지도 않게끔 막아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와 부끄러움과 치욕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당하게 될 슬픔과 고난과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살아오면서 당하지 말아야 할 슬픔과 고난과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일이 없어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날까 걱정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끔 막아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 날의 수치와 치욕도 다 잊어버리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41장에서 보면, 요셉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장남의 이름은 ‘므낫세’요, 차남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 지었습니다. ‘므낫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을 가졌고, ‘에브라임’의 뜻은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기에 지난 고난을 다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날의 모든 슬픔과 고난과 아픔을 다 잊어버릴 정도로 놀라운 축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눈에 보이는 환경 때문에 낙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두려워하고 놀란다’는 말이 뭐에요? 아직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는 말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겠다는 약속-, 부끄러움을 보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으십니까? 하여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3.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말씀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남편이 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시면, 저들은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마치 남편을 잃은 과부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6절에 보면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편인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다른 남편에게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이방의 신을 사랑하여 섬기고,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의 모습이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는 과부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과부의 비유를 든 것은 당시 과부들은 아무런 경제적 도움도 없고, 사회생활도 할 수 없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외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손을 내미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저들이 잘못을 하여 하나님께서 잠시 버리셨지만,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저들의 잘못을 생각하면 넘치는 진로로 다시는 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선 영원한 자비로, 헤세드의 은혜로 용서해주시고, 다시 받아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바람이 나 가출을 한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외간남자의 아이까지 낳는 잘못을 한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영원한 자비로 긍휼한 마음으로 저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로 이 땅을 멸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다시는 노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9절로 멀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말씀하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다시는 범죄하지 말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와 같이 다시는 홍수로 벌하지 않겠다고 결단을 한 것처럼, 저들로 하여금 다시는 하나님의 떠나지 않겠다는 결단과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하여야 함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할까요? 여러분은 하나님만을 남편으로 믿고 사랑하고 계십니까?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눈 감아주시며, 용서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 사랑에 감사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내미신 하나님의 손을 놓지 마시고, 주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분명 저들의 행위를 볼 때는 영원토록 바벨론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저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믿음의 장막터만 넓힌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겟다고 결단을 한다면, 회복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노하지도 않을 것이고, 다시는 책망하지도 않을 것이며, 영원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함께 살게 해주시겠다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의 장막터만 넓힌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회복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영원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우리도 영원히 살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