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우리 식구의 구지 살이
아버지가 외할아버지의 중학교 설립의 일을 돕기 위해서는 일단 외할아버지가 면장 일을 보고 있는 구지면에 삶의 터를 잡아야 했다.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는 우리 식구들이 살아야 할 집을 마련해야 하는 일인데, 8.15전부터 공출곡물을 보관하는 창고업을 하는 박진목(朴進穆) 씨가 이러한 외할아버지의 문제를 기꺼이 해결해주었다. 박진목(朴進穆)이라는 분은 나이가 나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로 마흔 좀 못 되는 장년층에 드는 분인데 몸이 자그마한 하고 눈이 깜작깜작 하는 아주 재기가 넘쳐 보이는 분이다. 처음 만나서도 언행에 상당히 진보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로당」 도당 간부라는 말을 들었고 실제로 당시 그는 「남로당」 경북도당의 조직책이었다. 나중에 나의 할아버지가 오셔서 인사를 텄는데, 할아버지의 말씀으로 그의 형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박진목 씨의 형은 박시목(朴時穆)이라는 분으로 의열단에 들어 항일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열사인데 일제 말에 왜놈 경찰이 아들과 함께 북경에서 붙잡아 국내로 잡아왔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렸는데, 신문받는 동안 두 부자가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애석하게도 8.15해방을 못 보고 그 직전에 두 분이 옥사하셨다. 박진목 씨의 아래로 이름이 준목(俊穆), 중목(重穆)인 두 아우가 있었는데, 박준목(朴俊穆) 씨는 당시 나이가 서른 쯤 되고 구지에 있었고, 남로당 운동을 하는 형의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고 형의 일도 도우고 있었다. 박진목 씨는 주로 대구에서 요정을 하는 작은집을 두고 살았는데 남이나 자기 가족들에게는 혁명운동의 편이로 그렇게 사는 양 했다. 구지에 있는 박진목 씨의 직계가족은 그 당시 아우 박준목 씨가 돌보고 있었다. 중목이라 이름 하는 아우는 내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아무튼 이 집안은 일제식민지시대에 항일독립운동가의 집안으로 많은 고초를 당했으며 박진목 씨도 형의 사건과 연루되어 일제 말기에 1년 6개월의 징역을 받아 감옥살이를 했다. 박진목 씨는 1947년 8월부터 불어 닥친 대탄압 시기에 평소에 늘 교제를 하고 있는 경북도 경찰간부의 도움으로 검거를 모면했고, 그들의 주선으로 미군정의 정보기관과 줄이 닿아 한 동안 양다리 놀음을 해온 것으로, 박진목 씨를 잘 아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 식구가 구지에 정착하고 아버지가 학교 일로 대구의 경북도청 학무과에 자주 갔는데 여러 번 군정청의 청사에서 자주 만났다고 하셨다. 그때는 남로당이 비합법이 되어 건부들은 지하로 숨거나 변절을 하거나 하던 시기였는데 박진목 씨는 아무 일 없이 경찰지프차에 경찰간부와 동승하고 다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나중에 할아버지가 구지에 오셨을 때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박진목 그 사람, 참 용한 사람입디다. 남로당 도당 간부 한다고 제 입으로 말했는데 경찰지프에 거저 형사 나부랭이가 아니라 꽤 높은 간부하고 타고 다니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아버지,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그 말씀에 대해서 할아버지는, “글쎄, 나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이 조용하지 못한 것을 보고, 나는 믿음이 영 가지 않더구나. 네가 그자에게 너무 속 깊은 말은 안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셨다. 그런 일이 있고 해를 넘겨 1948년 2.7구국투쟁을 지나 구국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나다가 이탈되어 1949년 4월에 구지의 집으로 온 후, 여러 곳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박진목 씨가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들렸고, 또 박진목 씨가 붙잡혀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남로당 경북도당 조직책 할 때 가지고 있었던 문서를 몽땅 주고 생명을 건졌다는 말도 들었다. 또 1951년에 전선을 뚫고 이북으로 넘어가 이북의 남로당 조직책인 이승엽을 만나려고 했는데, 그때는 평양에서 남로당의 종파가 발각되어 이북 보안기관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만나지도 못하고 혼이 빠져 도망 나왔다는 말도 있었다. 이는 자기의 글에서도 미군의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아 월북하고 돌아왔다는 말이 있어서 간 것은 확실하다. 박진목 씨는 자기 글에서 ‘김일성을 만나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라.’는 말을 하려고 갔다고 했으나 그건 당시의 그의 처신으로 보아 믿을 수 없는 말이다. 1951년 봄에는 미군 정보기관에서는 이북의 상황을 알려고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고, 또 이승엽 일당의 활동정형이 궁금할 때였는지라 이승엽과 접선이 가능한 박준목을 보냈을 것은 짐작이 되나, 박진목씨의 말대로 ‘정전을 시키기 위해서’ 또는 ‘내가 가서 정전을 호소했다.’는 말까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 1950년대 후반에 일본의 소설가 ‘마츠모도 세이쵸(松本淸張)’가 시사문예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연재한 실화소설 「북의 시인」이라는 소설에서 많은 근거를 들면서 이승엽(李承燁), 임화(林和), 설정식(薛貞植), 이원조(李源朝), 안영달(安永達), 박헌영(朴憲永)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도 박진목 씨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거기에 박진목 씨는 미군 정보기관의 일로 전선을 두 번이나 넘어 이북을 갔다 왔는데 두 번째는 붙잡혀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박진목 씨는 그의 형이 항일혁명가였고 그로 해서 자기 자신도 1년 6개월이라는 징역을 살았고 온 집안이 박산이 되고 말았다. 그 영향으로 해방 직후 한 때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1948년 이후부터는 차츰 변절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해서 미군 정보기관의 정보원으로 활동하여 이북을 두 번이나 갔다 온 사람인데 그 활동은 조국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명백하게 드러나고 밝혀질 것이다. 나는 박진목 씨를 통하여 우리 식구의 당시 절박한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해주어서 고마운 생각은 잊을 수 없다. 그런 한편 또 그의 처신을 통하여 운동가가 한번 변절의 한 걸음을 잘못 딛을 때 변절은 변절을 낳고 하여 종래는 자기의 가치를 망치고 만다는 사실을 그의 반면교사로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박진목 씨는 우리가족을 위하여 외할아버지에게 자기 집의 아래채 사랑을 비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집을 살림을 할 수 있도록 부엌도 가대기를 달아 만들고 도배도 깨끗이 해주었다. 우리 식구는 곧 그 집으로 이사했다. 이사라야 서외할매로부터 여분의 동자그릇과 이불을 우선 나누어 받아 옮기고, 장터 솥 가게에서 무쇠조선밥솥과 양은냄비 등을 비롯해 여러 가지 지질구레한 살림도구를 사서 부엌에 정리해두고 일군을 시켜 솥을 걸어 놓으니 영판 새 살림집으로는 제법 어울렸다. 방은 부엌에 큰 솥이 걸려있는 큰방과 가운데 대청을 건너 건넌방이 있는데, 큰방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향아와 용아를 데리고 거처했고 건넌방에는 나와 재두, 우리 두형제가 쓰기로 했다. 집은 대구에서 구지로 들어오는 도로가에 소달구지가 들어올 수 있는 3, 40미터쯤 되는 길로 해서 대문으로 들어오도록 되어 있는데 사방이 돌을 박은 토담으로 둘러싸여있다. 집은 정침과 사랑채가 남향으로 앉아 있고 동쪽에는 헛간과 그 옆에 방 두 간이 더 있었다. 나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그리고 작은 아버지가 오셨을 때 거기에 거처를 정했다. 박진목 씨는 원래 의성 사람으로 어떤 연고인지는 몰라도 아우를 데리고 구지로 들어왔는데 사람이 똑똑하고 타고난 붙임성으로 구지 술도가, 즉 「구지양조장」을 하고 있는 곽씨 성을 가진 주인에게 잘 보여 양조장 서기로 일하게 되었다. 술도가 주인인 곽씨 성을 가진 분은 당시 일제 식민지통치에 적극 협조하여 그 공으로 면장이 된 사람이다. 이 곽 면장에게는 무남독녀의 외동딸이 있었는데 어릴 때 눈병을 앓아 한쪽 눈이 불실하여 혼기가 되었으나 그 때문에 혼처가 잘 나지 않아 걱정이었다. 곽 면장은 일제 식민지 통치에 협조하여 면장 자리를 땄지만 그의 곽씨 성은 그 지역에서 명문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포산(苞山)곽씨는 아니고 근본이 알 수 없는 곽씨인지라 양반 사돈으로 혼인도 할 수 없어 고민하던 중, 박진목 씨의 넘치는 재기와 자기를 아버지처럼 받드는 정성을 보고 사위로 삼았던 것이다. 이 곽 면장은 솔례(率禮)라는 동네의 포산곽씨의 집안일에 일가라고 하면서 적극 협조하였고 그 공으로 솔례 곽씨의 한 가난한 집의 똑똑한 소년을 양자로 받았다. 그 아들을 당시 일류 공립중학교였던 대구의 「경북중학교」에 입학시켜 자기가 못 배운 한을 그 양자에게 풀게 되었고, 게다가 포산곽씨의 족보에도 자기 이름을 올리게 되어 양반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들은 나중에 면에서 일등 가는 젊은 지성인이었다. 이사하던 날 나는 박진목 씨의 부인을 만나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가 눈이 불실해서 보기가 안 좋기는 하지만 인상이 부드럽고 기다란 얼굴을 가진, 교양도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였고, 이곳 사람들은 박진목 씨의 출신 고향 이름을 택호로 해서 의성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삼남매를 두었는데 맏이는 딸이고 얼굴이 어머니를 닮아 기다랗고 이름이 희숙이다. 좀 모자라는 듯한 순진한 소녀인데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그 아래는 당시 2학년의 소년으로 이름이 희진, 막내는 장난 끼가 넘치는 개구쟁이 희선이다. 이 둘의 모습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아버지처럼 영리한 모습은 아니고 어머니를 닮아 심성이 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 집 대문을 나서 도로로 나가 오른편으로 나가면 구지면 사무소와 경찰지서로 가게 되는데 도로에는 10미터 좀 더 되는 공굴 다리가 놓여 있다. 그 다리 아래는 평소에는 물이 없는 마른 내가 있다. 그 마른 내의 이편 오른쪽에는 돌을 박은 토담을 벽체를 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은 창고가 있는데, 가운데 널찍한 마당을 둘러싸고 세 방향으로 늘어 서있다. 이것이 박진목 씨가 경영하는 미곡창고이다. 봄가을 수확 철에 공출로 거둔 벼와 보리를 보관하는 창고이고 이 창고의 보관료를 박진목 씨가 받아 챙겼다. 마른내의 저편에는 송판을 벽체로 하고 양철지붕으로 덮은 견실한 창고가 있다. 이것은 여름에는 누에고치를 거두고, 가을에는 목면을 거두어서 보관하는 창고인데 그 넓이는 교실 두 칸은 충분하고 그 곁에 붙은 사무실은 교무실로 씀직하다. 이를 이곳 사람들은 그냥 「무명창고」라고 부른다. 이 창고가 장차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설립하려는 「구지중학교」의 임시교사로 하려는 것이다. 일단 거처가 안정되자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일에 달려들었다. 먼저 달성군의 면장회의 때 외할아버지를 따라 군청에 가서 군청에 파견되어 있는 경북도학무과 장학사를 소개 받고, 중학교 설립에 관한 일을 맡을 자기의 사위라고 소개하고 앞으로 그 일을 위해 많은 도움을 청했다. 그 장학사는 김용우(金容佑)라는 분인데 술을 참 좋아했고, 참 어진 분이었다. 나중에 내가 구지국민학교의 교사로 근무할 때 나를 참으로 아껴주셨다. 김용우 장학사를 만나고 오신 아버지는 9월에는 일단 개교한다는 목표를 세워 「무명창고」를 교실로 개축하고, 책상 걸상을 제작하여 들이며 칠판을 달고 교단과 교탁을 마련하여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창고를 교실로 개축하고 학생들이 쓸 책・걸상을 만드는 데 드는 예산을 마련하는 일과 학생모집을 위하여 면민의 협조를 얻어야 했다. 당시 구지면에서뿐만 아니라 구지면보다 규모가 큰, 그 지역 사람들은 읍이라고 부르는 현풍면도 중학교 설립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고, 가근방의 어느 면도 중학교 설립을 꿈도 꾸지 않는 상황에서 구지에서만 유독 외할아버지가 교육열을 지피고 있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평소에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일에 몰두하고 그 일이 성취되기까지 모든 정력을 집중하는 극성서러움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도 또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정력을 집중하는 성품으로 두 구부 간에 죽이 잘 맞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이 일의 주재자로서 구지면의 「구장회의」(=동장희의)로 정하고 「구장회의」에다 면 유지들도 모아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확대회의에는 초등학교 교장, 시장번영회 회장, 양조장 주인, 축산의원 원장, 구지한의원 원장, 두 군데 정미소의 주인들, 금융조합 이사장 등이 들어간다. 그 회의에서 외할아버지는 중학교 설립의 취지를 열렬히 연설을 하셨다. “해방 후 곳곳에서 중학교 설립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면의 가근방에서는 아직도 중학교를 설립한다는 말이 없다. 우리보다 인구도 많고 재정도 나은 현풍면에서도 말이 없다. 우리 구지면은 다른 것은 몰라도 현풍보다는 교육에서는 앞서야 한다. 그 이유는 해동오현의 한 분이신 한훤당(寒暄堂)의 위패를 모신 「도동서원」이 있는 곳이고, 비록 행정구역으로는 현풍면에 들지만 솔례 마을은 구지 창동과는 이웃 마을인데 거기에는 포산곽씨 집안에서 나온 열둘의 효자・충신・열녀를 기리는 「현풍곽씨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貞呂閣)」이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러데 여기에 중학교가 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현풍면은 향교도 있지만 그 향교도 알고 보면 실은 향교의 구실을 맡은 사람들은 거의 다 구지면의 사람들이고 현풍면소재지보다 구지면소재지가 더 가까운 동네인 솔례 동네, 못골 동네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중학교는 먼저 구지면에다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구장들과 면 유지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동의했다. 외할아버지는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선 학교교사는 「무명창고」를 쓰고 운동장은 그 앞마당으로 하지만, 창고를 교실로 만들려면 책상・걸상도 들여야 하고 교단・교탁과 칠판도 달아야 하지. 그리고 교무실도 마련하려면 사무실도 수리하고 책상 의자를 들여야 하지. 나중에 정식 교사도 신축하고 운동장도 중학교 운동장답게 닦아야지만 그건 나중에 재원을 만들어 할 것이야. 그러나 우선 학생들 수업은 하도록 해주어야지. 그러려면 돈을 마련해야겠는데 구장들과 유지들은 주머니 끈을 좀 푸소.” 모두 고개를 주억거린다. 결국 회의는 한참 이야기하다가 결속 짓게 되었는데, 각 마을마다 가구 비례로 할당하고 그것은 가을 추수 때 거두기로 했다. 그리고 유지들도 적극 기부금을 내기로 했고 일단 필요한 금액은 면의 보증, 즉 면장의 보증으로 금융조합에서 얼마간 융자하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은 학생모집의 문제였다. 일단 한 학급 60명을 모집하기로 하고 구지면을 물론이고 이웃면의 면사무소 벽보판에 학생모집의 광고를 붙이기로 했다. 그리고 구장은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을 모으기로 했다. 일이 이처럼 결속되자 일은 바빠졌다. 학생용 책상・걸상은 목공기술자인 나의 외숙이 작업을 맡기로 했다. 나의 외숙은 대구공업중학교의 전신인 대구직업학교의 목공과를 졸업한 자격증을 가진 목수 기술자였다. 면 직원 두 사람이 잡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창고 경비실 겸 사무실로 쓰던 공간을 정리하여 임시사무소를 열었다. 아버지가 하실 일은 교무전반의 일이다. 먼저 교사를 초빙하는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밀양중학교의 화학선생이었던 손기용 선생님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이의 연락을 내가 맡았다. 나는 그 이튿날로 밀양으로 내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