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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사이에 계시리라 (사무엘상 20장 30-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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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다윗과 요나단이 처음 얼굴을 보게 된 때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왕 앞에 섰을 때입니다. 다윗은 이미 그 전에 수금을 타는 소년으로 궁궐에 들어와 있었지만, 다윗과 요나단은 이 때에 처음으로 얼굴을 대면한 것으로 나옵니다. 사무엘상 18장 1, 3-4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말입니다. 남자도 남자의 멋짐에 반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신분이 왕자이고, 소년 다윗은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윗이 보여준 담대함과 지혜로움에 감복을 받았습니다. 특히 다윗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하나님만 경외하는 모습에 크게 감동을 느끼고 그를 흠모하게 됩니다. 왕자와 목동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남자대 남자로서 아름다운 연합을 맺은 것입니다. 참 멋있는 남자들입니다.
두 사람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궁궐에서 탈출 한 이후 였습니다. 이 때는 왕자와 목동의 관계가 아닌, 매형과 매제의 관계였습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으로 피신였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에 요나단을 찾아가서, “내가 무엇을 하였기에 왕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억울하다”라고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요나단은, “매형이 죽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모든 일일 막아 줄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고 위로합니다. 요나단은 정말 다윗을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완전하게 다윗의 편이었습니다. 20장 17절에,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고 합니다. 목숨까지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이었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요나단의 일편단심은, 남녀 간의 사랑,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보다 어쩌면 더 크고 위대한 힘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요나단은 진정으로 다윗을 사랑하였고, 그의 안위를 걱정해준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왕자와 목동이었던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요나단은 다윗을 향해 그토록 우정과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요?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불가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마지막 남긴 말에 해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나님이 그 두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요, 약속을 맺게 감동 주신 것도 하나님이요, 영원토록 헤어지지 않고 함께 지낼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 이십니다. 두 사람의 특이하고도, 감동적인 우정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주는 세 가지 사랑의 메시지를 살펴봅니다.
첫째, 신분을 초월한 우정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왕자와 목동의 신분은 평생에 한 번 만날 일이 있을까 할 정도로 너무나도 차이가 납니다. 왕자는 평생 동안 목동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지낼 것이며, 목동은 왕자가 사는 궁궐이라는 곳은 가볼 엄두가 나지 않는 상상속의 장소일 뿐일 겁니다. 그런데 이런 극한의 환경 속에서 요나단과 다윗은 만남을 가졌고, 매형과 매제로서 맺어졌을 뿐 아니라, 생명까지 두고 맹세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관계를 볼 때, 신분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계층일 뿐, 인격체인 인간본연의 모습은 서로에게 존중과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상호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오직 평등의 관계만이 성립되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부터 세워진 질서입니다.
그런데 사회 구조상 만들어진 신분의 차이는 인간이 허물어뜨릴 수 없을 만큼 견고합니다.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특별하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눈에 보기에는 낮고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무조건 복종하게 만들고 다스려야 하는 대상일 뿐, 함께 어울리고 생각을 공유해야 하는 집단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히 너희들이” “기어오르려고 하지 말고 그냥 너희들끼리 살아” 이렇게 깔보고 무시하는 천대의식이 구분 된 계층구조를 만들고, 각종 특권의식을 양산해 냅니다. 이러한 신분의 격차를 허물어뜨릴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낮은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꿈꾸며 발버둥 쳐보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합니다. 요행이 그런 자리에 올라갔다고 하여도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올라온 그들을 별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영원히 그 자리에서 잘 먹고 잘 살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이런 구조를 깨드릴 수 있는 방법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의 자리를 양보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특별한 경우이고, 현실의 세상에서는 전혀 불가능 한 일입니다. 돈, 권력, 자리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왕자인 요나단이 목동인 다윗에게 예를 갖추고 존중하고 동격으로 대해 준 것은 오로지 요나단이 왕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목동의 자리로 눈높이를 맞추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창조자와 피조물,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격이 없는 소통을 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에서는 “그는(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고 합니다. 권세와 권위를 다 버리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가, 단지 우리와 화해하시고, 함께 하시기 위함이라니 허무하기 까지 합니다. 왜 그러셨을까?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거나,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나는 특별한 그룹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단 번에 깨트려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들을 낮은 자리에 보낸 것처럼 너희들도 계속 낮아지고 떠 낮아져서 모든 사람이 서로 차별하지 않고 동등한 인간관계 속에서 화평과 화목을 이루어 가라”는 큰 뜻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려고 하고,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들을 매섭게 꾸짖으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요나단이 목동 다윗을 존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 번은 할 수 있으나 계속해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해 나간 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내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주신 마음,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쳐주신 평등의 정신이 요나단과 다윗에게 보여진 것입니다.
어딜 가나 부자나, 권력자나, 상전(주인)들은, 없는 자, 평범한 자, 하인(종)들을 무시하고, 없이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 교만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아들을 낮게 보내 주셨는데, 예수님도 그 높은 자리에서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 오셨는데, 감히 인간이 자기 자리를 고집하고 버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낮아지고, 항상 낮아지고,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높은 자들이 낮은 자리로 자진해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자기낮춤이 일어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지극히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부터라도 낮아짐의 정신, 그리고 함께 하는 평등의 정신으로, 모든 이웃과 세상을 늘 섬기며 살아가는 예비 된 천국백성의 모범을 보이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집안의 원수를 향한 우정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울왕이 다윗을 진짜로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인지 요나단이 살펴보는 장면입니다. 요나단은 왕의 마음을 알아보고 만약에 왕이 화를 내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다윗이 멀리 도망갈 수 있도록 알려 주겠다고 미리 만나서 약속을 했습니다. 궁궐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가족 식사 자리에 다윗이 나아오지 않자 사울왕은 요나단에게, “다윗이 왜 식사자리에 오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사울왕은 악령이 들려서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서 궁궐에서 도망간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이, 오히려 다윗을 은근히 걱정하는듯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윗이 식사 자리에 나아오면 그를 다시 죽이려고 생각 했던 모양입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대답하기를, “다윗이 베들레헴의 가족모임에 가느라고 식사자리에 못 왔고, 요나단 자신이 베들레헴에 갔다 오는 것을 허락했다”고 말합니다.
사울왕은 요나단이 다윗을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냅니다.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30절 말씀입니다.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우리말 성경은 사울왕이 얼마나 화가 났고, 저주성의 말을 하고 있는지 더 잘 표현해 줍니다. “너 반역자며 사악한 여자의 자식아, 네가 그 이새의 아들 쪽을 택한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게도 망신이지만 널 낳아 준 어미에게도 망신이다” 악령에 시달리는 사울은 사위도 못 알아보고, 아들과 자기 부인까지도 저주하는 분노조절장애를 드러냅니다. 큰 키에 얼굴도 준수하여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기름 부음 받아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는 영예를 얻었는데, 그런 왕에게서, 성령이 떠나자 분별력을 잃고 추악하게 무너져 가는 모습이 안타깝고 애처롭습니다. 누구라도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포악하고 비열하고 추잡한 인간 말종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 왕은 그야말로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급격하게 추락해버린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 탓 할 것 없이 자신이 자초한 일이고,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을 저지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입니다.
사울은 단단히 독이 올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살아 있는 동안 너 요나단의 나라(왕위)는 없을 것이다. 당장 다윗을 내 앞에 끌어와라”(31절) 요나단에게 다그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그렇게 분노하는 데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다윗이 무슨 죽을 일을 저질렀습니까? 그를 왜 죽여야 합니까?”(32절)라고 항의 합니다. 사울왕은 이성을 잃고 자기 아들인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창을 꺼내어 요나단을 겨냥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것에 크게 분노하여 식탁을 치고 일어나 자리를 떠납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처한 처지를 생각하며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들판에 나아가 미리 약속한 대로 화살을 멀리 쏘아서,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요나단의 이런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일관되게 다윗 편에 서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패역무도한 불효자 입니까? 아니면 간사한 첩자입니까? 요나단은 부모 자식 간의 육신적인 관계보다 대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지각능력을 지녔습니다. 불의하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결코 굴하지 않는 칼 같은 성격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안위보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나의 원수가 진정 누구인지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 왕위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손익계산이 금방 나오는데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대쪽 같은 성격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소 십자가에 매달리신 상태에서까지 실천하셨던 그 모습이 바로 요나단의 행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다 용서 할 수 있고, 무조건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용서의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용서를 해 주신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악에게 지지 않고 선을 행할 때 그 힘이 발휘가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가족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을 용서와 사랑의 힘으로 끊어내려 한 것입니다. 당장은 불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도, 언젠가는 요나단이 판단했던 진심의 마음을 알아 줄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악과 타협하기도 하고 적당하게 느슨하게 생활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불의와 타협하고 매사를 적당히 하려 했다면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장 먼저 악과 불의에 맞서서,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고,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내 아버지가 하나님 이신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비록 당장에 가족에게 따돌림 당하고, 동료와 이웃에게 “너만 잘났냐!”고 눈총을 받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마십시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할 것이고, 진심은 언젠가는 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 하시려고, 사랑하시려고 모진 고난을 당한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고난의 상황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겨내야 합니다. 굴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여라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마음을 받아서 다 뽑아내십시오. 내버려 두면 내 몸이 점점 상해집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난 나야,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절대로 잊지 않고, 용서도 못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 받고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나는 받기는 했으나, 하나도 주지는 못하겠다는 비뚤어지고 옹고집적인 마음은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빨리 용서하고, 완전하게 용서 할수록 더 자유로워지고, 주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상황과, 관계가 우선이 아니라, 그것이 비록 가족의 문제일지라도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정신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실천하신 사랑의 마음으로, 내 안에 있는 모든 불의를 털어내고, 나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한 사람도 다 용서하여서 주님과 더욱 가까이 지내며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끝까지 지켜낸 우정은, 성령님의 동행하시는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41, 42절의 말씀은 요나단과 다윗이 들에서 나누는 마지막 이별의 장면입니다.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남자들의 뜨거운 이별의 눈물 장면이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요나단이 마지막으로 다윗에게,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고 한 말이 의미 심장 합니다. 한 사람의 오해와 광기로 인해 비록 두 사람의 몸은 떨어지지만,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 사람은 영원히 약속가운데 함께 있는 사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언약을 들으셨고, 이 언약을 지켜 주시는 동안에는 두 사람은 성령으로 교통하며 언제나 함께하는 사이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우정, 진정한 사랑은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영원히 지속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는 요나단의 맹세와 언약의 말은 그대로 지켜졌습니다. 사울왕과 요나단은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가 길보아산에서 전사를 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조가(弔歌)를 지어 그를 애도 합니다. 사무엘하 1장 26절에,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요나단을 흠모 하고 사랑하고 존경했는지 한 구절로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지만 다윗은 그를 잊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전투 중에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합니다. 요나단의 아들은 이름이 ‘므비보셋, 으로 전투 중에 유모가 안고 달아나다가 놓쳐서 평생 다리를 절었습니다. 왕이 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이르기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라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므비보셋은 평생토록 왕과 함께 식탁을 같이 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비록 죽었고, 사울 집안과는 원수가 되었지만, 그와 맺은 언약대로 그 후손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요나단도, 다윗도 참으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을 거두어 준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과거에 가르쳐 주셨던 모든 말씀들이 기억나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시고, 모든 문제들을 상담하며 동행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요나단이 죽었어도 그의 아들을 다윗이 보살폈던 것처럼, 예수님이 안 계셔도 영원토록 우리 동행하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요나단은 죽었지만,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는 언약의 맹세는 죽어서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끝까지 우정을 지켰던 요나단과 다윗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성령 충만함으로 임하여 주십니다. 성령님의 동행하심은 곧,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만을 끝까지 신뢰 하시고, 내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않고 나와 내 후손에게까지 동행하여 주시는 성령님과 아름다운 동행을 이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을 이야기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표현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시는 신분을 초월한 사랑, 십자가에서 다 해결해 주시는 용서의 사랑,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동행하여 주시는 성령님의 사랑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다윗과 요나단의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이제 이 세상 사람들을 제대로 섬겨 주려고 겸손함으로 더욱 더 낮아지고, 나에게 어려움을 준 사람을 용서해 주기로 결단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령님과 영원토록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 바라보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우리 사이에 영원히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생의 소망가운데 전진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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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따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용서하고, 동행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를 때까지 온전한 믿음을 지키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요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61005 수요설교. 나와 너 사이에 계시리라 (사무엘상 20장 30-42절).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