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세 갑오쎄
예천 갑오쎄
<개벽 마당>
1860년 4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하셨다.
왕조가 운을 다했도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고달픈 흰옷 입은 사람들 두 귀가 쫑긋
산토끼가 물 마시러 오듯 동학이라는 옹달샘에 모여들었다.
1864년 3월 초열흘
수운이 감히 평등한 세상을 꿈꾼 죄로
경상감영 관덕전에서 목을 맨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이미 이를 예감하고 최시형에게 한울 목숨을 주었다.
<보국안민>
갑오년 정월 초열흘 새벽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저항하며
농민군 1천여명이 사발통문을 돌리며 말목장터에 모였다.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얻고
창고를 헐어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것이 폐정개혁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고 일어난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척왜척양>
갑오년 3월 초
전봉준은 태인 대접주 김개남과
무장 대접주 손화중 등 농민군들이 백산에서 봉기했다.
처음으로 전봉준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녹두군의 군사체계를 갖추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백성들의 가축을 잡아먹지 말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자고 하였다.
갑오년 4월 초이레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에 승리하였다.
갑오년 5월 스무이레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예천의 녹두꽃>
갑오년 삼월부터
옹기장수 최맹순이 옹기를 새끼로 얽어 지고
소야에서 꽃재를 넘나들며 포덕을 했다.
녹두꽃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갑오년 유월 스무하루
왜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 임금의 목에 칼을 겨루었다.
서울의 왜군 중동 소식에 삼남이 술렁였다.
예천의 녹두꽃이 떨었다.
갑오년 팔월 초열흘
감천 귀밑에서 대일항전용 군수전을 모으던
녹두꽃 열한송이가 관아에 잡혀왔다.
“너희들이 우리를 죽인 뒤
감히 살 수 있겠느냐?”
민보군은 이들을 국법에 따른 절차 없이
한내 모래사장에 생매장했다.
아닌 밤중에 귀를 비비게 한 비보에
녹두꽃 화들짝 일어나 몸을 떨었다.
갑오년 팔월 스무사흘
보수집강소 군 3백여 명이
화지의 농민군을 선공해 왔다.
농민군은 윤치문을 중심으로 이를 물리쳤다.
갑오년 팔월 스무나흘
보수집강소 군의 화지 공격 소식에
관동수접주 최맹순이 대로했다.
그는 소속 접에 예천 관아 공격령을 내렸다.
갑오년 팔월 스무닷새
농민군이 용궁에서
동학 도회를 염탐하던
왜군 다케노우치 무리를 에워쌌다.
“여기가 뉘 나라라꼬 넘보고 다니느냐?”
다케노우치가 당황해 칼로 제 배를 찔러 엎어졌다.
“형님, 나머지 두 놈도 해치우시더.”
“아닐세, 졸에게 큰 죄가 있겠능가?”
“돌아가 너희 상관에게 이르거라!”
“빨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돌아가라꼬.”
그때 파랑새가 날았다.
갑오년 팔월 스무엿새
농민군이 용궁현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챙겼다.
우리도 칼을 가져야 한다!
우리도 총을 들어야 한다!
조선 백성 모두 일어나
척왜양이의 깃발 다듬어
푸른 죽창이라도 들어야 한다꼬
갑오년 팔월 스무여드레
화지에 모인 농민군
북을 치며 피리 불며 예천읍내로 진군했다.
가을걷이도 뒤로 한 채로
가족들도 뒤로 한 채로
이 한 몸 뒤로 한 채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보국안민!”
“척왜양이!”
목 쉰 함성이 땅을 울렸다.
흐드러진 꽃내음이 하늘을 찔렀다.
농민군은 서정자들 유정에 진을 쳤다.
벗은 갓과 두루마기 버드나무에 걸어놓고
겹담배 뻑뻑 연거푸 속 깊이 빨아들인 뒤
곰방대는 무명 바지춤에 찼다.
상투머리와 쑥대머리 맞대어 한 바다를 이루었다.
두둥! 북을 울리자 전투 대형으로 펼쳤다.
농민군과 민보군은 한천 제방을 사이에 두고
손에 닿을 듯 가까이서 맞섰다.
관동수접주 최맹순과 야전 사령관 김한돌은
금당실의 농민군 당도 소식을 목을 빼고 기다렸다.
“안 될씨더, 우리만으로라도 싸우시더!”
저녁 늦게 공격 신호를 내렸다.
타다탕!
어둠 속에 유성 같은 불빛만 보이고
우래 같은 소리만 들렸다.
총탄이 떨어지는 숲에는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어지럽게 날았다.
검은 연기가 하늘에 가득해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았다.
현산에서 쏘는 대포 소리에 양쪽이 모두 놀라 주춤했다.
민보군의 신식 총에 농민군이 참새처럼 떨어졌다.
돌이티쪽에서 횃불이 오르더니
거짓 함성이 들려왔다.
“안동에서 구원병 3천이 온다!”
농민군은 기가 꺾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물러나고 말았다.
금당실에는 모량도감 전기항이 있었다.
화지의 농민군이 읍의 서쪽을 공격할 때
금당실의 농민군은 읍의 동쪽을 공격하기로 약정돼 있었으나
뒤늦게 예천읍을 향해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긴 횃불 행렬을 지어 북을 치며 호각을 불며
부르고 대답하는 소리가 산천을 진동했다.
달구리고개를 넘어 생내실 냇가 모래밭에 진을 쳤다.
첩보를 받고 출동한 보수집강소 군은
읍쪽 언덕 아래와
물 건너 농민군 진지 끝 풀밭에 매복했다.
농민군이 머뭇거리는 사이
보수집강소 군의 총탄이 두 곳에서 비 오듯 쏟아졌다.
농민군도 응사하였으나 많은 희생자를 내고
물을 건너지 못하고 말았다.
갑오년 스무아흐레 아침
왜군은 석문리 입구를 지키던 초소를 기습한 뒤
소야리 농민군 병참기지를 습격하였다.
11칸에 보관해 둔 군수전과 무기를 탈취해 갔다.
보수집강소 군은
금당실의 동학 접소로 사용된
함양박씨 유계소를 불태웠다.
보수집강소 군은 철저한 보복에 나섰다.
다른 접소도 하나하나 불을 질렀다.
갑오년 10월 열여드레
최맹순은 예천읍 관아를 다시 공격하려고
강원도 평창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100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하여 벌재까지 진군하였다.
갑오년 11월 스무하루
관동포 수접주 최맹순과 그의 아들 최한걸과 접사 장복극과 함께
단양 독기에서 관군에게 붙잡혔다.
이날은 최맹순의 아들 최한걸이 백년가약을 맺던 날이었다.
초례청에서 홀기를 부르던 중 관군의 급습으로 체포되었다.
초례청에서 신랑을 빼앗긴 새색시는 얼마나 놀랐을까?
새색시와 가족들은 무사했을까?
갑오년 11월 스무이틀 장날
최맹순은 남쪽 모래사장에서 목이 잘려 내걸려졌고
최한걸과 장복극은 총살되었다.
남은 녹두꽃에게는
계속 피 비린 내 나는 보복이 자행되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녹두꽃들은
다음해 을미의병이 되어 다시 왜군과 싸우다가 최후를 맞았다.
예천의 녹두꽃은 이렇게 피었다가 졌지만
끝내 지지 않는 영원한 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