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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광수 시와 단상과 연작소설 말과 글 19
불초 김광수 우선 보고부터 드립니다. 작년 어렵사리 창작기금을 받았습니다. 시인작가로서의 자격차원이 아니고, 서류를 만드는 일이 제게는 중편소설 한 편 쓰기보다 어려웠습니다. 오리무중, 뭐가 뭔지 알 수 있기는커녕 손에도 머리에도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니 기다리기는 오히려 쉬웠습니다. 내 인생, 희망 없는 기다림이었으니까요.
문득 불세출의 야구선수 장효조, 최동원, 두 분이 생각났고, 셋이 모여 죽마고우인 양 무릎 부딪쳐가면서 산성막걸리 한 열 병 쯤 사놓고 수작하며 나누어 마시고 싶은 생각 간절했습니다.
야구선수는 야구로 승부하여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 진리라기보다는 상식에 충실하려다가 오히려 힘들기만 했던 두 분이었습니다. 야구계의 속설이라는 야구 안 되는 사이비선수가 꼭 변칙으로 놀고, 정치하려 든다는 말이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야구 아닌 딴 인생에도 두루 통하는 말이고, 현실이니까요.
문학인들이 문학작품으로 평가 받는 날을 기다립니다. 작품이야 지금도 그렇게 평가되고 있다고 믿습니다만 문학인도 사람이라서 작품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거나 끝나는 일이 아니니, 그것이 문제이겠지요.
코 묻은 돈 수준인 알량한 푼돈장난, 혈연 지연 등 인맥장난, 학맥장난, 문예지장난 등속에 놀아나는 문학외적이지만 필요악인 것들이 안타깝습니다. 그것들이 문인과 문학까지 망치고 있는 듯싶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야구를 필두로 스포츠야 구체적인 것이니 속임수가 오래 가지 않지만 정신적이어서 추상적이고, 간접예술이라서 금방 가치판단이 되지 않는 문학적 속임수는 바로 드러나지 않으니 백배 무섭습니다.
책을 만들고도 서류제출을 미루다가 창작기금을 놓칠 번한 모골이 송연한 일을 겪어가며 출간한 소설집이 김광수 제10소설집 연작소설『열리는 혼』입니다. 오늘은 감히 그것을 보고하고 선보이려 합니다.
사족입니다. 수작(酬酌)은 원뜻이 술잔 주고받기랍니다. 엄청 좋은 뜻인데, 대한나라 어르신들이 술좌석 등속에서 중상묘략 따위를 즐기니 부정적인 뜻으로 의미가 전이되어버렸지요. 애재라. 스포츠는 운동과 운동경기 등 복합의미이므로 문맥에 맞추어 해석하면 됩니다. 또 있습니다.
연작 장편소설, 마당놀이 사람의 말 둘째마당은 곧이어 올리겠습니다. 다언다사多言多謝!
일요일의 영혼 인연과 사랑에 갇히다
12월령, 울 엄니 꼬장 타령
먼저 이상하고도 낯선 제목 「꼬장 타령」이다. 타령은 대강이라도 알겠는데, 도대체 꼬장이 무엇인가? 아이구야 설명할 거라도 있나, 고추장의 경상방언이고 고어다. 그것도 최하 이순 넘긴 사람이나 알아듣는 말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이나 아이들은 사투리인지도 모를뿐더러 이런 말이 있는지조차도 모를 것이다. 당연하다.
요즈음 나는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바로 등 뒤에서 찌른 비수에 찔린 채 살고 있다. 하기야 가까이 있다고 꼭 친한 것도 아니더라만.
폭탄으로 치면 직격탄이다. 당한 난으로 보면, 언란言亂이라기보다는 말의 폭력 이상인 언란諺亂을 당한 것이다. 여기서 언諺은 명사로는 상말, 속된 말, 속어, 속담 등이 되고, 동사로는 조문하다, 제 자랑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된다. 세상에, 별것 아닌 인간의 자기자랑이 얼마나 듣기 싫었으면 상말로, 나아가 조문하기로 비하했겠는가.
남루와 비루를 지나 야비하다 싶을 정도로 더럽고 추잡해서, 언란의 내용을 말하면 말하는 사람의 입뿐 아냐 듣는 분들의 귀한 두 귀마저 더러워질 것이니 구체적 내용은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저 말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현장에서, 그 말 안니 말들을 들은 순간의 내 당혹감과 수치와 슬픔을 말하려 하는 것일 따름이니 양해하기 바란다.
결론은 불운. 내가 왜 그곳을 지나치게 되었고,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잠시나마 머물게 되었던가, 문제는 그것이었다.
도끼에 발등 정도가 아니고 비수로 등을 찔린 기분이었다. 여느 사람이 다 그래도 당신만은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등 돌리면 사랑하는 당신도 많이 외롭고 곤란해질 건데. 당혹감, 구업이 도끼나 비수인 줄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 날카로운 것일 줄이야, 슬픔.
그러나 타산지석에 반면교사도 있지 않은가. 진리도 은원恩怨도 곁에 있음 배운다. 어머니가 생전에 가르쳐 주신 병인 가슴앓이가 중병임도 배운다. 치유불능의 암으로 전이할 수 있음도 배운다. 자칭세칭 식자들의 양두구육의 언행, 점잖은 언사보다는 양아치의 거칠고 저급한 언행이 오히려 진솔함도 배운다. 적어도 정직하다.
그래도 곁에 있는 사람을 믿고 사랑하여야 함을 함께 배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같아지지 말아야 함도 배우게나. 힘드네요, 그러나 힘내세요.
말이든 글이든 친한 사이일수록 그를 상대로 푸념하지 말자, 그보다도 절대로 타인을 화제의 대상으로 올리지 말자는 게 내 일상생활과 어법의 좌우명 하나 둘이었는데 요즈음 그걸 어기기도 하고 실수도 제법 한다.
많이 부끄럽다. 부끄러움의 자락을 붙잡고, 명경지수까지는 아니어도 요 며칠 사이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글도 쓰고 편지 띄우기도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한 번 맺은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지속할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한다. 화두인 셈이다.
먼저 사족이다. 씹는다, 이빨 까다, 요즈음 가장 자주 듣는 시쳇말이다. 천박하다. 그러나 절묘한 표현이다. 담화 도중 자리에 없는 사람을 항한 욕과 험담과 악담하기를 통틀어 씹는다고 한다. 현재진행형이다. 씹는다. 씹히는 사람은 음식물이 되어 먹힌다.
이빨 까다에 이르러서는 기가 탁 막힌다. 평범한 내용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말솜씨를 그리 표현한다 하니, 이빨로 말을 까는 행위 맞다. 이빨, 원래는 이의 비속어였는데 요사이는 그냥 쓰인다. 까다의 뜻으로 가장 보편화된 것이 새끼를 친다는 뜻과 남의 결점을 까발린다는 뜻이라니 알조 아닌가.
모르는 게 약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잠시나마 잊어버린 것이 화근이었고, 원죄였다. 모름의 미학이랄까, 듣고 보아서 또 알아서 마음 아픈 말이나 글 타인을 미워하게 하는 말글은 듣지 않고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은데. 잘 알면서도.
그러나 귀와 눈이 각각 두 개인데다가 늘 열려 있는 것이 죄업이라서 본의 아니게 필요 없는 말글을 듣고 보게 된다. 슬프다가 아프다. 그럴 적마다 나는 지금은 이승에 없는 울 엄니 말씀과 민요이면서 잡가다 싶은 꼬장 타령을 생각하고, 간혹 입안에 넣은 채 흥얼거리기도 한다. 소리가 입 밖으로 넘어올까 조심해가며.
“둘째야,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들으려면 제 속에는 꼬장 열 단지 넘게 담아야 한다, 아나.”
꼬장 타령, 꼬장과 마찬가지로 지금 사람들은 듣기는커녕 있는지조차도 모르기 십상인 지방민요에 잡가다. 환갑 넘은 사람 중에서도 경상도 보리문둥이들은 들어본 적이나마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고 나면 쉽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시시할 정도다.
당신의 다섯 자식 교육비로 생활비가 금방 동이 나고, 벌어온 돈도 그 자리서 거덜나버리는 일상 가운데에서도 어머니는 철따라 보양음식을 만들어 삼남 이녀에게 거두어 먹였다. 진한 모성애다.
당시에는 신기했고 지금은 경험으로 아는 것들 중 하나다.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모성애라면 아버지의 그것은 오히려 의무감에 가깝다는 것이다. 아내가 그렇고, 아버지가 그랬고 나도 그렇다. 이 위대한 모성애를 요즘 여자들은 잊어가고 있거나, 거기까지는 아니어도 피해의식은 너나없이 느끼고 있는 듯싶다. 대한나라 어머니들이여, 당신들만이라도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상에 오르는 상어회가 그것이었다. 꼬들꼬들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하고, 기타 설명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그 생물고기를 윤집장에 버무려서 상에 올리면, 자식이라서 원수이기도 한 우리들은 아귀가 되어 먹어치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침이 고이는 대단한 감칠 맛. 윤집장이란 꼬장에 식초와 설탕을 버물어 넣은 양념장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이거 넉넉하게 먹으면 한겨울에도 춥지 않다, 아나. 실컷 자시고 올 겨울에도 공부 열심히 해라. 으이그 내 새끼들, 일등 해야지, 일류 중고등학교 나와야 서울대학교에도 가지.”
오로지 자식만을 위한 윤집장을 만들면서, 울 엄니는 비장의 꼬장 타령을 흥얼거렸다. 모처럼 여유만만한 소리고 천진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44조 가사체인 것을 안 것은 먼 훗날이었다. 월령체인 노랫말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오호라 메주야 꼬치같이 매운 세상 꼬장 타령이나 해보자
정월달에 담는 꼬장 조상님 음덕이요
이월달에 담는 꼬장 우리 서방 손길일세
삼월달에 담는 꼬장 삼짓날 제비요
사월달에 담는 꼬장 부처님 자비일세
오월달에 담는 꼬장 그네 위의 처자요
유월달에 담는 꼬장 유두날 유두일세
칠월달에 담는 꼬장 견우직녀 이별이요
팔월달에 담는 꼬장 한가위 이바딜세
구월달에 담는 꼬장 투전판 술안주요
시월달에 담는 꼬장 내 자식 찬거릴세
십일 십이월 담는 꼬장 노는 두 달에 먹을 걸세.
오호라 메주야 꼬치같이 매운 세상 꼬장 타령이나 해보자
정월달에 먹는 꼬장...
대강 이런 내용 아니었나 싶다. 꼬, 꼬장. 꼬오장, 이런 식으로 4박자를 맞추는 단조로운 음수율가락에 역시 단조로운 가사였으나 어머니가 부르면 기이할 정도로 정감이 있었다. 멋과 흥이 있었고 마지막 가락에서는 마침내 서러웠다. 내가 평생을 따라 흥얼거려 봐도 절대로 흉내 내지 못하는 가락과 노랫말의 묘미다.
이제 여러분도 꼬장 타령이 무엇인가를 알고, 시시해할 것이다. 고추장 타령.
지금 이 시간에 나는 가신 울 엄니와 같이 고추장 타령 아니지 꼬장 타령을 이중창으로 노래하며, 한 백 잔쯤의 술, 질펀하게 나누어 들고 싶다. 당신이 윤집장이라 부르던 초고추장을 듬뿍 친 상어회를 으뜸안주로 받들어 모시고, 맥주 서너 상자 통째로 곁에 두고. 윤집장으로 양념한 채소들과 오징어무침을 밑반찬으로 삼아 여분으로 두고, 형제자매들 더불어 어머니 모시고 들고 싶다.
당신이 공개적으로 최고급주로 단정한 맥주와 은밀하게 군침 흘리시던 윤이 반들반들 흐르는 상어회 더불어, 춘향전에서 운영전 거쳐 숙영낭자전까지 서너 작품 연속으로 노래하고 얘기하는 것을 삼가 경청하고 싶다.
영원한 둘째인 내게 소설은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속삭임으로 가르쳐주신 사부님, 고대소설은 판소리가락으로 읊을 수 있는 것이 최고이고 절창임을 노래로 가르쳐 주신 사부님, 울 엄니시다.
어머니가 노래인 창과 사설인 아니리로, 남들에게 암송해 줄 수 있는 고대소설은 어림잡아 열 작품이 넘었다.
“둘째야, 숙영낭자가 최고다, 아나. 주인공이 진짜로 죽거든. 그런 고초를 당하고 살아남는다는 것도 우습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헛이바구들은 더 우습다, 아나.”
살아생전 그리도 좋아하던 맥주, 거나해지면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말글의 크고 작은 폭포수들.
“조고각하照顧脚下거든. 제 발밑을 잘 살펴야지 먼 데만 보면 뭐가 보이나. 가슴앓이 끝의 암 덩어리가 뭔 줄 아나, 남의 심장에 비수 안기고 끝가지 잘 되는 사람 없다, 시간과 인생세간이 영약이고 복수다, 내가 칼을 들지 않아도 세월이 창검으로 복수해준다, 아나.”
“돈이 없어서 소주가 좋으니 막걸리가 좋으니 하지, 맥주가 최고다 아나. 술술 잘 넘어가잖나. 안주만 좋으면 뒤끝도 없는 턱이고.”
“돈이나 재산은 언제든 흘러내리니 유루공덕이다. 공부해서 마음을 채우는 것이 절대로 흘러내리지 않는 공덕인 무루공덕이다, 아나.”
“외갓집에 자주 가지는 말아라. 우리 것도 아닌 논밭산판에 괜히 헛바람 든다. 가도 머슴방과 주방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거라. 상소리 외에 배울 것 없는 곳인 데다가 고추에 힘만 빠진다, 아나.”
사람은 가도 노래와 말글은 남는다는 사실을 실증한 어머니의 어록이다.
울 엄니야, 제발 아나 또 아나 반복하지 말그래이, 이 엄니 극락왕생한 나이가 다가오는 데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나. 김광수 제10소설집 연작소설『열리는 혼』
2. 시문 16.
시詩
12월령, 그리하여 건강은 첫사랑 같은 것
진실로 건강은
첫사랑 같은 것
사랑의 순결과
사랑의 기대
몽환까지 같다네,
순결에서 혼탁
기대에서 실망
몽환에서 현실
그렇게 첫사랑이
병들어 가면
되돌릴 수 없는 것
가버리고 나서
울고 또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네.
문文
여는 글, 그냥 넋두리
퇴직 이후 일 년 남짓 기획 편집하여 지금까지 만 삼 년, 발표 미발표 작품들을 죽어라고 컴퓨터에 옮기고 있는 것이 <김광수 전집> 초고들이다.
우선 한 권이라도 상재해놓고 봐야 전집출발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화두와 명제를 넘어, 강박관념에 두통까지 불러일으킨 정도였다.
마침 부산문화재단에서 부산광역시와 부산시민을 대신하여, 이 일을 할 수 있는 빌미를 미련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다. 이제는 각오와 다짐이다.
열 번째 소설집인 연작소설 『열리는 혼』을 <김광수 전집 - 소설> 중 한 권으로 편집하여 시작하자.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연작소설, 동서소설의 효시인 듯싶다. 서양소설의 출발이라 평가되는 『데카메론』, 동서의 교량 격인 중동의 『아라비안나이트』,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집 『금오신화』가 그렇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연작소설 『말테의 수기』가 있다. 지금보다 정신적으로 한참 미숙한 그러나 젊은 날, 젊다기보다는 어린 날, 단편소설에 소설인생을 걸고자 했던 필자를 매혹과 감동의 바다에 빠뜨린 장편소설이었다.
릴케가 주인공 말테의 편력을 통하여 가르쳐준, 이 불후의 연작장편은 복잡다단한 바탕사상과 내용에 비해 형식과 구성은 비교적 간단하고 단순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것이 소설문학의 진수인 명증한 사실성과 현장성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형식이고 구성임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를 하나하나 떼어놓으면 독립된 형식과 내용의 단편소설이나, 그것을 이으면 줄거리와 주제가 이어져 장편소설이 되는 절묘한 구성이 그것이다.
연작소설 『열리는 혼』의 주인공 김희수는 필자의 희망적 분신이며 둔갑술도 조금 할 줄 안다. 그러나 손오공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까지 포기하는 둔갑이 아니고,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히고 굴절하듯 슬쩍슬쩍 팔도홍길동으로 변신하는 정직한 분신이다.
중편분량의 패관소설 『저 혼자 잘 빛나는 별』은 닫히고 갇힌 혼에서 열리는 혼으로 이동하는 이야기와 주제를 패관소설형식으로 써본 것이다.
일종의 패러디parody 戱畵化며, 감성과 상상력의 무한자유와 연작소설 형식의 극대화를 위한 실험이다.
기항가담寄港街譚에 정담情談이면서 신라인 특유의 산문가락과 익살, 보편적 음성율과 음수율로 천년신라의 꿈과 정서를 완벽하게 아우른 말글의 사설과 노래가 신라인 신라의 정서적 총화인 패관소설稗官小說과 향가鄕歌다.
필자에겐 꿈의 소설이고, 시가詩歌이며 나아가 문학예술이다.
매사 걱정이고 두렵다, 이 소심한 화두가 이즈음의 필자를 지배하는 정서의 표현이다. 열 번째 창작소설집이면서, <김광수 전집 - 소설>의 단서가 될 연작소설을 묶으면서도 바로 그렇다.
과연 팔릴 기약조차 없는 소설집과 시집을 계속 찍어내야 하는가? 열 가지 이야기를 이은 연작소설 『열리는 혼』은 바탕사상이자 주제인 인생세간과 삼라만상의 닫힘과 갇힘, 열림에 맥락이 통하는가? 개별성과 통일성이 조화를 이루는가? 이야기 하나하나, 독자들에게 선보일만한 수준은 되는가? 소설적 상상력의 결과인 격조와 재미는? 사실성과 현장감은?
만 가지가 걱정이고 두려움이다. 그러나 어이하랴, 이것이 업보인 것을. 피하지 못할 일이라면 부서질 요량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싸움닭 김희수와 등장인물들아, 용감하게 나가자. 영원한 동지이면서도 순간순간 두려움의 대상인 독자여러분과 정직하게, 만나서 얘기 나눠보자.
한 구절이라도 읽고 기억해주시는 분이 이 소설집의 주인이다. 소설이 감성과 상상력의 무한대 자유를 위한 것이라면, 내용뿐 아냐 형식도 그래야할 일이다. 주인에게 바칠 만한 자유는 있는가, 여전히 두렵다. 그래도 계속 쓰고 발표할 일이다.
갑년 지난 나이에 걸맞지 않게 길고 짧은 소설들이 제법 써지고 시도 지어진다. 소설 맞나? 시는?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랍시고, 길고 짧은 이야기들을 재구성하여 연작소설로 꾸려보아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아, 『열리는 혼』과 『저 혼자 잘 빛나는 별』 연작소설『열리는 혼』 여는 글
연작소설『열리는 혼』 차례
토요일의 영혼 역사와 진실 사이 내가 참 녹주綠珠니라
일요일의 영혼 광복과 허기 빈 젖에 갇히다
월요일의 영혼 소설로 쓰는 소설론 해인사 합천
화요일의 영혼 전쟁과 성장통 여시년, 순천아줌마
수요일의 영혼 그냥 그리움 형님친구 조 형의 대필인생
목요일의 영혼 사랑에 갇히다 도박사와 바다
금요일의 영혼 술에 갇히다 술꾼일기
토요일의 영혼 생사에 갇히다 인생은 그리움
일요일의 영혼, 인연과 사랑에 갇히다 울 엄니 꼬장타령
월요일에 내 영혼 열리다 원업삼대, 노래 사랑 열리는 혼
패관소설稗官小說『저 혼자 잘 빛나는 별』
길놀이 대신 화엄경타령
입동 즈음에 옹녀 탄생설화
만춘달 변강쇠 탄생설화
오늘날 슬픈 변강쇠, 조-스는 갔다
내림굿 대신 But I miss you miss you
3. 산행기 16. 옛 산행기
12회 2011년 시월 16회 옛 산행기, 다시 연습등산 2
2006년 2월 12일(일) 금정산 북문, 고당봉 다시 북문, 동문, 남문, 만덕고개, 쇠미산. 백양산
백양산 1, 2, 3 봉우리까지 무휴, 연습등산 2
매년 새봄에 하는, 금정산에서 백양산까지, 무휴식 등산 범어사에서 북문 거쳐 고당봉, 다시 내려 북문, 동문과 남문 지나 만덕고개 쉬엄쉬엄 넘으면 백양산 기슭, 백양산 1, 2, 3 봉우리까지, 영양식으로 때우며 휴식 없는 산행 여덟 시간 안팎.
요 몇 년간 새봄이면 어김없이 하는 조춘 산행길이다. 물론 힘에 벅차고 도전적인 것임을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래도 어쩌랴. 산길 오르내리고, 들길에서 도시의 비교적 한적한 길까지, 입좌보행立坐步行의 삶을 위한 체력이 유지되느냐? 측정해 보는 나만의 방법이 이뿐인 것을.
예년과 별다를 것 없는 산행이었으니 감상도 무사히 다녀왔다는 말로 산행기 끝내고, 전격적 사족이다. 하산 후, 삼광사三光寺에서 한 잔의 물 아주 고맙게 마시고 감사, 감사, 그리고 지하철 타고 집으로.
눈썰미 있는 분은 짐작하셨겠지만, 하산주로 통하는 일배주와 택시타기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환갑에 술 끊겠다는 아내와의 약속 지키기. 마시지 않으면 그만인 단주가 어려운 것은 아니나 진짜 심심하기는 하다. 별다른 취미생활이 없는 탓인 듯싶다. 그보다 사람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 술꾼으로 소문난 상태로 평생을 산 후유증이다. 다 내 죄다, 결과적으로 내가 죄인이다. 반성문 만 장을 써도 모자라는 죄업이다.
그러니까 지하철에 지하철에서 기분은 장동건이나 몸은 낙지아저씨인 분들, 술 두어 잔 마시고 하는 슬픈 모습 타산지석으로 삼아 나를 다잡아야겠지. 그러나
2006년 산행기의 첫머리 2006년 양력 이월이자 음 일월 초, 자연의 이법으로 본 새해 새봄이다. 태양력과 태음력 다 좋고도 위대하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있다. 아니지, 현저하다.
양력이 사람 중심의 달력이라면 음력은 자연의 이법 위주의 것이라는 것. 그 사실을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계절의 구분을 보면 된다.
양력은 철저하게 사람의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사람이 따뜻하면 봄, 더우면 여름, 서늘하면 가을, 추우면 겨울, 이런 식으로. 거기에 붙는 자연의 변화 즉 소생이니 성숙이니 수확과 조락이니 휴식이니 등은 부록이면서, 사람이 의식하는 느낌이나 인식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 비해 음력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이법을 따른다.
음력 일, 이, 삼월은 봄이다. 이런 순서로 사오유월 여름, 칠팔구월 가을, 십십일십이월 겨울. 여기에 체감온도니 사람과 의식 따위, 스며들 자리가 없다. 그저 자연의 계절적 변화에 충실하고도 성실하게 따르면 그뿐.
지켜지기 어려울 것 각오하면서 짜는 2006년 산행기의 첫머리. 부산 시내 속의 명산을 다시, 그리고 확실하게 한 번씩 오르내린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중간고사나 학년말 시험공부 하듯 범위를 정해놓고.
항도이기는 하나, 가맛골답게 산과 바다 다시 산과 강 사이에 기다랗게 이어지는 광역시부산. 거기에 온천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그 부산의 으뜸산줄기인 금정산과 백양산, 승학산과 엄광산, 구덕산과 구봉산, 황령산과 장산에 대해 제법 안다고 자부하고, 우리 집 우백호격인 금정산에 관한 한 산신령 손자라 까불지만 2006년 다시 샅샅이 오르내리기와 걷기다. 산행기라기보다 산수와 자연을 소재로 한 감상문 나아가 신변잡기적 수필, 산 더불어도 계속 써야겠지.
2006년 4월과 5월, 용서하라 아름답지 못한 화두 사월은 산에서 얻은 그러나 절대로 산을 닮아서는 아니 되는 두 개의 아름답지 못한 화두로 출발하여 다시 너와 나 우리들의 산음수양山蔭水楊, 산의 북쪽과 강의 북쪽 산이 북쪽은 그늘이고 강의 북쪽은 양지란다. 그 강산의 다사로운 그늘 아래로 돌아가려 한다.
오월이면 어김없이 돌아온다. 끔찍한 선생의 날, 훈장수준도 못되는, ‘접장들과학부모들의일방적돈주고받기날’로 인식되어질 정도로 전락해버린 날의 화두. 출발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기를 기대하면서.
돈 가진 자와 선생과 정치인의 상호기생, 천생 악어와 악어새다. 기실 다음과 같이 범위를 좁혀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았고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천민자본주의자와 접장과 정상배가 오늘의 등장인물이다.
영위주연은 돈 가진 자이고, 조역은 정치인과 선생. 말 도중 사족으로 예전의 접장은 훈장과 학생 사이에서 가르치고 배울 준비를 하는 보조이었단다. 각설하고 돈을 준 자의 태도와 말을 요약해 본다.
정상배에게 돈을 주고 그들은 언제나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들키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쓰라고 준 정결한 돈이라 한다. 그리고 촌지 수준도 안 되는 돈이라 한다. 골프가방이나 사과상자에 고액권 지폐다발들을 터질 듯이 채워 줘 놓고도.
선생에게 코 묻은 돈도 되지 못하는 푼돈을 주고 나서 의기양양, 그들은 같은 입으로 지껄여댄다. 거금을 주었단다.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갖다 바쳤단다. 살림에 쪼들리면서도 자식 때문에 주었단다. 그들에게는 명실 공히 추잉검 값 정도인 그것을 버리듯 던지고도.
평생을 교단작가 겸 지방작가로 문학의 변방에서 골목대장 노릇. 그러나 말과 글을 평생 가지고 놀기도 하고 노리개가 되기도 하면서 머리와 손과 손가락을 중심으로 하여 온몸으로 체험한 것이 말과 글의 법칙이고, 그것을 요약하고 다시 발췌초록, 정리한 것이 오늘날, 『김광수의 말글 여행』이다.
『김광수의 글짓기 여행』 『김광수의 구술면접 여행』 『김광수의 논술 여행』 등도 있지만 역시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말과 글의 여행담이다. 왜 여행인가? 기행이나 연구가 아니고? 아주 적절한 의문이다. 해답도 간단하고. 사십년 남짓 고등학교에서 교단에서 교단교사 생활을 하면서 얻은 직접체험에서 얻은 것이기 때문. 다음은 말과 글의 여행담 중 한 자루로 삼 분과 오 분과 오 분 법칙, 줄여서 3 5 5법칙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나를 화두로 할 적에는 삼 분 이상 이야기하지 말고 타인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할 적에는 오 분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지. 왜냐?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면 삼 분까지는 자기반성 등 오만가지 겸손을 떠나 그 다음부터는 제 자랑이 되고, 남의 이야기는 오 분까지는 칭찬이나 덕담으로 이어지기도 하나 그 후는 급전직하 험담이 시작되기 때문이란다.
반성에서 자랑으로, 덕담에서 악담으로의 파도타기 식 변화, 이것을 화법에서의 억양법이라 이름 붙이면 어떨까? 이상 무식한 현학이었고. 3․ 5․ 5 법칙의 마지막 5법칙. 역시 간단하다.
머리 아둔한 사람들, 간혹은 얼짱에 몸짱이기도 하나 이성과 감성 등 정신이 덜 자란 아해들 더불어서 5분 이상 대화를 나누지 말라는 뜻이다. 5분 이내에는 제법 멋쟁이처럼 듣고 말하나, 그 이후에는 우이독경에다가 계속 들으려면 두통이 나는 말들을 쏟아낼 때 정지시킬 방법도 없고, 다 들어주는 것이 예의라 들어주려 할라치면 기가 딱 찬다. 니까짓게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간단하다. 더 간단한 예 하나만으로도. 구구단에서, 머리 좋은 사람은 2계단을 가르쳐 주면 9계단까지 바로 외운다. 그러나 2계단이 한계인 사람은 3계단을 가르쳐도 2계단 수준으로만 이해한다. 단이 계속 올라가면 견해차를 부르짖고, 칠팔 계단쯤 넘어서면 가르쳐주는 사람을 오히려 미친놈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참고로 견해차는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이므로 좋은 것이다. 사람 환장하게 하는 것은 수준차이고, 견해차와 수준차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은 의도의 오류가 오류의 연속이 되고 다시 동문서답으로 격하되어간다는 것.
이 법칙에서 시간은 줄고 또 줄어서 현재는 113법칙이 되었다. 앞으로 jf마나 더 줄어들지는 나도 모른다. 산음수양인 강산보다 더 다사로운 사람들아, 용서하시기를 빈다. 망언다사妄言多謝!
2011년 시월 말과 글, 모국어와 한글, 말글의 예술 14
예술藝術 art, 문학文學 literature, 시詩 poem 2
희곡戱曲 drama, 소설小說 fiction, 수필隨筆 essay, 비평批評 criticism
시詩 poem 2
선천적으로 리듬에 민감한 시인, 시론이 필요 없는 타고난 시인도 있으나 대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상기한 시인들 중에 목숨을 걸고 시작에 매진하고, 마침내 시와 당신의 인생전부나 일부를 바꾸지 않은 분은 단 한 분도 없다. 시의 구조 = 시의 형식 × 시의 내용은 당분간 계속된다. 그리고 이 말글 전체의 본론이자 결론인 문학의 다섯 갈래에 대한 본격적 이야기도 계속된다. (지난번 끝부분)
소설의 유일한 형식이 가락을 숨긴 산문이다. 시의 유일한 형식은 가락을 들어낸 운문이다. 시의 딴 요소들은 내용과 결합된 형식이거나 절대적 형식이 아니다.
중간에 사족, 이야기가 난삽하다는 애교만점의 항의가 들립니다. 정확한 문장구사를 못한 탓입니다. 재주가 메주인 필자 탓입니다. 정확하고 쉬운 문장 만들기와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도록 노력,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고유어 가락은 의미와 심상이 포괄적이어서, 전문용어로 사용하기에는 변수가 있다. 그래서 한자어 운율과 외래어 리듬으로 얘기하려 한다.
운율韻律 = 운韻(음성율音聲律) × 율律(음수율音數律)
리듬rhythm = 라임rhyme(음성율) × 미터meter(음수율)
+가 아니고 ×인 이유는 자명하다. 편의상 분류하기는 하나 물리적 구분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가분리, 불가분不可分의 완전분리를 해버리면 리듬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종관계 혹은 으뜸버금관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리듬 중에서 음성율이 주인가, 음수율이 주인가를 따져보면 된다. 말글의 예술인 시문학답게, 이것은 언어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인도어를 바탕으로 인도유럽-어와 인도차이나-어는 오늘날 세계어의 주류다.
굴절어屈折語인 이들 언어의 공통점은 문장중심의 언어로 문장 속에서 단어가 굴절, 즉 어법적 변화를 일으킨다. 쉬운 예다.
I am a poet. You are a dramatist. She is a novelist.
여기서 존재의 be동사는 am, are, is로 굴절한다.
This is my poem. That is your drama. The novel is hers.
일인칭대명사 I가 my로, 이인칭대명사 you가 your, hers로 굴절한 예다.
문장 속에서 단어나 어휘가 굴절하는 이 말은 부드럽다. 그 만큼 문장이 간결하다. 문장 속에서의 작은 변화이므로 음성의 고저장단이 정확하지 못하면 말도 의미도 정확할 수가 없다. 굴절어가 음성의 고저장단인 성조(聲調 accent)가 정확하고, 성조에 바탕을 둔 음성율이 으뜸리듬인 이유다. 당연히 음수율은 보조리듬이다. 그리고 굴절의 의미는 원형을 유지한 변화란 뜻이다.
우리말인 우란알타이어는 섭섭하게도, 언어의 변방이다. 그리고 첨가어添加語다. 중앙아시아북단 툰드라지방에 우랄산맥과 연이어 알타이산맥이 있는 바, 거기 발생한 우랄알타이Ural Altai-어가 따뜻한 남쪽나라를 따라 와 한어韓語가 된다.
나는 시인이다. 너는 극작가다. 그녀는 소설가다.
나+는 시인+이다. 너+는 극작가+다. 그녀+는 소설가+다.
의미 있는 말인 실사實辭에 어법적 역할을 하는 말인 허사虛辭가 첨가되어 문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첨가어다. 의미 있는 말에 의미 없는 말이 첨가되어 이루어지는 이 말은 고저장단보다는 의미 자체에 의하여 문장의 뜻이 밝혀진다. 의미를 위하여서는 높낮이(고저악센트)와 길이(장단악센트)에 따로따로인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높은 소리는 짧아지고 낮은 소리는 질어지는 현상이 생겨난다.
리듬 역시 여기 준하여, 박자 맞추기에 진력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전통시가가 음수율이 으뜸리듬인 이유다. 음성율이 보조리듬인 것 같은 맥락이다.
이론이 복잡해지면 어려워진다. 어려우면 글을 쓸 엄두나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학론과 시론은 간단할수록 좋다. 전문적인 이론은 평론가들에게 맡기고, 시의 형식은 여기서 접는다. 왜냐? 이것만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말글의 박자를 맞추거나(전통시가) 고저장단을 찾아서(서구적 정형시와 자유시), 말글을 재구성하고 형상화하는 노력의 반복시행, 좋은 시 쓰기는 그렇게 출발한다. 우리말글의 리듬 찾기, 한 가지 예다.
밤이 깊었다. 잠들기 위하여고 불을 끄니 달빛이 아주 밝았다.(산문, 설명문)
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휘영청 달빛이 밝아요.(운문, 시)
시의 내용은 심상과 느낌이다. 시의 구성 중 시의 내용이다. 내용의 요소들은 참으로 많다, 그리고 다양하다. 그러나 선행요소는 단연 심상과 느낌이다.
심상(心象 image) 말글을 통하여 머리와 가슴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때로는 머리로(주지시), 때로는 가슴으로(전통시가), 대부분의 경우는 머리와 가슴을 유기적, 입체적으로 작동하여 그리는 그림이다.
이것이 느낌과 역시 유기적, 입체적으로 결합하여 혼연일체가 되면서 시의 내용은 출발한다.
애초에 시가 되지 않는 분, 오랜 세월 학문에 진력한 분, 남의 이론에 매달려 산 인생이 지겹고 역겨워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하여 시를 쓰려하는 분, 이런 분들이 설명문을 시의 외형으로 끊어놓고 태연한 이유가 심상과 느낌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절대로 시가 아니다. 심상도 느낌도 없거나 유도하지 못한 탓이다.
밤이 깊었다./ 잠들기 위하여/ 불을 끄니/ 달빛이/ 아주 밝았다.
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휘영청 달빛이 밝아요.
방안에 불이 꺼지고 어두워지자 방의 불빛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보름전후 달빛(심상), 호젓하지 아니한가(느낌). 거기에 형식인 리듬, 가락 둥실은 어떻고.
다음은 느낌과 의미전체를 파악하기 위한 말글의 단계와 으뜸언어와 보조언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으면, 말글을 흥얼거리면서 읽어라(첫째다). 사전을 곁에 두고 리듬과 심상과 의미가 있음직한 단어와 어휘를 끝임 없이 찾아라.(둘째) 흥얼거리면서 글로 쓰고(셋째), 써진 글을 다시 낭송하여서 음성인 말로 환원시켜라(넷째). 그래야만 말글이 혼연일체가 되어 말글의 예술이 된다.
간혹 낭송朗誦은 외어서 읊는 것이고, 낭독朗讀은 보고 읽는 것이라 강변하는 분이 있는데, 으이그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국어사전> 좀 찾아봐라.
(문체文體 style, 비유比喩 figures of speech와 상징象徵 symbol, 말글살이, 인간人間 human, 사회社會society, 문화文化 culture, 기술技術 art, 문학文學 literature 1, 말글이 종류, 실용문實用文, 학술어문學術語文, 문학작품文學作品, 학문學問 學文 study,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의술醫術 medical) 계속 예술藝術 art, 문학文學 literature 2,) 시詩 poem, 희곡戱曲 drama, 소설小說 fiction, 수필隨筆 essay, 비평批評 criticism 순으로 얘기하려 합니다.
전문적, 과학적으로 갈 생각은 애초에 없습니다. 언감생심으로 제 능력 밖이니까요. 그 동안 배우고 읽고 나아가 쓰는 동안 제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있는, 혹은 저장되어 있는 것을 끌어내 쓸 정도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니 부담 없이 읽으시면 됩니다. 저도 전문용어의 사용을 줄이고 초당이나 주막에 앉아 담소를 나누듯 계속 그렇게 쓸 것입니다. 김광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