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소리에 놀라 옥상에서 떨어져
증언자 : 이은형(남)
생년월일 : 1936. 7. 15(당시 나이 44세)
직 업 : 광주전화국 기계부(현재 전신전화국 근무)
조사일시: 1988. 11
개 요
5월 21일 직장인 전화국에 나갔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부상.
1980년 당시 나는 중앙국민학교 앞에 있는 광주전화국 기계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입사한 지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였다. 직장에서는 물론 가족에게도 성실한 가장이었다. 내가 하는 직장에서의 업무는 사무직이 아니라 기술계통이었으므로 그 어느 부서보다도 충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로 8시간 3교대로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일에는 신경쓸 틈이 없었다.
5월 21일,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날 나는 출근하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에 있었다. 그 직원이 내게 집으로 가려는데 계엄군이 젊은이를 보면 무조건 몽둥이로 때리고 잡아가는 것을 보니 집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나더러 전화국으로 나와달라고 하였다. 그때 직원들은 시내가 시끄럽고 어수선하여 모두 직장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직장일이라면 밤이건 낮이건간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나가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전화를 받고 나니 전화국이 걱정이 되어 오후 3시경 전화국으로 갔다. 평소에도 전화국 앞에는 군인들이 서 있지 않았는데 그날은 군인들이 무장한 채 서 있었고 신분증 검사를 하였다.
신분증 검사를 받고 전화국으로 들어갔다. 전화국에서는 전남여고가 잘 보인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잡아다가 전남여고 운동장에서 팬티만 입히고 몸에서 피가 나도록 두들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잡힌 사람들을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가는 것도 보였다. 나는 이런 장면을 목격한 뒤 심상치 않은 기분으로 4층으로 올라갔다. 기계부에서 전화선을 관리하는 곳으로 전화통화가 잘 되는지 살펴보는 곳이기도 하고 통화를 중단하는 곳이기도 하다. 4층 기계부에서 직원을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숙직실로 내려가 그 직원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고서 다시 4층으로 올라가려고 하였는데 4층 거의 다 올라가서 갑자기 학생들이 뛰어들어오고 계엄군이 쫓아오면서 총을 쏘는 소리를 들었다. 깜짝 놀라 2층 옥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직원이 밖을 내다보다가 2층에서 나를 발견하고 전남대 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머리가 깨어지고, 오른쪽 발목 뼈가 부러졌으며, 왼쪽 무릎이 깨어져 뼈가 파손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로 학생들인지 청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계엄군이 총을 쏘며 뛰어오는 바람에 옥상에서 떨어졌다는 기억밖에 없다.
떨어진 이후 5개월 10일 정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옆구리도 좋지 않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아 내과, 정형외과로 다니면서 무척 고생을 많이 하였다. 지금은 걷는 것도 불편하여 절뚝거리며 다니고 있다.
나같은 경우는 너무나 우습게 다친 것이다.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엉뚱하게 다친 셈이다. 하지만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파헤져보면 그 싸움의 발단을 누가 일으켰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상당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실상 난 별로 할 말이 없지만 온몸이 파손될 정도로 되었던 원인은 불을 보듯 훤하다.
다친 이후로 6개월 정도 못 움직이다가 지금은 직장에 다시 나가고 있다. 부상자협회에 가입하여 한 달에 한 번씩 나가는데 협회를 통해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밝히는 데 적극 동참하고 있다. 몸이 불편해 활동하는 일은 거의 하지 못 하고 있지만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가 하루라도 빨리 오길 바랄 뿐이다.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받고 싶다. 전두환, 이순자 구속과 광주민중항쟁 비리를 캐내는 데 적극 외치는 학생들의 요구에 나 역시 같은 바람이다.
구속보다는 군부정권의 만행을 들춰내어 다시는 광주민중항쟁과 같은 피를 흘려 서는 안 될 것이다. (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