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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石에게 영향을 준 短歌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요절 시인, 메이지 시대의 그늘을 노래하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소설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詩(短歌)에서 재능 발휘… 吟風弄月하던 단카를 생활인들의 詩로 변모시켜
⊙ 白石, 이시카와를 흠모해 ‘石川’의 ‘石’을 따다가 필명 지어
⊙ “실무에서는 쓸모도 하나 없는 歌人이라고/ 날 보는 사람에게/ 돈 빌리고 말았네”
⊙ “새로 구입한 잉크에서 나는 향/ 마개 뽑으니/ 주린 배에 스며서 서럽기도 하구나”
⊙ “농사꾼들의 대부분은 술까지 끊었다고 한다/ 더 곤궁해진다면/ 무엇을 끊으려나”
〈동쪽 바다의 조그만 섬 바닷가 백사장에서
나 울다 젖은 채로
게와 어울려 노네〉
짧은 시(詩)지만, 그림이 그려진다. 삶에 지치거나 실연(失戀)의 아픔 때문에 바닷가를 찾은 젊은 사내가 슬픔에 젖어 백사장을 헤매다가 어디선가 엉금엉금 기어 나온 게를 발견하고 노닥거린다.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울고 있다. 이 한 수(首)만 가지고도 좋은 시이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시는 다시 이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뺨에 흐르는
눈물 닦지 않은 채
한 줌의 모래 움켜쥐어 보이던 사람 잊지 못하네〉
역시 이 젊은 사내는 실연한 것이다. 그는 여전히 떠나가 버린 옛 여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시는 계속된다. 이 세 번째 수에 이르면 당초 생각이 맞아떨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드넓은 바다 나 홀로 마주하고
이레 여드레
실컷 울어보고자 집을 뛰쳐나왔다〉
그렇다. 이 시(詩)는 짧은 시들이 이어지는 연작시(連作詩)이다. 시 한 수 한 수를 다시 읽어본다. 5·7·5·7·7의 음보를 느낄 수 있다. 일본의 단카(短歌)다.
지독한 가난을 노래한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단카집》
작가는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년) 메이지(明治) 시대의 시인이다. 본명은 하지메(一). 필명인 다쿠보쿠는 ‘딱따구리’라는 의미다. 20세 때 《동경(憧憬)》이라는 시집을 내면서 ‘천재시인’으로 주목받았지만,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번에 나온 《이시카와 다쿠보쿠 단카집》(필요한책 펴냄)은 그의 단카집인 《한 줌의 노래》와 《슬픈 장난감》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기자는 문학은 잘 모르는 문외한(門外漢), 아니 문외한(文外漢)이지만, 읽는 맛이 색달랐다. 서두에서 소개한 것처럼 한 수 한 수가 독립된 단카로서의 맛이 있지만, 4~6수 정도를 읽다 보면 하나의 이미지가 저절로 그려진다. 그리고 하나의 장(章)을 다 읽고 나면 운문의 형식으로 된 하나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시인은 일상의 삶에 찌들 대로 찌든 도시민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떠나온 고향의 풍광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한다. 삶으로부터 도망쳐서 떠도는 나그네의 삶, 병상에서 신음하는 병자의 처연함, 그리고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가장의 부끄러움도 노래한다.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단카를 생활인들의 모습을 그려낸 시로 승화시킨 것이다.
시집 전체를 지배하는 색조는 어두운 회색이다. 절망감이 섞여 있는 회색이다. 지독한 가난의 색이다. 이 가난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본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아버지는 일본의 동북 변방인 이와테현의 사찰 주지였다. 대처승(帶妻僧)이 일반화되어 있는 일본이니, 아버지가 승려였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지방에서 상당히 대접받는 유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금전적인 문제로 주지 자리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같은 현 내에 있는 모리오카시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여섯 식구의 신산한 삶이 시작된다.
자녀 가운데 유일한 남자였던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역할을 해주어야 했지만, 문청(文靑)의 꿈에 쫓겨서였을까? ‘천재’라는 찬사에 들떠서였을까? 그는 스스로 중학교를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겠노라며 도쿄로 상경(上京)한다. ‘중학교 중퇴’라고는 해도 오늘날과 비교해 고학력이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 학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별로 없었다. 이시카와는 이후 문예지 편집자, 출판사 교정자, 지방신문 기자, 지방 소학교 대리교사 등을 전전한다. 거기에 더해 절제력이 약하고 낭비벽이 심한 예인(藝人) 기질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실무에서는 쓸모도 하나 없는 歌人’
때문에 이 시집 곳곳에는 한때 무지개를 좇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실에 치여 사는 젊은 문인의 서러움이 절절히 녹아 있다. 《한 줌의 노래》 첫 장의 제목은 ‘나를 사랑하는 노래’지만, 세상은 시인을 사랑해주지 않는다.
〈“그 정도의 일로 죽어야 하나”
“그 정도의 일로 살아야 하나”
그만해라 그 문답〉
그래도 시인은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실무에서는 쓸모도 하나 없는 가인(歌人)이라고
날 보는 사람에게
돈 빌리고 말았네〉
〈변덕이 심한 사람에게 고용되어
절절하게도
나 사는 이 세상이 너무나 싫어진다〉
〈새로 구입한 잉크에서 나는 향
마개 뽑으니
주린 배에 스며서 서럽기도 하구나〉
그는 소설가가 되기를 갈망하지만, 그의 ‘달란트’는 시, 특히 단카에 있었다. 그 괴리에서 오는 아픔도 시가 된다.
〈시원치 않은 소설을 쓰고서는 기뻐라 하는
사내 가련하구나
초가을 바람 불고〉
그래도 시인은 19세 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그 여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여인을 바라보는 젊은 지아비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여인이 있어
내가 하는 말에는 거역 않으려 부심하고 있구나
보고 있으니 슬퍼〉
歸鄕과 방랑
21세 때 시인은 가족과 함께 고향 시부타미로 돌아간다. ‘연기(煙)’는 그 기억에 대한 시들이다. 시인은 고향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리운 고향 사투리를 들으며 소년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며 귀향을 기뻐한다.
〈고향에 있는 산들을 향해 보면서
할 말도 없네
고향에 있는 산은 고맙기도 하구나〉
여전히 가난하고 불안하기는 해도 시인은 애써 고향에 돌아온 평안함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결국 고향에 다시 정착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듬해인 1907년 5월부터 1년간 시인은 일본의 북쪽 끝 홋카이도로 가서 지방신문 기자 등의 자리를 전전한다. 이 시기의 일들을 노래한 것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주제에 때로는 변방 술집의 여자들을 품에 안아보기도 하지만, 그 여인들 역시 아픈 상처를 하나 가득 안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죽고 싶지는 않은가 물어보니
이것 보라며
목에 난 어떤 흉터 보여주던 여인아〉
〈죽을 정도로 내 취기를 기다려
온갖 가지의
서글픈 이야기들 속삭여 대던 사람〉
‘그 마음가짐 자세, 잊지 않으려 했지만’
방랑이나 다름없던 홋카이도 생활도 1년 만에 때려치우고 시인은 다시 창작을 위해 도쿄로 올라온다. 1년 뒤에는 가족도 상경해 다시 가정을 꾸린다. 《아사히신문》 교열계에서 일하면서 문예지 《스바루》 등에 소설을 발표하지만, 그 삶은 여전히 위태위태하다. 1910년 10월에는 첫 가집(시집) 《한 줌의 노래》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지만 같은 달 장남 신이치가 출생 후 24일 만에 죽는 비극을 맛본다.
그런 와중에서 새해는 온다. 새해의 다짐, 자신에 대한 실망과 회한, 이런 것들은 모두 시가 된다.
〈어제까지는 아침부터 밤까지 잔뜩 긴장한
그 마음가짐 자세,
잊지 않으려 했지만〉
‘잊지 않으려 했지만’이라는 것은 결국 잊었다는 얘기다. 새해의 결심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모되어버리는 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새로운 날인 내일이 오리라고 믿는다 하는
나 스스로의 말에
거짓이야 없건만—〉
‘말에 거짓이야 없건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 결국 전과 다를 바 없는 삶. 그래도 먹고살려면, 가족을 건사하려면, 변변찮은 직장이나마 나가야 한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기만을,
오로지 하나 기다림으로 삼아,
오늘도 일을 했네〉
직장인들의 마음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또 한 번 미소를 짓게 된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내 시인의 고단한 삶을 노래한 시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왜 이 모양인가 한심하게 여겨져
약한 마음을 몇 번이나 꾸짖고는,
돈을 빌리러 간다〉
그렇게 빌린 돈을 시인은 밀린 하숙비를 내고, 빚을 갚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유흥가에 가서 탕진하고, 충동구매를 하면서 날려버린다. 그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지저분한 손을 보네—
마치 꼭
요즘을 사는 나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는 듯하다〉
〈최근 사오 년
하늘을 올려 보는 일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노라
이럴 수도 있는가?〉
“이시카와는 가여운 녀석이다”
얼마나 삶이 고단했으면, 얼마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으면, 사오 년 동안 하늘을 올려 보는 일이 한 번도 없었을까? ‘이럴 수도 있는가?’라는 시인의 탄식에 함께 가슴이 무너진다.
〈“이시카와는 가여운 녀석이다.”
가끔 이렇게 스스로 말하면서
슬픔을 느껴본다〉
정말 이시카와는 가여운 녀석이다. 그놈의 가난으로도 부족해 본인과 가족이 줄줄이 병에 걸린다. 1911년 1월 시인은 만성복막염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는다. 그해 12월에는 어머니와 아내가 결핵에 걸리는 액운이 닥친다. 시인은 시를 가지고 병원에서 만나는 의사와 간호사의 흉을 보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호소하기도 한다. 가난 앞에서, 병 앞에서 청춘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마음은 자꾸 가라앉는다.
〈아니 그러면 살고 싶지 않다는 의미입니까
의사가 하는 말에,
아무 말 못하는 마음〉
〈굳세게 잡을 만큼의 힘마저도 사라져버린
비쩍 마른 내 손이
애처롭기도 하네〉
〈가련하게도,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 나에게 있다.
이 무슨 마음일까〉
〈오늘도 다시 가슴에 통증이 있네.
죽을 거라면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자 생각한다〉
그래도 시인의 시름을 덜어주는 것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즐거워하다가도 시인은 탄식한다.
〈네 부모와도,
부모의 부모와도 닮지 않기를—
그렇게 너의 아비는 생각한단다, 애야〉
〈단 한 명뿐인
사내자식이었던 나는 이렇게 자랐지.
부모님도 슬프지 않겠는가〉
이시카와는 아이를 낳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아예 애를 낳지 않는다. 이런 후회를 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소심한 혁명가’
시인이 살았던 시대는 메이지 시대의 끝자락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라는 목표를 향해 상하 할 것 없이 40년을 달린 끝에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고 ‘대일본제국’은 세계 7대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피로감이 몰려왔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리도 허위허위 달려왔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지식인들의 가슴을 때렸다. 마치 개발연대(開發年代)를 지나면서 ‘근대화’에 대한 피로감에서 전(前)근대와 사회주의로 일탈했던 한국의 지식인들처럼…. 배움의 깊이는 깊지 않았어도, 시인 역시 그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사람들 모두
같은 쪽을 향해서 가고 있구나
그것을 측면에서 보고 있는 내 마음〉
〈농사꾼들의 대부분은 술까지 끊었다고 한다.
더 곤궁해진다면,
무엇을 끊으려나〉
사람들이 모두(적어도 대부분이) 제국주의, 군국주의를 향해 가고 있을 때, 그것을 측면에서 보는 시인의 눈에 사회주의가 들어온다. 마침 1910년 일단의 사회주의자들이 천황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대거 처형되는 이른바 ‘대역(大逆)사건’이 발생한다. 시인은 몰래 금서(禁書)를 들여다보고, 테러리스트들과 감옥에 간 사람들을 생각하고, 병상에서 ‘혁명’을 헛소리처럼 내뱉는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를 암살한 여성 혁명가의 이름을 따서 딸에게 ‘소냐’라는 이름을 붙이고 즐거워한다. ‘소심한 혁명가’를 곁눈질하는 시인은 그런 감정들도 단카로 노래한다. 그래도 시인은 세상보다는 자신을 먼저 탓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단카들은 회색빛이기는 해도 날이 서 있거나 아주 우울하지는 않다. 시인이 10년이나 20년 후쯤 태어났다면, 아니 그가 10년이나 2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문학 같은 데에 한쪽 발을 담갔을지도 모른다(두 발 다 담그지는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그런 수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음산한 노트를 달라”
1912년 4월 시인은 친구 도키 아이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돈이 더는 없다. 단카집을 낼 수 있게 해달라.”
문득 죽기 직전 친구에게 돈을 만들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던 소설가 김유정이 생각난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주기 바란다.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譯)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도키 아이카는 시인의 요청을 받는 즉시 도운도 서점에 가서 시인의 단카집을 내는 계약을 맺고 돈을 받아온다. 목돈이 생긴 시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원고를 손볼 시간이 없었다. 시인은 아내에게 “그 음산한 노트를 달라”고 했다. 194수의 완성된 단카와 미완성인 한 수의 단카가 담긴 노트였다. ‘그 음산한 노트’라니…. 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여기서 다시 느낄 수 있다. 원고를 넘긴 지 며칠 후인 1912년 4월 13일 오전 9시,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사인(死因)은 폐결핵. 그의 나이 26세, 남들 같으면 이제 막 인생을 꽃피우기 시작할 나이였다.
도키 아이카는 시인의 유고(遺稿)를 모아 그해 6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두 번째 단카집을 냈다. 이것이 이 책의 후반을 차지하는 《슬픈 장난감》이다. 시집이 나오기 6일 전 시인의 두 번째 딸이 태어났다. 하지만 시인의 아내도 이듬해인 1913년 5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복한 집안이었다.
이시카와를 흠모했던 조선의 시인. 백석
이 시집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병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노래했다.
지도에 나온
조선국 자리 위에
시커멓도록
먹물을 칠해가며
가을바람을 듣네
일본 국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와 등불을 들고 축하행렬을 이루고 있을 때, 시인은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의 이 시는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된 이웃 나라를 위한 조시(弔詩)였다. 그리고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메이지유신의 성공과 ‘대일본제국’의 영광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이런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흠모했던 조선의 시인이 한 명 있었다. 평북 정주 출신의 시인 백기행, 곧 백석(白石)이었다. 백석이라는 필명은 바로 이시카와(石川)의 ‘石’을 가져다 지은 것이었다.⊙
[허연의 책과 지성] 이시카와 다쿠보쿠 (1886~1912)
허연 기자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식민지 조선의 애상을 읊은 日국민시인
이름 모르는 이거리 저거리를 오늘도 헤매었네 친구가 나보다 모두 훌륭해 보이는 날이면 꽃 사들고 들어와 아내와 놀았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날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는 '9월 밤의 불평'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1910년 9월의 일이다.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도 위 / 조선 나라에 새까맣게 / 먹물을 칠해가면서 / 가을 바람소리를 듣는다."
이시카와는 지도에서 지워진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유독 조선을 언급하거나 상징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다음은 그의 시 중 널리 알려진 '코코아 한 잔'이라는 시다.
"나는 안다 /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 단 하나의 그 마음을 / 빼앗긴 말 대신에 /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이 시에 나오는 테러리스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을 지칭한다는 해석이 많다. 그리 개연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시카와가 "누가 나에게 저 피스톨이라도 쏘아줬으면 / 이토 수상처럼 / 죽어나 보여줄 걸"이라는 냉소를 날린 적이 있는 걸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26년이라는 아주 짧은 생을 살다간 이시카와는 뜨거운 낭만주의자이자 미학주의자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낭만주의자로 살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이시카와는 1886년 일본 동북지방 이와테현에서 승려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아버지가 종단과의 마찰로 사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운다. 이 무렵 이시카와는 모리오카 중학을 중퇴하는데 이를 놓고 여러 가지 설이 등장한다. 생활고로 인한 지나친 결석이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동맹파업이 원인이었다는 설, 나중에 부인이 된 세쓰코와의 연애사건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퇴 후 이시카와는 유명 잡지인 '명성'에 단카(短歌·일본 정형시의 하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어린 나이에 문단의 주목은 받았지만 중학 중퇴 학력으로는 변변한 직업을 얻기 힘들었다.
고향을 떠나 홋카이도를 방랑하면서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시부타미 소학교의 임시교사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이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이른 결혼으로 아내와 아이가 있었던 그는 도쿄로 이주해 온갖 잡일을 하면서 산다. 하지만 26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하는 순간까지 생활고는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낭만적 습성은 가난을 더 부추겼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이시카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중학 선배가 자기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5엔을 빌려준다. 그러나 그는 5엔으로 쌀을 사는 대신 목련꽃과 화병을 산다. 배고픔과 목련꽃 향기를 맞바꾼 사람. 그가 바로 이시카와였다. 그는 군국주의 시대를 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새로 산 잉크병 마개 열고 나니 / 신선한 냄새 / 굶은 배 속에 스미어 슬픔을 자아내고 / 일을 하여도 일을 하여도 / 여전히 고달픈 살림 / 물끄러미 손바닥 보고 또 보고 있네 (중략) / 새로워지는 내 마음 찾고 싶어 / 이름 모르는 / 이 거리 저 거리를 오늘도 헤매었네 / 친구가 나보다 모두 훌륭해 보이는 날이면 / 꽃 사들고 들어와 / 아내와 놀았네."
이시카와는 일제가 천황제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을 검거한 '대역(大逆)사건'을 보면서 반체제 시인의 길에 들어선다. 제국주의가 쌀 살 돈으로 꽃을 사던 시인마저 저항의 길에 나서게 했던 것이다. 슬픈 시대였다.
철새 - 자유일보
철새 가을 저녁의 조용함을 휘저어놓고하늘 저 멀리 구슬픈 소리가 건너간다대장간의 백치 아이가재빨리 그 소리를 알아듣고는저물어가는 하늘을 쳐다보며새가 나는 흉내를 내면서그 주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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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
가을 저녁의 조용함을 휘저어놓고
하늘 저 멀리 구슬픈 소리가 건너간다
대장간의 백치 아이가
재빨리 그 소리를 알아듣고는
저물어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새가 나는 흉내를 내면서
그 주위를 빙빙 돌아다닌다
까악~ 까악~ 외쳐대면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
☞일본문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나라를 침략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들은 대부분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단순한 감정이다. 안타깝게도 대중은 언제나 감정을 앞세워 역사를 읽는다. 그래서 중우정치(衆愚政治)의 위험성은 늘 우리 곁에 상존한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아사히신문이 선정한 지난 1000년 간 최고문인이다. 26년의 짧은 생애 동안 고향을 향한 그리움,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애환과 서정이 담긴 작품을 남겼다.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가인 동시에 국민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그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에 대해 비판한 반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정부 비판을 금기시하는 제국주의 냉혹한 시대임에 그는 목숨을 걸고 시를 썼다. 시인 백석은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흠모하여 그의 이름 중 ‘石’을 따와 필명으로 사용했다.
철새들이 수만 리 고된 비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 때문일 터이다. 감각과 본능에 의지해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땅을 찾아간다. 철새들이 대오를 지은 채 비행하는 것은 날갯짓이 만드는 상승기류가 서로에게 힘을 보태기 때문이다.
가을날 철새들이 ‘저녁의 조용함을 휘저어놓고/ 하늘 저 멀리 구슬픈 소리가 건너간다. 저물어가는 가을 하늘에 떠나가는 철새의 풍경은 구슬프다. 그런데 ’대장간의 백치 아이’는 그렇지 않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새가 나는 흉내를 내고 까악 까악 외쳐대면서 그 주위를 빙빙 돌아다닌다’. 그 아이는 철새들이 떠나가는 광경이 오히려 기쁘다. 이 순진무구한 영혼은 보통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감정을 가졌다. 보통사람에게는 날개가 없지만 이 아이에게는 날개가 있다. 그래서 땅에서 새처럼 날 수 있는 것이다.
<한 줌의 모래>
시라고 하는 문학에는 많은 것이 담겨져 있다. 작가의 그 당시 심정, 기분, 또는 시를 쓸 때 본 풍경에 따라서 달라지기에 어찌보면 시라는 문학은 작가를 파악하기에 가장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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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2000년을 기념하여, '지난 1000년 간 일본 최고의 문인이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투표를 하 였다.
그리고 그 투표에서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20위에 자리했 다. 이것은 그의 시가 1세기를 지나서도 여전히 살아서 문 학사에 흐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