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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주인의 시 / 심경호 | ||||
기획연재 | 중국 고전명시 감상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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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다면 한시는 정말로 음풍농월에 불과한가? 한시를 음풍농월이라 말하는 관점을 반드시 부정적인 평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실상 한시는 자연과 현실과 역사의 모든 것을 소재로 삼고, 서정뿐만 아니라 기록과 논변의 기능도 지니므로, 한시를 음풍농월로 규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음풍농월이란 말은 한시의 매우 중요한 속성을 아주 적절하게 지적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바람을 읊고 달을 하놀인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시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적 유희의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해 온 이유이자, 현재도 사랑받을 수 있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사실, 바람을 읊고 달을 하놀인다는 일은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바람과 달을 우리 가까이 되돌리는 것, 이것이 한시를 읽는 첫 번째 이유여야 하리라. 옛사람들에게 자연은 관념이 아니었다. 자연은 신이 깃들어 있고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한편 월(月)은 이지러진 달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달은 이지러졌다가는 원만의 상태를 향해 변화해 간다. 그 변화는 생명 있는 것들이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시는 주기를 상징했다. 동파는 동쪽 언덕이란 뜻인데, 소동파가 거처 근처의 언덕을 그렇게 부르고 그 이름을 거의 고유명사처럼 사용했다. 당나라 때 백거이(백낙천)는 충주(忠州) 교외의 동쪽 둑, 즉 동파에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를 심고 그곳을 사랑했다. 소동파는 평소 백거이를 좋아했기에 백거이의 시어에서 연상하여 거처의 동쪽 언덕을 동파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동파는 그곳을 특히 사랑해서 스스로의 호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했다. 나는 그 음향을 사랑한다. 달빛 아래 홀로 가는 길, 소리 없는 바람이 언덕의 길 위로 불어왔으리라. 마음의 번열이 혹 일어나더라도 바람은 그것을 식혀 줄 것이다. 이 시는 청(淸), 행(行), 성(聲)의 세 글자를 운자(韻字)로 사용했다. 평성 가운데서도 경(庚)운에 속하는 글자들로 압운을 하여, 맑고 탁 트인 느낌을 준다. [-ng]의 발음이 특히 그러한 느낌을 갖게 한다. 절구는 본래 짝수 구에 압운을 하지만 각 구가 일곱 자로 이루어진 칠언절구는 첫 구에도 운자를 놓을 수 있다. 당나라 후반부터는 이것이 오히려 정격처럼 되었다. 칠언절구는 모두 28자에 불과하다. 시인들은 한 글자 한 글자를 금같이 소중하게 여겼으므로 보통 그 28자에 같은 글자는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동파는 이 시에서 몇몇 글자를 중복해서 사용했다. 즉 동파(東坡)의 坡를 첫 구에서 사용하고는 세 번째 구에서도 사용했다. 마치 언덕의 이름을 가볍게 부르는 듯이 두 번이나 사용해서, 동쪽 언덕길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 듯하다. 두 번째 구에서는 人과 行이란 글자를 두 번씩 사용했다. 이 두 번째 구는 시인(市人)의 행(行)과 야인(野人)의 行을 대비시키면서 人과 行의 글자를 거듭 사용한 것이다. 또한 낙각(?石角)은 울퉁불퉁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두 글자가 똑같이 [-k]로 끝난다. 글자의 끝 부분 소리를 운(韻)이라 하는데, 둘 다 폐쇄음인 입성 각운(覺韻)에 속한다. 이렇게 끝 발음이 같은 두 글자를 나란히 이어두는 방식을 첩운(疊韻)이라고 한다. 대개 사물이나 상황을 형용하는 말에 첩운이 많다. 낙각은 울퉁불퉁한 돌들을 형용하면서 입성의 글자를 사용해서 거친 느낌이 든다. 이 어휘가 있기에 거꾸로 청(淸), 행(行), 성(聲)의 세 글자가 이루어내는 온화하고 명랑한 분위기가 더 증폭된다. 현대 중국어 보통화에서는 입성의 발음이 없다. 낙각(?石角)은 병음부호의 luo que에 4성의 성조를 얻어 발음하는데, 그런 중국어로는 도무지 입성의 맛을 살릴 수가 없다. 산길이 울퉁불퉁하다는 표현은 한유(韓愈)의 시 〈산석(山石)〉에서 “산 바위는 삐죽삐죽하고 오솔길 희미한데, 황혼에 절에 이르니 박쥐가 날아다닌다.”라고 했던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한유의 시는 그로테스크한 자연의 형상을 묘사하기 위해 그 표현을 사용했다. 곧, 박쥐가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황혼 녘 산사에 가까스로 이른 사실을 서술하였다. 앞부분만 보면 이러하다. 마지막 구의 자애(自愛)는 스스로 홀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고정된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주관에 따라 나 홀로 사랑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갱연(쿦然)의 갱(쿦)은 종 같은 것을 친다는 동사인데, 동사 다음에 연(然)이란 글자가 오면 형용어로 된다. 갱연(쿦然)은 쇠, 돌, 옥, 나무 등이 다른 사물에 부딪혀 내는 홍량(洪亮)한 소리를 형용한다. 지팡이가 내는 소리가 짜증스럽거나 위화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홍량함을 나타냈다. 소동파는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로서 시나 문 모두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지금의 쓰촨(四川) 성에 속하는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이다. 북송의 인종 때인 1057년에 진사가 된 후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신종 때 스승 구양수(歐陽脩)가 왕안석의 변법(신법)에 반대하는 구법당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도 구법당으로 간주되어 항주의 통판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미저우(密州)와 쉬저우(徐州), 후저우(湖州)의 태수를 지내면서 정치를 풍자하는 시를 자주 지어 당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왔다. 당시 소동파가 지은 시에 〈획어가(魚歌)〉가 있다. 획어는 물고기를 갈고리로 끌어 올린다는 뜻이다. 변법이 백성을 괴롭히는 사실을 은근히 풍자한 것이다. 장편인데, 일부만 보면 이러하다. 황주에 유배된 직후, 좋은 생선이나 맛 좋은 죽순이 나는 곳이라고 해서 스스로 만족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봉급이 너무 적어, 도무지 가족을 건사할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정혜원이란 곳에 살다가, 수역(水驛) 가까이 언덕 위의 정자로 옮겼다. 그곳을 남당이라고도 하고 임고정(臨皐亭)이라고도 했다. 이 무렵, 친구 마정경(馬正卿)이 그를 위해 고을의 관청에 호소하여, 소동파는 군영지의 빈 터를 빌려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때 〈동파〉라는 제목으로 고시 여덟 수를 계속해서 지었다. 앞서의 칠언절구는 이 고시 여덟 수보다 1, 2년 뒤에 쓴 시다. 고시 연작시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붙어 있다. 마정경도 몹시 가난했다. 소동파는 “부귀한 사람이라곤 없군. 그중에서도 나와 몽득은 대표적인 예라.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을 비교해 본다면, 몽득 군이 이긴다”고 했으니, 마몽득은 소동파보다도 훨씬 가난했나 보다. 8수 연작시 〈동파〉의 제1수에서 소동파는 스스로의 비운을 슬퍼했다. 단, 마지막 구에 약간 해학의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연작시의 제3수에서 소동파는, 금년은 한발인 데다가 농사일이 무척 힘들기는 하지만, 보습 댈 만한 비가 때마침 내리고, 지난해의 미나리 뿌리도 한 치만큼은 살아 있어 희망을 가져 본다고 했다. ‘도는 기(氣)를 제어할 수가 없고 성(性)은 습관에 이길 수가 없다. 그 근본을 쟁기질하지 않고 그 끄트머리만 호미질한다면, 지금 이것을 고친다고 해도 뒤에 반드시 다시 죄가 일어날 것이다. 차라리 불승에 귀멸(歸滅)하여, 한바탕 이것을 씻을 것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성남의 정사(精舍)를 발견했다. 안국사라고 했다.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 숲, 물길을 막아 만든 연못과 물가에 임한 누정이 있다. 하루, 이틀 지난 뒤 곧바로 가서, 향을 피우고 묵좌했다. 깊이 스스로를 성찰하자, 물아(物我)를 둘 다 잊고 신심(身心)을 모두 공(空)으로 여겨, 죄악의 때가 발생하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념으로 청정하여, 염오(染훜)가 저절로 떨어져, 안과 밖이 훌쩍 초월해서 어디 무착하는 것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이것을 즐거워해서,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기를 지금까지 5년간 그렇게 했다. 무릇 천지간 만물은 각각 주인이 있기에,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 해도 가질 수 없으나,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그것을 들어 소리가 되고 눈으로 그것을 보아 색을 이룬다. 그것을 취해도 금하는 이 없고, 그것을 써도 다하지 않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 없는 창고로서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는 것이로다. 풍광과 경색을 거느리는 주인을 풍월주(風月主)라고 한다. 신라 법흥왕 원년에 동남(童男)으로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라 부르고 착한 선비를 구해 무리를 만들어 효제충신을 장려한 일도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우리 옛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그런데 한시에서 풍월주라고 하면 역시 소동파를 우선 떠올리게 된다. 소동파를 추종했던 황정견(黃庭堅)의 〈문잠립이 지은 춘일 세 절구에 차운하다(次韻文潛立春日三絶句)〉 가운데 첫째 수에 보면 “회남의 풍월주에게 한번 물어보리다, 새해의 도리화는 누굴 위해 피었소(試問淮南風月主, 新年桃李爲誰開)?”라는 어구가 있다. 이것은 소동파가 서화첩에 적었던 “강산풍월은 본시 일정한 주인이 없으니, 한가한 사람이 곧 주인이다(江山風月本無常主, 閑者便是主人)”라는 말이 전고(典故)라고 한다. 《사기》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전국시대 제나라 정승 맹상군의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맹상군은 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정승의 자리에서 파직되자 문객들이 모두 떠나갔다. 맹상군은 몹시 서운해했다. 그는 정승에 복직하자, 문객들이 이제 자신을 보러 올 면목이 없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때 유일하게 곁을 지켰던 풍환(馮驩)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흙과 함께 사는 야인은 다르다. 아침이면 앞다투어 어깨를 비비고 저자에 간다거나 날이 저물면 팔을 휘두르며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다. 소동파는 시인(市人)과 야인(野人)을 구별했지만, 자신의 정신 경계가 저들의 세계와 뾰족하게 다르다고 대립시키지는 않았다. 시인의 왕래가 끝난 길을 야인이 갈 뿐이다. 이것은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 751~814)가 〈유순을 전송하면서(送柳淳)〉라는 오언고시에서 자신을 명리(名利)의 사람들과 대립시킨 것과는 다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스산한 바람 속에 홀로 서 있다. 차가운 얼굴을 드러낸 채로. 그런데 소동파는 현실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깨닫고 탄식하지만 스스로 소외의 슬픈 감정을 갖지는 않는다. 미나리 뿌리를 찾아 보호하고 밭에 잡풀이 들러붙지 않도록 김을 매는 노동에 몰두한다. 소외를 한탄할 겨를이 없다. 더구나 달이 뜬 밤이면 호젓한 동쪽 언덕을 지팡이 짚고 가면서 마음속 깊이 기쁨을 느낀다. 소동파는 맹교의 시풍을 가도(賈島)의 그것과 아울러서 “교한도수(郊寒島瘦)”라고 평했다. 맹교는 싸늘하고 가도는 야위었다는 뜻이니, 두 사람의 시가 씁쓰레한 맛을 지니고 있다고 논평한 것이다. 확실히 맹교는 싸늘하다. 시 〈유순을 전송하면서〉에서 장안 길을 멀리서 바라보는 그의 태도를 보라. 그것은 곧 소동파가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과는 상당히 다르다. 소동파는 어느 날 밤, 맹교의 시집을 읽다 말고 이렇게 말했다.
5. 소동파는 1084년에 창저우(常州)로 옮겨갔다. 1086년에 철종이 즉위하고 사마광이 이끄는 구당이 집권하자, 내직인 한림학사 겸 시독에 기용되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자들이 신법을 모두 폐지하는 데 대해 불만을 느끼고, 1089년에 항저우(杭州)의 태수로 나갔고, 다시 여러 주의 태수를 거쳤다. 1093년에 수렴첨정이 끝나면서 철종은 직접 정사를 맡아 신법을 다시 시행하였는데, 이로써 소동파는 남방의 후이저우(惠州) 등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1101년에 휘종이 즉위하여 사면령을 내리자, 소동파는 개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거성도옥국관이라는 직위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창저우에서 세상을 떴다. 소동파는 정치 이념상으로는 유학 사상을 따랐다. 특히 대관료와 대지주들의 기본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잘못된 정사는 가차 없이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생활에서는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여, 초연하고 활달했다. “강산풍월은 본시 일정한 주인이 없으니, 한가한 사람이 곧 주인이다”라는 말은 이 초연하고 활달한 태도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 주는 말이다. 소동파의 수필집이라고 할 《동파지림(東坡志林)》에 ‘여몽령(如夢令)’ 악보에 맞춰 지은 사(詞)가 두 곡 실려 있다. 1084년 12월에 사주(泗州) 옹희탑(雍熙塔) 아래서 지은 것이다. 水垢何曾相受 물과 때를 언제 받은 적이 있나 물과 때가 둘 다 없다고 했다. 어느 선승은 마음이 늘 찌끼에 더럽혀지므로 시시로 씻어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 말과 전혀 다르다. 아예 씻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고 했다. 소동파가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애당초 그가 풍월주인임을 자부하여 호방함과 명랑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시를 읽는 것은 청풍명월과 교감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풍월주인의 당당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