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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운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철목사
부모를 용서하기 나를 용서하기
데이빗 스툽, 제임스 매스텔러 지음/정성준 옮김
예수전도단/2001년 8월/383쪽/1,100원
▣ 저 자
데이빗 스툽
캘리포니아 남부에 위치한 가족치료센터(The Center for Family Therapy)의 설립자이자 공동 책임자인 스툽 박사는 풀러신학교 심리학대학원 협동 학장을 지냈으며, Focus On the Family, Minirth Meier New Life Clinic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는 YWAM(Youth With A Mission)의 국제 열방대학(University of the Nations)의 주강사로 있으면서 상담학자인 아내 잰과 함께 20여 권의 책을 집필하여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제임스 매스텔러
제임스 매스텔러는 결혼 및 가족치료사이며, 남캘리포니아 가족치료센터의 공동 책임자이다.
▣ 역 자 정성준
부산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YWAM 대학사역에서 활동했다. 국제 열방대학에서 가정사역학교(FMS)와 가족치료학교(FTS)를 마치고 가족치료 석사과정 중에 있다. 역서로는 『하나님께 바로 서기』『아무도 말하지 않는 죄』『하나님, 제 아이 정말 잘 키우고 싶어요』 『까다로운 사람 상대하기』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우리들 대부분은 변화되고 싶어하면서도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연약함 가운데 우리를 묶어두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진정한 치유와 해방이란 가능한 것일까? 본서는 용서야말로 과거의 고통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주장하면서 회복을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는 자신이 자라온 가정에서 역기능을 부추기는 가족 패턴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가족 내의 비밀과 습관, 그것으로부터 빚어진 역기능적 패턴을 한 단계 한 단계 명확하게 이해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당신은 용서를 통해 건강한 자신과 가정을 세워가도록 도전 받게 될 것이다.
본서는 그리스도인 심리학자들의 지나온 연구와 경험을 집대성하여 만들어 낸 기독교 상담학의 대작으로서 세계적 심리학자인 저자 데이빗 스툽과 결혼 및 가족치료사 제임스 매스텔러는 이 책을 통해 현재 개인의 인격적 문제나 성격적 문제로만 알고 있는 자신의 문제가 어떻게 가족사적 배경과 부모의 성격과 관련을 맺고 있는지 가계도에 따른 경계선 제시를 통해 다양한 문제 유형의 가정을 보여주어 객관화시키고, 자신의 가족 시스템을 진단할 수 있는 심리학적 진단 기제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기부인과 억압으로 잠재된 개인이 지닌 과거의 상처를 외부로 드러내고 수용할 수 있는 바른 자세와 용서의 단계에 따른 심리적 메커니즘 및 성경적인 통찰력을 제시하여 온전한 내적 치유와 가정의 관계 회복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을 제시해 준다.
본서는 가족체계 이론에 근거하여 기독상담 분야의 권위자들인 노먼 라이트, 루이스 스미디스, 존 프릴, 해리엣 러너 등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전문적인 기독교 상담자, 가족치료사, 정신과 의사뿐만 아니라 가정사역자와 사회사업가,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내적 치유와 가족치유에 대한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 차 례
추천의 글
책머리에
여는 글: 용서, 과거의 고통을 해결하는 열쇠
제1부 가정의 보따리를 풀어라
1장 가정: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2장 가족 시스템
3장 가족과 나
4장 아비의 죄
5장 삼각관계
제2부 용서의 자유
6장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풀어주기
7장 용서하기, 잊기, 부인하기, 수용하기
8장 표면적인 용서
9장 분노는 용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10장 비난게임
11장 직면, 복수, 화해
12장 부모를 용서하기, 나를 용서하기
후기: 용서와 12단계
부록: 용서 작업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12단계 지원그룹 안내
제1부 가정의 보따리를 풀어라
1장 가정: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때때로 가족 패턴은 이해하려고 아무리 시도해도 알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어내기도 한다. 무엇을 찾을지, 또 어떻게 그것을 해석할지 일단 알기만 하면 대다수는 자신이 속했던 가정의 역기능적 역학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과거가 신체적 학대, 성 학대, 이혼 등과 같은 형태의 역기능에 의한 상처로 얼룩져 있는지의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냥 도피해서 마치 그런 가정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던 체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도피해서 그런 가정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던 체' 하려고 애쓰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가족 모델에 끌리는 본능적인 인간의 성향은 그러한 구성이야말로 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디자인해 주신' 모습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정상적인 가정이란 "자율적인 개인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안정감과 자유를 마련해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정의를 완성할 수 있다.
또한 가정은 두 가지 언약이 교차되어야 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수평적' 언약,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수직적' 언약이 그것이다. 역기능 가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역기능은 언약적 사랑의 결속, 특히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결속이 손상을 입거나 깨어진 상황을 말한다. 어떠한 유형의 가정에서 자라났는지는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우리의 사생활의 중요한 역학관계에 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자유와 변화는 가능하다. 그 열쇠는 가정생활의 역학관계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더 철저히 이해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이해를 위한 다음 단계는 새로운 방식으로 가정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바로 가정을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2장 가족 시스템
환자들의 행동은 실질적으로 가족의 맥락 속에서는 완전히 이치에 맞고 정상적인 행동인 것 같았다. 다시 말하면 역기능이었던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가정이었던 것이다. 가정은 단순히 어쩌다가 같은 성(姓)과 주소를 쓰는 분리된 개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가정은 그 속에서 각자의 태도와 가치, 행동이 다른 모든 일원들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이다.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우리의 행동 패턴은 우리가 속한 특정한 가족 시스템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많다. 가족 시스템과 그 속에서 맡겨진 역할에 대해 이해한다면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테네시 윌리엄의 고전극 <유리 동물원>은 가족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전형적인 예이다. 극중에서 딸인 로라는 정신적인 질환, 심지어 정신분열증을 가진 환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 특히 그녀의 가정을 바라보면 - 그녀의 '미친' 행동은 완벽한 논리성을 띤다. 정말로 그것은 가족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머니와 오빠의 긴장이 위험 수위에 이를 때마다 로라는 그들이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이상야릇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녀 자신의 '기괴함'에 초점을 옮기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병든 것은 단순히 개개인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이다.
가족을 역기능적인 패턴에 묶여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한 가지 주된 요소는 관성이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들은 이전과 똑같은 상태를 스스로 고수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습관적인 역할과 태도, 행동도 더 강화되게 한다.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변화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주된 원인은 '가족 비밀'과 '가족 신화'이다.
'가족 비밀'이란 과거에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신은 절대로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습득했다. "왜 우리 집 거실에는 코끼리가 있죠?"라는 질문이다. 친구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 물으면 올바른 대답은 "무슨 코끼리 말이야?"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가족 신화'란 "우리 가족은 매우 친근해요" 등과 같이 말은 하지만 결코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가족 신화와 가족 비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족이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이 신화로 은폐하고 싶어하는 것일 것이다.
3장 가족과 나
잘 조정된 가정은 첫째, 겉으로 보기에는 상반된 역학관계, 즉 친근함과 분리 사이에 균형을 이룬다. 둘째,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가족 차원에서 다룬다. 셋째, 세대 간에 견고한 결속이 있다. 넷째, 개개인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유지된다. 다섯째, 가족들은 서로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여섯째, 차이가 수용되고 격려된다. 일곱째,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수용한다. 여덟째, 각 사람은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아홉째, 긍정적인 감정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시한다. 열째, 가족들이 가정을 '살기 좋은 곳'으로 평가한다. 열한 번째, 각자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피드백을 장려한다. 열두 번째, 개개인이 자신의 공허감을 경험하는 것을 허락한다.
완고한 가정은 매우 권위주의적인 가정이다. 지도력은 분명하게 정의되고 인식되며, 누가 대장인지, 어떤 규칙이 있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또한 혼란한 가정에서는 자녀를 키우고 훈계하는 것이 매우 변덕스럽다. 유연한 가정이란 완고한 가정과 혼란한 가정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로 명확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리더십과 건강하면서도 조절이 가능한 훈계가 있는 가정이다. 이탈된 가정은 독립성과 가족 외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 그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밀착된 가정은 질식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고 이탈된 가정은 개개인에게 고립감을 남기는 반면, 애착된 가정은 건강한 균형감각을 느끼게 한다.
4장 아비의 죄
가계도는 여러 세대에 걸쳐 나타나는 가정의 관계적·정서적 측면을 도식화한 일종의 확대된 가족 계보이다. 이 가계도를 통해 분명해질 수 있는 가족 역동관계의 첫 번째는 경계선의 역동관계이며, 두 번째는 역할의 역동성과 그 역할이 수행되는 방식이다. 현재 우리가 떠맡고 있는 역할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가정에서 떠맡았던 역할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떠맡았던 역할을 이해하고 그 역할들이 모두 어떻게 상호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체를 보게 되면 특정한 부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가계도를 그리려면 몇 가지 기본적인 기호들을 알아야 한다. 먼저 남성 가족 구성원은 네모로 표시된다. 여성은 원으로 표시된다. 네모나 원 위에 'X'표를 한 것은 그 사람이 죽었음을 뜻한다. 사람들 사이의 가까운 관계는 선으로 표시된다. 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수평 실선은 결혼했음을 의미한다. 그 실선 위에 짤막하게 그려진 두 겹의 사선은 이혼했음을 뜻한다. 자녀들은 가장 나이 많은 쪽은 왼쪽에, 가장 나이 어린 쪽은 오른쪽에 순서대로 나열한다.
가계도를 바라보면 볼수록 패턴은 더 분명히 드러나는 것 같다. 우리가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양쪽 원가족에서 세대 간의 경계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각각의 경우 자녀들은 부모들의 문제에 얽혀 있게 된다. 그들은 성장하면서 습득한 패턴 속에 자신들을 가두어 버린 셈이다. 그들 모두에겐 거기에서 벗어나 다른 결혼 유형이나 가족생활 유형을 개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알고 있었던 역동관계를 현재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에서 얼마나 명확하게 재현하고 있는지 알고 나서는 깜짝 놀란다. 남편이 감지하기 훨씬 이전부터 아내에게 불만족이 자리잡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남자는 대개 관계적인 문제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쏟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버려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 적합하고 융통성 있는 역할로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지 논의해야 한다. 부부간의 관계와 자녀와의 관계 모두에 대해서 말이다.
성경의 아브라함 가문에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재생되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각각의 세대에서 아들 중의 한 명은 가정을 떠나야만 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사라의 질투로 인해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생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을 떠나야만 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속여서 뺏은 후에 형 에서가 그를 죽이기로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질투 때문에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 노예로 팔려갔다. 또한 각각의 세대에서는 결혼한 배우자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자녀들과 제휴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 등을 돌리고 이삭과 제휴한다. 이삭은 리브가와 야곱에게 등을 돌리고 에서의 편에 선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요셉과 제휴한다.
각각의 세대에서 이전 세대의 가족 역동관계에 뿌리를 둔 문제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가? 이것은 통상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며, 가계도는 이것을 명확하게 보도록 도움을 준다.
5장 삼각관계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은 그 본질상 불안정하다. 두 사람 사이에 불안과 갈등이 있으면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곧 제3의 인물이 들어가 삼각관계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의식적인 성찰이나 의지가 없다면 물리학의 법칙처럼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가족 시스템 연구가들은 사람들의 관계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최선책은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 즉 삼각관계를 살펴보는 것임을 발견했다. 제3의 인물을 전후상황에 포함시킬 때 비로소 관계의 숨겨진 작용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며 우리의 부인(否認) 시스템을 '폭로'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이유로 가족 관계에서 '삼각관계'를 점검하는 것은 가족 시스템을 이해하는 최선책이 된다.
가족의 가계도를 완성한 뒤에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삼각관계를 그리는 것'이다. 삼각관계는 두 개의 기본적인 기호를 사용하여 그린다. 두 사람 사이에 직선을 긋거나 파동선을 그릴 수 있다. 직선은 결속이나 매력을 느끼는 관계를 말한다. 파동선은 갈등을 느끼거나 결속력이 없는 관계를 가리킨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편안하게 느끼고 서로에게 끌린다고 느끼면 직선으로 연결한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서로에게 '결속'되지 않는다면 파동선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관계 속에 엄청난 갈등이 있는데도 서로에게 매우 강하게 끌리는 상태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서로 싸울 때만 행복해 보이는' 부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진실에 실질적으로 좀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전혀 싸우거나 말다툼하지도 않는 부모와 자녀관계를 묘사하는데도 파동선을 사용할 때가 있다. 또한 어떤 경우 '제3의 인물'은 매우 상징적일 수 있다. 그 자리에 없는 제3의 인물의 유령이 어떤 관계에 매우 실제적으로 현존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베티라고 하는 여성을 상담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하고 재혼을 했다. 베티는 자신이 어머니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항상 냉담하고 매사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의 관계는 좋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자신도 의붓아버지에게 항상 가깝게 느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탐색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엄마가 이혼했을 때 그녀는 어떻게 느꼈는가? 의붓아버지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는 진정 어떻게 느꼈는가?
점점 안절부절 못하는 베티의 반응은 겉보기와는 달리 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베티의 의붓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의붓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상화하지는 않았는지 베티에게 물어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이해할만한 것이라고 우리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어머니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이혼 후에 아버지와 분리되는 사건을 경험했다. 의붓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상화시켜 거기에 묶여 있는 것은 정서적인 고아와 같은 느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계속 대화하는 도중 베티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분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다만… 한 번씩…" "다만 한 번씩 어떻다고요, 베티?" 우리는 부드럽게 질문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표면에 떠올랐던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베티의 의붓아버지는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곤 했던 것이다.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고,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일어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제적인 성적 착취였다. 그 기억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그녀는 그것을 몇 년 동안 조심스럽게 묻어두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의붓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한 '좋은 사람'이었다고 맹렬하게 자신에게 말해 왔던 것이다. 물론 여러 면에서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를 사랑하긴 했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녀에게 심각한 손상을 끼치는 학대를 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그러한 진실을 직면하기란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베티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가족을 배신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진실을 직면하는 것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도 말이다. 사실,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녀는 일어났던 일을 정면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진실을 직면하는 일은 수년 동안 그녀를 괴롭혀왔던 우울증을 극복하는 열쇠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한두 가지 정도 삼각관계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에겐 항상 자신이 자란 가정(또한 다른 곳)에서 지고 온 '보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지만 다른 관계들에 짐을 지우는 것들이다. 삼각관계를 다룬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까지 불안을 촉발하는 어린 시절의 가정에 있는 문제를 파악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핵심적인 가족 삼각관계 속에서 지금까지도 떠맡고 있는 역할을 분별하고 개선하는 것을 뜻한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가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는데 힘을 쏟았다. 특별히, 때때로 가정이 어떤 식으로 '잘못되어 가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형성하는 데 가족 시스템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정상적' 또는 '건강한' 가정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았고, 가정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역기능적'으로 되는 가장 통상적인 방식들도 어느 정도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는 가정에서 존재하고 있는 역할, 규칙, 신화, 비밀 등도 살펴보았다.
당신 자신의 가정에 대해 가계도를 그렸고, 가능한 많은 관계에 대해 삼각관계를 찾아냈다면 이제는 당신의 가정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이며, 좋은 것은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여러 가지 역동성을 발견하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 영향이 당신에게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정을 점검하다 보면 과거에 '악한'으로 보였던 특정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들의 약점, 한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점,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점.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여전히 어려움을 가지도록 기여하는 것들일 것이다. '악한'은 부모나 다른 성인일 수도 있다. 오빠나 누나일 수도 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 화가 난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한 하나님께 말이다.
그러나 어디에 문제가 있으며 누가 '악한'인지 발견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얻게 된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나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에게 행해진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금 우리는 자신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자신의 모든 어려움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자신에게 행해진 일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배울 수는 있다. 과거의 부정적인 영향을 딛고 일어서는 데 도움을 주는 방식을 말이다.
제2부 용서의 자유
6장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풀어주기
충동적 행동의 뿌리 가운데 하나는 묻혀져 있는 고통이다. 고통이 속에 없는 것처럼 가장하고 자신이 그로 인해 더 이상 어렵지 않은 것처럼 가장한다면 당신의 문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참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당신의 과거를 직면하고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묻혀 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그 기억을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부모를 용서하고, 그러한 상처로부터 당신을 보호하지 못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분노할 때 가장 상처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라. 그것은 바로 당신이다. 내면의 혼란과 쓴 뿌리를 삼켜버림으로써 그렇게 된다. 용서는 당신이 자신의 분노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도록 함으로써 당신의 부모와 가능한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한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다른 관계에까지도 긍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유케 될 것이다. 이러한 용서의 과정은 언제나 결정과 함께 시작된다. 용서는 의지의 행위이며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 순간에 '용서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하더라도 용서하는 것이 올바르고 건강한 일임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용서의 과정을 6단계로 살펴보자.
① 손상을 인식하라 - 우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내는 것은 중요하다.
② 연관된 감정을 파악하라 - 우리에게 행해진 해로운 일들과 그 상처로 인해 생겨난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과 같은 감정들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대개 오래지 않아 분노가 표면으로 끓어 오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분노의 강도에 놀란다. 그들은 분노를 몇 년이 지나도록 내면에 쌓아 놓고 짊어지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의로운 분노 같은 것도 있다. 그것은 종종 손상을 당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기도 하다. 그것은 용서의 과정을 지속하는 것을 수월하게 한다.
③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표현하라 - 만일 당신의 위에 유독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단지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유독 물질이 있는지 아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그것을 제거하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 특히 분노를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표현해야 한다.
④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선을 설정하라 - 용서의 과정을 밟아 나갈 때 종종 우리는 새로운 경계선을 설정하고 그 속에서 작업해 나가도록 자기 자신에게 '공간'을 허락할 필요가 있게 된다.
⑤ 빚을 청산하라 - 어떤 경우에는 어떤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용서의 행위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한 행동들은 언제 우리가 실제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빚을 청산했는지 정확한 시간에 대한 기억을 주지시킨다. 우리는 용서를 했음을 알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안다.
⑥ 화해의 가능성을 고려하라.
7장 용서하기, 잊기, 부인하기, 수용하기
우리 모두는 '잊어버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당신에게 일어났던 해로운 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그 대신 잊으려고 노력할 때 일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부인(否認)'이라는 단어이다. 부인은 학대나 상처를 받는 그 당시에는 도움이 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특히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처하는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인이 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기억들을 봉쇄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것들은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를 바꿀 수는 있다. 그것은 용서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많은 유대인들은 해마다 11월이 되면 '크리스탈나치(Krystal-nacht)'를 축하한다. 그것은 나치가 독일 전역에 있는 모든 회당의 유리를 다 깨뜨렸던 1938년의 밤에 일어난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몇 년 전 크리스탈나치 예배에 참석했을 때 나는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 두 명이 연사로 나온 것을 보았다. 첫 번째 연사는 깊게 주름진 얼굴에 등이 굽은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겪은 참담한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세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력하게 바라보며 서 있는 동안 어떻게 남편과 아들이 가스실로 끌려갔는지 이야기할 때에만 울었다. 연설이 끝나갈 때 그녀는 똑바로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독일사람들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혼자서 생각했다. "저분은 용서가 무엇인지 참으로 이해하고 있구나."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록 기억하고 있다 할지라도 용서한다는 사실에 능력이 있다. 만일 정말로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피해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리는 가운데에서도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우리 자신을 삼켜버리고 결국에는 파괴하고야마는 내적인 분노, 적개심, 보복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용서뿐이다.
8장 표면적인 용서
우리들 대부분은 갈등을 불편해 한다. 갈등을 해소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보다 차라리 그것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과거를 재빨리 뒤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강하고 성숙했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갈등을 신속하게 직접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강함과 성숙함의 신호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감정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온전한 용서의 과정을 거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순수한 회개와 순수한 용서는 둘 다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시인하고 수용하며, 연루된 느낌과 감정을 해결하는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글렌다라는 여인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 어머니는 항상 '사람들이 네게 공격을 하는 바로 즉시 그걸 네 마음에서 잘라버려라.'고 말씀하셨죠." 글렌다는 누군가 자신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자기 마음을 조각조각 잘라버리는 가위를 손에 들고 있는 이미지를 몇 년 동안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용서하려고 서두르면서 저는 평안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잘라내는 듯한 느낌을 갖곤 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때때로 의문이 생겼어요. 계속 이렇게 한다면 나 자신이나 내 마음 속에 뭐가 남아 있겠는가?" 좋은 의문이었다!
데이빗 옥스버거는 그의 저서 『직면할 정도로 충분히 돌보기』에서 "용서는 많은 단계로 이루어진 긴 여정이다."라고 말한다. 용서가 신속하고 수월하기를 바라는 만큼 용서는 과정이다. 우리는 용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하도록 가르칠 뿐이나 용서는 어떻게 반응할지 그 선택권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표면적인 용서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지워버릴 수 있으나 그것은 쓴 뿌리와 적개심으로 끝날 것이다. 반대로 진정한 용서의 길을 선택하고 우리의 삶을 더 바람직하게 형성하는 길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원리를 진지하게 적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용서가 선택사항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필수이다. 남은 선택은 쉽고 빠른 표면적인 용서의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힘들지만 더 많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 진정한 용서의 길을 택하는가 하는 것일 뿐이다.
9장 분노는 용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대다수 사람들은 모든 분노는 잘못된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라났다. 심지어 죄라고까지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분노는 삶의 한 일면이다. 우리에게는 분노하는 일이 생기며 그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미칠 정도로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분노의 감정 자체로는 특별히 잘못된 것이 없다. 분노를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지니고 있어야 할 부분이다. 그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나 자신의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두는 데 전문가인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것을 미덕이 아니라 문제로 인식한다. 선한 사람들도 화를 낸다. 예수님조차도 화를 내셨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 25-27). 밤에 잠자리에 누워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는 모습은 바울의 교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분노를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를 화나게 만든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청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인관계 차원에서 해소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 자신의 감정적 차원에서라도 분노를 처리해야 한다. 우리 내면이 독으로 곪지 않도록 분노를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말이다. 분노는 억압되면 가장 해로운 감정이 될 수 있다. 해결되지 않고 남겨지거나 부인의 어둠 속에 묻혀져버린 분노는 뿌리를 내리고 쓴 뿌리와 적개심을 만들어 낸다.
억압된 분노는 전화기에 있는 '통화 대기' 기능과 유사하다. 당신은 마치 분노가 없는 것처럼 무시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분노는 잠재되어 있다. 처리하기 전까지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울증이나 쓴 뿌리, 불신, 자기 연민, 불안, 비판적인 태도 등의 형태로 '새어 나올' 길을 찾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의사들은 억압된 분노가 신체질환을 야기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암 연구가들은 '전형적 암 유발 인격'이라고 불리는 것을 소개했다. 암에 걸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시종일관 유별난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 네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낮은 자존감, 둘째 장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지 못함, 셋째 자기연민의 경향, 넷째 적개심을 품고 용서를 잘 하지 못하는 경향. 이 네 번째 요소는 억압된 분노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분노의 반사 작용에 대한 네 가지 기본적인 반응
① 감정을 억압한다. 조심하라! 억압된 감정은 압력을 만들어내어 결국 터지고 만다.
② 분노를 터뜨린다. "미루지 말라. 품고 있지 말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 그러한 충고를 따르면 일시적으로는 해소가 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관계를 깨뜨리고 자신의 정서적 건강을 해친다.
③ 분노를 느끼지만 그 즉시 표현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종종 그렇게 하려면 "열까지 세라."는 말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방법은 반응을 할 때까지 자신에게 여유를 준다.
④ 자신이 신뢰하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고백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여 최선의 반응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0장 비난 게임
"만일 언니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고백하고 내 인생을 망친 것에 대해 사과한다면 그 땐 언니를 용서할 거예요." 때때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좌절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킨다. 그들은 짜증을 내고 무례하게 행동한다. 결국에는 그들의 적개심이 그들 자신의 자유를 파괴한다. 그들은 심술궂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리하여 적개심의 독이 그들의 시스템에 철저히 스며들게 된다. 이것이 비난 게임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인 것이다. 비난 게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패배자로 끝맺게 된다. 죄를 지은 쪽이 처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피해를 당한 쪽은 여전히 평화가 없다. 가해를 당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기억은 고뇌와 혼란의 원천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은 성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현상을 자주 본다. 그들은 어딘가에 탓을 돌릴 필요를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역동성, 즉 어른들은 더 크고 더 힘이 세며 '항상 옳다'고 인식된 것 때문에 학대의 피해자들은 원인을 늘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들은 단지 결백한 어린아이였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선택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일단 이러한 깨달음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들은 종종 복수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도록 프로그램화 된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 하는 게임이다. 일련의 결과가 누가 시작했는지를 찾는 게임이다. 그 목적은 쌍방의 행동이 누구의 탓인지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상호 행동은 한 사람의 행동이 상대방의 행동을 지속시키고 자극하면서 빙빙 도는 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빙빙 도는 춤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결론적으로 분석해 보면 누가 시작했는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나는가?"하는 것이다.
비난 게임은 자기연민의 파티를 벌리게 하면서 우리의 쓴 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퍼지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고통을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 때때로 다른 사람이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을 이해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처는 작아진다. 경청은 우리 안에 쌓여 있는 독을 제거하는 것 같다. 용서의 길을 걷는 것은 종종 자신의 고통을 신뢰하는 누군가와 나누는 것을 수반한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많은 짐에 짓눌려서 길을 걸어가기가 힘들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과 나누게 되면 짐이 가벼워진다.
11장 직면, 복수, 화해
때때로 당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게 가서 '의혹을 밝히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직면하기 전에 당신은 주의 깊게 당신의 동기를 점검하고 당신의 기대를 평가해야 한다. 또한 당신은 그들과 화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용서는 일방적이다. 용서는 전적으로 우리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해는 상대방의 참여를 요구한다. 이처럼 용서와 화해는 전혀 다른 별개의 과정이다. 우리는 화해가 없이도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형태이다.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실수, 파괴적인 성향을 깨달은 데서 솟아나는 연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사과하고 회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무조건 관계를 '원상복귀'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 사람들은 용서를 획득한다 하더라도 어떤 불가능한 보상을 해야 하거나 어떤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충동으로 갈등하게 될지도 모른다. 용서는 사랑의 행위로서 값 없이 주는 것이며, 겸손의 행위로서 값 없이 받는 것이다. 우리는 값 없이 받은 것에 대해 값을 지불할 수 없다. 용서와 화해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행동이라는 데 있다.
직면은 사실과 감정을 단순하고도 본질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앙심을 품은 공격이나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멀리하거나 바꾸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다. 당신이 상대방을 직면하는 목적은 그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쏟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분노는 직면을 하기 전에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신은 상대방을 처벌하거나 보복, 또는 위협하거나 고통을 주기 위해 직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면은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처리하지 않음으로써 계속적으로 곪고 있었던 과거의 고통스러운 상처를 마감하는 방법이다.
제임스의 아버지는 큰 교단에 속한 교회의 목회자였다. 어느 크리스마스 날 그의 아버지는 9살이었던 제임스가 그들이 살고 있던 남부 도시의 빈민들과 비교해서 너무 많은 장난감과 옷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미리 한 마디 설명도 없이 그의 아버지는 주일 설교 단상에서 제임스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없을 것이라고 광고했다. 또 그가 받는 어떤 선물이든 가난한 아이들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했으며 정말로 제임스에게 직접 그렇게 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기특한지 말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전 여전히 장난감을 원했다는 거예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한 번도 선택권이 없었어요." 성인이 된 제임스는 어린 시절의 다른 고통스러운 기억과 더불어 그 경험을 다루어야 했다. "전 아버지가 제게 한 일에 대해 어떻게든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는 복수에 대한 생각으로 너무 괴로워서 지원그룹에 참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제임스는 복수심은 치유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정상적인 부산물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용서로 가는 길을 통과하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는 지원그룹에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복수'하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요?" 우리는 용서할 수 있기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누군가를 직면하기 전에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직면은 기대와 연관이 있다.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직면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서 거의 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가장 효과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기꺼이 상대방의 부인이나 반박, 축소, 애매모호성 반응을 마주칠 마음이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때때로 상대방의 반응이 우리가 가장 우려했던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직면과 화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과거는 과거'로 끝내는 것이 가장 현명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용서의 과정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물론 상대방이 더 이상 생존해 있지 않기 때문에 직면과 화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부모는 지금의 부모가 아니라 그때 당시의 부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용서는 화해와는 별개의 것이다.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과거의 짐에서 풀려나면 된다.
용서의 과정을 거쳐 사람들은 자신이 상처 속에서 생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번성할 수도 있음을 알고 깊은 만족감을 가진다. 아무리 상처가 깊다 하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 희생자도, 단순한 생존자도 아니다. 우리는 승리자인 것이다! 우리가 싸워왔던 싸움은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12장 부모를 용서하기, 나를 용서하기
만일 자신의 부모를 미워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증오로 갈등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만일 부모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나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기능 가정의 성인아이로서 부모를 용서할 필요를 느낀다면 자기 자신 또한 용서할 필요를 느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실패한 부모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나 그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삶 속에서 부모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위치 때문에 그 위치에 적합한 '비중'을 부여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실패하고, 상처 입히고, 손상을 입힌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공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것이다. 특히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그렇게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현실을 부인하고, 용서의 가능성을 없애고, 자신을 역기능적인 사고와 행동패턴 속에 묶어 버린다면 우리는 부모나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① 자신에게 어떤 상처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② 자신의 부모에 대해 변명한다.
③ 자기 자신에게 탓을 돌린다.
④ 표면적인 용서를 한다.
⑤ 용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우리에게는 부모를 보호하려는 강한 본능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화가 나거나 전적인 사랑이나 헌신 이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면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외상적인 기억들은 그대로 지니고 살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용서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가능한 한 많은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처를 놓아 보내려면 어린 시절에 느낀 그대로 상처를 느낄 필요가 있다. 자신의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갈 때에 우리는 용서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 역시 자신이 실패한 부분을 더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여긴다. 우리는 자신에게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훨씬 많은 연민을 느낀다. 만일 우리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탓하도록 가르치는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특히 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붙들고 있는 정서적인 차용증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붙들고 있는 것만큼이나 실제적이며 파괴적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손상을 인식하라. 둘째, 연관된 감정을 파악하라. 셋째, 감정을 표현하라. 넷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선을 설정하라. 다섯째, 빚을 청산하라. 앞서 용서의 6단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용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용서는 우리 자신의 용서받음에서 흘러나온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만큼 이것이 더 많이 적용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자신에게 아무리 쓰라리게 상처를 입혔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충분하다. 그분의 용서는 항상 부족함이 없다. 자신이 가치 없고 사랑스럽지 않다고 아무리 느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꿀 수는 없다. 그분은 우리들 각자에게 한없는 가치와 진가를 책정해 주셨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셨다. 만일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면 어째서 우리가 자신에게 용서를 베풀 수 없단 말인가? 우리가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자기 자신까지도 말이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지웠던 건강하지 못한 죄책감의 짐에서 자신을 풀어줘라. 당신의 우울감, 위축, 자기의심, 불신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자신을 풀어줘라.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거쳐 나가면서 당신이 자신을 스스로 낙담시켰던 때를 돌아볼 때 이러한 말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갖고 있었던 성숙과 지식, 지혜를 다해서.
이제 나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더 많이 갖게 된 성숙과 지식, 지혜를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