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시인을 만나다-시집속 대표시-박은영
만두 외 4편
우리의 피는 얇아서
가죽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비칠까 봐 커튼을 치고 살아도 속내를 들켰다
틈은 많은데
쉴 틈이 없다는 것은 조물주의 장난
우리는 섞이지 않는 체질이지만
좁아터진 방에서 꾹꾹 누르며 지냈다
프라이팬과 냄비 손잡이에 덴 날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대끼고 어우러지고 응어리지고
그러다가 터지면 알알이 쏟아지던 찌끼 같은 시비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아직 찢어지지 않은 것
찢어질듯 불안을 안고 사는 일이었다
처녀가 아이를 배도 이상하지 않은
무덤 같은 방,
깊이 쑤셔 넣은 꿈속에서
개털과 나무젓가락과 실반지가 나왔다
온도를 잃은 이물질들
방으로 들어오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짙게 밴 냄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의 피는 얇아서
가죽, 아니
가족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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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는 알까
새우깡을 쥐고 팔을 뻗으면 갈매기가 채 갔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고 남은 건 검게 그은 모녀와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 뿐이었다
조금과 사리가 반복되는 겨울
너에게 아버지가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아버지가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엄마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새우깡을 녹여 먹으며 작은 움직임을 찾아다녔다 조개껍데기를 줍던 바닷가 패각의 무늬처럼 추억은 아픈 부위에 남는 것, 한때 진주를 품었을 가슴 안쪽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 파동으로 몸의 가장 먼 곳에서 뱃고동은 울리고 밀물은 드는 것인가 깎지 못하게 뭉그러진 발톱까지 바다였다는 것을 갈매기는 죽어도 모를 일
소주병을 쥔 사내를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쓰다 쓰러진, 엄마의 입술이 파란빛으로 물들어가는 사리 물때
중환자실 창밖엔
조갯살 같은 눈이 내리고
나는 새우깡을 녹여 먹다 까진 입천장만큼만 아팠다
*요한복음 4장 18절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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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어린 새가 전깃줄에 앉아 허공을 주시한다 한참을 골똘하더니 중심을 잃고서 불안한 오늘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나의 비행은 어두운 뒤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뒷산, 농협창고 뒤, 극장 뒷골목 불을 켜지 않은 뒤편은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뒤보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백열등을 깨고 담배 연기 자욱한 친구의 자취방을 박차고 나온 날, 전깃줄에 걸린 별 하나가 등을 쪼아댔다 숙제 같은 슬픔이 감전된 듯 저릿하게 퍼지는 개학 전날 밤, 밀린 일기보다 갈겨 쓸 날들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새가 날 수 있는 건 날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 속의 무게를 훌훌, 털어버리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게 날갯짓이라면
모든 결심은 비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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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나리아*
습기가 많아 잠을 자주 깹니다
어젠, 소름 끼친다는 말을 듣고도
상을 차렸습니다
징그럽다는 소리는 싫지만
본질을 숨기고 싶진 않습니다
냉장고를 열고
빈속을 보며 놀라는 눈들
동공이 커진 것은 동경한다는 뜻이니까
의식하지 않습니다 겨울이면
찬물이 나오는 수도와 연애를 하고
여름이면 미지근한 마음으로 삽니다
봄가을엔 먹을 게 없어도
키가 자랍니다
눈물은 유전이란다
놀란 눈들이 저주를 걸며 치부를 들여다봐도
꿈틀거립니다 토막토막
내 몸을 절단해도 참아낼 수 있습니다
나는 바닥에서 태어난 이름,
주문을 외우듯
이 땅의 고통에서 풀려나리라
젖은 치마를 벗고 몽유하는 새벽
손목을 그은 자리에
입이 생깁니다
*재생력이 강한 편형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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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복권
가능성은 긁지 않을 때 일어나는 사건
우리는 서로의 등을 긁어 줬다 꽝인지, 행운인지 손 닿지 않는 곳을 긁어 주는 사이가 되었지만 잔소리를 하며 바가지를 긁을 때가 많았다 긁을수록 앞날은 보이지 않고 마른 등판만 눈에 들어왔다 일확천금의 불가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가장 쉬운 일
긁지 않고 그대로 두는 편이 나을 뻔했다 우리는 꽝이란 것을 안 뒤 즉석요리를 먹듯 뭐든지 쉽게 화를 내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찢어지자며 언성을 높였다 어떤 날은 긁다가 혈흔을 남기기도 했다
손톱은 피를 먹고 자랐다 우리의 관계에서 남은 건 피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등골은 물론이고 이마와 미간, 손등…… 온몸은 그야말로 손톱자국으로 이글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우리가 낳은 자식은 가능성이 많은 아이라고 여겼다
그 희망을 간직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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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1977년 전남 강진 출생
-2018년 문화일보,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 『우리의 피는 얇아서』
-제2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수상
-제2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 수상
-조영관문학창작기금 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