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은묵 탐험기 시집『키워드』읽기
임재정(시인)
잠시, 내 이야기이면서 그의 이야기일지도 모를 이야기를 두런대보자.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한동안을 살았다. 그 사이 어떤 거대한 손이 해를 바꿔 달았고 세 개의 계절이 오는 듯 가고, 그는 두 번째 시집을 냈다. 6개월, 혹은 183일, 또는 4392시간. 좀 다르게 263520분이래도 그만인 동안. 마음만은 쉼 없이 시 근처의 비등점을 끓어오르고 더러는 휘발되거나 속성이 다른 어떤 감정들로 변해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이때의 마음을 이룬 주성분들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백컨대 문자를 통하거나 그밖의 방법으로 우린 더러 만났고, 세상을 흉보거나 공통의 관심사들을 키들거렸을 것이다. 이러저러 패인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누구의 것인지 모를 무언가를 공유하거나 서로에게 밀어놓기도 했을 것이다. 분분하던 그 흐름 속에 분명히 그도 있었을 것이다. 관계란 그런 것이니까. 그쯤의 사소한 것들이 무엇이라고 이런 자리에 꺼내 들쑤시고 부스럼을 만드는가. 그렇다. 그가 지극히 인간스러워서다. 인간이어서 느낄 수 있는 사소한 떨림들이 그에겐 미치도록 잘 어울린다. 인간이라는, 자신을 거듭 확인하려는 일단의 내밀한 속성들, 가령 됨됨이라든가 성정 따위의 무형인 것들, 나아가 인간의 바깥을 이루는 형식과 형상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이 모든 것을 합한 가운데서 그는 공격적이며 퉁명스럽고 재기발랄하며, 쓸데없이 따뜻하다. 본색을 들킬까 봐 조심하지만 몇 번 그를 보면 등딱지 속의 전반을 알게 된다. 본능은 생리에 가까우니까, 나를 미루어 보면 그가 되니까. 그가 꾸리는 꿈, 삶의 방식, 뾰족한 그와 뭉툭해진 다음의 그와 자기에게 돌아가 고개를 박은 그 조차도 알게 마련이다. 이것들은 그와 그의 시를 이루는 바탕들이다. 그러니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눈여기는 지점엔 언제나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온전한 사람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기미로, 반향으로, 더러는 사물의 외형을 빌려 그 속에 있다. 안 그런 시들이 어디 있겠느냐 항변할 이들도 있겠으나, 시를 꾸리는 화자의 시선이 품은 온도를 보면 대뜸 알게 된다. 시를 이루는 사람들이 그냥 행색으로만 사람인지, 체온과 심장을 가져서 손을 내밀기도 하는 가슴을 포함한 사람인지를 말이다. 정말 그는 사람들을 향해 끝내 집요하고 그렇기에 따뜻하다. 가끔 그것이 지겨워 튕겨날 때조차도, 틀림없이 그렇다.
캔버스를 채우지 못한 형광등의 계급에 대해, 앞니와 어금니의 급여에 대해, 바나나와 우주선의 밀착에 대해
잠 못 들게 하는 쥐며느리의 앞치마에 대해, 쌀알보다 작은 개미에 대해, 텅 빈 밥상에 대해
스케치 하다가 청춘이 저문다
명함만 한 지하에서 흠 많은 동전으로 돼지 저금통을 채우는 까만 병정들
이 밤은 무슨 동물들을 셀까 머리를 돌리면 베개를 뚫고 흩날리는 동물들의 털
붓이 되라, 기름 바른 붓으로 그은 일획이 미끄럼틀이 되게
찢어진 화폭으로 얼굴을 내민 사람들이 등 돌리고 들어간다 세수를 하지 않은 채로 누워 먹지 못하는 별에 대해, 지갑 속에 간직한 복권에 대해, 곁에 있는 당신에 대해 -「잠 못 드는 밤」전문. 20쪽
‘잠 못 드는 밤’은 화자에게 하나의 ‘캔버스’를 허락하고, 그는 주인이므로 거기에 그릴 것들을 재량껏 호명할 수 있다. 구체적 인물이 아닌 처지나 자세들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람의 것이어야 마땅한 것들이다. 전반부의 “계급”, “급여”, “밀착”이 현실적 차원이라면 후반부를 이루는 “별”과 “복권”과 “당신”은 이에 상응하는 이상의 차원들이다. 이 두 차원의 상대성이 쌍을 이루는 것은 현상과 반향이 사람의 전후를 이루는 결정질들이기 때문이다. “청춘”과 그 반대편의 관성에 찌든 “까만 병정들”의 삶은 “이 밤은 무슨 동물들을 셀까” 라는 질문을 통해 몸을 일으키고, 상관물로서 혹은 대립물로서의 지위를 획득해 낸다. 믿을 수 없지만 거친 선으로 일으켜 세운 “스케치”의 세계가 마침내 표정을 가진 인물이 된다. “청춘”을 지나 “미끄럼틀”을 배운 “동물”과도 같은 “등 돌린” 사람의 행색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부끄러움을 견디려는 자세는 화자에게 “잠 못 드는 밤”의 구조적 불편으로 치환된다. 밤은 부풀고 그도 함께 부풀어 오른다.
불편은 불화의 모서리를 이루는 하나의 퍼즐조각에 불과하다. 불편을 통해 불화의 전체에 가 닿고자 하는 궁극의 흐름이 삶이라는 전제는, 완성된 퍼즐처럼 언제나 옳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각들을 이어 빚어내는 세계는 그에게서 매혹적이며 유효한 방식이다. 그것은,
탁상달력에 팬티를 입혔다 가려진 날짜를 기웃거렸다 엉덩이를 본뜬 캐스터네츠는 두드리지 않고 보기만 했다 그의 편력을 듣는 동안에도
곡선은 스스로 부푼다
……(중략)……
동굴 입구에 왼쪽 발을 내놓았다 그의 손짓에 따라 자세를 바꿨다 보일 것과 숨길 것의 경계를 구부렸다
내가 휘어지는 만큼 예술이 된다 -「세미누드」부분. 30쪽
에서처럼 “휘어”진 자세인 동시에 “왼쪽”의 자세이기도 하고, 나날의 일상에 “팬티”를 입혀야만 하는 ‘누드’의 자세이기도 하다. 나날들을 벗은 사타구니로 인식하는 화자는 그러나 부끄러움으로부터 달아날 수도 있다. 휘어져야만 가능한, 왼쪽인 동시에 “동굴”처럼 외지고 어두운 “예술(시)”에게로 말이다. “곡선”으로 된 세계이며 완벽하게 휘어져 있는데다 왼쪽인 곳. 거기에서 그는 흔들려서 완벽한 사람의 면모로 다시 태어난다. 예술의 속성이 그렇듯 아버지이자 아들인 자신에게조차 공격적이며 망설일 때조차도 단호하다. 이런 양상을 자기애라 부를 수 있다면, 스스로 부푸는 “곡선”이라면, “예술”은 화자의 능동태이므로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기꺼이 “당신”이라 불러도 되고 어둠의 전면을 공히 나누어 쓰거나 그 자체가 되어도 된다. 거듭 휘어 보는 일로 어둠을 오래 달이다보면,
버스표로 네모난 고양이를 접는 건 너무 쉬워, 휘파람을 연습할래, 둥근 것들은 쉽게 이탈하지 -「붐비는 농담」부분. 58쪽
이상하게도 즐거워서 슬픈 놀이가 되기도 한다. “버스표”를 통해 “고양이”의 탄력을 불러낼 수 있기에, “휘파람”으로 탄력을 부릴 수 있기에, 놀이는 예술의 출발지이며 종착지인 “터미널” 쯤으로 치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둥근 것들”을 향한 놀이의 다른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면, 단언컨대 “예술”의 표정을 엿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놀이를 끝까지 뒤밟을 수 있다면 마침내 예술과 민낯으로 만나리라는 이야기. 그리고 하나 더, 예술은 시와 등치시킬 수 있는 둥글기를 가졌다는 이야기.
둥글기라는 비정형(예술)을 만나 가장 안쪽의 “휘어진” 자기와 조우하려면 그가 하듯 하면 된다. 직선을 벗어버리고 의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왼쪽을 사랑하고 동굴이 포함한 커다란 스피커를 끄덕여야 한다. 어둠을 화폭으로 당겨 쓸 수도, 마침내 “내가 휘어”질 수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방법들을 써서 그가 마련한 둥글기에 다다를 때, 우리는 그가 심연에 가라앉혀놓고 오래도록 훔쳐보곤 하던 그리운 얼굴을 만날 수도 있다.
손을 저어도 터미널은 지워지지 않지, 농담처럼 터미널이 북적이고, 누나 거기
바다는 어때? -「붐비는 농담」부분. 59쪽
바로 “누나”다. “농담처럼” “터미널”에서나 물어보는 먼 곳의 안부, 그럼에도 자신의 내부에 와 꽂히는 질문, 그런 까닭에 궁금한 구체적 상대는 “바다”가 되는 이상한 풍경이 펼쳐진다. 무엇이 이토록 시적 상황을 아름답게 일그러뜨리는 것일까. 시집『키워드』에는 전반부를 중심으로 “누나”가 등장하는 여러 편의 시들이 혼재한다. 그곳에서의 그는 서정적인 포즈와 함께하며 수시로 둥글어지고 퉁명스럽지만 부풀어 오른다. 그의 시 일부를 빌리면 “아날로그” 적인 세계의 초입이 될 터이다. “누나”를 부를 때 군데군데 얼비치는 가계의 편린들은 모르는 척 지나치기로 한다. 의도했든 아니든 장독대 뒤에 숨은 그림자니까, 잘게 찢어버린 편지를 몰래 이어붙이는 일은 솔깃하지만 불법이니까.「새치기의 달인」속 “나를 밀치고 먼저 나간” “누나”가 선험적 삶을 매개로 “밤에 배가 고파 내일로 가서 아침밥을 먹고” 오는 화자의 삶을 환유하는 추임새의 역할을 맡고 있다면,「누나, 위험해요」에서의 “누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의무에 떠밀려 거친 사회의 파도 속으로 먼저 몸을 내던지는 뒷모습이 슬픈 우리들의 정형화된 누나를 연상시킨다. 특이한 것은 가족들 중 유난히 도드라지는 “누나”의 이미지가 “누이(충청도에서는 누나와 누이를 혼용하는 경향이 있다)” 혹은 “여자” 등 각각 다른 인칭으로 변용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과 특별한 몇 가지 상징이 그녀들과 함께 한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북극이 깨진 지구본 속으로 자전거를 탄 아저씨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중략)…… 구멍도 모이면 가족이 될까 -「누나, 위험해요」부분. 38쪽
달팽이 껍질로 들어간 누이는 고드름처럼 느리게 울었습니다 -「아픈 사람들」부분. 47쪽
포플러 나무로 변한 파에톤의 누이를 만났다 -「태양의 눈물」부분. 84쪽 (밑줄은 필자 임의로 첨가함)
밑줄 친 부분에서 알 수 있듯 “깨진 지구본”, “구멍”, “달팽이 껍질 속”, “포플러 나무로 변”해 있는 등의 어딘가가 허물어진 결핍의 양상을 보이거나, 일종의 금제에 걸려 있으며, 여기에는 없는 이들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런 결핍의 여러 양상을 그는 “구멍도 모이면 가족이 될까”라는 빼어난 단 한 문장으로 통괄해내는 마술을 보여준다. 이 문장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게 구멍은 아닐까?’ 되묻는 역설을 숨기고 있을 터이므로, 그의 가계가 통과했을 질곡과 음영을 넓게 두드려 펴서 시 전체를 아우르는 바탕으로 자리한다.
터미널에는 왜 등대가 없어?
터미널은 다시 바다가 될 수 없겠지, 등대는 서서 울고, 남은 그림자는 몇 가락의 휘파람이 되고
……(중략)……
손을 저어도 터미널은 지워지지 않지, 농담처럼 터미널이 북적이고, 누나 거기
바다는 어때? -「붐비는 농담」부분. 59쪽
「붐비는 농담」의 한 부분으로 되돌아가 보기로 하자. 떠나는 곳인 동시에 돌아오는 장소도 되는 “터미널”은 시의 내용에 의하면 “버스”가 떠나고 난 뒤엔 아득해져서 “누나”가 머무는 “바다”로 바뀌는 곳이다. “터미널” 이쪽엔 뭍과 버스와 화자가 머물며, 저쪽으로는 떠난 누나가 바다를 품고 있다. 이 변환이 가능해지는 것은 터미널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자가 “누나”의 체험을 이해하고 공유하기에 가능해진다. 마술을 부르는 주문처럼 터미널에는 버스에 몸을 숨겨 “탈선”을 꿈꾸는 이미지의 “고양이”와 속이 둥근 “눈물과” 휘파람이 되는 “남은 그림자” 가 충만한 곳이다. 짐작컨대 탈선을 꿈꾸는 “둥근” 것들의 속성은 앞서 언급한 “예술”의 그것과도 애끓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농담”의 가벼움으로 이런 속성을 공글려 그는 비로소 이 세계와 만나고 부풀며 낯설어진다.
2.78%의 확률을 걸고 주사위를 던진다
홍두깨 부인 고은애 씨 입술을 닮은 나뭇잎이 자꾸 말을 건다
장례식장 옆 예수像을 마주 보며 대화를 한다
늦은 밤에 먹은 신의 언어가 더부룩하다
까스활명수는 주야간 몸값이 같다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전구는 바람을 압축해서 만든 가짜별이다
-「히든카드」부분. 74쪽
불특정한 대상들을 불러내고 거기에 일정한 흐름과 속도를 부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낯섦이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해 새로움과 유기적인 매혹을 동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 시에서 그가 취하는 방법은 ‘흐릿한 구체적 울타리’를 짓고 선행 문장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활용해 다음의 문장으로 불편한 의미를 품고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는 것이다. 낯선데다 문턱까지 하나 더 있는 셈. 과문한 자들의 양식인 인터넷을 검색해 알아낸 “2.78%의 확률”은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 그 합이 특정한 수가 나올 확률이다.「히든카드」를 아우르는 ‘흐릿한 구체적 울타리’이자 “고은애 씨 입술을 닮은 나뭇잎이 말을” 걸 확률이며 “늦은 밤에 먹은 신의 언어가 더부룩하”게 느껴질 확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전제는 일종의 액자처럼 남아, 그의 시편들을 통괄하는『키워드』라는 테제 안에서 구조적 효율성과 일정한 관련을 맺는다. 구체적으로는 신화 속의 인물을 소급해 오늘을 사는 자의 얼굴을 대신하는「미소분식」의 “페르세포네”나 “데메테르”가 그렇고,「태양의 눈물」에서의 “파에톤”이 그러하다. 특히,
구름을 읽고 싶은 날엔 바다로 간다 사백여든아홉 쪽의 책장을 펼쳤을 때 구름의 갈기를 닮은 사자개 한 마리 튀어나왔다 누군가 휘파람을 북서풍으로 불었다
-「쉬어가는 페이지」부분. 96쪽
에서는 기원전 489년 ‘네메아 복싱대회’ 우승자인 ‘테오 게네스’라는 위대한 복싱선수의 삶을 오늘로 소환한다. 강인한 육체를 살다간 한 인간의 여린 내면을 “구름의 갈기를” 빌려 쓰는 “사자개”의 상징을 빌려 비의해낸다. “너무 긴 꿈”과 “반쯤 사용한 어제”, “낡”아서 더 “사나운” 척하는 “트럭” 등이 의미하는 과장된 몸짓은 나약한 내면을 방어하려는 공격적 외형의 어두운 이면을 향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시집『키워드』의 중·후반부는 시적 화자의 공격적 외형 속에 숨긴 여린 내면을 향한 연민이 함께 한다. 그럴 때의 그는, 독자에게 좀 더 퉁명스럽고 시큰둥하며 동시에 깔깔해진다. 시에서 서정은 흐릿해지고 불안을 내포한 자아가 저면에 도드라진다. 문장은 더욱 낯설어지고 속도감은 시어를 한층 더 가파른 곳으로 위치시킨다. 이러한 양상들이 모여 “둥근” 결핍들을 노래하며 부풀어 오를 때의 그와, 현실의 불편으로부터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육체와 정신의 중간, 그러니까 시에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그는, 같은 사람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얼굴을 꺼내 쓰는 이들이 흔히 있지만, 그는 얼굴을 바꿔달지 않는다. 이런 때의 그와 저런 때의 그가 늘 같은 둥글기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속도가 다르고 반응이 달라질 뿐이다. 나는 그가 만드는 이런 차이를『키워드』라는 일종의 장치를 통해 변환하는 감각적 체계 위에 있으며, 그럴 때의 그는 ‘둥근 부풀기와 놀이’를 동반한 ‘둥근 부풀기’를 반복해서 오가는 슬픈 존재로 이해하기로 한다. 그를 훔쳐보는 일은 무서운 일인 동시에 솔깃하고도 즐거운 일이다. 세상에서 이쯤의 일은 오직 탐험뿐이다. 그와 시를 합쳐 그의 세계를 만나는 일은 곧 나를 만나는 일이기도 할 텐데. 이쯤에서 나는 훔쳐본 그의 가장 눈부신 지점에 독자를 부려두고 여기를 빠져나갈까 한다. 부디 오래『키워드』에서 그의 둥글기를 따라 부풀어 노닐다 가시기를. 때마침 부풀어 오르기 좋은 계절이니까.
종이를 접어 애인을 만들었다
오후 한 시의 태양을 따라 자국이 생기고, 이것은 복원이다
종이는 약도가 되지 못한 좌표였거나 너무 늦게 만난 오른손일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눌러 접은 선을 따라 무엇을 쓰든 줄거리가 될 것이다
인장을 찍듯 손바닥을 허공에 대고 누른 곳에 애인을 누인다
구두가 필요해 종이로 만든 새를 읽지 않은 책으로 들여보냈다
그림자를 얻으려면 숨 쉬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
새벽을 즐겁게 먹기 위해선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종이의 가능성을 믿는다 -「이 시는 거꾸로 읽어야 한다」전문. 116쪽
임재정 충남 연기 출생. 2009년 <진주신문>으로 작품 활동. 시집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
|
첫댓글 덕분에 시집 탐험이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