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꽃잎, 노란 꽃술,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어느 순간 미련 없이 낙화하는 꽃봉오리. 동백꽃을 만나기 위해 남쪽 섬으로 향한다. 매화, 산수유, 벚꽃 등에 앞서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동백. 그녀에게서 때로는 정열의 삶을 배우고 때로는 숭고한 사랑을 배운다. 동백이 보고 싶어 거제도의 부속섬 지심도를 찾아간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心) 자처럼 생겼다는 곳, 지심도. 두세 시간이면 동백숲 속에서 동박새처럼 날아다니며 일상사 잊고 지낼 수 있는 꿈같은 섬이다.
섬이라고는 하나 의외로 가깝다. 거제도 동부의 장승포항에서 도선을 탄다. 직선거리로 6km 정도,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20분 만에 지심도에 닿는다. 시멘트로 널찍하게 다진 지심도 선착장에 내리면 곧바로 동백숲길이 시작된다. 갈 지(之) 자 형태의 소로는 고도를 높여가며 민박집 단지로 이어지고 섬의 정상부로 올라간다.
지심도는 섬인 동시에 난대림 수목원이라 할 수 있다. 지심도를 뒤덮고 있는 수목은 후박나무, 대나무, 소나무, 동백나무 등 모두 37종에 이르며 특히 전체 숲 면적의 60~70%를 동백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지심도는 동백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동백숲은 동박새만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다. 동백꽃은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번갈아 피고지면서 외지의 연인들을 유혹한다. 3월 초순에서 중순까지가 절정기이다.

지심도의 동백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산책길.
많은 여행객들의 시선이 한려해상국립공원 유람선과 외도해상농원에만 쏠릴 때에도 지심도는 아무 말 없이 동백을 피워내고 연인들의 방문을 받아준다. 그런 마음씀씀이가 있어 지심도는 연인의 섬이기도 하다.
겹동백이 아닌 홑동백이 여행객들을 불러 모으는 지심도의 동백꽃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선착장-민박집 사잇길-폐교 앞-활주로-유자밭-폐교로 이어지는 길을 일주해본다. 섬에 들어가기 전 미리 식수와 군것질거리를 장만해가는 것이 도보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무작정 걸음을 빨리 해서는 어리석은 일이다. 천천히 걷는 걸음걸이가 필요하다. 따스한 봄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동백하며 땅에 떨어진 동백 하나하나에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지어진 지 오래 되긴 했어도 인정미가 뚝뚝 묻어나는 민박집들도 지나고 동백꽃잎들만 운동장을 지키는 폐교도 하나 스쳐가고 정상부의 방위건물에 닿는다. 일제 때 일인들이 설치한 포대 같은 진지는 바로 그 정상부의 동녘 아래에 있다.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도 보인다는 곳이다. 바닷가 갯바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성돔을 노리는 꾼들의 낚싯줄이 바닷바람 속에 언뜻언뜻 보인다.

활짝 핀 동백꽃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끈다.
동백숲길은 활주로로 이어진다. 동서 길이 5백m, 남북 길이 1.5km, 가장 높은 지점의 해발이 97m에 불과한 이 작은 섬에 활주로가 있다는 것이 기이하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시절,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인들이 경비행기들의 이착륙을 위해 닦았을 공간이다. 그 활주로 공사에서 거제도와 지심도 주민들의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이 쏟아졌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봄볕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활주로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장승포에서부터 지세포만, 일운면 땅이 골고루 눈에 들어온다. 한 민박집 윗뜰에는 지금 유채꽃이 피어나 동백꽃과 함께 지심도의 봄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컹컹 짖어대는 진돗개 소리도 꽃바람 속에서는 고향 언덕에서 휘날리는 풀피리소리처럼 들려온다.
다시 길은 동백숲 터널로 이어진다.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아 동백들은 수십 년의 수령을 맘껏 자랑하며 하늘로 솟았는가 하면 이리저리 뒤틀리며 외로운 섬 생활의 속살들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준다. 동쪽 바다에 머물며 장승포항이며 옥포항, 부산항으로 들어갈 대형 상선들의 풍경만 아니었다면 여행자들은 시간의 흐름마저 잊었을 법한 원시의 숲 터널이다. 좁고 구불구불한 동백숲 터널이 끝나면 햇빛이 잘 드는 정지작업이 마무리된 자그마한 공간이 나타난다. 준비해간 김밥이며 음료수를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이따금 들려오는 동박새와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청량감을 더해준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면 또 한번 동백숲이 등장한다. 지심도가 동백섬이라는 정의를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다. 작은 길을 한두 번 오르내리다 보면 활주로가 조성된 정상 부근 공터로 되돌아오게 된다. 점심을 준비해가지 않은 여행자들은 해돋이민박집 등에서 점심을 먹는다. 동백꽃이 소리 없이 떨어지는 민박집 평상에서 소박한 밥상을 받는다. 해물찌개에 이 섬의 특산물인 방풍나물에, 겉절이가 전부이고 누른밥이 후식인 상차림. 대가집 한정식 상이 결코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이다.
지심도 선착장에는 장승포로 나가는 배를 기다리는 여행객들의 미각을 유혹하는 좌판이 펼쳐져 있다. 해삼, 멍게, 개불 등 1만원 안팎이면 지심도 여행의 마지막 장에 방문기념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장승포에서 지심도까지 왕래하는 카페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