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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과 발락의 교훈을 기억하면서 (민 22:21-30, 벧후 2:15-22)
발람(Balaam)이라는 이름의 뜻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거짓예언자'이며 브올의 아들이요 술사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워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결국 발락이 제공한 물질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게 한 이중인격의 선지자였습니다.
발락은 십볼의 아들이요, 모압의 왕이었습니다. 발락(Palak)이라는 이름은 '짓밟는 자' 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을 짓밟고 파멸시키는 독재자 발락 왕이 점쟁이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구약성경 중에 가장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바로 발람과 발락의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처럼 발람과 발락 사건하면 사람들이 다 “아! 그 때 그 사건” 할 정도로 누구나 다 알고 있던 유명한 사건이어서 신약에 그 사건을 교훈으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발람은 이방인이요 무당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욕심을 좇아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중적이고 가면을 쓴 행위를 가장 싫어하시고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이름 중에 ‘발’자가 들어간 인물치고 훌륭한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애굽에서 요셉을 가두었던 시위대장 보디발, 욥의 친구 중 나아마 사람 소발, 또한 다윗이 방랑할 때에 다윗의 부하들을 위한 음식 요청을 거절하고 다윗을 비웃었던 나발 이렇게 발 자 돌림은 모두 별로 훌륭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발’자가 들어간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발락이요, 또 하나는 발람 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 모압이라는 나라는 원래 이스라엘과 친척지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과 싸우지 말고 그들의 땅을 뺏으려 하지도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신2:9)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싸울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을 지나 가나안으로 가는데 모압 사람들이 겁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통과하려고 할 때에 겁을 먹고 미디안 장로들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왜 저주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을 지나면서 소와 양떼들이 밭의 풀과 곡식을 다 뜯어 먹을까 하여서 염려가 되었습니다. 모압 땅에 경제적인 손해가 올까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한 것입니다.
발락 왕은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의 손에 예물을 들려 강변에 있는 발람이라는 무당을 불러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발람은 당시 마술사의 최고봉이요, 박수 가운데서도 가장 이름난 박수 용한 점쟁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난 박수무당 발람이 누구에게 망신을 당했습니까? 바로 자기가 부려먹는 당나귀입니다. 신을 불러서 저주를 하고 축복을 할 수 있었던 무당 발람이 당나귀가 보았던 하나님의 천사를 전혀 몰라보고 당나귀가 들었던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압왕 발락이 용한 점쟁이 술사 발람을 찾아오라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왕의 신하들이 발람을 찾아와 왕이 당신을 찾습니다. 왕궁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라는 것입니다. 왕이 부른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청와대도 구경하고 나는 이렇게 권력의 배경이 있다고 자랑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꿈에 사자를 보내시어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말라. 이스라엘은 축복을 받을 자니라. 뜻밖에 하늘의 음성을 들은 무당 발람은 모압 신하들과 함께 가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신하들에게 무당 발람이 왕궁에오는 것을 거절했다는 보고를 듣고 더 높은 귀족들과 더 좋은 예물을 발람에게 보내어 초청했습니다. 왕궁에 와서 이스라엘백성을 저주하면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금은보화를 주겠노라고 발람을 다시 한 번 유혹했습니다. 귀족들이 우리 입장도 생각해 주시라고 저주를 하고 안하고는 그 때가서 선생님 마음대로 하고 제발 왕궁까지 가기만 해 달라는 것입니다.
18절에 처음에는 발람이 내 집에 금은보화를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거절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참 신앙 좋은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19절 말씀에 왕의 귀족들에게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하루 밤 지내면서 생각하고 하나님께 물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안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벌써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들어내는 말입니다. “왕의 부탁이니 내가 이번 한 건만 잘 하면 다음에는 이 짓 안 해도 되겠다.”는 탐심이 발람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귀족들을 하루 더 유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야 합니다.
여기 발람과 발락의 사건을 통해서 듣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교훈입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듣는 처음 영감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두 번째 오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요, 세 번째 오는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라.’ 사람들은 처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색칠하고 덧입혀서 회색으로 만들고 결국 얼마 지나면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열 번 찍지도 않았는데 넘어가 버립니다.
모압의 장로와 미디안의 장로들이 돈을 가지고 와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였을 때, 발람이 처음에는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 하셨기 때문에 단호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귀족들에게 하루 유할 것을 청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다시 했습니다.
20절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당 발람에게 말씀하십니다.
“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 찌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음모를 꾸미는 가롯유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습니다. 사단이 들어간 가롯 유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요13:27)
발람은 그 다음날 아침 모압 귀족들과 함께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22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하나님은 발람에게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가라”고 명령하신 후, 그 명령대로 발람이 집을 떠나자 진노하시는가? 이것은 발람이 잔머리를 굴리고 잔꾀를 썼기 때문입니다.
어떤 농부가 입만 열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이 농부는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요번에 송아지 쌍태를 주시면 한 마리는 꼭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욕심을 부린 것입니다.
그러자 기도대로 이란성 송아지 쌍태가 나왔는데 한 마리는 누런 송아지고, 다른 한 마리는 얼룩 송아지였습니다. 이란성 쌍태를 보자 농부의 마음에 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송아지 한 마리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만 누런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가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하필이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다니.”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송아지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보나 장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들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합니다. 이 농부처럼 마음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처음 마음 첫 사랑 첫 믿음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발람과 발락의 사건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장애물을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가라고 하셨지만 그 길에 장애물을 놓으시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사탄은 잡아 먹으려고 함정과 올무를 놓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깨닫게 하시려고 어려운 장애물과 아픔을 주십니다. .
무당 발람은 모압의 귀족들이 앞에 가고, 두 명의 종들이 따르니까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거들먹거리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발람의 길을 막았습니다. 발람을 태우고 가던 당나귀가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밭으로 빠집니다. 밭으로 빠지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또 쫓아와 막습니다. 당나귀가 사자의 칼을 피해서 좁은 곳으로 가다가 발람 주인의 발을 벽에다가 비벼서 상처를 냈습니다. 나중에는 이 당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고 더는 못가겠다고 아예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영안이 닫힌 발람의 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최고 선지자가 나귀만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역하고 명예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나귀의 눈이 오히려 발람의 눈보다 더 밝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미풍 작은 바람소리 물소리에도 들리고 씨를 부리는 농부의 모습 장터에서 아이들이 소꿉놀이하고 있는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성경 말씀에 가까운 말을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왕따 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인생에 많은 장애물이 놓이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장애물을 많이 만나는 사람은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꼭 가야 한다면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장애물을 만났을 때, 장애물을 치워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장애물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도 지혜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장애물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행동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귀는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살리려고 길을 가다가 밭으로 가고, 결국 주저앉아버렸는데, 발람은 나귀를 채찍으로 때리고 그래도 안 되니까 지팡이를 들어서 내리쳤습니다. 화가 난 발람은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너를 당장 죽였을 거하고 나귀를 책망했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으로 칼 든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고 당나귀는 오직 주인의 생명을 보호해주려고 주저앉았을 뿐인데 돈과 명예에 눈이 먼 발람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책임을 당나귀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는데 그만 실수로 이만 원 권을 찍었습니다. 이 지폐를 서울에서 쓸 수가 없으니까 돈을 잘 알지 못하는 시골 깡촌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 먹자 주인장이 국수 값으로 사천 원을 내라고 합니다. 국수 값으로 이만 원 권 위폐를 주었더니 이 주인장이 칠천 원 권 두 장과 이천 원 권 한 장을 거스름돈으로 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여보시오! 대한민국에 칠천 원 권과 이 천 원 권이 어디 있소? 이거 위조지폐 아니요?”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장이 이만 원 권을 가만히 보더니 “ 이 만 원 권 이 돈은 제대로 된 돈이요?”라고 대답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만 원 권도 우리나라에 없는 위조지폐인데도 자신은 모르는가?
이런 이야기를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발람이 책임 전가하는 것은 바로 적반하장입니다. 요즈음 쌀 직불제 문제로 누가 잘못인가 여당과 야당이 서로 자기 잘못이아니라고 적반하장입니다. 발람의 태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당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당나귀가 말을 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나귀가 입을 열어 말합니다. 주인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때리십니까? 발람은 나귀가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태연한 척 “ 모르겠느냐? 이는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니라.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너를 죽였으리라” 발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뇌물에 눈이 어두워 모압 왕에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때 나귀가 말을 합니다. “나는 주인님이 항상 타는 나귀가 아닙니까? 제가 언제 오늘과 같은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귀의 말이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나귀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하니까 발람이 꼼짝도 못하고 “없었느니라”고 대답합니다. 옆에서 지켜본 모압의 귀족들이 짐승만도 못한 놈이 무슨 예언을 한다고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양심에 터난 인간들이 그래도 교인이라고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장애물을 만날 때, 화와 때문에 뱀 때문에 너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 장애물을 만날 때 너 때문에 망했다고 책임전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나 조상 탓이 아니라 모든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책임전가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요나가 불순종하니까 그 배가 풍랑을 만났던 것처럼, 신앙인들이 바로 살지 못하니까 이 사회에 어려움이 초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에 어려움이 왔을 때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않고 제가 죄인이옵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
네 번째 발람과 발락의 사건 마지막 교훈은 인생을 살다가 장애물을 만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져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31절 말씀에 발람이 이제 영안이 열려서 앞을 보니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당장 그 자리에 엎드려서 34절의 말씀처럼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우리는 이처럼 몸의 자세를 낮추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장애물을 치워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 앞에 엎드린 발람의 자세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은 비둘기 마음 콩밭에 있었습니다.
. 발람의 회개는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발람이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회개의 고백을 한 후에 돌아서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에는 아직도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발람은 입으로만 회개하고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저주코자 하는 계획을 축복의 언어로 바꾸시어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발람과 발락이 아무리 술수를 쓰고 음모를 꾸미고 숨기려 해도 하나님께서는 나귀를 통해서 발람의 입을 열게 하시고 진실을 밝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아합과 이세벨의 음모를 다 밝히시고 나봇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했던 발람은 어떻게 됐을까? 발람이 그 입술로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니 복을 받았을까? 아닙니다. 발람은 재물에 눈이 멀고 명예에 마음과 양심을 팔아서 이미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죽었습니다.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음모를 꾸민 이세벨의 피를 핥게 만들었습니다. 가롯유다는 회개하고 목매달아 죽고자 했지만 그 줄이 끊어져 뒤로 넘어져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이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다시는 음모와 술수를 부리지 말고 배신하지 말라는 경고이십니다. 다시는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나 깨끗이 씻었던 몸을 더러운 웅덩이에 도로 눕히는 돼지 꼴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이는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경고이십니다.
발람은 결국 명예와 재물을 누리지 못하고 살해되었습니다. 만약 발람의 회개가 겸손하고 진실했더라면 발람은 자신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고, 생명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욕심과 탐욕을 따라서 살다가 결국 죄를 짓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은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 뜻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을 통하여 ‘기도하라. 전도하라. 충성하라. 말씀을 사모하라. 모이기에 힘쓰라.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새하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분명히 핑계입니다. 순종은 힘들고 어려운 길 같아도 거기에 승리가 있고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을 비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출애굽한 우리들은 발람과 발락의 사건을 통해서 항상 교훈을 배우고 다함께 축복의 길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유리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해 가시오니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사람의 계획과 뜻을 바꾸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뒤를 따르게 하옵소서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하나님!
명예와 물질 욕심으로 눈이 멀고 양심과 믿음을 팔아버린
발람과 가롯유다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용서와 사랑 축복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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