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겨울 스산한 오후에 부석사로 가는 영주 순흥 지방의 풍경은 내 머리를 맑게 한다. 왼쪽으로는 소백산 준령을 끼고 앞뒤로 펼쳐지는 낮은 구릉과 전답들에는 사과밭과 그 유명하다는 인삼밭이 지천이다. 사과밭이 있는 시골 풍경은 사계절 언제나 아름답겠지만 사과가 익는 가을이 가장 멋있지 않을까?
주차장에서 매표소까지는 사하촌을 현대식 관광지로 개발해서 마음이 가지 않으나 매표소부터 갑자기 나타나는 산간 절집 앞 풍경은 아하 이것이 산사의 분위기로구나 하게 된다. 천왕문으로 오르는 오른쪽에 있는 탱자나무 울이 길게 쳐진 사과밭은 처음 보는 멋진 풍경인데 틀림없이 절을 찿는 관광객들의 심심풀이 사과 서리 예방책으로 생각해 낸 이 대안은 주변 풍경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이곳에 사과밭을 지키려고 철조망을 쳤다고 상상해보면 이 탱자나무 울타리에 깃든 지혜로움을 알 수 있다.
늦겨울 평일 오후의 흐린 날씨 덕에 부석사를 보러 온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 아주 편안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부석사를 구경했다. 무량수전 앞에서 한참을 보니 배가 통통한 배흘림기둥이 느껴진다. 정면 5칸 측면 3칸 이 날렵한 처마와 팔작지붕의 천년 목조 건물이 학창시절 그토록 시험에 자주 나오던 곳이구나. 최고의 목조 건물 지위는 이미 30년 전 여기서 멀지 않은 봉정사 극락전에게 넘겼지만 무량수전 그 이름만으로도 내 마음의 답사처로 오래토록 새겨져 있었다. 눈을 돌려 안양문 쪽에서 멀리 풍기를 바라보는 풍경은 눈맛을 시원하게 해준다. 흐린 날씨로 점점이 물결처럼 이어져 가는 소백산과 백두대간의 장엄한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어 무척 아쉽다. 무량수전 앞에서 천 년을 지켜 온 조선 석등의 담백한 아름다움이 요새 절에 흔하게 세워지는 일본식 석등에 비할 수 없는 멋을 자아낸다. 늦겨울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을 보는 즐거움도 사뭇 운치 있다.
아미타불이 모셔진 법당에서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보는 절에서는 꼭 기도를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