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10월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자들은 저들의 실패를 달가와 하지 않고 대량의 군대를 증원하여 보복활동을 감행하였으며 선후로 2600여명의 무고한 조선인들을 살해한 “경신”년 대학살 사건과 반일무장 단체에 대한 “경신”년 대토벌을 조작했다. 이와 동시에 봉계군벌 장작림도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고 동북、더 나아가서 전 중국을 통제하려는 야심으로 경제와 군사주권을 일본침략자들에게 팔아 자기의 력량을 강화、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장작림은 “만주에서 불량선인 단체를 숙청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동북지구에서 활동하는 한국반일단체와 반일 무장조직들을 취체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의 전례없던 대토벌과 봉계군벌 장작림의 공제, 그리고 경제상 후원의 결핍으로 연변지구 각 반일 단체들은 엄중한 곤경에 빠졌다. 생사존망의 관두에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 시키고 반일무장 유생 력량을 보전하기 위하여 전략적 이동을 주장하고 북로군정서부대를중국북만국경지역인밀산으로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1920년12월 중순에 서일이 통솔하는 북로군정서、홍범도가 통솔하는대한독립군、안무가통솔하는국민회군과 신민단、독도부、의군부、혈성 단、야단、대한정의군정사 등9개 반일무장부대 3500여명 대오가 밀산 평양진에 집결하였다.서일은밀산에집결한반일무장단체들을통합하여 립군단”(大韩独立军团)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서일을 총재 로、홍범도、김좌진、조성환을 부총재로、김규식을 총사령으로 선임하 였다. 밀산은 일찍 1910년대에 “한흥동”、 “심리와” 등 한국독립운동의 최초 해외 무장투쟁 기지를 건설한 곳으로 한인사회의 일정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경제 지반이 비교적 취약했기에 3000여명의 독립군이 장기적으로 체류할 곳은 못되였다. 더우기 중국 북만지구의 12월 엄동기간에 준비없이 이동한 독립군장병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것이 큰 문제로 되였다. 전례없는 곤경에 빠진 독립군부대는 시급히 출로를 찾아야 했다. 1910년대, 러시야 연해주는 중국 동북지구와 마찬가지로 한국 독립운동이 바야흐로 전개되고 있던 곳으로 약 20여만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규모의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더욱히 러시야 10월 혁명이후 쏘련정부가 피압박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에 쏘련 연해주 지역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새로운 희망지로 되였다. 서일 등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여러차례의 토론을 거친후 최종 쏘련 연해주 지역으로의 전략 이동을 결정하였다. 1921년 1월초, 대한독립군단 장병들은 밀산 당벽진을 지나 호림현 호두에서 우쑤리강을 넘었으며 쏘련 변경도시 이만시를 거쳐 연해주 코르사프카 (노령쿠풍)에 집결하였다. 코르사프카에서 독립군 단체들은 밀산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을 다시 “대한독립군총합부”로 재편하였다. 대한독립군총합부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총장은 서일、부총장은 한춘운、군사 사령관은 홍범도、군무 부장은 김좌진、외교부장은 최진동 이였다. 1921년3월, 대한독립군총합부와 기타 한국 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은 쏘련 원동정부의 안배에 근거하여 중국 흑하시 량안에 자리잡고 있는 알렉쎄브 스크시에 륙속 집결하였다. 1920년대 초기는 쏘련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갓 승리하고 피압박민족 독립과 해방을 지지하는 국제공산주의가 발전하는 시기여서 한국 각 반일 무장 단체들은 쏘련정부의 지지와 방조를 받았다. 이때 일본은 쏘련정부에 한국 반일무장 단체들의 무장을 해제할데 대한 압력을 가하였다. 갓 성립되여 정권이 확고하지 못한 쏘련정부는 쏘련에 와 주둔하고 있는 한국 각 반일무장단체들을 쏘련 홍군에 편입시키고 한국 반일 무장단체들의 원 명칭을 취소하자는 건의를 내놓았다. 얼마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에서 긴급히 “임시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였다. 그 목적은 중국에서 온 독립군 부대와 시베리아 한인들이 조직한 모든 의용대를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이 지휘하는 한인 자유보병 대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개편하려는 것이였다. 대한독립군총합부와 기타 한국 반일 무장단체들은 알렉쎄브스크시에서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치렬한 쟁론을 벌렸다. 쟁론끝에 모순이 많았지만 모든 한국 반일무장단체를 고려혁명군 3개 련대와 1개 경비대로 편성한다는 결의가 공포되였다. 이 결의는 1921년6월25일에 반포 되였으며 24시간내에 집행하여야 한다는 군정의회의 통첩도 내렸다. 그러나 한국 각 반일단체의 많은 장병들은 이 개편 결의를 접수하지 않았다. 1921년6월28일, 오후 4시경에 쏘련홍군 29련대와 자유보병대대는 장갑차 2대와 30여정의 기관총 화력의 엄호밑에 600여명의 기병을 앞세우고 개편에 복종하지 않은 한국무장단체 장병들을 무장 진압했다. 홍수같이 밀려드는 쏘련 홍군의 공세앞에서 한국 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의 저항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공세가 시작되여 한시간도 못되여 한국 반일무장단체의 장병들은 밀리고 쫓기여 마침내 흑룡강에 이르렀다. 그들의 뒤에는 탄우가 비발치듯 날아왔고 앞에는 도도히 물결치는 검푸른 흑룡강이 가로놓여 있었다. 진퇴량난의 궁지에 빠진 장병들은 흑룡강에 첨벙첨벙 뛰여들었다. 수많은 장병들이 총탄에 비참하게 맞아 죽었고 물에 빠져 죽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참안에서 한국 반일무장단체의 전사자가 272명, 익사자가 37명, 행방불명자가250명이였고 포로가 917명이였다. 일본 침략군과의 전례없던 대격전인 청산리 전투에서도 이렇게 큰 손실을 보지 않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반일투쟁사에서의 무장력량의 일대 조락을 초래한 “자유시 사변” 또는 “흑하 참안”이였다. 서일은 일찍1921년 1월, 대한 독립군단이 국경을 넘어 노령 자유시로 이동할때, 보다 큰 승전과 장래를 위해 일부 소분대를 거느리고 당벽진에 남아서 둔병제(屯兵制)를 바탕으로 대한 독립군 후방기지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자유시 사변”후 서일은 분산된 북로군정서부대 성원들을 조직하여 북로군 정서부대 재건활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1921년 8월17일 저녁에 서일의 부대는 마적들의 돌연적 습격을 받아 불행하게 하루밤사이에 대부분 장병들이 피살되는 참극을 보았다. 비록 그날 저녁 서일은 포교 활동으로 다른 마을로 갔기에 봉난을 피면하였으나 뜻밖에 발생한 참안은 서일에게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서일은 하늘을 우러러 통탄하면서 대종교 제1세 종사 홍암 라철의 유서 한 구절을 읊었다.
귀신이 울부짓고 도깨비 날뛸제
하늘땅의 밝은 빛 가뭇없이 사라졌네.
독사가 물어뜯고 메돼지 달려들제
사람들 피흘리고 살점을 뜯기누나
해는 지고 앞길은 막막하거늘
인간세상 어디로 가야 할소냐?
서일은 홀로 마을 뒤산 수림속에 들어가 돌을 베개로 잔디를 자리로 하고 대종교의 조식법(调息法) 으로 귀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