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같은 세월입니다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아들이 넌지시 일러 줍니다.
“이번 결혼기념일은 40주년이에요. 그냥 넘기지 마세요.”
“응, 엄마랑 둘이 여행가는 걸로 이야기했어.”
아들의 생일을 겸한 기념 해외여행을 이미 다녀왔지만, 아이들은 리마인드 웨딩 이벤트와 더불어 엄마에게 감동을 줄 만한 계획을 이야기했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아니야,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빠의 주관으로 떠나는 여행이라 기대감도 있어.”
그 말을 듣고 “아니, 이 사람이? 지도에 표시한 여행 경로가 빽빽한 데 처음이라니?”라고 말하려다가 곰곰이 생각하니 진짜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 생전엔 부모님과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형제들과 지인들과 늘 함께했지, 둘만의 여행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며늘아기가 말했습니다.
“두 분이 울릉도 여행 다녀오셨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하, 그러면 그렇지. 회사 근속 20주년 기념으로 5박 6일의 여행을 단둘이 다녀왔었지.’
한 번은 있었으니 처음은 아니라며 겨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정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소만 머릿속에 있을 뿐, 먹고 마시고 잠자는 계획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부랴부랴 검색하며 시간 계획까지 촘촘히 짰습니다.
평일의 좀 이른 시간에 출발한 덕인지, 교통 체증 없이 두 시간 거리를 지루하지 않게 달렸습니다.
충청북도의 길은 십수 년 전에 아들이 증평에서 ROTC 장교로 근무할 때 자주 오고 간 길이라, 부부간의 이야깃거리도 많았고, 무엇보다 산의 단풍이 절정이었습니다.
또 그 산은 강원도의 산과 닮기는 하였지만,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문경새재는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사촌 동생 가족과 함께 단양을 경유 해서 갔던 기억이니, 25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커피 향과 주변 풍경이 기가 막힌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아내의 도록(圖錄) 프로필 사진을 무진장(?)으로 찍고, 25년 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함께 손잡고 새재의 구석구석을 거닐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단산 모노레일을 찾았지요.
그런데 주차장이 한산하니 이게 웬일일까?
아뿔사! <지반침하로 안전상 문을 닫았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습니다.
‘아, 내가 아내에게 하는 일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스스로 낙담하고 있는데, 아내는 주변의 풍경만으로도 만족하다며 올라올 때 본 사과 농장에나 들리자고 했습니다.
농장 가족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구매한 문경 감홍 사과는 정말 맛이 있어 지금도 먹으며 그 풍경을 떠올립니다.
온천욕을 위해 잠자리로 정한 수안보로 향했습니다.
검색할 때 느낀 것처럼 시간이 멈춰 있는 듯 예스러운, 그러나 그래서 더 정겨운 거리와 시장통을 지나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로 정한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단체 손님이 예약되었는지 밖에서 대기하라고 말하는 주인장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그냥 나와 제2 후보 식당으로 정했던 곳으로 향했습니다.
꿩고기 샤브샤브였습니다. 꿩만두는 먹어봤어도 샤브샤브는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기에 아내에게 강추했습니다.
(아내는 망설였지만, 어디에나 있는 메뉴를 내건 식당들만 있을 뿐 달리 대안이 없었지요.)
수안보 막걸리와 더불어 처음 먹는 음식에 나는 계속 감탄했지만, 아내는 꿩 가슴살을 몇 점 데쳐 먹다가 식감이 낯설었던지 만두만 먹었습니다.
숙소로 오는 길엔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서 길을 밝히고 있더군요.
어렸을 때 캄캄한 밤에, 엄마 심부름으로 가게를 가다 보면 달이 자꾸 따라오던 기억, 자신의 신발짝 소리가 남의 발소리로 들려 무서워 뛰어갔다는 이야기를 둘이서 두런두런 나누며 돌아가신 두 분 어머니를 이야기하며 그 세월이 우리 앞에도 다가오고 있음을 말없이 느꼈습니다.
온천욕에, 안마 서비스를 원 없이 즐기고 다음 날 향한 곳은 충주호였습니다.
가는 길에 우륵과 신립 장군의 이야기가 담긴 탄금대를 들렸지만, 역사의 흔적은 별로이고 그냥 동네 공원이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았습니다.
충주호는 집으로 돌아오는 귀경길 코스로 생각하여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에, 이번엔 아내가 주변 검색을 통해 식당과 카페를 찾았습니다.
충분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니 호(湖)의 좌변과 우변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중 충주호 전망이 그야말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한 카페에서는 길이 남을 사진 몇 장을 찍었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고속도로를 피해 일반도로를 택하였으므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과 마을 풍경은 지난 세월을 추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둘만의 1박 여행을 자주 나오자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약속했습니다.
40주년 기념이라고 하기엔 별거 아닌 여행이지만, 둘만의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아내도 그랬다고 합니다.
다만 차가 이천, 양지, 용인에 이르기까지 정체가 이어지고, 게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자,
모든 장면 속에 할아버지 할머니로 줌-인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