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절망의 시대다. 과거에 절망하니 ‘묻지마 범죄’가 계속 일어나고, 현재에 절망하니 스스로 목숨 끊는 이들이 늘어나고, 미래에 절망하여 출산을 주저하는 부모들이 많아진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촛불을 밝혀야 할 교회들이 오히려 절망의 어둠을 짙게 만들고 있다는, 캄캄하고 답답한 현실이다. 동시대 도덕과 윤리의 정점에 서야 할 교회가 타락과 몰상식의 늪에 빠져 있다. 이러한 ‘교회 절망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큰 고통이다. 교회들이 연이어 저지르는 절망의 소식들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 다수는 한국 최대의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 것이다. 지난 7월 어느 날, 강남구 대치동 예장 합동 총회본부 사무실에는 역겨운 냄새가 자욱했다. 교단 총무의 패륜 및 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어느 노회장이 총무실 앞에 인분을 뿌린 것이다. 한 달 뒤 같은 장소, 이번에는 관이 등장했다. 베옷을 입은 목사가 관을 끌고 나타나 합동 교단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죽었다며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는 총회장 내정자가 교단의 중진급 목사들과 함께 노래주점에서 도우미들과 함께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보도가 떴다. 등골이 오싹했다.
침소봉대라 말하고 싶었다. 안티 그리스도인들의 공작에 의한 악의적 헛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두 눈 똑똑히 그 절망의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9월, 합동 총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 97회 총회를 전 기간 참관했다. 태풍이 몰고 온 폭우를 뚫고 서울에서 네 시간을 운전해 대구의 총회 장소로 내려갔다. 나를 처음 맞이한 것은 말로만 듣던 용역들이었다. 검정 양복을 맞춰 입은 백여 명의 거구들(이들은 윗사람을 “형님”이라 불렀다)이 고압적인 자세로 언론사와 참관단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같은 시간, 회의장 안에서는 “거룩한 총회에 용역이 웬 말이냐. 즉시 철수시키라”고 주장하는 목사와 장로 총대들을 향해 교단 총무가 가스총을 꺼내들고 위협했다. 마지막 날에는 회무가 아직 많이 남았음에도 시간이 다 됐다는 핑계로 총회장이 갑자기 폐회를 선언하고 건물의 전원을 내리고 도망쳤다. 노래주점 사건으로 인한 총회장 불신임안, 용역 동원과 가스총 위협으로 제출된 총무 해임안 처리를 무산시키기 위해서라는 후문이 들린다.
똥물, 관, 노래주점, 도우미, 용역, 가스총, 날치기. 이것이 장자 교단을 자임하는 합동 교단의 초상이다. 아니,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복음은 증인, 즉 전하는 자의 인격을 통해 전파되는 법. 교회가 이 지경이니 누가 그 복음을 들으려 할까? “너나 잘 하세요”라며 조롱할 것이다. 가뜩이나 교회 가기 싫은 자녀들은 부모에게 말대답할 좋은 빌미를 얻었다. 상처 입은 교인들은 세상의 조롱을 무릅쓰고 계속 교회 다니기가 너무도 힘들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절망을 딛고 회복을 꿈꿀 희망의 가능성은 어디 있는가?
역설적으로 나는 이번 총회에서 희망을 보았다. 이번 총대들은 전과는 좀 달랐다. 해도 너무 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가장 눈이 띈 것은 높은 출석률이다. 예년 같으면 총회 일정 도중에 미리 귀가하여 마지막 날에는 회의장이 텅텅 비기가 일쑤였는데, 이번에는 대다수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발언권을 독차지하는 정치 목사들이 교단의 주요 결정을 좌지우지하도록 방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이러다 교회 다 죽는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개혁의 열기가 느껴졌다. 그 에너지는 결국 ‘총회 정상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원회’를 탄생시켰다. 총회장이 전기를 끊고 도망친 회의장은 마치 한국 교회의 현실처럼 캄캄하고 답답했지만, 비상대책위원회는 냉정을 잃지 않고 개혁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희망의 소식은 다른 교단에서도 들려왔다. 예장 통합, 백석, 합동 총회는 금권선거 및 이단옹호 문제로 한국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킨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감리교는 이른바 ‘세습 방지법’을 통과시켜, 부모가 담임목사 또는 장로로 있는 교회에서는 그 자녀나 자녀의 배우자를 후임 담임목사로 세울 수 없도록 했다.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희망을 어떻게 더 키워나가야 할까? 먼저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목회 전횡, 재정 비리, 성추행 등 몰상식한 소식들이 교회에서 들려온다. 희생과 헌신이라는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식의 회복이 급선무다. 이를 위해서는 참여가 필요하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도 돈과 성과 권력의 유혹 앞에 무릎 꿇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애정 어린 비판과 견제로 목회자를 도와야 한다. 이를 통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지금 한국 교회는 아프다. 교회가 병들어 교회 안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불신자들까지도 상처 입히고 있다. 교회는 진실한 회개와 각고의 갱신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키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의 절망 문제에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 절망에 대한 해법은 인간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교회의 절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맞은 ‘교회 절망의 시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신앙에서 기인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크고 힘 있는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쳤지만, 하나님은 작고 연약한 참된 예언자들을 통해 일하셨다. 권력과 율법에 무릎 꿇은 다수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날뛰었지만, 하나님은 자기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따른 소수의 어부, 창녀, 세리의 편에 서셨다. 돈과 권력에 물든 중세 로마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이에 저항하여 분연히 일어선 개혁자과 함께 계셨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안정과 번영의 거짓 복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신앙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