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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한바퀴 대충 끝내고 뱅갈주의 다르질링, 시킴주의 펠링, 케체파리호수(?)를 가기 위해 인도 중부 딱 가운데 정도에 있는 엘로라 아잔타 석굴을 보고 바라나시 지나 동북으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서북 국경선 도시 실리구리를 넘어 네팔로 들어가서 카투만두를 돌아보고 포카라로 가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 트레킹을 하고 동부국경 마헨조다르(?)를 넘어 북인도로 가는 길에 해발 약 3000고지에 호수가 있는 도시 나이니탈을 지나 알모라, 코사모를 들러 요가의 도시 리쉬케쉬를 가는 중입니다. 그 도중에 만난 어떤이는 제 인도여행1년의 가슴에 꼭꼭 묻어 두고 싶은 사람도 있었기에 사진을 아꼈습니다. 초상권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제가 뒤돌아 보며 정리하는 제 여행기에, 그 곳의 역사라든지 문화의 유래라든지 지명이라든지 등등 기억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구지 다이어리 꺼내서 정확히 하지 않고( 인터넷 찾아 보시면 저보다 더 박식하고 정확하게 쓰신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ㅎㅎ) 그냥 주루룩 내 나름 팍 줄여 극적이는 것은 보슬비에 옷 젖듯 지낸 시간이었기에 머리 지어짜가며 용쓰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 오탈자가 있든 말든 보시는 분이 이해하리라 내 맘대로 생각하고 그 곳 사람사는 이야기를 네번째 시작합니다.
요놈들이 누구냐면요. 에구 망측혀라.
남녀가 교합을 하는 장면을 걸림없이 조각으로 표현한 미투상(종교적인 상식이 없으면 난해하기 그지 없는 관경으로 기냥 벌건 대낮에 햇살 좋은 잔듸 밭에 앉아 플레이보이 잡지 보는 듯합니다 ^^*)으로 유명한 카주라호에서 이른 아침 부랴부랴 로컬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가는 중에 참을 수 없는 급한 볼 일(?)로 낮선 간이 정류소에 버스를 세워 두고 화장실 찾아 뺑글뺑글 돈 적이 있었습니다. 인도 그러면 딱 뜨오를 수 있는 단어 '지저분'과 '가난'. 시골로 가면 요런 것들이 실감납니다. 특히 화장실 문화가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각설하고, 어째튼 동동 거리며 몇 군데를 찾았지만 웬만하면 적응 잘하는 나인데도 패스를 하고 겨우 자리 잡은 공중화장실. 윽~ 설명을 생략할랍니다.(너무 자세히 하면 진짜 기절할 것 같아...) 하튼, 두 손으로 코를 막고 두 눈 꼭 감고 엉거주춤 반 서다시피하여 볼일을 보고 나올려고 고개를 드니 ... 에고... 요넘들이 화장실 문도 없는 담벼락에 옹기종기 모여서 고개만 내밀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봤다는 것입니다. 사진 보이는 꼬마들은 요정도뿐이지만 밖으로 뛰쳐 나왔더니 족히 2~30명! 호기심어린 눈망울이 겁먹은 듯합니다 ^^ .
바라나시에서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안입니다. 원래 마주보는 이 좌석에는 각각 3명이 앉게 되어 있고 밤이 되면 낮에 접어 두었던 침대를 펴서 2층 3층으로 만들어 각자 자리번호 대로 올라가 잠을 잡니다. 그런데 우찌 이렇게 오골오골 앉아냐면 그것이 우리 일행이 사고를 친 까닭입니다. 바라나시에서 출발을 할 때 같이 동행하자는 길동무와 출발일 의견이 맞지 않아 떠나는 날 까지도 기차표 예매를 하지 않고 있다가 출발일에 둘이 의기투합 되어 후다닥 배낭을 메고 날랐습니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표 예매도 하지 않고 일을 저질렀지만 막상 기차를 탔을 땐 그 믿는 구석이 쨍그랑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인도 기차는 초특급 두어대 빼고는 모두 한 열차에 많은 등급을 매겨 칸을 나눠 놓고 승객들이 자유스럽게 선택할수 있는 권리( ㅎㅎ)를 줍니다. 소도 개도 함께 탈 수 있는 자리 없는 칸, 자리는 있지만 지정석 아닌 표만 끊어서 탔다가 빈 자리가 나오면 눈치코치 동작 빠른 놈이 잽싸게 앉아 갈 수 있는 2등급 이코노믹칸 부터 시작하여 6명이 앉아 갈 자리를 한자리로 만들어 부대시설 럭셔리하게 꾸며 그 삯이 비행기표보다 비싼 a1(에어컨이 있는 한 사람용 시트라는 뜻)등급까지 (한등급 오를 때 그 요금이 배가 넘었습니다)있는데 난 2등급 이코노믹을 탔다가 나중에 기차 안에서 빈자리 나오면 표를 부탁할 생각( 그렇게 나오는 자리가 꽤 있거든요)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얼마가지 않아 생각대로 자리가 나왔는데 추가 지불 금액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렀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생기는 돈은 그들의 것이되니 우리가 외국인이다 보니 높게 불렀나 봅니다.
에고~ 포기하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눈 먼 빈자리 찾아서 열차 좁은 통로를 왔다갔다하는데 이들 청년들이 우리 손을 잡아 끌며 자기네들과 같이 가자고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민폐끼치는 것 같아 극구 사절을하다가 12시간 이상 밤을 새고 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신세를 지기로 하고 슬그머니 힢짝을 밀어 넣었습니다. 담 날 아침 자이팰구리역에 도착하여 다르질링가는 짚차를 탈 때도 그 앞까지 택시로 데려다 주고 돌아갔습니다만 돈 한푼 받지 않고 즐거운 여행하라며 손만 흔들었습니다.
펠링입니다. 심심산골 꼬두메 비탈진 마을에 40됨직한 아저씨가 애들 셋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엄마는 5년전에 막내를 놓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 여자가 없어서 그런지 궁색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만 이 아저씬 손님인 저를 위하여 옆집에서 급히 조달해 준 매기(인도라면)를 재료로 야채를 넣고 아침을 준비하였습니다. 꼬마들은 옆에서 곡물로 된 비스킷 두어개와 짜이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했고 난 황후의 만찬을 받았습니다. 아저씨는 내가 수저를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밥을 먹고 아이들에게도 나눠 주면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담에 펠링에 오면 저어기 비싼 호텔에 머물지 말고 우리동네로 바로 오면 밥도 먹는 것도 걱정없다라고 했습니다. 어느새 내 주위로 몰려든 스무나명 되는 동네 분들이 내 등뒤에서 다들 왁작지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더불어 산다는 것이 뭘까......... 지금도 눈물의 만찬이 생각납니다.
주원이는 어디있을까...
다정도 병이 되어 결국 싸우고 헤어진 길동무입니다.
평생하자든 지기 떠나고 1년 못되어 엄마도 가시고 ...... 힘들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친구를 만나 말 없이 통한 부분도 많았고 말할 수 없이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깊은 속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네팔로 들어갔습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한 사두를 산꼭데기 허름한 움막에서 만났습니다. 옆에는 관상 좋은 젊은 이들이 서넛있었습니다. 함께 설산을 가자고 제의를 하였습니다. 깊은 산 속 요소요소에 학교를 세웠다고도 하고 도시에 있는 부자들이 돈을 가져다 주면 다 어디론가 보낸다고도 하는데 그가 사는 집은 초라한 움막집이었습니다.
으이구~ 요넘 청년~
생긴 모습은 무슨 마피아 양아치 같습니다ㅎㅎ. 그러나 젠틀하기가 네팔인 답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에베레스트가 보인다는 카투만두 주위 나갈코트를 갔었습니다만 높은 언덕이라 전망이 확트여 시원하기는 하였지만 구름에 가려 설산을 볼수 없었습니다. 담 날 아침이면 날이 좋아 질것이라는 이 분들 꼬임에 하룻밤을 그의 방갈로 같은 게스트하우스에 지내기로 맘 먹었지만 배낭도 세면도구도 카투만두에 두고 갔었기에 필요한 모두를 서비스 받아야 했습니다. 참고로 인도나 네팔이나 아주 고급 호텔이 아니고서는 숙박 시설에서 서비스로 물품을 제공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담날 눈을 뜨니 날은 더 흐려져 산 밑이 온통 구름 바다로 되어있었습니다. 그 광경도 멋은 있었지만 에베레스트를 볼 것이라는 꿈은 접고 주섬주섬 쌕을 챙겨 길을 떠날려고 하는데 설산을 못 보고 돌아가는 나에게 이 친구가 미안했나 봅니다. 좋은 곳이 있으니 가이드를 해주겠다면 오토바이를 끌고 왔습니다. 의심스런 눈짓을 하니 노프라블럼이라며 이것저석 끌어내어 자기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증명을 해보였습니다^^*. 정말 신나게 산악 바이크를 즐기며 카투만두 나갈코트 일대를 돌아 다녔습니다. 외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룸비니 대성석가사를 들렀습니다. 초파일 쯔음이니 다른 곳에 돌아 다니기 보다 한국절이 가깝게 있다고 하여 찾아 간 곳입니다. 5월인가 싶습니다. 그런데 음력을 쓰는 네팔력과 한국력이 조금 다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오신 날도 음력 4월 8일이 아닌 닷새 정도 뒤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성석가사가 자리잡고 있는 룸비니 국제 사원구역은 어마어마하게 넓습니다. 네팔은 원래 힌두교입니다만 룸비니가 석가모니 탄생지이다 보니 세계 불교 관련 국가들은 그 곳을 아주 성스럽게 여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순례를 옵니다. 실제 그곳은 무더운 기후 뿐만아니라 땅이 척박하여 환경적으로 너무 열악합니다. 교통은 말할 것 없습니다. 하여 국가 차원으로 이 넓은 땅을 그들 나라에 99년(?) 제공해주고 각 나라는 그 곳에 불사를 하여 사용하도록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노스님이 조계종단도 아닌 정부지원도 아닌 개인 자격으로 이곳 땅 일부를 임대하여 신라 황룡사를 재현하는 거대한 불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한국절 대성석가사입니다. 시작을 했던 노스님은 이 불사를 유언으로 남기시고 돌아가시고 그 분 상좌가 주지를 하며 20여년을 불사 계승을 하고 계시는데 여기저기 늘려진 일처리 하신다고 꼬꾸라진 나무지팡이 들고 요리조리 총총걸음으로 경내를 다니시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동자승 같이 귀엽습니다(제가 버릇이 조금 없습니다 헤헤). 이곳은 원래 더운 곳이기는 하지만 5월이면 그 더위가 난리부르스를 칩니다. 숨이 컥컥 막힙니다. 더위에 사람 죽는다는 말 실감났습니다. 그런데 우찌 이 주지 시님은 20여년을 한결 같이 이러구 사셨는지 탄복이 절로 납니다. 가만히 있어도 죽을 맛입니다. 그늘이 있어도 별 소용없고 나무잎들이 땅에서 뿜어내는 지열에 바짝바짝 타 들어 갑니다. 바람이 나풀 흉내만 내도 그 시원함에 감사 기절을 합니다(과장 아님).
우리나라에서는 전국민이 환희심 나는 축제 분위기인데 네팔 4월 초파일은 한가합니다. 순례오신 현덕스님이 그냥 지내기 맹숭하니 룸비니 동산 안에 있는 마야데못(?)에 가서 제를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나도 뭔가 스님들께 인사를 드려야 겠기에 거금 1000루피(한국 2만7천원 정도지만 피부로 느끼는 가치는 10만원 오바 ㅎㅎ. 여행지라서 그렇습니다. )씩을 봉투에 넣어 각국에서 오신 스님들께 내 밀었습니다. 키가 190이 넘으신 호리낭창 독일 스님은 그 봉투를 보시고 겸연쩍게 웃고만 서 계시길래 설명을 드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부처님 오신날 높으신 스님께 이렇게 보시를 한다고ㅎㅎ. 꿈보다 해몽입니다. 덕택에 난 한달 넘게 술 값을 아껴야 했습니다. 크크
위의 사진은 그 때 지극정성 제를 올리시는 현덕스님 모습입니다.
제를 지내시는 현덕스님은 사회생활 하시다가 늦게 출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주위 고아들을 모아 고아원을 만들어 돌보시고 못먹고 못사는 사람들을 모아서 룸비니 합창단을 만들어 희망을 주는 포교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날도 그 분들을 초대하여 일일이 손을 잡아 주시고 돌아 갈때는 음식들을 한 꾸러미씩 챙겨 그들에 안겨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지극정성입니다.
이 이쁜 꼬마는 긴 세러머니가 지루했나 봅니다. 눈이 나른해 보입니다. ㅎㅎ
네팔에서 서쪽 모헨다러나가르 국경을 넘어 오면 인도 밤바사 철다리가 있습니다.
그 곳 길이 참 헷갈립니다. 기억에 크다란 강이 있는데 댐으로 막아 그 둑을 국경 길로 사용하는 듯했습니다. 릭샤를 타면 20루피(500원정도)할 것도 100~200을 부릅니다. 몇 번을 흥정하다가 관두고 걸어서 국경을 넘기로 하였습니다. 현지인들은 걸어서 다닙니다. 에고~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 (사실은 2km도 안되는 거리) 끝이 보이지를 않아 헤메고 있었더니 이 할배가 나를 따르라면서 앞질러 이 철길을 지나고 또 걸어 퉁가(말이 끄는 구루마)를 타고 밤바사까지 동행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잔 잡수시어 얼큰^^*. 친절한 분 많습니다.
코사모입니다. 간디 사원에 들어 갔습니다. 이곳은 인도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 입니다. 숙박시설은 고급스럽고 비쌉니다. 인도 시골은 못 산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예외입니다. 이곳에서, 히말라야산맥 8000고지 이상의 유명한 산보다 더 유명한 난다데비 설산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산을 보기 위하여 일년 중 날씨가 풀리면(산이 높아 눈도 많고 춥습니다) 순례를 하는 이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힌두인들에게는 쉬바의 산이라고 불립니다. 나는 가난한 무수리 배낭족이라 물어 물어 싼 숙소를 찾다 보니 간디의 후예들이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살아 가는 곳을 소개 받았습니다. 정말 검소하게 생활했습니다. 모든 것이 도네이션(기부)으로 꾸려지고 있었씁니다. 아침 저녘 두끼만 먹습니다. 뭐라고 칭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곳 관장이신 위의 분의 설명으로 간디에 대하여 많이 이해도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정도 쉬어 갈려다가 영화 속에 나오는 고풍스런 목조 산장에서 비바람 몰아 치는 폭풍도 보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설산도 보고, 전나무 숲 , 광대하게 펼쳐진 솔 숲, 하늘금이 보이지 않는 첩첩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 올라간,하얀껍질이 벗겨지는 몇 아름드리 나무들, 밤이면 울어대는 바람소리, 뜰에 피어 있는 각종 천연색 화련한 꽃들과 함께 4일을 보냈습니다.
떠나올 때 하루치 밥값 차값 방비 포함250루피(약 7000원) 생각하여 천을 드리고 왔습니다.
이 어른은 자태는 고결 그 자체였습니다. 간디도 그러했을까.....
리쉬케쉬 강가입니다.
아침 마다 이 강가 계단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짜이를 마셨습니다. 무지 더웠지만 그 물에 발 담그고 있으면 오히려 발이 시러웠습니다. 이 물은 수백 키로 전에 있는 설산이 녹아 흘러 내립니다. 덕택에 석회질도 많이 섞여 있고 차갑습니다. 이 물 때문에 리쉬케쉬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ㅎㅎ. 레프팅의 명소입니다.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매일 아침마다 이 계단에 걸터 앉아 마셨던 짜이는 위 빨래하는 여인이 만들어 옆에 웃고 있는 꼬마에게 주면 그 꼬마는 나에가 가져다 주고 5루피를 받아 갑니다. 참 살고 잡이 였습니다. 옆에 손 빨래하는 세탁소도 같이 운영을 했습니다. 엄마랑 딸이 똑 닮았습니다.
리쉬케쉬. 해질녘 쯤, 강가에서 늘 크다란 뿌자(제사)를 지냅니다. 그곳에 갔다가 묘령의 아가씨와 함께 한 컷 ^^*. 미국에서 몇년전에 이곳에 왔답니다. 아니 매년 와서 기도한다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제 영어 실력이 짧아 대충 해석하자면 그렇습니다. 리쉬케쉬 무슨 아쉬람에서 지내는 뿌자는 강위에 거대하게 만들어진 파란 쉬바신 동상 뒤로 해가 해가 질 때쯤 그 곳을 향해(결국은 쉬바신 어깨 뒤로 해가 넘어 가는 듯보입니다.) 불을 피우며 행해지는데 자연과 어우러져 환상입니다. 신비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속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이 여인은 사실 50이 넘었습니다만 20대 앳띤 숙녀 같습니다. 그 자태가 이곳에 잘 어울려서 그랬던건지 현지 제를 지내는 브라만들도 눈에 확 띄는 그녀를 특별 대우를 했습니다. 우띠~ 얼굴이 내 반쪽이여~ ㅎㅎ
맥그로드 간지 옆 박수나트.
나의 젬배(인도 전통 타악기) 쌤이었습니다만 날 가르치다 말고 함께 했던 여행자들의 수업료 떼 먹고 야밤 도주 해 버린 쌤.
하튼 나도 생각해보면 인도 여행하면서 별별일을 다 겪은 듯합니다. 후후~
마날리에서 레가는 길목.
밤 두시에 출발한다는 짚차가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숙소 앞에 왔습니다. 열이 쪼끔 났습니다만 어쩝니까 인도인걸요. 차를 타자 마자 살푼 잠이 들었다가 깨니 운전하시는 분이 아침 먹고 가자며 내려 준 곳입니다. 옆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 발꼬락 양말 신고 늠름하게 날 지키고 있는 처자가 무초입니다. 아버기가 무협지를 너무 좋아하시어 온 식구들이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답니다 ^^*. 동유럽 터어키로 넘어 갈때까지 함께 했던 황무초, 그 이름 한번 근사합니다. 대학2년생인디 요즘 학교 그만 두고 세계여행간다고 뽀독뽀독 개기고 있답니다. 난 지럴(ㅋㅋ)하지 말고 조신하게 겅부해서 남미로 워킹홀리데이 비자 받아서 여행하라 하구요. 켁~
스리나가르 리긴 호수.
작은 시카라(배, 하우스보트 생활자들은 자가용입니다.)를 빌려 돌아 다녔습니다. 저 넘은 대학생인데 방학 중이라 잠깐 집에 와서 쉬는 참에 저를 만났다고 합니다만 하도 구라가 심한 것 같아 그 마저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도에는 요렇게 영악한 아도 어른도 많습니다. 이야기해보고 자기 페이스에 말려 든다 싶으면 덥썩 물어 돈이든 뭐든 별짓을 다할려고 하니 조심해야합니다. 저는 적당히 알고도 모르는 척 자알 구워 삼는 바람에 리긴 호수 투어 잘 했습니다. ㅎㅎ.
아고 힘들어라.
기억을 되새길려니 참 힘들구먼.
나중에 다시 짬이 나면 정확하게 써야겠습니다. 오늘은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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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에 사시는 분?
먼 길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일년씩이나 있으셨는데 별일 다 겪으셨겠지요.. 눈물나는일도 많았을테고... 시행착오도 많았겠지요..
저 쌤 얼굴은 야밤도주하게 생긴 얼굴같아요..
구라가 심한 인간들이 덥썩 물어 돈이든 뭐든 별짓을 다할려고 한다는말이 많이 무섭습니다.
역시 저는 그런인간들 잘 구워삼는 석하님하고 함께 가는것이 가장 나을듯합니다.
석하님이 여기저기 올리신 모든자료들을 이틀에 걸쳐 두탕씩 읽었습니다.
그래도 지명이름 하나 못 외웁니다... 에효... 가까운 날에 모임한번 하시죠?..ㅎㅎ 전 분당쪽입니다만...
히히~ 저도 이제 깜빡깜빡합니다만 여기에 또로로 적혀있는 지명이나 여타 이름들은 열 중 하나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명사를 많이 썼잖아요. ^^*
여혼사에서도 그렇고 특히 이곳까지 우찌 알고 찾아오신 분들은 더 그렇고 한번은 만나서 뭔 이바구를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한번 날 잡아 칼바람 맞더라도 좋은데 가서 밥이라도 먹든지요............
좋아요~ 만나서 이바구를 들어보구싶어요~~~ 쪽지 보낼께요~
이제사 답변을 드립니다.
잘 계시죠?
좋겠다. 자유로운 인생을 만끽해서. 나도 집을 한번 떠나고 싶다.
하이고모~
설은 잘 새셨는지요?
여혼여로 갑니다.
언니 넘 반가워요. 여행초 함께했던 남궁이예요^^ 계획대로 1년여의 여행을 잘 마무리하셨네요 부럽습니다.
요즘 어디서 뭘 하며 살고있을까.
한번 보입시다~
예전엔 홀로여행을즐겨서 잘돌아다녔는데 이젠 용기가 나지않네요~~두렵기도하고 무섭기도하고 소심증이되어버려서리......ㅋㅋ
아무튼 님의 용기는 대단하십니다~~많이부럽사옵니다~~
서울에서 한번 뵙기를 바랍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