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제2 코스 호국돈대길
언제:2024년 2월 3일 토요일
날씨:흐림 기온:-3/ 4도C
어디를: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순 방향 (약 18km)
갑곶돈대-용당돈대-광성보-덕진진-초지진
트레킹시간:7시간41분 휴식시간 포함 <놀멍 쉬멍>
누구와:지인 한 분과 아내와 셋이서
▲트랭글기록&괴적
▲강화나들길 1코스종점& 2코스 시작점
▲2코스 종점 초지진을 향해 출발
갑곶돈대가 보인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조선 인조 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됐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해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해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더러미 마을 장어거리
▲강화대교와 문수산이
▲갈대밭 넘어로 염하강이
예전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예븐 카페가 생겼네
▲첫번재로 만나는 용진진,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라고,
진이란 군인이 머물러 있던 무장 성곽도시를 이른다.
용진진은 조선시대 각 진에 배치되었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던 곳으로,
101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한다.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개소, 총좌(총을 놓는 자리)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석축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출입문 2곳만이 남아 있었는데, 1999년
그 위로 누각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되었으며,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쌓았다.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멋진 참나무
강화도 동안 염하강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용당돈대는 속종 5년(1679)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강화 해안선을 따라 축조된 48개 돈대 중 하나다.
가리산돈대, 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의 관할 아래에 있었던 용당돈대는 용진마을 남쪽의
소구산에서 염하로 이어지는 능선의 동쪽 끝자락 정상에 지형에 맞추어 축조되었다.
▲타래붓꽃 군락지
▲강 건너 김포 땅,평화누리길 1코스를 바라보며 나란히 가는 호국돈대길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화도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화도돈대, 한 그루의 감나무가 늦 가을이면 멋진 풍경으로 다가 오는곳
▲발밤이들
▲쉼터
▲오두돈대
광성보 소속 돈대로 위치한 지역은 자라의 머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오두리라고 부르는데,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 있어 염하의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서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 아래로 조선시대 강화 8경의 하나인
오두정이 있던 바위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인 강화전성이 지난다.
원형돈대로 직경은 32m, 벽체의 두께는 3.5m이다. 동쪽과 남쪽으로 4개의 포대를 배치하였고
출입문은 서북쪽으로 두었다.
강화외성은 고려 제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후 고종 20년 (1233년)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된 성이다.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어재연 생가는 이천에 있는데...애석하게도 이곳 강화에서 순절하다니 ㅠㅠㅠ
▲ 광성보의 안해루
신미양요 어재연 장군의 순국지, 광성보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됐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했다고 한다.
쌍충비는 불은면 덕성리 산12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성보 경내에 2기가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강화군민이 건립한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년)에 축조된 돈대로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m2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염하강에서도 물길이 가장 센 이곳에 용두돈대를...강 건너편엔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묘와 묘비가 세워져있는 곳
용두돈대 (龍頭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강화 53돈대중 하나이다.
고려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시되었으며, 조선 숙종 5년에 돈대가 세워졌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복원된 상태이며 문화재로 보호받고있다
복원된 1977년 당시에는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멀리 초지대교가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현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덕진진
▲덕진 포대
덕진돈대 주변에 탱자나무들..적의 방어에 쓰였다고 한다.
덕진돈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 중 하나이다.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이기도 하다.
신미양요(1872) 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할 포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 1867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도 덕진진에 세워진 경고비이다.
비석 정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문장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으로 결연한 쇄국의지를 담고 있다.
▲ 덕진돈대를 내려서며 바라 본 초지대교와 대명항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1679년 조선 숙종때 성으로 지은 요새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미국의 아세아 함대,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요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미국·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하여 조선군은 빈약한 무기로
대항하여 싸웠기에 매우 고전하였다.
1973년 초지진의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여 역사 교육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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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강화도로 가 볼거나..
강화나들길 네번째 도전을 시작해 놓고 경기옛길로 인해 잠시 미뤄뒀었던
강화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 동안 집에서 나와 전철과 버스를 몇번씩 환승하며 서울을 지나 오랫동안 동쪽으로만
이동을 하다가 시작만 해놓고 못 걸은 서쪽 강화 나들길을 걷기로 한다.
07:40분, 96번 버스는 강화대교를 건너 청소년 수련원 정류장에 도착, 한 시간여만에
하차하여 갑곶돈대로 이동하여 2코스를 이어 간다. 흐린 날씨에 쌀쌀한 바다 바람은
손끝과 코끝이 시리지만 평화누리길을 마주 보며 억새가 일렁이는 염하강 강변 길을
지난 추억을 생각하며 오늘의 긴 여정 시작한다.
2년여 동안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옛날에 보던 그 풍경 그대로인 염하강변 모습이다.
보여주는 풍광은 언제 와도 실망시키지 않는 강화의 풍경이다.
그러나 그 뒤로는 항쟁의 소용돌이로 피폐해졌던 강화가 지금은 많은 역사적 유물로 인해
지붕없는 박물관이란 수식어가 붙어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인다.
그래서 오늘의 걸음도 많은 돈대가 밀집되어 있어 호국돈대라는 나들길 2코스다.
여러 돈대를 지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그때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로 지금의 나라가 있고 지금의 내가 서 있을 수 있으니
감사의 인사보다 보은의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염하강가의 누런 갈대와 오밀조밀 모여 앉은 청둥이들,오랫만의 강화 풍경에 빠져
힘든 긴 여정이었지만 봉화길과 대비되는 강화길에서 24절기 가운데 첫 절기인 봄의 문이
열린다는 입춘이 내일이라 이제 한파 정도의 추위는 없으리라..
다행으로 그리 춥지 않은 날 24년도 강화도의 첫 걸음,돈대길의 많은 역사의 흔적따라
걸어 보았다.
여기까지...
2023. 2. 3.
가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