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5월 1일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가신용조합이 설립되었다. 이어 6월 26일에는 서울의 계성여자중학교 음악실에서 80명의 조합원이 모여 가톨릭 중앙신용조합 창립대회가 열렸다. 해방 이후 최초인 우리나라 신용협동조합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로부터 벌써 반세기가 넘는 51년이 지났다. 한국 신용협동조합은 오늘날 963개의 조합(2010년 현재, 신협중앙회 누리집 통계), 557만 명의 조합원에 자산총액만 하더라도 47조 7800억 원에 이를 만큼 거대한 사회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런 신협의 성장이 곧 '협동조합운동'의 확대와 발전으로 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답은 '아니오'이다.
솔직히 한국의 신협은 소수의 단위 신협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합들이 조합원들이 주인으로서 상부상조하는 협동과 상생의 협동조합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한국의 신협 종사자들이 협동조합의 7대 원칙 가운데 자율과 독립,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관리 원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협 연합회는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에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형을 살고 나온 학생 운동가를 연합회 직원으로 채용할 만큼 정부로부터 일정한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지금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을 갔다 온 이른바 '빵잽이'를 직원으로 채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신협은 일반 조합원들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조합원 민주주의의 민간 자율 결사체가 이미 아니다. 협동조합의 생명과도 같은 이런 자율성과 독립성을 한국의 신협은 거의 잃어버렸다. 정부의 감독과 지시명령에 따르면서 조합원 민주주의가 실종된 제2금융기관을 협동조합으로 보기는 어렵다. 딱 부러지게 말해 그런 신협은 구소련과 북한의 관제조직과 똑같은 관료독재의 가짜 신협이다.
지금 신협은 신용협동조합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고액의 연봉을 챙기는 임직원들의 철밥통 같은 '좋은 직장'일 뿐이다. 일종의 '탐욕의 야합'인 셈이다. 지하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와 장대익 신부를 비롯한 초기 신협 운동가들이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해도 시원치 않을, 기가 막힌 현실이다.
협동조합에 노동조합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협동조합의 자본가가 누구란 말인가. 협동조합은 자본-임노동관계를 뛰어넘어 협동의 원리가 관철되는 결사체이자 공동체이다. 협동조합 활동가들의 노동은 자유인이자 조합의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노동을 하는 것이지 노예와도 같은 임노동자의 노동력 제공이 아니다.
관제기구로 전락한 신협을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는 진정한 협동조합으로 바꾸기 위해 일시적으로 혹시나 한국의 신협에 노동조합이 필요할는지는 모른다. 신협 종사자들이 협동조합 정체성으로 무장하고 초기 신협 운동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정부와 신협중앙회 '관료'들과 싸우기 위한 투쟁조직의 측면에서는 긍정의 측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협동조합운동의 정체성 회복운동도 노동조합이 아니라 협동조합운동에 맞는 조직형태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신협의 노동조합이란 일반 서민들이 대다수인 신협 조합원들의 고혈을 짜내 더 높은 연봉을 챙기겠다는, 신협 관료독재의 착취에 편승하는 야합 조직일 뿐이다.
초기 신협 운동, 고리채를 없애다!
사실 한국의 초기 신협 운동은 그야말로 민간 스스로의 협동조합운동으로서 거의 모든 신협인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협동조합운동을 해 왔다. 초기 신협 운동 활동가들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신협중앙회는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농촌의 극심한 생활난은 보릿고개와 고리채란 두 단어로 요약된다. 당시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리채를 얻어야 했다. 그런데 이 고리채의 이자는 무려 60%에 이르렀고, 농가부채 액수는 전체 농업생산액의 1/6에 달할 정도였다.
1960년 실업률은 자그마치 34.2%, 실업자 수는 240만 명이었다. 국내산업시설이 밀집되어 있던 경인지역의 공장들은 80%가 조업중단 상태였다.
▲ 창립 당시의 성가신협 ⓒ신협중앙회
바로 이 같은 시대 상황에서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운동은 시작되었다. 부산 성가신용조합을 만든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와 서울 가톨릭중앙신용조합의 산파역인 장대익 신부는 서로 일면식도 없었지만, 1960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용조합을 출범시킨 한국 신협 운동의 산파들이었다. 이들은 또한 동시에 당시 개발도상국 인민들의 경제자립운동으로 주목받고 있던 캐나다의 안티고니시운동을 공부한 것도 일치했다.
안티고니시운동은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의 읍 단위 마을인 안티고니시 지역에서 일어난 협동조합운동을 말한다.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심각한 불황이 밀어닥쳤을 때, 많은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고 인구는 줄었다. 당시 프랜시스 세이비어 대학의 코디교수와 톰킨스 교수는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교육과 활동가 양성을 시작으로 안티고니시를 협동조합의 도시로 성장시켰다. 그 결과 안티고니시를 비롯한 노바스코샤 지역은 캐나다의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탈바꿈되었다. 오늘날에는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이나 이탈리아의 볼로냐 협동조합이 한국에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1950년대의 협동조합 모델은 안티고니시 협동조합운동이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57년 12월 프랜시스 세이비어 대학에서 2개월 동안 안티고니시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1959년 2월 부산 메리놀 수녀회에서 한국에서의 협동조합 방법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운크라 고문 3명과 주한봉사단체협의회(KAVA) 회원 등 18명과 함께 워크샵을 개최한다.
농촌사목을 주로 하던 장대익 신부 또한 1957년 9월부터 1년 동안 프랜시스 세이비어 대학에 유학을 가 신용협동조합운동에 대해 배웠다. 귀국 후에는 서울교구의 후원으로 1959년 8월 소공동에 사무실을 열어 서울교구와 인천교구 신자들을 대상으로 협동조합 소개와 교육 활동을 계속했다. 이때 장 신부가 서울 지역 천주교 신자들이 스스로 조직한 협동경제연구회 사람들을 만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협동경제연구회는 평양교구 소속의 월남 신도들이 신용조합을 빈곤 타개의 대안으로 인식하고 연구 소개하기 위해 1959년 11월 20일 만든 모임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신협은 불특정 대중을 상대하는 금융기관이 아니라 서로 잘 알고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상호부조하는 조합'이라는 신협의 공동유대 정신 아래 출범했던 것이다.
1960년대 신협의 대부 금리는 연 1.5~3%였다. 당시 가장 중요한 담보는 대부받는 사람의 '정직성과 좋은 인격'이었다. 대출금은 반드시 지정 용도로만 써야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높은 이자로 되 빌려 주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대부금 용도가 고리채 정리, 가옥 수리, 자녀 학자금, 전세금 마련 등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신협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다름 아닌 고리채 정리였다. 신협은 이 고리채 정리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렇게 되기까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 신협 지도자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합 활동에 헌실하던 초기 신용협동조합운동 활동가들의 노력이야말로 신협 운동의 성장을 이끈 밑거름이었다. 당시 이사회는 물론 회계와 서기 등 모든 임직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오늘도 없었다.
협동조합의 생명, 교육과 학습
신협 운동 초기에는 지금의 한국 신협에는 거의 없는 조합원 교육과 강습, 토론회 등이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개신교, 불교 신자도 참여한 가운데 매주 열렸다. 신협의 조직 확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닌 교육이었고, '협동조합교도봉사회'였다.
협동조합교도봉사회는 박희섭, 이상호, 박성호 등 3인의 교도원이 전임강사로서 신규조합 설립과 운영을 위한 지도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했다. 예컨대 27명이 참석한 1차 지도자 강습회는 1962년 2월 24일에서 3월 3일까지 진행되었는데, 강습회가 끝난 1962년 4월 4개의 조합이 설립되었다. 1962년 한 해 동안 22개의 조합이 설립된 것은 순전히 교도봉사회의 활동 성과였다.
1963년 7월 1일 협동조합교도봉사회는 사무소를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하고 이름도 협동교육연구원으로 바꾸었는데, 1971년까지 10년 동안 총 2,074명의 수료생을 배출하였다. 이를 토대로 개신교, 원불교, 천도교 등에서도 신협 설립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군경, 공공기관, 직장, 단체, 교육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신협 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예컨대 직장 신협은 삼화인쇄조합을 시작으로 1968년에만 무려 20개 조합이 창립되었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민심 수습 차원에서 관제조직인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켰다. 그런데 재건국민운동본부 경남도위 소속 재건청년회와 재건부녀회 일부 회원이 협동조합교도봉사회의 3차 지도자강습회(1963년 4월)에 참여하였다. 강습회에 참여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63년 5월 25일 산청 생초면에 하둔신용조합이, 5월 26일에는 창녕 성산면에서 월곡신용조합이 창립되었다. 이것이 새마을금고 1호, 2호이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1964년에 민간기구로 개편되면서 신용조합을 마을금고로 개칭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에 재건금고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72년 신협법 제정 이후에는 마을금고로 또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982년 새마을금고법 제정과 함께 새마을금고로 법정 명칭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새마을금고의 뿌리는 신용협동조합이고 실제로 새마을금고는 농협과 함께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 가입한 한국의 주요한 협동조합이다.
▲ 지난 5월 12일 신협중앙회는 신협 창립 51주년을 기념해 한국에 신협운동을 전파한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등 신협운동 선구자에 대한 추모식을 대전 신협중앙연수원에서 가졌다. ⓒ연합
국가로부터 자율과 독립이 없으면 협동조합이 아니다
1972년 신협법의 제정과 함께 순수 민간 자율 결사체였던 신용조합은 신용협동조합이라는 법인으로 바뀌게 된다.
정확히 법 제정 이후부터 한국의 신협 운동은 정부의 관리 통제 기도에 맞서 끊임없이 자율성을 지키고자 하는 저항 운동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신용협동조합법과 법인격은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국가의 지배 개입과 관리감독 수단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인민의 자율과 독립을 생명으로 하는 협동조합운동에서는 양날의 칼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협법 제정과 동시에 당시 재무부는 정관 제정과 개정, 인가 기준부터 업무영역, 이자율, 등기, 각종 세금 문제까지 행정명령인 '지침'을 제시하면서 신협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1973년 3월 24일 서강대에서 277개 조합의 대의원이 참석해서 신협연합회가 창립되었는데, 이때 연합회 회장을 외부인사로 영입하자는 주장과 순수 신협인이 신협 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틀 동안 논쟁한 것도 자율과 독립,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관리라는 협동조합 정체성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은 영등포산선 신협에 대해 신협법에 따른 감사권한을 이용하여 조합원 명단을 요구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자 아예 해산 명령을 내려버린다. 국가가 협동조합을 해산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등포산선 신협은 다람쥐회를 조직하여 신협 운동의 초기로 돌아가 그야말로 순순 민간 결사체로서의 상부상조 활동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신협법 제정 이후 10여 년이 지난 1983년에 성림신협 8억 700만 원, 신정신협 10억 2400만 원 규모의 내부자 회계부정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연합회 본부와 서울지부에서도 회계 사고가 발생하였다. 심지어 연합회관 구매과정의 부정 사건까지 불거져 나왔다. 위장대출, 예탁금 횡령, 부외거래, 조합명의 당좌발행, 상호보증대출 등 이사장의 전횡과 임직원들의 방조, 조합원 의식 결여가 뒤엉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같은 대형사고는 1980년대 들어 조합이 대규모화되고 조합원 교육이 경시되기 시작하면서 협동조합 이념이 상실되는 현상과 동전의 양면으로 터져 나온 일종의 협동조합 정체성 일탈의 결과물이었다.
조합원들이 손님으로 소외되고 신협 임직원들이 관료화되면 당연히 이사장의 집행권 남용에 대한 견제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조합은 일종의 사기업으로 전락하고 만다.
회계부정 사고는 곧바로 재무부와 은행감독권의 감사에 뒤이은 정부 감독의 강화를 불러온다. 결정적인 사고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1997년 국제통화기금 사태에서 터지고 만다. 1997년 8월 조합원 수 500만 명 돌파에 1700여 개에 육박하던 한국의 신용협동조합들은 그 직후 몰아닥친 국제통화기금의 신탁통치 아래 수많은 신협이 망해서 문을 닫고 말았다. 이른바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신협들은 이후 더더욱 제2금융권 기관으로 제도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1997년 논골신협의 인가 이후 지금까지 정부에서는 단 한 곳의 지역 신협도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말하자면 지금 신협중앙회를 비롯한 기존의 신협들은 자유인들의 연합체로서 인민들이 스스로 만드는 새로운 신용협동조합의 창립을 가로막는 기득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활공제협동조합을 비롯한 일반 인민들이 스스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자 해도 지금은 신협이라는 이름조차 쓸 수 없다. 신협법을 협동조합 정체성에 맞게 개정하고자 하는 신협 조합원들의 운동도 없다.
▲ 신협 홈페이지 ⓒ프레시안
50살이 넘은 한국 신협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협동조합 원칙을 지키면서 국가로부터 자율성과 독립성을 회복하는 협동조합 정체성 회복 운동은 순전히 신협 임직원들과 조합원, 그리고 신협 노동조합의 의지와 선택 문제이다.
조합원의 조합원에 의한 조합원을 위한 협동조합으로 거듭날 것인가, 아니면 인민의 고혈을 빠는 관제 금융기관으로 고착화될 것인가. 2012년 유엔이 정한 세계협동조합의 해를 맞아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와 장대익 신부의 헌신을 되새기며 한국의 신협 운동을 다시 생각해본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는 2010년 2월 12개 지역공제조합이 모여 출범하였으며, 2009년부터 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0년 2010년 12월 5일, 고 리영희 선생님장례식을 주관하면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바가지와 덤터기, 폭리와 리베이트로 복마전이 되어버린 상조회사의 주식회사 영업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대체하는 직거래공동구매의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전국에 걸쳐 16개 지역공제조합이 활동하고 있다. 조만간 장례산업과 비슷한 구조의 예식산업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바꾸어 혼인계를 시작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