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전에 재미있게 시청한 우리나라 첩보액션 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 제목이 안구의 홍채 혹은 무지개를 의미한다는 ‘아이리스’였다. 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되는 한 장면이 있다. 극의 등장인물 중 첩보기관의 팀장이 부하에게 소리쳤다. “누가 생각하라고 했어! 시키는대로 해!” 이러한 대사의 맥락을 IT업계의 시스템 아키텍처에 견주어 보고 싶어졌다. 이러한 일방적 명령은 전형적인 메인프레임/더미 단말기식 의사소통이다. 1980, 90년대의 주력 시스템인 대형 컴퓨터는 모든 논리연산 처리를 중앙의 메인프레임에서 처리했다. 단말기는 키보드 입력에 사용하거나 처리된 정보를 단지 모니터 상에 표출하기만 했다. 80컬럼의 글자가 단말기에 뿌려질 뿐, 작동하는 계산 로직이 단말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IT업계에서는 ‘바보’라는 말을 단말기 앞에 붙였다. ‘더미 터미널(dummy terminal) ’이 그것이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가 출현했다.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 기술의 맥락을 인간 일상의 대화로 비유해보고 싶은 발심이 생겼다. 아마도 서버입장에서는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으면 가끔씩 해줄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의 클라우드 컴퓨팅 아키텍처의 맥락을 비슷하게 풀어보면 어떤 대화 모습이 적절할까?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어떻게든 전달할께요! 매달 돈만 제대로 내신다면^^” 정도 되지 않을까 한다.
정보의 존재 위치는 권력의 위치와 같다. 메인프레임/더미 단말기의 시대에는 계층구조의 최상위 경영자에게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었다. 위에서는 지시하고, 아래는 시키는 것만 수행한다. 반면에 클라이언트/서버 환경에서는 권력을 서버와 클라이언트가 어느 정도는 나누어 갖고 있다. 업무 별로 정보를 가지는 서버가 존재한다. 클라이언트가 요청하고, 해당 서버가 응대한다. 특정 서버가 죽으면 해당 서비스는 활용할 수 없다. 한편 클라이언트/서버 환경에서는 단말이 어느 정도 지능을 가진다. 직원 역시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범위 안에서는 상사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일은 상급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상급자는 조언하고 돕는다. 상급자가 요청하고, 직원이 조언하고 서비스하는 것도 가능하다.
클라우드 환경은 어떨까? 클라우드는 말 그대로 오리무중이다. 도대체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다. 조직의 권력은 계층 위에도 없고 특정인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힘은 더이상 메인프레임이나 특정 서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은 네트워크의 관계 속에 내재한다. 만들어진 네트워크의 짜임새가 권력이고 힘이다. 정보자원은 클라우드 네트워크 상에 분산되어 있고, 구성 요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힘으로 협상력을 가진다. 어떠한 일도 혼자 처리할 수 없다. 당면 과제는 네트워크 상에서 분산된 자원과 협업으로 해결된다. 하나의 컴퓨팅 자원이 파괴되어도 다른 IT 자원에게 업무가 넘어가서 지속적으로 수행된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힘을 없애려면, 끊임없이 변신하는 네트워크 전체를 파괴해야 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와 비슷하다.
현대철학의 위대한 사상가인 들뢰즈(Gilles Deleuze)는 사물들이 접속과 일탈을 반복하면서 관계의 장(場)을 만들어 가는 형태를 '리좀(rhizome)'이라고 했다(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2001). 리좀은 잔뿌리를 내리며 뻗어가는 땅속의 구근 혹은 덩이줄기를 말한다. 고구마 줄기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된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린 고정된 나무와 달리 덩이줄기는 뿌리가 따로 있지 않다. 줄기가 땅에 닿는 접점마다 새 뿌리가 제멋대로 만들어진다. 연결된 선(관계)은 마치 그물처럼 연결된다. 이러한 그물은 환경 변화에 따라 끝임 없이 분절하고, 다시 연결되어 환경에 적응한다. 줄기가 자라날 방향이 미리 결정되지도 않고 새 줄기가 뻗어나가며 스스로 증식한다.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의 메커니즘이다. 결국 생물의 이치는 중심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은유법으로 들뢰즈는 ‘리좀’이라는 용어들 사용했다(탁석산, 2011). 이러한 철학 개념을 '관계의 철학'이라 한다. 도형으로 그리면 불규칙한 그물과 같은 '네트워크”를 생각하면 된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의 한 특징인 클라우드 아키텍처의 변천에 대한 통찰을 관계철학에서 얻을 수 있다.
철학의 세계도 절대자를 향한 본질주의 철학에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설명하는 주체주의 철학으로, 그리고 일정한 지향과 방향이 없지만 자기조직화를 지향하는 관계주의 철학으로 변천했다. 컴퓨터 아키텍처도 중앙 집중적 메인프레임 아키텍처에서, 상호적 관계를 존중하는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를 지나서, 일정한 형태를 설명할 수 없어서 “구름”이라는 용어를 빌려온 클라우드 아키텍처 환경으로 진화했다. 철학적 관점, 컴퓨터 아키텍처 의 관점도 사회적 현상이 투영되는 거울이다. 무엇인가 인간 세상에서 힘의 중심과 형태가 바뀌어 가고 있다. 관계철학은 조직의 힘은 구성원 자체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연대한 맥락에 힘이 있다고 설명한다. 시대를 꿰뚫는 통찰을 가질 때, 변화해가는 사회에서 나의 미래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사회의 관계자로서 나의 역할과 삶을 깊이 성찰때가 된 것 같다. 컴퓨터 아키텍처의 변화에서도 지혜로운 통찰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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