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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 후 6. 25전후 못 안 신월의 가가호호
1. 삽짝골 제일 안에 기오어른과 그 밑에 도산 댁 내외와 영수...
1-1 도산 댁 더 안쪽에 가산 댁을 신축 가산 댁 대구로 감.
춘산 댁이 살다가 빈집으로.
1-2 도산 댁 정 서편, 화국 댁 동쪽에 내산 댁이 신축. 수년전에 별세
2. 웃 마을 첫 집으로 남동어른과 밑에 하오 댁 덩관이 경주로 이사 후
운천 댁이 살다가 별세 후 순조 해근 태근 재화
셋째 재화가 아랫마을 앞들을 돋워 2층을 신축.
남동 댁 서편에 전 씨 성의 북기 댁과 영구 선구 후구 대구로 이사 가고
화전 댁이 재건축 경자 영옥 옥주 정호 미옥 화전 댁 별세 후 대구로 솔가
북기 댁 정남으로 길 건너 화국 댁 동준 동구 화분...
화국 댁 이가 후 마을회관 건축 현존
화국 댁 서북 편 길 건너 유국 댁.유국 댁 경주로 이거 후 정산 댁이 거주 태조 영조 영자 영대 재길
정산 댁 별세 후 앞산골 석전 댁이 거주
유국 댁 정남 길 건너 보동 댁 귀조 귀자 영로 한로 영호 영만
보동 댁은 정 서 편에 신축이사하고
보동 댁 집에 가동 댁이 이사 와서 윤선 진호 점선 3남매
유국 댁 정 서쪽 담 넘어 양산 댁 유화 도화 은포 6.25전 경주로 이사 후
연오 댁이 양산 댁 집을 매입 이주하였음
유국 댁 북북서 산 밑에 연오 댁 칠수 영구 영연, 양산 댁집 매입 이주
연오 댁집에 평산 댁 일포 정포--대구로 이주후-- 가산 댁이 입주
가산 댁 동동북편에 권 씨신축 이주 병탁네가 원지로 이사 행방 후문없음.
양산 댁 서북쪽 동오 댁 점용 장용-점용(춘산댁)분가 삽작골 거주 명숙 천호
동오 댁 별세 후 장용(부영)문기 댁이 생활 외준 태준 학준 창준 성준.....
학준이가 가동 댁 보동 댁을 통합주택 창고로 활용.
창준은 구 연오 댁과 화전 댁을 통합 주택과 창고로 활용
동오 댁 서남쪽 길 넘어 구동어른과 밑에 중오어른 동필 동수 동포 일화
동원, 중오 댁 자리에 박 규태 댁 재건축 하여 주택과 창고로 활용.
중오 댁 정 동쪽 길 건너 양산 댁 범태 금조
양산댁은 재건축 문기 댁 창고로 활용
중오 댁 정남쪽 길 건너 서국 댇 영포 영근 영군 진영,.서국 댁 별세후 빈집
중오 댁 정북에 선오 댁 석녹 석열 귀분 일분 을주 금주 석춘 석칠
선오 댁의 내산 댁은 회관 동쪽에 이사, 마산 댁이 입주 생활 중
중오 댁 정 서쪽 밭 넘어 금동 댁 임조 화분 정남 한조 술남 은조
금동 댁은 동북쪽에 신건축 생활,금동 댁 성국 댁 타계후 외지인 소유됨.
서국 댁 정 서쪽 포상 댁--포상 댁 이사 후 집이 없어짐
3. 웃 마을 앞산골 태동 댁 석전 댁 수야 종수--석전 댁 별세후 정산 댁
매입 이사
4. 아랫 못 첫 집 조동 댁 동만 동익 동출 동원 끝분
조동 댁 동북쪽 산 밑 가동 댁 윤선 점선 진호(웃 뫁 보동 댁으로 이사)
조동 댁 서북쪽 높게 지오 댁 경훈 영자 영나 영훈 영덕
조동 댁 정 서쪽 덕산 댁
덕산 댁 서쪽 삼산 댁 일분 경도 이분 영도
삼산 댁 서쪽에 수오 댁 동견 동열 동락 동팔
삼산 댁 정 북쪽 산 대박에 정산 댁 태조 영조 영자 영대 영길 재길
정산 댁은 윗 못 유국 댁 (경주로 이거 후)집으로 이주함
5. 새로 신축한 집으로는 아리마을 가운데 김 재화 씨가 이층집 지었고
새로 안 마 백 여 미터 들어가서 박 상록 씨가 양옥 같은 집을 지었고
큰못 상녹씨 댁 동남쪽에 박 신부(영화) 씨가 신축 집 지어 생활함.
6. 못 밑 엿마지기 내려가는 길 동쪽에 소 먹인다고 집지어 살고(외지인)
배낙골 길 밑 도독골 내(천)동편에 신축 거주하다가 비워둠.
2. 마을과 사람들
(1) 해방 전후의 동내는 초가집이 전부이고 웃못 마을앞 샘물을 이용하고
중오댁 한 집만 집안에 우물이 있었고...아래못 마을에는 조동댁 동편 논에
샘이 있어서 아래 못 공동 샘으로 이용 했는데 해굼내가 나는 물 이었다.
윗동내를 “웃 못“... 아래 동내를 ”아리 못”이라고 구분해서 불렀고
웃뫁에 스물여섯 집 정도이고 아래뫁에 다섯 집쯤 있었다.
(2) 노인으로
삽짝골 안집에 기오어른(도산 댁 부친)
다음 웃뫁 첫 집 남동어른(하오 댁 부친)
복판쯤 양산 댁 내동어른(양산 댁 부친)
중오 댁의 구동어른(중오 댁 부친)
금동 댁에 안어른 범실 댁 할머님(금동 댁 모친)
아래 뫁에 삼산 댁에 서동 댁 할머님(삼산 댁 모친)
지오 댁에 이동 댁 백발 할머님(지오 댁 모친)
노인들은 위 일곱 어른이나 연령차례는 모르겠고 환갑을 넘기신듯하고
(3) 다음 환갑 밑층의 어른들 연배를 정확히는 모르고 대충 순서를 보아
아래 뫁 조동어른 다음 수오어른 다음 웃 뫁 화국어른 동오어른
금동어른 하오어른 연오어른 유국어른 중오어른 서노어른 정산어른
덕산어른 성주어른 양산어른
(4) 다음 오십 밑으로
(아래못) 삼산어른 지오어른 (웃뫁)양산어른 가동어른 북기어른 운천어른
도산어른 서국어른 보동어른 포상어른 석전어른
(5) 다음 삼십대의 청장년층으로
춘산어른 이산어른 성국어른 칠국어른 가산어른 평산어른 산원어른 마산
(6) 이십대 청년들과 십대후반
(아래뫁) 동출 동열 동원 동락 (윗뫁) 석열 동구 부영 한조 동원 영구
(7) 열 살 전후
(아래뫁) 동팔 경도 (웃뫁) 경화 은조 범태 영조 석춘 영구
더 아래로 많은 아이들은 이름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아 기록 할 수가없고...
2. 신월 앞뒤 산과 논밭과 크고 작은 못
(1) . 둘러있는 앞뒤 산
사방을 둘러보면 산으로 싸였으나 나무는 화목으로 벌목하여 보이는 산은
풀밭이 전부라 소 먹이로는 좋으나 나무하러 가기는 참으로 곤란 하였다.
해방 전에는 서슬 퍼런 일본순사들 눈이 무서워 더러 나무가 있기는 하였으나
해방 후 벌채 감독은 느슨하고 화목은 필요했던 관계로 감시를 피해 도벌 하는 등 육림의 여유가 없었으므로 민둥산이
전부였고봄이면 멀리 가까이 참꽃이 온 산을 붉게 하고 담벼락 살구나무는 하얗게 꽃눈을 날리고 산비탈 작은 밭둑에는
분홍의 복사꽃이 활짝 웃음을 토했으니 신월은 꽃피고 새우는 낙원 이었다.
근래에는 울창한 수목에 가리어 키 작은 진달래는 보기가 어렵고 살구꽃 자두 꽃도 나뭇잎에 안보이고 못 밑 찻길 옆 가로수
꽃나무가 새로이 아름답다.
못 둑의 벚꽃하며 여름 닥아 오면 자귀 꽃 조밥 꽃이 나도 꽃이라 고개 들고...
(2) 눈이 부신 큰못 물결 언제나 풍요롭고 삽작골 가로지른 옹당못과 길 따라
길죽한 못이 있고 점 양지에 작은 못, 안마 골에 옹당 못 양지갓 밑에 못과 각
골옹당 못 이 있었고 비약골 중간에도 못이 있었으니 신월 사람들의 근면과
열의를 증면한 것들 이고 이 밖에도 파래 물 푸려는 파래구덩이는 큰못에 있고
웃마을 가운데 웅덩이와 안마골 턱골짝 밑에도 파래구덩이가 있었다.
(3) 신월 마을은 해방 전에 삼십 여 호가 해방 후 까지 살았지만 가난이
대를 이어 못 밑 논은 외지인들 소유거나 다른 동내사람의 묘답이 많고 마을
동민의 소유는 적었으니 골짝마다 밭을 논으로 개간하여 작은 논이 있어 옹당못
을 막아 가뭄에 대비하고 산에도 경사가 약한 곳이면 밭을 일궈 조나 팥을 심어
소출을 더 내기위해 끝없는 노력을 다 했으니...
더듬어 보면 골짝이름도 정확히 모르고 밭이 있다가 없어진 곳은 있겠지만 모르는 것이 많은데
진밭골 길따라 밭이 길게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어떤지를 모르고 웃 진밭골에도 경사 약한 동편 빈달에 밭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르며 아래 진밭골에서 앞산골로 돌아오는 곳에 아까시나무 윗쪽에 작은 밭이 있었는데 지금 묵혔을 것이고
앞산 길 올라가다가 오른 쪽에도 밭이 있었는데 묵혔고 앞 둑에 밤나무 만 한 그루 있어도 묵은 밭둑이라 밤이 잘 열리지 않았다.
삽짝골 제일 안쪽 두리봉 밑에 조동댁 밭이 있어 콩이나 조를 심었었고 옥메 쪽으로도 산록에 평산댁의 제법 큰밭이 있어
콩이나 조 또는 목화등을 심었고 북쪽으로 수오댁 지오댁 중오댁밭과 마을쪽 밑으로 동오댁밭이고
서북쪽 높은 둑 위에 조동댁 밭이고 남쪽 길따라 도산댁 못이 있었다.
눈에 아삼삼하나 글로 동내를 다 설명은 할수 없고 지적도를 그릴 수는 있겠 으나 그러지도 못하고
세월 수십년 지나 주인도 여러번 바뀌고 설명한들 뭤하랴!
마을이 산으로 싸였으니 땔 나무는 쉬울 듯 하나 그도 아닌 것이 동민의 산은 별로 없고 외지인의 산이라 벌체도 어렵지만
관청의 감독이 심해서 잘못 적발 되면 크게 곤욕을 치를 것이니 생나무는 멀찍암치 감췄다가 마를때라야 갖어오고
일본 순사가 무서워 멀리 순사가 보이면 이웃에도 연락하여 벌체 적발이나 밀주 적발을 안 당하도록 경계를 신중히 하였다.
겨울철에 간혹 벌체 허가를 받아 어느 산에 나무를 베게되면 그 때는 적발이없어 눈을 피해 남의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소깝(소나무 가지)비까리를 크게 만들어 일 년씩 화목으로 했었다.
가을 추수 마치면 깔비(낙엽)끌고 꼬지배기(썩배기)를 해다가 장작으로 쓸 수
있게 다듬어 갈무리 하여 이듬 해 까지 화목으로 불을 때어 소죽을 끓였다.
집집마다 소를 한 두 마리씩 소를 키워 논밭갈이와 짐을 지워 몰고 다녔으니 농사일과 운반 수단으로 이용하고 키워서
팔기도 하고 가정 경제재로 요긴하게 부렸으니 가을 일철을 넘기면 소 값이 하락할 때 구입하여 겨울에 잘 먹여
농사철 닥아 오면 소 값 좋을 때 팔아 이득을 보고 새끼를 낳으면 잘 키워 이득 남기며 좋아 하였다.
여름 낮에 뜨거울 때 못 둑 조신 나무 밑에 동내 소를 매어두고 아이들은큰 못에 풍덩 뛰어들어 멱 감으며 즐기고
한낮 지나면 자기 집 소를 몰고 각골이나 약물래기 혹은 못 밑 양지로 가는데 좁은 길이라 한 줄로 여 나문 마리에
딸린 송아지 몇 마리하며 장관을 이루고 산 밑에 도달하면 소이까리 목에 감아 산으로 보내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술래잡기, 씨름, 감자서리, 밀서리, 등등 온갖 장난 다 치고 해 그름 되면 자기 소 찾아 뿔뿔이 흩어져
이등저등 이골 저골 로 찾아 나서는데 당시의 산에는 산소 주변의 도리 솔 몇 그루씩 있을 뿐 전부가 풀 뿐이라
밑에서 보아도 자기 집 소를 찾을 수도 있고 목에 달린 풍경소리만 들어도 자기소는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국민학교 다닐 나이 의 외소 하고 초라한 아이들 이었지만 모두가 강단이 있어 가파르고 험한 산을 변변한
신발도 없이 더러는 맨발로도 소를 몰려 찾아 가고 송아지 까지 데리고 다니는걸 보면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때 조신나무는 각골 물막이 넓은 못 둑에 둘레 서너 아름 넘을 포구나무거목이 네다섯 그루 있어 넓게
그늘을 이루고 여기저기 말뚝을 박아 그늘에다 소를 매어두고 멀찌감치 떨어진 그늘에 가마때기 깔아 어른들 담소하시고
아이들은 멀리 앞 둑에 옷 벗어놓고 풍덩 미역 감으며 수영으로 못을 건느며 가로질러 다녔었다.
그래서 신월 아이들은 헤엄 못하는 아이가 없었고, 겨울이면 발시겠또 두짝 양 발에 신고 두껍게 언 어름위로
큰 못을 누볐으니 참 대단한 아이들 이었지!..
여든이 다 된 나이에 그 시절 생각하니 눈시울이 젖어오네 !...
윗마을(당시에는 웃못)이라고 불렀고 삽작골 들어가 왼쪽 첫 골짝이 큰삽짝골짝 이고 고개 넘는 잘룩한 만댕이에
돌무더기를 서낭당이라 했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거나 천 조각을 매달아 액운을 막는 관습이 있었다.
큰골짝 입구에서 왼편 산비탈로 붙은 길이 서낭당으로 화본가는 길이고 똑 바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굽어
막창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두리봉 으로 신월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이다.
소먹이러 갈 때 앞선 사람을 줄서듯이 따라 큰 골짝이나 두리봉 으로 가서 소는 이까리 목에 감아 산으로 올리고
아이들은 그늘 밑에 모여 장난꺼리를 찾아 같이 놀거나 연세 높은 어른이 있으면 이전 이바구(옛이야기)
한자리 해달라고 욱여 둘러앉아 어른을 처다 보고 한마디도 안 빠지게 열심히 들었었다.
그때 어른으로는 마을의 상노인 기오어른과 구동어른 두 분이 간혹 소 먹이 다니셨는데 일손을 놓을 연세고
산에 오르기도 어려우시니 저녁때 되면 아무나 아이들 이름을 불러 당신의 소를 같이 몰고 오라 하시면
거절 못하고 어려워도 같이 몰아 왔으니 그 당시에는 어른 말씀은 거절하면 안 되는 것으로 교육 받았다.
한 번은 구동어른께서 수수깨끼를 내며 왼짝 궁둥이 닮은 것이 뭐 있을까 고 하시며 맞춰 보라 하셨는데...
아이들은 호박이라 해도 아니라 하시고 지붕위의 박이라 해도 아니다 하시니 종일 모여 상의를 해도 다 아니라 하시고...
그 후 며칠이 지나도 못 맞추어 아이들 다 모여 정답을 알려 달라고 졸라대니 왼짝 궁둥이 닮은 것은
오른짝 궁둥이지 뭐... 하시어 아이들은 박장대소 한 적 있다.
또 한 번은 기오어른께서 당신이 어릴 적에 서분(지금 창평동)아이들 중에 말을 먹이는 아이가 있어
두리봉 옆 기(게)발등에서 만나 신월 아이들이 말 타기 연습을 했는데.... 말 등에 올라타고는 내려오는 법을 몰라
한 참 후에 떨어지듯 내려오니 엉덩이와 사추리에 흠집이 생기고 피가 나서 오래 애 먹은 적 있다고 하셨으니....
그 시기를 몇 년쯤 되었을까 대충 계산 하면 말씀 당시에 70쯤 되신 기오어른이 어릴 적이라면 12세 가량 이면
58년 전 얘기고 내가 12세 쯤 들었 으니 67년 쯤 전에 들은 것이라 합산하면 125년 전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런 구전 이야기는 지금의 내가 아니면 아무도 기억 못하고 잊혀질 이야기다.
큰못에 관한 이야기로는 당시의 어른들 말씀을 들어두지 못한 것이 지금은 후회가 되지만 어쩔수 없고
못을 막은 연대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6. 25전 우리가 멱 감고 수구문 근처 얕은 곳에 들어가면 아름도 넘을
큰 나무의 그루터기가 열 개도 넘게 많았으니 그때의 생각으로 수십 년 전에는 포구나무 같은 큰 나무 가 숲을 이룬
습지대 비슷한 공지가 못 들머리 쪽에 있던 땅을 못 안에 흡수 시켰구나 싶었다.
가물어 얕은데 바닥이 들어나면 검은 그루터기가 들어나곤 했었다.
이 거목들의 그루터기들은 6.25 전쟁 후 어느 해 겨울에 못 물을 빼고 말려 바닥에 퇴적되어 쌓인 토사를 긁어내는
준설작업을 불도저를 투입하여 시행한 후에는 없어졌고 못 둑에 있던 포구나무(조신나무) 거목들도 한 두 그루씩
죽어가더니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푸라타나스 심어 지금은 거목이 되어 그늘을 이루었으나 거기
아니라도 더위 피할 곳도 많고 앉아 쉴사 람이 없기도 하다.
봄을 지나 여름이 되면 가득 찬 물위에 말밤 잎이, 더 많은 지출이라는 수초 사이사이 보이다가 점점 많아지고,
가을되면 말밤의 열매가 영글어 긴 나뭇가지 구해다가 침 달린 말밤을 건져 까면 하얀 속살이 고소하고
달콤하여 맛있었다.
얼음이 녹은 이른 봄이면 갈끼라는 말치는 기구를 만들어, 가는 새끼줄에 매달고 멀리 물에 던져 말이라는
초록색 수초를 뜯어 나물로 무쳐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고 신월 못의 말이 가근동에 제일 맛있다는 소문이 났었다.
초록색의 같은 말이라도 다른 동내의 말은 떫은맛이 있었지만 신월의 말은 잡맛이 없어 맛있다며 봄이면
타 동내에서 말 치러 모이니 음달 둑과 앞둑 양지 둑에 말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휘휘 돌리는 깔끼에 다칠까 겁도 났다.
첫 얼음이 얼면 전체가 파란 빛이고 두께가 3센티 정도만 되면 들어가 밟아도 깨어지지 않으며 투명하게 바닥까지
훤히 볼 수 있어 곳곳에 모여 있는 말을 찾아 장대 끝에 깔끼를 묶어 내려다보면서 말을 치면 잡초 덜 섞인 말을
건질 수 있고 그 때의 말은 새로 자라는 보드라운 말이라 더 맛있었다.
이렇게 활동적이고 건실하던 못안신월 마을이 6.25 후에 외지의 생활상이 알려지고 교통이 발달 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사회풍조 따라 한 집씩 이사를 가고 학업을 위해서, 직업을 찾아서 젊은이가 나가고 가족 전부가 떠나고 하여
지금은 열 가구 미만이 남았고 아이들이 전무하니 앞으로 십 여 년 지나면 빈 동내가 되지 않을까 서글프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 컴퓨터 만지다가 고향생각을 하고 아삼삼한 옛생각을 떠올리다가 ... 시간 지나고 내가 기억을 못하면 아무도 알지
못할 사실이겠다 싶어 더듬어 보다가 기록을 하고 내 컴퓨터가 없어지면 기록도 없어지겠다 싶어 못안 신월이바구에
함께 얹어 보자는 마음으로 연습한 내용글 이지만 퍼 옮겨놓고 두고두고 고치고 더 다듬고할 작정이랍니다.
틀리고 잘못 기억된것도 있을 것이니 오류가 발견되면 덧글로 라도 알려 주시면 수정할 작정입니다.
#. 몇년 전에 경화 석춘 영조 은조 넷이모여 날잡아서 도시락 준비하여 넷이서 못안 신월동내 둘러싼 산능선을 한바퀴
돌아 보자고 약조는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친구 석춘씨가 작고 하시고는 약조가 없어진 일이 있음.
(2016년 10월 16일. 김은조 씀)
16 년 11 월 29일 12;10
이 글 쓰고 한달 반쯤 되었지만 더러 읽어본 흔적은 있으나 아무도 댓글을 쓰신분 도 없고 뭐 어느 대목에 잘못된 점
이 있다고 정정을 요청하는 이도 없으니 모두들 말문이 닫혔을까 글을 잊었을까 ?
무슨 말이라도 하고싶은데 듣는 사람이 있어야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제 한 달이 지나면 내 나이 80 이라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신월
그 정다운 마을을 둘러싼 산을 돌며 다시 한번 이라도 동내를 살펴보고 싶으나 혼자 뿐이라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고 이런 생각도
끝이 아니겠나 싶어 서운 한 면이 없지 않으나 두고 보자 언제일지 모르나 내가 혼자 또 나서게 될지?.....
혼자서 뒷산 정상부위를 따라 마을을 돈다면 서쪽 큰갓으로 올라 서남재에서 원골 각골 능선을 돌고, 약물래기안쪽 높이
오르면 보구리집 봉우리 중턱으로 서낭댕이로 가는 등성으로 이어지는데, 보구리집봉 중간 쯤에 전사자 시신이 묻혀 있고
그 자리 밑은 팥청석 이라 시신 묻을 때 청석을 뜯지는 못하고 주변의 흙을 긁어모아 시체를 덮기만 했을 것이니 경사진 청석
땅에 몇년이 지나 덮었던 흙은 비바람에 흘러내리고 해골과 뼈대 조각만 노출되고 흩어젔으니, 내가 고교 졸업하던 해 여름
어느날 저녁나절 내 앞날 진로도 갈피를 못잡고 마음이 이상하게 싱숭하고 해서 혼자 뒷산으로 올라 각골 서낭댕이 지나 거기
까지 가니 해는 서산에 걸리고 동그란 해골만 있기에 이사람의 부모 가족은 십 여년 지나도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먹먹하고 눈물을 감당 못하여 해골을 잡고 한참을 울고나니 해는 지고 주위가 어두운데 멀리 못둑에서 못난
자식 찾아 부르는 내 어머님의 소리가...아아 들리듯 말듯 그소리가 ...참을수 없어 이만 써야겠다.
11. 30 일. ~~~~~ 꺼뚝골 서낭댕이를 지나 굼에 바람골 능선을 잔 소나무 해치며 걸어가면 공동묘지 까지는 가고
옥메넘는 서낭댕이 부터는 골프장에서 서분으로 가는 길을 없에버려 어떻게 가야하는지 안 가보고는 모르겠다. 곧 멀지않은
내가 가본 후에 마을 일주하는 방법을 알아봐야 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