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영웅, 관우의 본 모습은 어땠을까.
중국에서는 관우를 “무신”으로 추앙합니다.
공자를 모시는 “문묘”와 관우을 모시는 “무묘”가 있는데
한 때 무묘의 수가 문묘의 수보다 많을 때도 있었답니다.
우리나라 무당들도 대부분 관우 초상, 청룡언월도를 비껴든 형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관우는 무예와 의리의 화신이죠.
(2009.7월 전주로 답사 여행을 갔을 때 남고산성 안에 관우묘가 있는 줄 알았으나 시간 관계로 찾지 못하고 정몽주의 시가 새겨진 만경대에만 갖었다)
삼국지에서 관우는 비루한 유비를 호위하며 대업을 이루어가는 최고의 장수로 추앙하는데 군웅들과 동탁 간 대전에서는 “마궁수”라는 하잘 것 없는 직책으로 여포의 주장 화웅의 목을 단칼에 베어서 침체된 전황을 살리며 군웅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허구입니다)
훗날 조조에게 사로잡혀서도 유비의 식솔을 호위하며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용장 “안량”과 “문추”를 단 칼에 베어버린 후 조조를 떠나면서 조조의 용맹한 다섯 장수를 죽이고 오관을 돌파할 때 “도망자 유비”를 찾아나서는 장면에서는 독자들은 전율하기 마련이죠.
적벽대전에서는 조조를 고의로 놓아주며 예전에 진 빚을 갚고, 훗날 촉나라 오호장군의 한 명인 황충을 격파하고 유비 진영으로 귀순시킴으로서 유비의 전력을 크게 보강하여, 훗날 유비가 한중을 정벌할 당시 황충이 조조의 주장 하후연의 죽이고 한중을 점령하여 유비는 한중왕이 됩니다.
드넓은 형주를 홀로 지키며 그 용맹을 과시하는데 특히 조조군의 주장인 우금과 방덕이 이끌고 온 최정예 7군을 모조리 수장시키고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의 목을 벤 사건은 조조로 하여금 천도까지 고려케 할 정도로 중원을 크게 진동시킵니다.
유비의 서천정벌은 그의 일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서천을 정벌하러 간 유비군 5만이 낙성을 공격하다가 낙봉파에서 군사 방통을 잃습니다. 이 사건은 유비진영의 지각변동을 일으킵니다. 제갈량과 방통은 유비진영의 양대 축으로 전략과 전술이 모두 그들의 머리에서 나왔던 터라 전략상 기본틀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관우와 같이 형주를 지키던 제갈량이 장비와 같이 서천으로 떠납니다.
제갈량이 서천으로 떠나면서 관우에게 당부하며 관우에게 물었습니다.
“조조가 쳐들어 오면 어떻게 대처하려 하십니까?”
관우는 “힘껏 싸우겠습니다.”
제갈량이 다시 묻습니다.
“손권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관우는“죽을 힘을 다해서 물리치겠습니다”
제갈량이 재차 묻습니다.
“조조와 손권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관우는 “ .....................”
이에 제갈량이 관우에게 전략을 제시합니다.
“손권과는 화친하고 조조에게는 대항 하십시오”
관우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유비와 제갈량, 방통, 장비 등이 주력군 5만을 이끌고 서천정벌을 위하여 떠나자
조조는 우금과 방덕에게 정예 7군을 파견하여 형주공략에 나섰으나 관우군에게 7군은 궤멸되고 우금은 사로잡고 방덕은 목이 잘립니다. 사실 이 전쟁은 유비군과 조조군의 한중쟁탈전과 맞물려 유비군의 사활이 걸린 전면전이었으며 관우는 연계전쟁을 훌륭하게 소화해 냅니다.
그러나 관우가 큰 틀을 스스로 깨고 맙니다.
당시 관우가 지키던 형주는 조조와 손권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으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손권과 필연적으로 화친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관우는 지나치게 자존심을 내세워 손권과의 화친을 그르칩니다.
적벽전을 치르면서 조조에게 쫒기던 유비가 기사회상으로 살아났는데, 사실 적벽전은 조조와 손권의 전면전이고 유비는 손권의 조력자에 불과했기에 형주를 온전하게 통치를 자격이 없었으나 전쟁승리 후 손권의 부하 노숙의 주장으로 형주9개군 중 형주,장사,계양 무릉 등 5개군을 임차형식으로 유비진영에 할양하게 됩니다. 사실 그 명목은 오나라가 장강을 등지고 조조를 막아들라는 취지였으나,
관우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손권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서천을 점령하였으니 빌려간 형주땅을 돌려달라”는 손권의 요구에 대해,
유비는 관우를 핑계로 거부하자 손권은 관우의 환심을 사기위해 결혼동맹을 제의하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였는데 관우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누가 범의 새끼를 개한테 보낸다더냐”라고 하며 손권을 모욕하며 사자를 내 쫒았습니다.
그후 관우가 우금을 무찌르고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포위하였는데 다급해진 조조는 손권에게 형주를 공격하라고 충돌질하자 손권은 관우의 배후에서 빈틈을 노립니다.
오나라 여몽장군이 형주와 경계하고 있는 장수였는데 관우가 그의 역량을 아는지라 형주성의 수비병을 넉넉하게 배치하고 봉화를 만들어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여몽이 관우의 경계심을 풀고자 병을 핑계로 물러나며 나이어린 육손을 총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그러자 관우는 곧바로 형주의 수비병으로 번성을 공략하기 위해 돌렸는데 여기에서 관우는 또 다른 큰 실수를 범합니다.
늘어난 군사로 인하여 식량이 모자라자 손권 진영의 군량미까지 허락 없이 사용하여 손권에게 전쟁이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사실 관우가 손권의 군량미를 도둑질 할 이유가 없었지만 인접한 자국 태수 미방, 부사인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였으며 이들은 후방지원을 거부하고 관우의 패망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후환이 두려워 오나라에 투항하죠.)
여기에서 관우의 성격상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아랫 사람들에게는 관대한 반면 같은 반열의 장군이나 사대부들에게는 지나친 자존심 때문에 사이좋게 지나지 못하여 작게는 자신을 망치고, 크게는 국가대사를 그르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곧바로 후방에서 여몽장군의 기습을 받게 된 관우는 조조군의 협공까지 받게되어 맥성(아주 작은성)으로 퇴각하였다가 오나라 장군 동습 등에 사로잡혀 양자 관평과 같이 참형에 처해집니다. 손권의 끈질긴 항복요구를 거절하고서 말이죠.
관우의 죽음은 삼국의 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킵니다.
관우가 죽은 후 그 복수를 다짐하며 부하들을 심하게 다그치던 장비도 직속부하 범강,장달에게 죽임을 당하고,(장비는 관우와는 반대로 사대부에게는 관대하나 부하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대함으로서 최후를 맞게 되죠) 복수를 위해 촉나라의 주력을 이끌고 오나라와의 전면전에 나섰던 유비도 참패를 당하며 주력군 70만(사실은 7만 정도라고 보아야 함)과 마량 등 우수한 두뇌들을 모두 잃고 자신도 백제성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습니다.
그 후 촉나라는 제갈량이 동분서주하며 노력해 보지만 30년 후 위나라에 병탄되며 삼국지의 종말을 고하고 혼란한 미완의 통일제국 - 진나라로 이어집니다.
관우는 본국과의 연계작전을 이해하지 못하여(혹은 무시?)오나라와 화합하지 못하였으며, 또 무리한 작전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동료장군과 반목하여 자신과 국가대사를 망칩니다. 결국은 제갈량과 유비가 구상한 삼국정립의 구상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하며 국가 패망에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이런 관우를 신격화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관우가 살던 시기와 그 이후 진나라를 거쳐, 오호16국 시대, 위진남북조시대까지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보다 더한 혼란기를 맞습니다. 끊임없이 전쟁하며 무수한 국가가 생멸을 반복하게 되죠. 이 과정에서 군주들은 관우 같은 우직하게 충성할 무장들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으며 관우가 거기에 딱 맞는 모델이었던 겁니다.
이후 15세기에 나관중이 소설 삼국지를 집필하면서 삼국시대 이후 민간이나 국가차원에서 신격화한 산물, 설화 등을 소설 삼국지에 녹이면서 관우에 대한 우상화는 정점에 달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우의 중대한 성격적 결함과 결코 앞서가지 못했던 지략, 국가패망의 결과는 자연스럽게 묻히게 됩니다.
원래 유비와 제갈량의 계획은,
삼국이 정립되면 오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형주방면과 한중방면 양측으로 군대를 몰아서 위나라를 공격하여 중원을 수복하다는 큰 틀을 짜고 있었는데(유방의 항우공격을 본떠서) 관우의 우매한 처신으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관우가 죽음으로서 드넓은 형주땅, 전진기지를 잃고 의형제들(유비와 장비)까지 비명횡사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촉나라는 출구 없는 우리 속에 갇힌 형국이되어 헤어나지를 못하다가 결국 망하고 맙니다. (제갈공명은 중원으로 나갈 기틀을 닦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오장원에서 최후를 맞습니다.)
우리가 삼국지에서 보는 관우의 모습은 15세기 전후의 과장된 모습입니다.
소설이 아닌 “진수의 삼국지(기전체)”를 읽어보면 화려하지 않은 관우의 모습을 알 수 있죠.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실패한 CEO의 표본인데 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