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장 28 - 41절
"모임이 흩어지게 하니라"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솔로몬 성전이 엄청나게 컸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크게 잡아도 길이가 30m, 넓이가 10m. 평수로 하면 90평 정도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 크기에 비해 아데미 신전의 크기는 137m에 69m로 평수로 하면 2800평이 넘습니다. 피라미드 같은 경우는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데 아데미 신전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규모를 자랑하는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서 팔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조합장,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했을 때 에베소 상인들이 일제히 분노에 가득하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쳤는데 온 시내가 요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소동을 일으키면서 바울을 찾으려고 힘을 썼는데 정작 바울은 찾지 못하고 바울과 함께 다녔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서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에베소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희생양처럼 되어버린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구하기 위해서 연극장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이고 바울의 제자들이나 친구들은 바울에게 그곳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권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상황이 매우 심각했던 것입니다. 아마 바울이 그곳에 들어갔었더라면 바울의 모습은 사도행전 19장에서 끝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막상 이들이 모여서 확인을 해 보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서도 분란이 일어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무엇 때문에 그곳에 모였는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시내가 온통 요란할 정도로 사람들이 모이기는 모였는데 왜 모였는지 모르는 기이한 일이 발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분노로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에베소 사람들처럼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그냥 휩쓸려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노의 부작용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분노가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의 달스트롬 교수는 의대생을 대상으로 분노와 죽음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적대감이 높은 그룹과 낮은 그룹을 정하고 25년이 지나 그들이 50대가 되었을 때의 사망률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분노와 죽음의 상관성을 명확하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적대감이 높았던 그룹은 낮은 그룹보다 사망률이 7배나 높았고, 심장 질환자도 5배나 많았습니다. 법대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법대생 시절에 적대감 수치가 높았던 그룹은 이미 20%가 사망했지만 반면에 낮은 그룹의 사망률은 4%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분노라는 것이 한순간은 시원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명줄을 끊는 것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어리석은 모습은 반드시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분노의 상황 속에서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41절 말씀에 보면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분노에 의해 모여진 사람들은 분노가 사그라지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모여서 두 시간 가량 소리를 지르면서 분노를 해소했더니 그 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안에 알지 못하는 분노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생긴 분노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배신감이나 크고 작은 아픔 때문에 갖게 된 분노도 있을 것이고, 정치적 분노나 사회적 불신으로부터 생긴 분노 등 엄청나게 다양한 분노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쌓여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신이 유혹을 하면 그곳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분노를 쏟아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노가 얼마나 허무하냐면 그렇게 요란했던 소동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사라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만든 신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믿지만 우상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밟으면 밟을수록 더 성장하고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결국 이방 땅으로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에서 일어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또 다른 헬라 문화권으로 급속히 퍼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생명의 종교는 쉽게 흩어져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상을 믿는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쉽게 흩어져서는 안 됩니다. 흩어진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에베소 사람들이 보여준 이런 흩어짐의 모습으로는 절대 믿음의 생활을 잘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던 온 인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언어를 다르게 하셔서 흩으셨던 심판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상을 좇던 에베소 사람들처럼 흩어지거나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서 흩어졌던 것처럼 쉽게 흩어지는 모습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을 통해서는 이렇게까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습관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문화들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여서 받았던 은혜들을 서로 챙기면서 한 주간 내내 그 은혜 아래서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습관이 되어야지 한 주에 한 번씩 생사를 확인하는 수준으로 모였다가 폐하는 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각자가 살아야 할 삶의 공간이 있고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는데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처럼 그런 삶을 다 포기하고 주야장창 모여 있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육체는 각자의 삶의 처소로 돌아 가지만 마음만큼은 하나가 되고 삼겹줄을 이루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영적 관계는 한 주간 내내 끊임없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러 왔지만 잠깐 모였다가 흩어지기 위함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교제를 통해 맛보게 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일주일 내내 함께 경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베소 사람들처럼 그렇게 쉽게 흩어지라고 우리에게 특별히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두 시간 뜨겁게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하다가 또 흩어져서 남처럼 살다가 습관처럼 다음 주에 모여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오늘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하고 우리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솝우화에 보면 사이좋은 네 마리 황소가 있었습니다. 어딜 가든지 함께 다니고 좋은 풀밭을 만나면 절대로 먼저 나서지 않고 함께 사이좋게 풀을 뜯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힘을 모아 함께 헤쳐 나갔습니다. 그런 황소들을 잡아먹기 위해 노리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였지만 네 마리의 황소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황소를 잡아먹을 궁리를 하던 사자는 풀을 뜯다가 다른 세 마리에게서 조금 뒤처진 황소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놀란 한 마리 황소가 친구들에게 뛰어가려는 데 사자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다른 황소들이 그러는데 너 혼자만 풀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흉을 보더라." 그렇게 사자는 다른 황소들에게도 거짓말로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황소들이 그러는데 네가 덩치가 가장 작고 힘이 약해서 별로 쓸모가 없데." "진짜 맛있는 풀이 나는 언덕을 너한테만 알려주지 않는다더라." "네 뿔이 너무 못생겨서 보기 싫데." 계속되는 사자의 거짓말에 사이가 틀어진 황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게 되어 뿔뿔이 흩어졌고 결국 차례대로 사자에게 잡아먹혔다고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정말 우리가 귀담아 들어여 할 구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흩어질 거면 무엇하러 모입니까?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흩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자리에 굳이 온 것이고 그럴 생각으로 함께 예배드리고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배어 있는 흩어짐의 습관을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흩어지라고 원근각처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도 아니고 쉽게 흩어져서 뿔뿔이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믿음의 공동체를 허락해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라고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는 복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만족함을 누리기 위해서 모였다가 흩어지는 잘못된 습관이 우리에게 있다면 철저하게 버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모이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면서 기뻐하며 살다가 주님 오시는 그날 다함께 함께 천국 가라는 의도인 것을 분명히 깨달으시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은 습관을 버리고 마음으로 더욱 모여서 그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