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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석산과 작성산은 한남정맥에서 가지 쳐 나온 꽤 뚜렷한 산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두 산은 바위가 별로 없는 흙산으로 부드럽고 숲이 우거져 있다. 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얽힌 산이어서 은발의 산행에 알맞고 겨울 산행에 특히 좋다.
은석산과 작성산 산행의 멋은 산길에 있다. 소나무가 거의 없고 참나무 등 활엽수 숲이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산길에 낙엽이 두텁게 깔린다. 그래서 푹신하고 빠삭빠삭 소리도 정겨워 걷는 재미가 유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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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석사 골짜기의 명소,낙엽 깔린 널찍한 너럭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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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석산은 여름에도 좋다. 은석사 들머리 은지리에서 은석사로 들어가는 긴 골짜기의 개울이 아름답고 물도 제법 많다. 온 산이 거의 흙산인데도 은석골의 개울은 바위와 돌로 이루어져 있어 물이 맑고 시원하며 경관도 좋다. 여기 개울가에 넓은 너럭바위도 잘 알려진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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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석사 삼성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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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산은 버드우드 골프장을 오른편으로 싸고 도는 긴 등성이 숲속 길이 편안하고 호젓하다. 은석산과 작성산은 높이와 모양이 비슷한 산으로 서로 이웃해 있어 어느 한 산만을 산행하기에는 너무 싱겁다. 그래서 두 산을 모두 오르는 것이 좋다. 두 산이 한 줄기에 이웃해 있지만, 두 산 사이에 있는 개목고개가 매우 낮아서 산행을 이으려면 한 산을 다 내려간 뒤 새 채비로 다음 산을 올라야 한다. 천안시 자료에는 은석산이 대순 같이 수려하고 수석이 아름다우며 산 정상에 기우제 제단이 있다고 써 있다.
은석산은 옛절 은석사가 있고, 영성군 박문수 어사의 묘가 있는 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성군 박문수는 훌륭한 어사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에도 밝았다. 그 밝은 풍수지리 지식을 살려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죽기 전에 미리 잡아둔 묏자리)를 은석산으로 정했던 것이다. 벗처럼 여긴 영성군이 66세로 죽자 영조는 정승으로 임명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한다.
은석산에는 불개미가 많다. 불개미는 소나무 잣나무를 망치는 송충이의 천적이다. 영성군 묘가 있는 은석산의 소나무를 송충이가 지키고 있는 셈이다. 영성군이 어사 시절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살려준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은석산의 불개미가 되어 송충이를 잡아 박 어사에게 보은하는 것이라 한다. 은석산의 불개미를 다른 산에 옮기면 살지 못한다고 한다.
은석사와 영성군 묘로 들어가는 은석골 들머리에 영성군의 사당과 충헌공 박문수 유물관이 있다. 충헌공은 영성군의 시호다. 유물관에는 보물 제1189호로 지정된 영성군 영정이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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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개목고개에서 안내 표지판을 보고 있다. 2 영성군 박문수 사당. 3 본인이 골라 놓고 거기에 묻힌 영성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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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석사는 영성군 묘소 아래 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여러 차례 불에 탔다고 한다. 절을 새로 짓는 중이어서 지금은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다. 법당의 목불이 지방문화재라 한다. 왼편 언덕 위의 삼성각만이 옛 모습이다. 병천쪽에 찻길이 터져 있다.
은석산과 작성산 사이 잘록이를 개목고개라 한다. 옛날 근처에 사는 어느 농민이 장에 다녀오다 술이 취해 개목고개에서 잠이 들었다. 마침 그 때 산불이 나서 타죽게 된 것을 따라온 개가 몸에 물을 묻혀와 딩굴면서 주인을 살렸다. 그러나 개는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고개를 개목고개라 불렀으며 의구비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구비는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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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목천현편 산천조에 작성산은 있으나 은석산은 나와 있지 않다. 불우조에는 은석사가 작성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천안시의 자료나 은석사 스님은 은석산의 이름이 은 은(銀) 자를 쓴 은석산(銀石山)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은혜 은(恩)자를 쓰고 있다. 은석사 스님은 은석산에 돌이 많고 돌을 깨면 속이 하얗다고 해서 은 은자를 쓴다고 했으나 믿을 수는 없었다.
하나 더 밝혀야 할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목천현편 성지조에 작성산에 성터가 있다고 적혀 있다. 산행하며 작성산에서 분명한 성터를 보았다. 천안시의 자료에도 없고, 그 누구도 작성산의 성터를 아는 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