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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생활
태환이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자 막노동을 했다. 집 짓는데 따라다니며 잡부 노릇을 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석회 사모리(모래와 석회와 물을 섞어 반죽하는 작업)를 하고, 벽돌을 나르며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했다.
기술자는 벽돌을 쌓거나 못질을 했지만, 잡부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래서 태환이는 저녁에 일 끝내고, 집에 오면 끙끙 앓았다. 그러나 그런 일거리도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생기는 일거리도 경쟁이 치열해서 차지하기가 힘들었다.
태환이는 그런 막노동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일이 서툴렀다. 그래서 기술자들은 경력자를 쓰려 하지,
태환이처럼 초보자를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큼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한때는 나일론 버선을 만들어서 가게에 넘기는 일도 했는데, 그것도 버선이 예쁘지 않아서 잘 팔리지 않았다.
태환이는 그렇게 되지도 않는 장사를 하다가 몇 푼 있던 밑천까지 다 날리고 말았다.
결국 태환이는 차라리 시골 가서 농사나 짓는다며 충주 독골로 내려갔다. 간난이는 말리지 못했다.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골에 가면 그곳은 농사짓는 곳이니, 부자는 못 되도 밥은 굶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위도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이발을 한다고 하지만, 놀 때가 태반이었고, 일을 한다고 해도 벌어 오는
돈은 간신히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던 중 경기도 여주 ‘주암리’ 라고 하는 곳에 이발소가
하나 있는데 운영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3개 부락 주민들을 상대로 이발을 해주는데,
이발 요금은 하곡과 추곡으로 두 번에 나누어서 받는다고 했다. 간혹 현금을 내고 이발을 하는 주민도
있지만, 몇 명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마침 그곳에 재를 하나 넘어가면 양동면 ‘걷다니’ 라고 하는 동네가 있는데, 그곳에 간난이 시댁쪽으로
5촌 당질녀가 살고 있다. 그래서 간난이는 그 당질녀한테 이발소에 대해 좀 자세히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후 당질녀한테 연락이 왔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런 곳이 있기는 있는데, 지금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하고 있는 사람이 추곡 때까지 하고서 그만둘 예정이므로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걷다니 마을에도 이발소가 없어서 이발을 하려면 주민들이 양동면까지 가던지
아니면, 재를 넘어 ‘주암리’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정이 괜찮으면 우선 걷다니로 와서 가을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그 마을 사람들 이발을 해주면서 있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만일 그렇게민 해준다면 기거할 집도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간난이는 어차피 사위가 지금
서울에서 놀고 있다시피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통지를 하고, 집세를 정리해서 6월 중순경에 양동으로
이사를 갔다.
중앙선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강원도 경계선 바로 직전에 있는 역이 양동역이다.
양동역에서 우측으로 약 십오리 정도 산골로 들어가면 다리가 하나 나온다.
주암리로 넘어가는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내천이 산자락을 타고 흐르기 때문에 다리가 있는 것이다.
이 곳은 여름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물이 흐른다.
그래서 장마철에는 많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 다리가 꼭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길은 산골에 있는 길이지만 차량도 다닐 수 있을 만큼 꽤 넓게 양동면에서 시작해서 여주군
주암리까지 재 너머로 뚫려 있었다.
걷다니 마을은 바로 이 다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동네는 다리에서도 삼 사리 가량 산골로 더
들어가야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다리 옆 길가에 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은 따로 마당도 없고,
그냥 길 옆에 덩그러니 집만 있는 그런 집이었다. 그리고 그 집 앞쪽에 있는 길 아래로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집은 얼마전부터 비어 있으며, 살던 사람은 서울로 이사를 갔고, 지금은 임자가 따로 없는
집이라고 했다.
바로 이 집이 간난이와 딸 경숙이 부부가 이사오게 된 바로 그 집인 것이다.
이렇게 이곳으로 이사를 온 다음날부터 간난이 사위는 이발 도구를 챙겨서 걷다니 동네에 가서 이발을
해 주었다. 때로는 면에 가는 도중에 간난이네 집에 들러서 머리를 깎고 가는 이도 있었다.
집 앞이 바로 냇물이므로 거기서 머리를 깎고, 감을수도 있었다. 완전 자연 이발관이다.
그 시절 시골 이발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이발 후에는 머리를 본인들이 직접 감고, 손질도 하지 않고,
수건으로 물기만 대충 닦고서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 넘기면 되는 것이다.
이발비도 바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고, 머리를 깎고 간 사람이 누구라는 것만 일단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모곡으로 받았다. 모곡을 받을때도 머리 깍은 식구가 몇 명인가를 구별하면 된다.
그래서 모곡을 받을 때까지 한번을 깍던지, 열 번을 깍던지, 그것은 본인들이 형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발 횟수도 몇 번을 깎던지 본인의 의향대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사일이 바쁠 때는 수염이
덥수룩해도 면도도 하지 않고 다니다가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 먼 거리로 나들이를 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머리를 깎는 것이 시골 농사짓는 사람들의 이발법 이었다.
간난이는 서울에 살 때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도 특별히 할일이 없다. 딸 경숙이가 낳은 외손녀 미선이하고
놀거나, 심심하면 나물도 뜯고, 또 마을에 살고 있는 당질녀네 집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당질녀는 늘 들에
나가 일을 했기 때문에 간난이하고 한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간난이는 나물을 뜯던지 마실을 가던지 했고, 그럴때마다 외손녀 미선이를 업고 다녔다.
외손녀 미선이는 걸음마를 막 시작해서 아장아장 걸음을 걷는 것이 한 참 귀엽다. 그래서 외손녀하고
있으면 별로 심심하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충주로 이사간 아들 태환이가 왔다. 얼굴이 새까맣게 변한 것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말로는 그냥 요즘 좀 한가해서 다니러 왔다고 했다. 그런데 간난이가 눈치를 보니까 농사가 힘이
드는 모양이다. 말이 농사지, 제 땅도 없이 당숙네 집에서 일꾼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난이는 이런 아들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프고 쓰렸다.
전에 간난이네가 농사짓고 살 때도 외동아들로 귀하게만 컷지, 농사일이라고는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아들이었다.
간난이는 이런 아들을 공부도 많이 가르치고, 귀하게 잘 키워서 훌륭하게 만들려고 했었는데 그런 아들이
지금 이렇게 남의 집에서 일꾼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태환이는 며칠 머물다가 농사가 끝나면 또 오겠다고 하며 나무를 해 놓고 다시 충주로 내려갔다.
태환이가 가고난 후 간난이는 산에 올라가서 한참을 울면서 기도를 했다.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는 저에게 있으니 무슨 벌이든 저에게 주십시오, 태환이가 잘될 수
있다면 무슨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제발 태환이를 지켜 주십시오, 태환이에게 복을 주십시오.”
가을이 되어 여주 주암리에 있는 이발소를 인수 받게 되어 간난이네는 또 이사를 갔다.
인수라고 하지만 그냥 들어가서 이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가게 세는 모곡을 받아서 곡식으로 주면 되는 것이었다. 이발소에 방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세식구는
그냥 그 방에서 다같이 생활을 했다. 단칸방이기 때문에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런데로 지낼만 했다.
주인집은 철물 가게를 하는데 식구들은 모두 마음이 좋았다. 성은 안씨라고 했다.
주암리는 생각보다 꽤 컸다. 가게만 해도 잡화점이 두 군데나 되고, 철물점, 이발소, 다방, 술집, 정육점
등 있을 것은 다 있는 웬만한 면 소재지만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엔 교회도 하나 있는데, 집주인 안씨의
형님이 전도사로 있으면서 그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교회는 언덕배기 산중턱에 간신히 지어져 있었다.
그 교회는 돌과 흙으로 지어졌고, 지붕은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교회 바닥은 흙바닥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나일론 장판을 깔아 놓았다.
교인도 많이 모이면 30명 정도 되고, 보통 때는 10명이나 모일까 말까하고, 그것도 저녁 예배 때엔 5명
정도밖에 안 모였다. 전도사님 두 식구, 신 집사네 두 식구, 잡화 가게를 하는 김씨 부인 정도다.
그리고 새벽 기도엔 전도사님 혼자인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도 전도사님은 잘 버텨 가고 있었다.
다른 농사나 무슨 생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로 잘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전도사님은 몸이 약해서 매일 골골했다. 그래서인지 전도사님은 매일 집에 있거나 아니면 교회에 있었다.
성경과 찬송을 항상 끼고 살았는데 이상한건 집에 있을 때도 늘 성경을 보고, 교회에 가서도 늘 성경을
보는데 설교를 할 때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건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예배 때마다 늘 열 명 정도 앉아 있는 교인들도
태반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전도사님은 그래도 자기가 하려고 맘 먹었던 설교는 끝까지 다 했다.
그래도 꾸준히 교인들이 오는 걸 보면 그분의 골골하면서도 늘 변함없는 신앙생활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나보다.
간난이네가 주암리로 이사 오고, 식구들이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덕분에 간난이, 사위, 딸, 손녀
이렇게 네 명이나 갑자기 교인이 늘은 것이다. 평상시 교인이 열명 정도 밖에 안되는 교회 입장에서 보면
보통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2명은 집사였다. 그리고 전도사가 바라본 그들의 모습을 대략 묘사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권 간난 집사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머리는 희끗희끗 했지만, 얼굴은 뽀얗고 귀티가 났고, 그 모습에서
인자하고 자상한 어느 대가집 안방마님 같은 풍모가 느껴졌다. 거기에 상냥하기가 봄바람 같고,
꾀죄죄한 병객 시골 전도사를 보고 전도사님! 전도사님 하며 그 친절함이 성모 마리아 같이 느껴질 정도다.
또 그의 사위 이용준 집사도 머리카락이 곱슬곱슬 하고 올백으로 멋지게 빗어 넘긴 것이 어느 외국 영화
배우 같다. 거기다 말도 잘하고 상냥하기도 간난이 뺨 칠 지경이다.
간난이 딸이라고 소개한 윤 경숙은 얼굴이 예쁘고, 동글동글 한 게 인형 같아서 누구든지 한 번 보면
사귀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킬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형같이 생긴 미선이가 아장아장 걸으면서 생글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예뻐서 쓰다듬어 주고 싶고, 업어 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겼다.’
이렇듯 전도사가 봤을때 간난이네 식구들은 정말로 여기 사람들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간난이네가 이사온 뒤로 이곳 주암리 교회에는 생기가 돌았다. 교인도 전보다 많이 늘었고,
전에 잘 나오지 않던 교인들도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면 찬송 소리도 우렁차게 울려 퍼졌고, 시들했던 주일학교도 다시 활기를 띠었다.
동네에 몇 명 안 되는 고등학생들도 교회에 나올 정도였다. 그것도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일도
열심히 했다. 나와서 교회 청소도 하고, 주일학교 학생도 가르쳤다.
그래서 주일학교도 생기고 청년회도 생겼다.
어떨때는 전도사님이 몸이 영 불편하면, 간난이 사위에게 설교도 부탁했다. 간난이 사위는 설교를 잘했고,
간난이는 기도를 잘했다.
다른 교인들은 기도를 하면 항상 무엇인가를 그저 달라고만 했다. 돈도, 건강도, 병도 고쳐 주고, 또 미처
구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러나 간난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설교를 시작하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고,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또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한 반면 간난이는 죄인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게하고,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어느날이었다. 한번은 약방집 부인이 화가 잔뜩 나서 간난이를 찾아왔다.
그래서 간난이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자기 남편 때문이란다. 어젯밤에 술이 잔뜩 취해서 다른 사람이
업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간난이가 알고 있는 약방 주인은 원래 술을 못 마셨다.
그래서 물어보니 마음이 착해서 누가 술을 권하면 사양을 못하고, 주는대로 다 받아먹어서 이렇게 가끔
업혀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원래 술을 못 먹는 사람이라 이렇게 술을 먹으면 술을 이기지 못하고, 이삼일은 술병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남편의 성격 때문에 지금 약방집 부인은 잔뜩 열이 받아 있는 것이다.
“아 글쎄 아무리 마음이 착해도 그렇지, 한잔만 먹어도 그 고생을 하면서 이렇게 허구헌날 사양을 못하고,
받아 먹고 저 고생을 하니, 그게 착한거요? 멍청한 거지?” 하면서 속상해 죽겠다고 했다.
간난이는 그 말을 듣더니 빙그레 웃으며 “착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착하다는 것은 아무리 착해도 나쁠 게 없지요. 왜 그러냐하면 그 착한 마음이 언젠가는 복을
불러들이거든요. 안 그래요? 애기 엄마?”
약방댁은 간난이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기 남편이 착하다는 것은 자기도 알고,
남들도 안다. 덕분에 약방이 제법 잘됐다. 그래서 돈도 꽤 모았고, 그 돈으로 땅도 샀다.
이웃 동네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와서 약을 사 갈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약방에서 약을 사 먹으면 병이
잘 낫는다고 했다. 그제서야 약방집 부인은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그 양반이 착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거였구나!’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남편이 술을 안 마시게 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그런데 미선이 할머니, 어떻게 술을 안 먹게 할 수는 없을까요?”
“있지, 왜 없겠수? 아주 좋은 수가 있어, 이건 특효약이라오” 하면서 간난이는 약방댁을 지그시 들여다
보았다. 약방 댁은 도대체 그 방법이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물어봤다.
“그게 뭔데요? 어려운 일인가요?”
“아니요, 아주 쉬운 일이예요,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일이지”
“그럼 빨리 알려 주세요 ”
“그전에 나와 약속을 해야 하오. 내가 알려주는 대로 꼭 하겠다고. 만약 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하지
않으면, 오히려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우” 간난이는 약방댁을 은근히 겁주었다.
약방 댁이 간난이의 눈을 보니, 그 속엔 인자함과 진실된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분과는 어떠한 약속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대답을 했다.
“미선이 할머니의 말씀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다 따르기로 약속 할게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나를 그렇게 믿어 주니 정말 고맙구료. 그 방법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라우”
“예? 교회에 다니는 거라고요?”
“그렇다오. 교회에 다니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해결이 되지. 왜 그러냐 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술을
안 먹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수”
“그거야 다들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그러니까 이제 누가 술을 권하면 저는 교회를 다녀서 술을 못 먹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면 해결되지
않겠소?”
“아~ 정말 그러네요. 그런데 우린 예수를 안 믿는데 어떻게 하지요?”
“예수를 믿는 거야 교회에 다니다보면 차차 믿게 될 것이고, 지금은 우선 그냥 다니면 되는 거요”
“미선이 할머니, 그럼 아까 ‘꿩먹고 알먹고’ 라고 했는데 또 뭐가 좋은게 있나요?”
“그럼 당연히 있지, 다녀보면 나중에 다 알게 되겠지만, 교회에 다니면 좋은 일이 많아요. 일단,
술을 안 먹어 좋고, 복도 많이 받고, 나중에 죽으면 천당 가서 좋고 어때요? 이만하면 꿩먹고 알먹고
아니요?“
그리고나서 다시 한번 약방댁에게 다짐을 해본다.
“그러면 아까 나와 약속을 했으니 내일이 주일이니까 나와 함께 교회에 가는 거요? 알았지요?
지금 가서 남편에게도 이야기를 해 놔요. 내일 아침에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그렇게 해서 약방집이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나중엔 원래 착한 사람들이라 진실한 교인이 되었고,
술 문제도 깨끗하게 해결이 되었던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이제 가을 추수도 끝났다. 그래서 간난이 사위는 여름내 머리를 깎아 준 이발삯을
받으러 다니느라고 요즘 한 참 바빴다.
지금은 농촌 일손이 한가한 때라 머리를 깎으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간난이 사위는 머리 깎아 주랴, 모곡 받으러 다니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쌀쌀한 이른 아침이었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간난이가
대문을 열고 나와보니 막걸리 장사를 하는 김씨 영감이 웬 청년과 함께 서 있었다.
“웬일이세요.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하면서 뒤에 서 있는 청년을 보니 아니 이게 누군가?
아들 태환이었다. 태환이가 조그만 여행용 가방을 하나 들고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이 청년이 아드님이라고 해서 이리로 데리고 왔어요.”
“어머니, 저예요 제가 왔어요.”
“아니, 네가 어떻게 된거냐? 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떻게 김 영감님하고 같이 오는거냐?”
“그게 어제 이 젊은이가 밤늦게 와서 사람을 찿길래, 너무 늦은 밤이라 일단 우리 집에서 자라고 하고,
이렇게 아침 일찍 찾아온 거예요”
“그래요? 아이고 정말 고맙습니다. 좀 들어오시죠?”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며 영감님은 잡을세도 없이 돌아갔다.
간난이는 처음에 아들을 잘 몰라 봤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신발은 군화를 신고, 잠바를 걸쳤는데 머리는
꺼부숭하고, 면도도 하지 않아서 수염은 꺼칠한 것이 삐쩍 말라서 처음에는 태환이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머리를 깎으러 왔나 보다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니 그제서야 간난이는 청년이 아들 태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태환이가 웃는 모습은 너무나 제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간난이 남편 윤 옥씨도 늘 그렇게 빙그레 웃곤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에도 태환이가 빙그레 웃을 때면 ‘씨 도둑질은 못한다더니’ 하고 생각을 하곤 했다.
아들의 모습을 보니 간난이는 무엇인가 주먹만한 것이 가슴을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고 저것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으면 저렇게 변했는가?’ 그러나 간난이는 절대로 아들 앞에서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자”
“미선아 외삼촌 왔다”
“뭐라고요? 누가 왔다고요?” 이 서방이 먼저 나왔다.
그간 태환이는 고생이 많았다. 처음에는 충주에 내려가서 당숙네 집에서 농사일을 했다.
그러다가 도봉으로 가서 교회에 딸린 헛간에 방을 하나 만들어 놓고, 거기서 살면서 나무도 해다 팔고,
품도 팔면서 살았다.
때로는 학교 운동회 때 학교로 과자와 과일을 가지고 와서 팔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생활을 하기엔 너무나 힘들었다.
지난 가을엔 기계 타작 하는데를 따라 다니면서 일을 하다가 병이 나서 달포 동안을 앓아 누워 있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몰골이 이 모양이 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태환이 매형이 말했다.
“처남 그러면 충주로 다시 가지 말고, 여기서 같이 살자. 지금 여기 일이 혼자서 하기엔 너무 바빠서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하나 두려고 하던 참이었거든, 그런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힘들어 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처남만 괜찮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때?”
그날부터 태환이도 여주에서 살게 되었다. 태환이는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어서 삼사일 이 지나자 아이들
단발머리며 상고머리도 깎을 수 있었다. 보름 후에는 어른 머리도 깎았다.
손님들이 모두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라 솜씨가 좀 서툴러도 별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또 일년이 지나 가을이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태환이 부인이 찾아왔다.
태환이가 그랬던 것처럼 태환이 부인도 그렇게 불쑥 찾아왔다. 그동안 태환이 부인은 조치원 친정에 가
있었다고 했다. 그것도 큰 딸 아이를 하나 데리고, 친정에 얹혀 있으려니 아무리 친정이라도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심하고 무능력한 남편을 잘못 만나서 태환이 부인은 신혼 때부터 줄곧 이렇게 고생만 하며 살았다.
간난이는 할 수 없이 집주인 안씨에게 부탁을 해서 방 하나를 더 빌리기로 했다. 다행히 이 집이 집터가 꽤
넓어서 가게가 딸린 집 뒤로도 집이 두 채나 더 있었다. 그래서 그중에 작은 집을 빌리기로 했다.
태환이는 그길로 부인과 함께 조치원으로 가서 친정에 맡겨 놓은 살림을 대강 챙겨 가지고 왔다.
살림이라고 해봐야 보따리 두 개가 전부였다. 그렇게 여주에서 살림을 합치고, 간난이네는 대가족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주생활은 여의치가 않았다. 사실 시골에서 모곡 이발을 해서 생기는 수입이라고 해봐야
일년 동안 다 합쳐도 보리쌀 너 댓 가마, 쌀 너 댓 가마가 고작이었다.
그러니 식구가 어른이 다섯이고, 아이가 둘, 모두 일곱 식구나 되는 대가족에게는 터무니 없이 모자른
것이었다.
난방은 주로 태환이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땠다. 농토가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부족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듬해 여름 보리 모곡 때까지 견디다가 태환이는 결국 다시 충주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태환이 외가가 있는 멀미로 가서 그동안 배운 기술도 있으니 이발을 한번 해 보겠다고 했다.
태환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미리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이 아니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다가 불쑥 행동으로
옮기곤 했다. 그래서 같이 사는 식구들은 항상 불안하고, 힘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환이 부인은 늘
어쩔 수 없이 남편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렇게 해서 태환이네 세 식구는 가지고 왔던 보따리와 이발 연장 한 가지를 더 챙겨서, 왔던 것처럼
그렇게 불쑥 여주를 떠났다.
간난이네도 아들 태환이네 식구가 떠난 후 일 년여를 더 살다가 여주를 떠나 사위의 누이가 살고 있는
전라도 송정으로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