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자본주의 또는 후기산업사회로 규정되는 20세기 후반의 서구사회가 만들어 낸 문화운동이며 사회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지난 300여년 동안 근대 이후의 서구사회에서 일어났던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속에 잠재해 있던 모순과 갈등을 도발적으로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포스모더니스트들은 18세기의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합리적(논리적이고 합목적적인) 사고에 의해 이룩한 문명을 착각과 조작 위에 건설된 것으로 보고 그동안 억눌린 감각, 느낌과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인간의 다양하고 혼돈된 모습을 그대로 긍정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비진리, 현실/비현실(가상, 환상), 정상/비정상, 유용/무용을 구분하는 원칙을 부정하고 진리의 절대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성이라는 가면 속에 숨겨진 욕망과 의지만이 삶의 근거이다. 포스트모던 예술과 문화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때로는 정신분열증으로, 때로는 장난기어린 유희로, 때로는 진지한 예술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즐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모더니즘의 질서와 효율성을 비웃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시각이 있다. 이 두 관점은 비록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현대의 지배질서를 비판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강도에 따라 우파와 좌파의 시각이 갈라진다. 1) 획일적이고 체제옹호적인 합리주의와 편협한 정신적 측면을 우월하게 보는 기존의 휴머니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탈현대’의 몸부림이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근대주의의 일종으로 보는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예술가와 철학자) 2) 20세기에 들어와서 포드주의적 대량생산과 몰개성적 대중소비의 한계에 부딪힌 현대 후기자본주의가 좀더 새롭고 유연한 방식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작하기 위한 문화이데올로기적 전략이다.(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데이빗 하비, 백낙청, 도정일)
2.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래 철학이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1950년대 말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모더니즘 예술에 반대하는 일단의 예술가들(문학평론가, 소설가, 음악가, 무용가, 사진작가, 팝 아티스트, 건축가 등)에 의해 출발되었다.
예) 문학비평: 찰스 올슨(boundary2) 레슬리 피들리(경계선을 넘고 간격을 좁혀라), 이합 하산(문화, 불확정성 그리고 내재성), 수잔 손탁(해석에 반대한다, 급진적 의지와 스타일) 소설: 제임스 조이스(피네건의 경야), 새뮤얼 베켓(고도를 기다리며), 호르헤 보르헤스(픽쇼네스, 불한당들의 세계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창백한 볼꽃, 로리타), 움베르토 에코(장미의 이름), 로베르트 무질(성격없는 인간), 토마스 핀천(브이, 중력의 무지개), 존 바스 (미로에서 길잃어) 음악: 존 케이지(침묵, O'O''), 루카스 포스(타임사이클), 조지 크람(검둥이 천사들), 밀턴 배빗(필로멜), 스톡하우젠(미크로포니Ⅰ), 폴린 올리베로스(장미의 달), 백남준(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구) 미술: 로버트 라우센버그(코카콜라모형), 프랜시스 베이컨(교황의 초상), 앤디 워홀(팝아트), 로이 리히텐슈타인(만화), 백남준(비디오 아트), 론 키타이(아니, 아니라면) 건축: 로버트 벤츄리(둥근천정), 찰스 젱크스(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 찰스 무어(이탈리아광장), 알도 로시, 제임스 스털링(돔없는 돔), 필립 존슨(AT&T사옥), 마이클 그레이브(포클랜드 공공빌딩), 리카르도 보필(황금수의 광장) 무용: 머스 커닝햄, 이본 라이너(세 개의 바다경치), 루신다 차일즈(기분전환), 로버트 윌슨(스탈린의 생애와 시대) 연극: 에드워드 올비(미국의 꿈), 해롤드 핀터(귀향), 피터 브룩(마라/사드, 한여름 밤의 꿈), 리빙 시어터(브릭), 그로토프스키(묵시록) 영화: 마이클 스노우(파장), 장 뤽 고다르(Vivre Sa Vie), 말콤 르그라이스(풀밭위의 식사), 팻 오닐(소거스 시리즈), 조지 루카스(스타 워즈), 레슬리 손튼(제니퍼, 어디있니), 피터 월렌(애미!), 마이클 스노우(이것도 그래), 백투더 퓨처, 더티 해리 사진: 해리 캘러헌(무수한 이미지), 신디 셔먼(무제), 안드레 세라노(섹스의 역사), 대니 라이온(맨하탄 저지대의 해체), 제리 율즈만
이렇게 예술분야에서 시작된 반문화 운동은 현대의 기계주의와 기능주의를 비판하면서 1970년대에는 지난 300년간 서구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모더니즘’(합리주의, 경험주의, 계몽주의)의 허구성과 지배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진단하고 비판하는 뚜렸한 사상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반인종주의, 반엘리트주의, 반중심주의, 페미니즘 등과 연결된 해체주의 정치이념을 대안으로 제시했고 여기에 많은 철학자들이 가세하여 이론적인 꽃을 피웠다. 철학이론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루소, 니이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등의 독자적인 사상가들을 정신적 선구자로 받아들인 프랑스의 사상가들, 바따이유, 라깡, 푸코, 데리다, 들뢰즈, 리오따르, 보드리야르와 로티(미국), 파이어아벤트(오스트리아, 과학철학자) 등을 통해 서구 사상의 중용한 줄기로 자리 잡았다.
3. 한국의 포스트모던 문화: 90년대 한국 문학과 철학에서의 목소리
1) 한국의 포스트모던 소설의 예: 하일지의 <경마장가는 길>(1990), 김수경의 <유종>(1990),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1991),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 하재봉의 <콜렉트 콜>(1992),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
하일지: “인간과 인간이 처해있는 현실은 자세히 관찰하면 할수록 혼란되고 애매하고 또 때로는 불가해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다. . . 나는 불가해한 것들마져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인간과 그 인간이 처해있는 현실을 임의로 조작하고 왜곡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하일지, “작가의 말”,『경마장 가는길』603) 김수경: “텔레비젼, 신문, 스포츠와 각종 정치적 공약들. . . 나는 이런 것들을 일종의 집단적 마약으로 보았다. 그리고 권력에 중독된 사람들이 다스리는 나라는 정신병원과 같다는 생각이었다.” 장정일: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세계는 진실보다 악의없는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 ”세계가 그렇게 가변적일진대, . . . 왜 소설에서는 소설가가 쓰는 통사구조는 완벽해야 할까?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동일한 인물이 그때 그때의 감정에 따라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다가 추하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2) 한국의 포스트모던 철학의 수용과 비판
김욱동: “요컨대 포스트모더니즘은 좁게는 문학과 예술에 타난 문화현상, 넘ㄹㅂ게는 20세기 후반을 특징짓는 세계관이나 시대정신이다. . . 따라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우리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크게 다름이 없다. 새로운 인식지평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과 인간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한 20세기 후반의 독특한 사고유형이나 사고방식인 것이다.”(『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 447)
김상환: “해체론은 서양이 시작되던 여명기의 어둠을 미래시제의 자격으로 오늘에 되살리고 있다. 서양 문명의 정점에서 닥치는 대재난이다. 서양문명의 황혼을 촉진하고 밤을 알리는 역사철학이 해체론이다. 존재의 근원적 친화력과 미결정성으로 돌아가는 밤, 이곳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다시 하나일 수 있고 연인일 수 있다. 시대는 더듬는 모색과 교미를 기다리고 있다.”(『해체론 시대의 철학』, viii)
이진경: “반면 들뢰즈에게는 일차적이고 작용적인 힘이, 긍정적 의지개념이 ‘욕망하는 생산’이란 개념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이 자신을 통제하려는 코드화된 힘고 권력(의지)에 저항하고 대립합니다. 따라서 주체는 단지 생체권력이 일방적으로 만드는 수동적 생산물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것은 끊임없이 코드화하려는 힘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만들어 냅니다. 이는 근대철학의 한계를 넘어 새로이 ‘주체’의 생산을 파악하는 탁월한 유물론적 관점이라는 게 제 의견입니다.”(『철학과 굴뚝 청소부』, 350-351)
도정일: “리오따르가 이처럼 수동적이고 허약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근대적 대서사에 대한 그의 깊은 불신과, 메타이론의 도그마에 대한 그의 혐오, 지시과 명령의 통합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권력의 폭력에 대한 그의 저항 때문이다. . . 포스트모던 지성이 그런 처방 밖에는 내놀 수 없다는 사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현재 서구 지성이 당면하고 있는 딜레마의 심부를 드러낸다.”(『포스트모더니즘의 쟁점』, 118).
최종욱: "필자는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정치적 권력과 천민적이고도 독점적인 자본의 횡포 그리고 우리의 일상성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상품소비문화에 대한 정치적, 비정치적 비판과 저항이라고 본다. 그런데 ‘포스트’주의자들은 그러한 저항과 비판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무런 효과도 없는 무의미한 행위라고 선전하면서 패배주의와 체념을 조장하고 있다. . . 이것이 바로 ‘인간해방’의 깃발을 이제는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포스트’주의자들에게 필자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다.”(『프랑스 철학과 우리』, 141-142).
제2강 기독교의 두 가지 대응방식: 거부와 수용
1. 기독교 신앙의 방어를 위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독교 복음의 진리의 절대성을 파괴하고 기독교 신앙을 약화시킨다고 보는 입장으로 복음주의 신학자나 철학자들의 다수의 입장이다.
1) 칼 헨리(Cael Henry)
그는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고 진단한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통합적이고 학문적인 세계관 자체를 거부한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진리나 한 사실의 고정된 의미와 목적을 거부한다. 셋째, 모든 사상을 문화적 배경으로 환원시키면서 그 주장의 진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넷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교를 거부하지 않지만, 모든 종교를 개인의 취향과 자의적 선택의 문제로 본다. 따라서 기독교의 초자연적 계시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섯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윤리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죄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기독교와 친화성을 보여준다고 인정한다. 첫째, 양자는 과학주의적 세계관이 갖는 인간 이성중심의 이론보다는 인간의 신념, 의지, 정서를 중시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능적 이성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인간본성이라는 것이다. 둘째, 모든 진리는 역시 문화적 역동성 속에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진리와 문화를 동일시하지 않지만, 세계관의 내용이 문화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문화의 적극적 기능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리상대주의를 더 경계하는 입장에 선다.
2) 엔쏘니 씨슬턴(Anthony Thiselton)
영국의 유명한 신약학자 씨슬턴은 『하나님의 해석과 포스트모던 주체』(Interpreting God and The Postmodern Self, 1995)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독교에 적용될 때의 파괴적 영향을 영국 캠브리지의 신학자 돈 큐핏(Don Cuppit)의 예르 들어 설명한다. 큐핏은 ‘믿음의 바다’(The Sea of Faith)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그의 포스트모던 이해방식을 대중화시켰다. 큐핏은 서구 기독교를 썰물때 물이 빠진 바닷가에 비유하면서 기독교의 성경과 복음에 대한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이해를 포기하고 철저하게 탈규범적이고 모든 종교와 믿음으로 확장된 종교를 기독교의 미래로 본다. 그에게는 기독교를 선불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기독교의 생명을 유지시켜준다고 보였다. 씨슬턴은 큐핏이 70년대까지 칸트적인 합리주의적 자유주의 성경해석에 머물다가 80년대에 그 경계를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 갔다고 보면서 서구 기독교 지식인 사이에 번진 ‘후기 기독교’(Post-Christianity)의 전형적인 현상으로 본다.
3) 로저 런딘 기독교 철학자이며 해석학자 런딘은 그의 『이해의 문화』에서 데리다나 푸코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를 후기구조주의자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비판한다.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근거는 그들이 인간 속에 있는 감추어진 진리에 대한 열망을 거부하며 진리의 불확정성을 옹호한다는데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어거스틴과 달리, 인간의 욕망이 인간 내면이나 외부의 진리를 향할수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초자연적 진리를 부정한다고 본다.
4) 더글라스 그루투이스
미국 덴버 신학교의 철학교수 그루투이스는 프랜시스 쉐퍼와 칼 헨리를 개인적 스승으로 삼고있는 복음주의자이다. 그는 최근 『진리, 감소하다』(Truth Decay)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부분적으로 신뢰할 만한 통찰이 있지만,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상대화 시키고 기독교의 복음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기독교에 적대적이라고 진단한다. 그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성경적 기초 위에서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기독교 신앙의 방어를 위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
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독교의 복음의 이해와 선교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들은 기독교 복음의 절대성을 철저하게 인정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복음의 이해와 변증을 위해 최대한으로 사용하자는 입장이다.
1)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뉴비긴은 영국의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가 파송한 선교사로 35년 동안 인도에서 사역했다. 1974년 65세의 나이로 선교사역에서 은퇴한 후, 영국에 돌아온 그는 영국이 오히려 선교지가 되어있는 현실을 발견했다. 영국의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복음의 진리와 선교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있었다. 뉴비긴은 영국과 서구사회를 선교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과연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을 잃어버린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는 『서구 기독교의 위기』, 『현대 서구문화와 기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등의 책과 강의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종교다원주의에 반대하면서도 기독교가 문화의 다원성(또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복음을 서구의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에 기초한 근대 과학기술문명과 결합시켜서 설명하는 오류를 서구 기독교가 범해 왔다는 것이다. 뉴비긴은 기독교의 복음이 더 이상 합리주의나 서구의 현대문화와 동일시되거나 결합된 형태로 이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기독교는 계속 변화하는 다양한 문화 속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순수한 복음 -하나님이 성육신을 통해 인간 역사에 행하신 일 -을 믿고 증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계몽주의 시대에 이해했던 것처럼 순수한 합리성의 숨막히는 분위기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이 증명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영혼에는 채워져야 하는 어떤 필요가 있다.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를 최대한으로 수용하려고 했던 집단은 쇠퇴 일로에 있고 종교의 초자연적인 차원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강조해 온 종교집단은 번창하는 것으로 보인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342)
"만일 우리가 현대세계에서 기독교가 처한 총체적인 상황을 보려 한다면, 먼저 유럽문화를 언급해야 한다. 첫째는 지금 전세계에서 ‘현대화’라는 미명아래 근대의 게몽주의 문화가 전통문화들을 대체해 가고 있고 둘째로는 이 계몽주의 문화는 기독교 신앙을 침식하고 중립화시킬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A Word in Season, 1994)
“합당한 변증의 형태는 복음 그 자체를 전하고 그것[복음]이 이 우주 안에 있는 우리 존재의 신비를 파악하고 다루는 방법에 대한 최상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Profer Confidence, 1995)
2) 스탠리 그랜즈(Stanley J. Grenz)
캐다다 침례교 출신인 스탠리 그랜즈는 『포스트모더니즘 입문』(A Primer on Postmodernism)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의 과제는 복음을 이 시대의 문화의 맥락에서 이해시키고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오늘날의 문화를 ‘포스트’(post)의 문화로 규정하고 포스트 개인주의, 포스트 합리주의, 포스트 이원론, 포스트 인식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는 다른 책에서 자신의 입장을 ‘포스트토대주의’(Postfoundationalism)로 표현한다.
포스트 개인주의 근대주의 사회는 사유재산을 가진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rrn가 역시 이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개인의 존중은 개인의 인격과 신체의 존중이라는 바람직한 가치를 가치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경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결국 인간의 사회성과 공동체이 해체된 인간의 원자화로 귀결된 것이다. 기독교는 이런 개인에게 신앙 안에서의 살아있는 공동체를 제공해 준다.
포스트 합리주의 근대 사회는 합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왔다. 합리성(rationality)에는 논리성, 체계성, 효율성이 포함된다. 합리성에 포함되지 않는 가치인 감정, 욕망, 신비 등의 영역은 무시된다. 포스트 합리주의는 복음의 초합리적 성격을 회복한다.
포스트 이원론 계몽주의는 인간의 실재를 정신과 육체로 나누었다. 이런 관점이 기독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육체를 중시하는 많은 근대주의자는 유뮬론자가 되고,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관념론자가 되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
포스트 지식주의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이 획득한 지식(knowledge)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다. 그 결과 지식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 되고 인간의 내면적 동기나 행위와 분리되게 되엇다. 기독교 복음은 지식이 인간의 전인적인 삶에 주인이 아닌, 봉사자의 역할을 하도록 되돌려야 한다.
3) 미들턴과 월쉬(Richard Middleton/Brian Walsh)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책『그리스도인의 비젼』의 공동 저자인 미들턴과 월쉬는 그들의 새로운 책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1995)에서 우리 시대의 희망을 ‘신앙적인 즉석연주’(faithful improvisation)로 표현한다. 어떤 합리적인 체계와 규칙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고정하지 않고, 문화 상황의 변화에 발맞추어 유연하게 대응하는 기독교를 강조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기초로서 성경의 이야기(narratrive)의 생생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본다. 삶의 이야기로 이해되고 나타난는 기도교 복음은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덕(phronesis)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 성령의 은혜 안에서 신자에게 주어진 예언과 비젼과 꿈을 무시하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복음의 생동력을 이 시대의 새로운 문화적 변화 속에서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998, IVP Culture of Interpretation, Eerdmanns, 1993. D. Dockery (ed.), The Challege of Postmodernism, Baker, 1995. Stanry Grenz, A Primer on Postmodernism, Eerdmanns, 1996.R. Lundin, The Middleton/Walsh,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 IVP, 1995. D. Groothuis, Truth Decay, IVP, 2000. A. Thiselton, Interpreting God and The Postmodern Self, T&T Clark, 1995
첫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