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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이야기의 실마리로 돌아간다.
그 사이에 노련한 히말라야의 등산가로 8개의 8,000미터급 고봉을 정복하여
이름난 당신은 8년 전에 실패한 낭가 파르바트의 산록에 섰다.
낭가 파르바트는 당신이 돌아올 것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낭가 파르바트의 이야기에서 비극을 빼놓을 수 없다.
1세기 전에 벌써 이 산의 정복이 시도됐다.
영국인 프레드릭 머메리가 1895년에 이미 원정대를 조직하고 당시로는 상식 밖의 계획으로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켰다.
그 뒤에도 여러 원정대가 성공할 때까지 오랜 세월 등정을 시도했으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다.
1932년에는 독 · 미 원정대가 빌헬름 메르클의 지휘아래 성공도 못하고 희생도 없이 돌아왔다.
그러나 2년 후 같은 대장의 지휘 아래 독일 원정대는 등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원정을 마감했다.
메르클 자신이 8명의 대원과 5명의 셰르파와 함께 영원한 만년설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1937년 파울 바워의 원정대도 값비싼 희생을 치렀다.
눈사태가 잠자던 7명의 등산가와 9명의 포터를 덮쳐서 그들은 모두 죽었다.
또한 1953년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이 등정에 성공한 뒤
여러해 사이에 낭가 파르바트의 측면에서 알피니스트들이 계속 희생됐는데
그 가운데에는 라인홀트의 동생 귄터 메스너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만이 아니고도 낭가 파르바트는 아주 유별난 산인가?
사실 그렇다.
낭가 파르바트는 히말라야 거봉들 가운데 하나지만 그 산록은 가장 낮다.
거대한 인더스 강물이 그 기슭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으며
높이 1,000미터 지대에 하나의 계곡을 이루고 있다.
낭가 파르바트 산군이 7,000미터가 넘는 높이로 군림하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베이스캠프는 보통 3,800미터의 고소가 된다.
그래서 등산가들은 4,300미터가 넘는 고도차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 베이스캠프 만큼 아름답고 편리하며 쾌적한 곳이 없다.
텐트를 가축을 방목하는 푸른 풀밭에 치는데,
광대한 숲이 화목을 제공하고 밤마다 사람들이 불가에 모인다.
원주민들이 감자와 야채 그리고 과일들을 팔아서 식탁이 풍성하다.
이렇게 아름답다보니 차라리 등반을 집어치우고 나무 그늘에 눕고 싶어진다.
당신이 염려하는 데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을 것으로 본다.
낭가 파르바트 지역의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장기간에 걸친 어려운 등반에 대한 작은 기대마저도 희미하게 한다.
날씨는 이러했다.
아침에는 좋을 것처럼 보이다가도 열시쯤 되면 어느새 안개가 피어오르다가 비로 바뀌면서 종일 내린다.
밤이 되면 구름이 걷히고 다시 좋아진다.
풍경은 그림책을 보듯이 사람의 마음을 끈다.
베이스캠프를 낮은 곳에 설치하게 되어 처음에는 비와 더위와 싸우다가 별안간 눈과 얼음의 세계로 변한다.
특히 여기처럼 눈사태가 많은 산은 어디에고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때때로 얼어붙은 사면에서 낙석이나 산사태가 일어나며 특히 낮에는 무엇인가 계속 떨어진다.
그것은 일종의 저주이며 어쩌면 '벌거벗은 산'의 최악의 저주인지도 모른다.
당신들이 동남릉으로 도전을 감행했기 때문에 재앙이 더 심했다.
거기에는 하늘이 구름으로 덮이고 무척 더워서 눈사태의 위험이 크다.
그런데 이 원정대는 어떻게 됐으며 이 루트를 택한 까닭은 무엇인가?
당신들보다 앞서 동남릉을 시도한 자가 있는가?
원정대는 크라카워 산악연맹에서 조직했고 파브엘 몰라르즈 대장이 나에게 원정대에 참여하도록 부탁했다.
나는 몇가지 이유에서 그 제안에 관심이 갔다.
첫째는 8,000미터급을 또하나 오르게 됐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난날 실패한 것을 이번에 설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셋째가 가장 흥미있는 것인데 우리만이 오르게되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생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측릉으로 등정을 시도한 원정대들이 있었지만, 결국 성과없이 끝났었다.
마침내 이 과제는 1985년 칼 헤르리히코퍼가 풀게 되었다.
1977년의 원정대가 실패하던 때 우리에게 동남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그러나 이 암릉을 충분히 검토하고 나서 바로 우리는 이 계획을 취소했다.
그렇지만 당시 원정대 대원 가운데는 뛰어난 등산가들이 많았는데,
당신들은 국제 원정대라 할 수 있었는가?
그렇다.
폴란드와 멕시코인들 그리고 프랑스인과 미국인 각각 한 사람이 우리 팀에 있었다.
물론 마지막 우리 두 사람도 또한 폴란드 출신이었다.
루트가 까다로웠는데 등반형식은 알프스 식이었나 전통적 스타일이었나?
우리는 전통적 등반양식이었다.
말하자면 차례로 뒤따라 여러 캠프에 도달하면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서 점진적으로 장비와 식량을 위로 날랐다.
이런 식으로 정상까지 갔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
낭가 파르바트는 견디기 어려운 난관을 안겨주기 전에 쉽게 항복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
지금도 그때를 돌아보면 낭가 파르바트 원정이 내가 참가했던 원정대 가운데 가장 위험한 원정의 하나였다.
우리는 주로 이른 아침과 저녁에 행동했다.
말하자면 눈이 얼어붙어 눈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시간에 행동했던 것이다.
우리는 3킬로미터가 넘는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제3 캠프를 건설하는 동안에 우리는 이상야릇한 막다른 골목에 빠져들었다.
베이스캠프를 떠난 팀마다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왔다.
이러다가는 7,000미터라는 마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어쨌든 당신들은 한걸음 앞서 1934년 메르클이 제6 캠프를 세웠던 7,000미터 고소에 제3 캠프를 설치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현대 알피니즘과 개척시대 알피니즘의 명백한 차이를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우리는 제3 캠프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제2 캠프와 제3 캠프 사이에는 얼음과 바위가 뒤섞인 극도로 어려운 벽이 가로놓여 있었으며
텐트를 설치할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암벽 전체에 고정자일을 설치해야 했다.
우선 우리는 60미터를 고정시킬 수가 있었다.
자일을 까느라 무척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어서
우리는 위로 오르는 대신에 땅거미가 지기 전에 베이스캠프로 내려가려고 서둘러야 했다.
등반은 바위와 얼음이 뒤범벅이 되어서 무척 어려웠고, 게다가 안개와 눈보라가 가끔 몰아쳤다.
그러나 나는 벽에서 비박을 하는 한이 있어도 전진하자고 내 동료들을 설득했는데
그들도 도저히 해낼 수 없을 때만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동의했다.
동료를 마지막 휴식 장소에 불렀을 때는 이미 어두워졌다.
제대로 세운 텐트에 비하면 형편없는 비박 첼트에서 밤을 보냈다.
잠은 고사하고 쉬었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애쓴 보람이 있어서 아침에 우리는 200미터를 더 전진하여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고 예견했던 제3 캠프에 섰다.
이제 다른 팀이 제3 캠프에 물자를 공급하고 또한 다음 피치를 개척해야 했다.
한편 우리는 노력해서 제4 캠프를 될수록 높이 설치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 했다.
제1 캠프와 제4 캠프 사이에는 눈사태가 쉴 새없이 일어나서 그 구간을 '산책로'라고 농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번 암벽에 붙으면 빠른 시간에 베이스캠프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기가 어려울 것을 알았다.
우리는 다른 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떠났다.
우리는 다시 문제에 부딪쳤다.
아주 가파르고 얼어붙은 룬제가 암릉까지 뻗었다.
루트는 거기서부터 수월했지만 그 무렵이면 어둠이 다가와서 많이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제4 캠프를 7,400미터 고소에 설치했다.
그 동안 타데우츠 피로트로브스키 팀은 제3 캠프를 떠나 베이스캠프로 내려갔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함께 오르지 않았는가?
같이 올라갔다.
처음부터 우리는 체력이 고르게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로 떨어졌던 것이다.
두오 피오트로브스키 ㅡ 쿠쿠츠카 조가 다른 조보다 훨씬 빠를 것으로 보았는데 그대로였다.
그런데 우리는 제4 캠프를 지나서자 다시 합류해 이틀 동안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제4 캠프에는 먹을 것이 많지 않아 오래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정상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다음 팀이 식량을 많이 가져와야 했고 계획으로는 적어도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에서는 계획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가 하는 것을 나는 많이 체험했다.
우리는 베이스캠프와의 무전연락을 통해서 제1 캠프와 제2 캠프 사이에서 사고가 난 것을 알았다.
무전기 스피커의 잡음으로 잘 들리지 않았지만 놀라운 소식을 알았다.
"타데우츠 피오트로브스키와 파브엘 물라르즈와 함께
고정자일을 따라 오르고 있던 피오트르 칼무스가 눈사태로 쓸려 내려갔다.
칼무스는 벽에서 떨어졌는데 지금 구조책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그럼 당신들은?
우리는 2킬로미터 위에 있었으며 도저히 구조활동을 도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날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녁까지 새로운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음날 아침에 내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저녁에 무전기가 '피오트르 사망'이라는 새로운 소식을 전해왔다.
이 소식에 우리는 모두 크게 놀랐다.
그의 시체는 절벽 밑에 있었다.
그는 떨어지면서 죽은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벌써 눈사태로 인한 두 번째의 사고였다.
며칠 전에도 눈사태가 피오트르 사몰레비츠를 아래로 휩쓸어 갔다.
그는 약 600미터 아래로 미끄러졌지만 푸른 땅바닥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치명적인 부상을 모면했다.
피오트르 칼무스는 아주 운이 없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죽는 사고는 언제나 상황을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바꿔놓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진을 계속할 것인가, 계획을 중단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의논하고 베이스캠프와 무전으로 연락했다.
이야기는 오랫동안 끌었고 아주 괴로웠다.
이런 경우야말로 의견이 일치하기가 어렵다.
계속 밀고 나가자는 사람과 이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갈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네 사람이 계속 오르고 둘은 내려가기로 했다.
"우리는 결정했다" 고 당신이 말했는데 자기자신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겁장이처럼 행동했다.
그때 지가 말에 나는 의견을 제시할 용기가 없었다.
지난번 두 차례의 원정에서 동료들이 죽었다.
지금 하인리히가 대장이어서 나는 덕을 보았다.
나는 베이스캠프에서의 논의를 그에게 맡겼다.
그리고 "난 결정되는 대로 따르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논의가 저녁까지 이어지자 지가가 "피오트르의 희생이 헛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밑에서 답이 왔다.
"좋아, 알았다" 파브엘 몰라르즈의 소리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바로 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때 논쟁을 지금도 이따금 이야기 한다.
그런데 실은 동료 한 사람의 죽음으로 원정을 포기하는 원정대는 없다.
개척기 원정 활동과 함께 자취를 감춘 태도인데...
그러한 경우레 하나의 원칙을 세우기 어렵다.
언제나 특수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K2 아래쪽에서 할리나 크류거
시로콤스카가 죽고 나서 그리고 라팔 홀다의 비극적인 추락이 있은 뒤에 벌어진 토론이 생각난다.
두번 모두 시간을 끌었는데 언제나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원정대는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이것으로 많은 대원들의 공명심을 만족시키는 한편 다른 대원들에게 멋진 모험의 계기가 된다.
그러나 모든 대원들의 입장으로서는 원정 준비가 엄청난 육체적 재정적 부담이기도 하다.
설령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등반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내려간다는 것은 원정의 중단을 뜻한다.
그래서 일행 가운데 누가 내려가는지 결정해야 한다.
게다가 식량도 모자라니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컨디션이 좋고 베스트 멤버로 알려졌던 니콜라이 치제브스키가 자진해서 나섰다.
또 한 사람은 미찰 코찬치크였다.
우리는 제4 캠프 너머로 미리 고정자일을 깔아둔 구간을 다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포기했으며 우리는 자일을 타고 계속 올라갔다.
그리고 7,600미터 고소를 임시 제5 캠프로 삼고 텐트 두 동을 쳤다.
이런 데는 캠프라고 하기보다는 다음날 내려가지 않으려고 설치한 비박 장소인 셈이다.
아침에 우리는 짐을 가볍게 하고 정상으로 떠났다.
눈 앞에 수직이나 다름없이 벽이 나타나서 우리의 결심을 재촉했다.
이때 약삭빠른 지가가 원칙을 내세웠다.
"이 친구들아, 나중에 실패할 망정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는 거야."
(8,000미터 고소에서 실패한다면 하늘도 자비를 베푸실 거다.)
그러면서 그는 말없이 가스 스토브와 봄베를 배낭에 넣었다.
이 일을 우리가 나중에 얼마나 고맙게 여겼는지 모른다.
정오였는데 정상까지는 아직 멀었다.
등반로가 한없이 뻗어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쉴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하켄을 박고 한걸음 한걸음 떼는 것을 확보해주어야 했다.
저녁무렵 내가 세 피치를 오르고 또 한 피치 80미터를 마쳤을 때였다.
약 7,900미터 지점에서 갑자기 폭풍이 일더니, 소나기가 천둥과 번개를 몰고 왔다.
눈이 미친 듯이 쏟아지며 장비의 금속 부분에서 불꽃이 튀었다.
"...뇌우가 갑자기 몰려왔다.
피켈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알피니스트들은 피켈을 내던지고 고글을 썼다.
그리고 아이젠을 풀었다.
아이젠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반 시간 뒤에 그들은 배낭을 메고 제4 캠프로 내려갔다.
방전현상은 그치지 않았다.
슈마더러의 눈 앞에서 작은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이 순간 목덜미 밑을 무엇이 무서운 힘으로 쳤다.
갑작스러운 경련이 일어났다."
이와 비슷한 일이 당신에게도 있었는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으나 나도 제법 충격을 받았다.
산에서 뇌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하자면 금속물에서 피해야 한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카라비너가 달린 하켄에 매달린 채로
뇌우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야 할 때에는 꼼짝 못했다.
오후 네시쯤 폭풍이 어느 정도 수그러졌다.
나는 파트너 있는 데로 내려가서 비박하기로 했다.
그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설동을 팠는데, 설동은 아주 비좁았다.
우리의 유일한 보호자는 절연용 매트였다.
발을 은빛 천으로 감싸고 배낭 안에 앉았을 때,
지가가 따끈한 차를 주어 우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우리는 그의 배려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전날 잃었던 80미터의 고도를 되찾고, 한 피치 더 전진했다.
쉴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자일이 내 손에서 빠져 나갔다.
지가가 두 번째 오르고 있었지만 혼자서 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강 때 하인리히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당했다.(7월 13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상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앞에 아직도 장애물이 가로놓이고 위험한 빙하가 걸려있었다.
여기를 넘어서서 능선으로 붙기 전에 우리는 눈속에 허리까지 빠졌다.
그러나 마지막 구간은 균형을 잡기가 편리해서 그제서야 마음놓고 천천히 전진했다.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걱정없었다.
우리가 13시 정각에 정상에 오르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그밖에 자세한 일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도 가셔브룸 연봉과 K2 그리고 카라코룸 일대를 감싸던 아름다운 파노라마를 눈앞에 그린다.
우리는 다른 때와 달리 한 시간이나 정상에 머물렀다.
그리고 경치에 감동한 나머지 시간 가는 줄 몰랐으며,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설동에 돌아왔을 때에는 벌써 캄캄했다.
연료가 아직 넉넉해서 그런 대로 눈을 녹일 수 있었다.
가스가 연료통에서 없어지듯이 우리 힘도 빠져 나갔다.
아침이 되어 우리는 지친 몸을 끌다시피하며 설동을 나왔다.
그런데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이 없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카르로스가 그토록 쉬고도 얼이 빠진 듯해서 큰 소리로 말해야 했다.
온통 안개에 뒤덮이는가 하면 폭풍이 몰아쳐서 우리는 그 속을 뚫고 내려갔다.
우리는 그저 느낌대로 움직였다.
때로는 방향이 잘못돼 길을 찾는다고 한참 위로 올라가는가 하면 갑자기 알 수 없는 곳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가?
지가는 오른쪽으로 가야한다고 하고 나는 왼쪽이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그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아서 누구 말이 옳은지 알아보자고 했다.
그리고 무턱대고 100미터 가량 위로 다시 올라갔다.
그러자 첫 흔적이 눈에 띄었는데 며칠 전에 고정자일 옆에 버렸던 낡은 장갑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자일이 보였다.
동료들이 뒤따라 왔다.
나는 신나서 밑에 소리쳤다.
그들이 숨을 헐떡이면서 낭가 파르바트의 마지막 루트를 내려와서 앞서 작업했던...
운명의 고정자일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째서 운명이라고 했는가?
그 고정자일은 원정 중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사태에서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 고정자일이 없다면...
제5 캠프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다.
24시간 전부터 우리는 심한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제4 캠프에 와서야 겨우 갈증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루를 더 행군한 끝에 도달한 7,400미터의 고소에도 가스와 먹을 것이 없었다.
베이스캠프에서 우리에게 '지원조'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 밤을 어떻게 지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지원조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제3 캠프를 다시 세우려고 심한 곤욕을 치렀다.
텐트들이 빙탑에서 떨어진 얼음에 깔려 납작했다.
이것을 다시 세우느라 고생한 덕분에 우리는 식사를 하고 음료를 마시게 됐다.
이제 우리는 가장 위험한 데서 쉬었는데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는 동안 안전하고 확실한 활동 범위를 유지하려고 밤 두시쯤 떠났기 때문이다.
짙은 안개 속에서 아침이 밝아왔는데, 행운이 온난(溫暖), 즉 눈사태라는 공식을 당분간 무효로 해주기를 바랐다.
포격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나 많이 누그러졌다.
슬라보이르는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 큰 돌을 피했기 때문에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통에 니콘 카메라가 가위처럼 납작해지고 두 동강이 났다.
지가가 고정자일에서 카라비너를 벗기고 다른 데로 옮기려다가 머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추락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까.
그는 미끄러지며 자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 순간 고정자일이 죄어들어 하마터면 목이 졸려 죽을 뻔했다.
이 사고는 제2 캠프에 도달하기 조금 전에 일어났다.
내가 자일을 붙잡고 매달리고 있을 때 고정자일이 굳게 얼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얼어붙은 긴 자일이 느슨해지는 바람에 나는 곤두박질하면서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됐다.
더욱이 아이젠을 신은 발이 눈에 단단히 박혀있어서 몸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발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몸을 바로 세우려고 하자 나일론 보조자일이 늘어나서 길어질 뿐이었다.
소용없이 애만 쓰고 기운만 빠졌다.
나는 앞서 내려왔는데 뒤에 지가가 반 시간이 되어도 여기에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꼴로 오래 지탱할 수도 없고 의욕마저 잃었다.
나는 한번 더 해보았다.
될수록 몸을 높이 끌어올리면서 머리를 바로 세우고 몸을 단번에 아래쪽으로 던졌다.
발이 눈에서 빠질 때 다리가 부러질세라 몸을 내던진 것이다.
나는 공중제비를 하며 자일에 매달렸다.
이렇게 해서 몸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끝내 해내고야 말았다.
남은 일도 혼자 해냈다.
다리가 여전히 건재하니 계속 내려가는 데 지장이 없었다.
하인리히가 혼자 내려가지 못했지만 아무튼 우리는 저녁에 베이스캠프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는 떨어지면서 무릎을 다쳤기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워 했다.
우리는 그를 수송하려고 가까운 마을에서 당나귀를 돈 주고 얻어왔다.
보통 짐을 나르려고 나귀를 빌릴 때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쪽 사정이 부득이 한 것을 알고 마을 사람들이 값을 엄청나게 불렀다.
여기서 값을 깎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달라는 대로 주어야 했다.
그들은 조금도 인정이 없었다.
당신은 산에서 당신과 함께 모험을 감행한
원주민 동료들인 셰르파나 파키스탄 카라코룸의 고산족에 대해 몇가지 제한적 조건을 내세웠다.
이것은 히말라야 타이거의 의협심을 의례적으로 찬양했던 말투와
그리고 그들이 서양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지정된 장소에서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이 달라졌다고 믿는가, 아니면 개척자들이 보고에서 왜곡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좋은 성품과 소박함과 의협심만을
기록에 남기고 그들의 결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상적인 셰르파 상이 나도는데 그런 셰르파는 세상에 없다.
셰르파와 발티 그리고 히말라야 고산족에게 용서를 빌면서
별로 아름답지 않는 그들의 특징을 이야기 하겠다.
물론 고산 등반으로 그들을 다루는 일정한 방법이 강화되었다고 본다.
셰르파 계급은 네팔 사회에서 약 25층으로 되어 있으며 주방 고용인의 경우도 그렇다.
원정대에 참가하고 특히 트레킹을 같이 하면서 셰르파의 생활이 눈에 띄게 넉넉해지며,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 셰르파의 계급은 네팔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에 속한다.
셰르파의 전형적인 경력은 일정한 형태를 따라간다.
셰르파는 고산에서 단순한 포터나 쿡 아니면 안내자로서 시작한다.
훗날 저축해서 자본이 생기면 트레킹 대리점을 열거나 작은 호텔업을 시작한다.
벌이가 자연히 생기는데, 말하자면 관광사업인 셈이다.
명망이 높은 마켄다왕의 산하에 있는 자연보호 평의원의 의원인
저명한 네팔의 생태학자 헤만타 미스하가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종교가 있다.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관광사업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가 히말라야를 돌아다닌 횟수 가지고는
고산족의 인간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충분히 관찰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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