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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감추어둔 스페인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렸을 적 내가 제일 좋아한 음식은 어머니가 해주시는 동지팥죽이었다. 어찌나 맛있는지 한번에 다 먹기가 아까워서 한 그릇을 몰래 바깥 장독대 사이에 숨겨두었다가 며칠 지난 후에 조금씩 떠먹었는데 그때의 맛은 그 후 수 십 년 간 여지껏 먹어온 그 어떤 요리 보다 맛있는 짜릿한 행복 그 자체였었다.
여러 여행전문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나라 한 나라 만 꼽으라는 설문조사 결과 압도적으로 스페인이 1위를 한 기사를 언젠가 읽은 후로 꼭꼭 숨겨두었다가 때가 되면 맛있게 먹고 싶은 그 동지팥죽의 나라가 스페인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때가 왔다. 60살 환갑 핑계를 대니 식구들 모두 잘 갔다 오라고 환영해준다. 일생에 단 한번 써먹을 수 있는 핑계인 만큼, 하고 싶은 것 모두 다 넣어 계획을 짜기로 했다.
기간은 한 달, 숙소는 파라도르 호텔, 둘이서 차 렌트하여 다니는 걸로 스케쥴 짜주도록 스페인에 있는 전문가에게 부탁했더니 기왕 지나가는 길인데 포르투갈도 들러보라고 조언해준다. 그래서 기간이 35일간으로 늘어나버렸다. 출발 6개월 전에 숙소, 렌터카 그리고 항공 예약이 다 이루어졌다.
일정은 다음과 같다.
마드리드 5박 ( 그 사이 세고비아, 톨레도 ) – 차 운전 시작 – 부르고스 1박 – 산 세바스티안 1박 – 빌바오 2박 –산티아나 델마르 1박 – 푸엔테데 1박 – 레온 1박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2박 – (포르투갈) 포르투 2박 – 기마랑쉬 – 아베이루 - 파티마 1박 – 리스본3박(그 사이 신트라, 호카 곶) – (스페인) 메리다 2박 – 카세레스 – 세비야 2박 – 코르도바 1박 – 차량 반납. 그라나다 2박 – 바르셀로나 5박 – 마드리드 1박
그 후 출발 전 까지 스페인에 관해 꽤 많은 공부를 했다. 스페인 여행에서는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한 절반은 된다고 생각하기에 음식에 관해 읽은 책만도 몇 권이었다.
사실,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운전이었다. 해외운전이 처음은 아니지만 다혈질이고 흥분 잘하는 사람들이라 운전이 상당히 거칠턴데 하는 불안과, 이번에는 오직 내비게이터에 의존하는 운전인데 몇 년 전 그리스에서 겪었던 것처럼 그 내비가 고장나버렸을 경우의 불안이다. 그러나 그건 그때 가서 부딛쳐 볼 일. 자 출발이다.( 2013. 10.16 ~ 11.20 )
이번 여행에서 문화유적 답사는 물론 제1의 목적이지만 그보다 더 주안점을 둔 것은 파라도르에서의 숙박과 음식이었다. 그래서 이를 따로 정리해본다.
1. 파라도르
스페인은 고성 古城과 종교문화 유적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한다. 이 오래된 옛 건물을 개조하여 현대식 호텔로 운영하는 것이 파라도르인데 정부가 직영하는 국영이며 전국에 90여 개 있다고 한다. 수 백 년 된 고성에서 잠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는 것이 꿈이 아니고 현실에서 가능하다니! 스페인을 꼭 가고 싶어하게 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일정상 7도시에서 파라도르가 가능하였으며 스페인 현지 전문가를 통해 6개월 전에 조기예약을 한 덕분에 일반가격 보다 상당히 좋은 조건에 묵을 수 있었다.
제일 처음 간 곳은 산티아나 델 마르의 파라도르이다. 시골 장원 莊園 건물이라는데 정확한 건립 기록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묵은 7개 중 목가적이고 소담하여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중세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조그마한 시골 소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이 아늑한 곳에서 하룻밤 밖에 잘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아침식사를 하러 갔더니 조그마한 식당에 손님은 딱 2팀. 인상 좋은 초로 할머니 메이드의 시중이 마치 시골집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푸엔테데는 아주 험한 산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이고 그 파라도르 역시 등산과 트레킹 등 야외활동에 컨셉을 맞춘 현대식 숙소이었다. 바닥통로는 물론이고 가구 등 내부가 온통 목조로 되어있어 더더욱 알파인 분위기였고 방에 놓인 빨간 나무 스틱 2자루는 우리를 조금 감동스럽게 만들었다. 단점이라면 마을과 떨어져 있는데다가 그 마을 또한 벽촌이라서 저녁식사는 호텔 내부 외 별다른 선택이 없다는 점인데 호텔 식사라고 해도 또한 시골이라서 그런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청정지역의 축산물이 좋다는 추천에 따라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내 손바닥 3배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여서 먹느라고 한 시간 정도는 걸린 것 같다.
레온은 큰 도시이다. 도시 제일 큰 광장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이 파라도르는 왠만한 왕궁을 능가하는 정말 어마어마한 건축물이다. 1530년,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건립되었는데 한 면의 길이가 100m로 규모도 대단하지만 살아있는 뮤지엄이라는 소개자료가 전혀 과장이 아닐만큼 외부 장식, 회랑 뿐 아니라 건물 내부의 가구,장식 모두가 이 건물이 과거에 수도원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할만큼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 정반대로 호화스러웠다. 이 훌륭한 건물에서 허용된 왕 노름이 단 하루 뿐임을 아쉬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레온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중요한 거점이고 대성당 또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많으니 이 레온의 파라도르는 스페인 가는 사람들에게 한번 투숙해 볼 것을 꼭 권하고 싶다.
산티아고 델 콤포스텔라의 파라도르 역시 기막힌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순례자 길의 마지막 종착점인 대성당과 광장 한 면을 나란히 하고 있는 것! 건물 또한 오래된 것이다. 건물 정면 석조 아치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석각되어있다. “위대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명에 의해 1501년에 시공하여 10년 후에 완공하였다”
순례자들의 숙소와 병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독자적인 소도시라 할 만큼 규모가 커서 내부에서 길 잃을 정도이다. 건물 관람 가이드북을 가지고 둘러보다가 시간이 없어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다. 세계 최고 最古의 호텔로 공인되고 있다 한다. 이 건물 외부 지붕을 보다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빗물 홈통 중 하나의 모양이 달라서 유심히 보았더니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지 않는가! 어렸을 적 허리 숙여 가랑이 사이로 뒷 경치 바라보던 바로 그 자세를 남자가 하고 있단 말이다. 게다가 남근은 불끈! 우람하게 발기하여 있고! 빗물이 남자의 항문으로 나오게끔 되어있으니 그 석공은 “이 귀족님들! 내 똥 맛 좀 보슈!” 하고 웃고 있는 것 만 같다. 그 석공의 유머와 용기도 대단하지만 우리가 어둡고 엄숙하게만 알고 있던 중세시대 지배귀족층의 아량도 이 정도면 이 건물의 규모 만큼이나 크다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이번 35일간 여행 중 나를 제일 감동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물통이었다.
메리다 파라도르는 18세기, 과거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전 유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프란체스코 수녀원이었다. 수녀원답게 검박, 단아한 모습이다. 그런데 남자들의 수도원은 왜 그리고 거창, 화려했는지 새삼 의문이 들었지만 그거야 그냥 넘어가자. 화려한 호텔에 있다가 오니 오히려 들떠있던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것 같아 그 점도 괜찮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 파라도르는 그라나다. 관광객들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가보고 싶어하듯, 파라도르 숙박 시스템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제일 원하는 곳이 이곳인데 그것은 바로 알함브라 궁전 안에 있다는 기막힌 위치 때문이다. 호텔은 겨우 객실이 겨우 40개. 그러니 예약부터가 어려운데 나도 6개월 전에 했고, 비수기인 11월 숙박이라 예약이 가능했을 것이다. 알함브라 내의 히랄리페 궁전을 본따 14세기에 건축되었으며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사용되다가 19세기에는 군사용으로 전용되었고 1945년에 호텔로 개조되었다. 내부 곳곳의 영어 자료에 San Francisco 라고 되어있어 처음에는 의아해 했는데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이라는 과거의 이름을 따서 현재에도 그렇게 이름되어있다. 객실은 파라도르 중에서 제일 비좁았고 서비스도 기대에 조금 못 미친다. 워낙 규모가 작다 보니 서비스인원들도 적은 탓 같았다. 그러나 그런 점은 전혀 불만이 되지 않았다. 궁전 구경하기 위해 아침에 올라왔다가 저녁에 내려가는 불편이 전혀 필요 없고, 뒷 쪽의 널은 후원과 바로 호텔과 옆 짝이 되어 내다보이는 알함브라 궁전의 경치가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다.
파라도르 숙박이라는 나의 오랜 꿈은 그 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아니 그 기대 이상이었다고 말해야 옳다. 고성이라고 해서 영주의 아담한 옛 성 정도만 생각했지 레온이나 산티아고의 그 어마어마한 화려함, 산티아나 델 마르 시골 장원의 이늑함, 푸엔테제의 산장 등은 전혀 알지도 못했지 않았나 말이다. 파라도르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2. 음식
마드리드 첫 날, 짐 풀고 바로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 가격이 너무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다. 수박이 1kg에 49센트. 그러면 우리나라 제일 큰 수박 10kg 짜리가 지난 여름 3만원을 넘었는데 이곳 가격이라면 7,400원!!! 사과도 품종이 무척 다양했는데 대략 한 개에 300원 꼴. 육류야 말할 것도 없지만 어류 또한 우리의 절반도 안 되는 것 같다. 오기 전에 스페인의 대략적인 물가와 음식에 대해 조금은 알고 왔는데 식재료가 다양, 풍부하면서도 이렇게 쌀 줄은 몰랐다. 육류, 과일, 어류 할 것 없이 우리나라 물가 얼마나 비싼가!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가 식재료비가 제일 비싸다! 한 20년 전 까지, 지금 보다 소득이 훨씬 적었는데도 그 당시 나무로 된 큰 상자 째 사과를 사서 매일 밤 식구들이 배불리 먹었어도 별로 부담스러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식구들이 매일 한 개 씩 먹기가 버겁지 않느냐 말이다. 그러면서 과채류나 어류나 패류나 갈수록 더 안심하고 먹을 수도 없으니 작고, 가난한 나라에 태어남을 숙명으로 삭이고 살아야만 하는건가?
스페인 남부지방은 아예 오렌지 나무가 도시 곳곳에 심겨져 탐스러운 과실이 풍성하게 그야말로 오렌지 향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고 올리브 나무는 열매로 가지가 휘어져 있으며, 삼면이 바다로 둘려진 반도 국가라 어류 또한 풍부하니 그야말로 복 받은 땅덩어리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도 더 넘은 옛날에 출간된 돈키호테 책을 보면 초반부 돈키호테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는 양고기보다 쇠고기를 조금 더 넣어 끓인 전골 요리를 좋아했는데, 밤에는 주로 살피콘 요리를, 토요일에는 기름에 튀긴 베이컨과 달걀을, 금요일에는 완두콩을, 일요일에는 새끼 비둘기 요리를 먹느라 재산의 4분의3을 소비했다” 라고 묘사된다. 기억이 분명치 않지만 어느 책에선가는 돈키호테 책에서 언급된 요리의 가짓수가 160가지라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그 500년 옛날, 시골의 늙고 가난한 그가 먹는 것이 이 정도였으니 자고로 스페인이 얼마나 먹을거리가 풍부한지는 더 말 할 필요가 없겠다. 시장에 가보니 고추라면 단연코 우리나라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산산히 께지는 것 같았다. 먹는 양으로는 모르겠지만 고추의 다양성으로는 옆에 갈 수도 없겠더라. 고추라면 매운 맛을 내는 기초 원재료로만 사용하는 우리이지만 이 사람들은 시장 한 집에 걸려있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다양하게 맛을 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페인에서 있는 35일 동안, 호텔에서 먹는 아침식사 외에 점심과 저녁은 매 끼니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미리 알고 간 덕분에 다른 음식을 주문할 수 있기도 하였지만 지방마다 또 식당마다 메뉴가 다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즐겁게 한 것은 “메누 델 디아 Menu del Dia “ 였다. 해석하면 “오늘의 메뉴”인데 식당마다 코스 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 서비스 메뉴이다. 보통 전채, 메인, 디저트의 3코스에 빵과 음료가 포함되는데 이 음료는 물,맥주 또는 포도주 중에서 고를 수 있다. 술 좋아하는 나는 거의 매번 포도주를 시켰는데 식당에 따라 한 잔 주는 데도 있고 둘이서 시키니 아예 한 병 주는데도 있으며 또 피쳐에 한 병 가득 주는 식당도 있었다. 음식이 양이 풍성함은 말 할 것도 없고 거의 매 식당마다 맛 또한 훌륭하였다. 그러면서 그 가격은 10 내지 15유로이니 먹는 우리가 얼마나 마음 가벼운가. 특히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외의 지방도시에서 저녁식사를 10유로 짜리 메누 델 디아를 시켜 먹을 때는 아무리 식재료비가 싼 나라라고 하지만 이 가격에 원가나 맞출 수 있을는지 걱정스러워 먹으면서 미안한 생각이 자꾸 들 정도였다. 와인까지 실컷 마셨는데 계산서는 딱 20유로 그 뿐이다.
스페인의 유명한 요리 중 하나가 새끼 돼지를 통째로 구어내는 코치니요 아사도라는 것이 있다. 전국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지만 특히나 유명한 곳이 잘 알려진 관광지, 톨레도이다. 톨레도 관광 시 제대로 맛보기 위해 잘한다는 식당을 찾아 갔을 때 일이다. 옆 테이블을 보니 아무래도 양이 많을 듯해서 눈치를 보며 1인분 코스 만 주문했다. 스프가 처음 나오는데 우리 두 사람 각자에게 서브해주는 게 아닌가. 먹으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접시 치우는 웨이터에게 확인했다.
우리 1인분 시킨거야. 웨이터는 당연히 말한다. 옛 서!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메인인 돼지 구이가 나오는데 또 두 접시에 딱 각자 내어온다. 야, 조금 감격스러웠다. 우리나라 같으면 “ 두 사람이 1인분이라니요! 나가세요!” 하는 핀잔 듣기가 십상인데 말이다. 아! 자칭 인심 좋은 대한민국…! 마지막 디저트까지 따로 서브, 계산서에는 딱 1인분이 찍혀 나온다. 이럴 때 기분 좋게 주는 것이 팁이다.
바르셀로나는 워낙 부유한 지역이고 관광객에게 제일 인기 높은 도시라서 확실히 물가가 더 비싸긴 하였다. 그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으로 꼽히는 시에테 포르테스 라는 곳에 갔을 때이다. 스페인 국왕 부처, 영국 여왕이 왔다는 집이고, 자리 뒷부분에 바로 그 자리에 앉았던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있는 곳인데 우리 자리에는 오노 요꼬 이름이 있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명물인 파에야, 집사람은 항구인 만큼 모듬 해물 그릴을 주문하였다. 내어오는 해물 그릴의 양에 우리는 입이 딱 벌어졌다. 바닷가재, 넙치, 새우, 문어들이 푸짐하게 나온다. 양이야 당연히 많을 수도 있을 일. 그런데 그 가격이 한국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니까 하는 소리 아닌가. 바르셀로나에서 알아주는 고급 식당에서 말이다. 내 알기로 먹는 것에 관한 한 으뜸은 스페인이다.
그래도 스페인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식사는 세비야에서 먹은 점심이다. 알카사르 궁전을 구경하고 나와 바로 뒤에 있는 유대인 마을의 두 사람 나란히 다니기 어려운 좁은 골목길들을 구경하다가 한 300평 정도 될까, 자그마한 광장을 마주치게 되었다. 레스토랑 몇 개가 광장을 둘러싸고, 그 앞을 오렌지 나무가 열매 가득 주렁주렁 한 채로 식당들 앞을 가득 에워싸고 있었다. 별 다른 장식도 없고 화려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분위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 중 한 식당에 앉아 메누 델 디아인 해물 파에야를 주문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서늘한 바람에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오렌지 열매 향이 광장을 커튼 마냥 나부낀다. 저 옆으로 아름다운 히랄다 탑이 햇빛을 받아 금 빛으로 빛나고 있다.
아! 육체를 가진 기쁨이여! 몸뚱아리로 보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바람 어루만지고, 새소리 듣는 5감感이 어우러지는 향연을 즐기는 쾌감이여! 더도 덜도 말고 이대로만 같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라면 굳이 죽어서 천당 갈 필요 없이 그냥 여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스페인에서 제일 맛있게 먹은 것은 각종 타파스이다. 타파스란 한 입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총칭하는 단어이지만 주로 여인 손바닥 만한 바게트 위에 갖가지 먹을거리를 얹어서 만든 것이 일반적이고, 그 재료들이 여러가지일 때는 쓰러지지 않도록 이쑤시개로 꼽아서 나오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특별히 핀쵸스라고 부른다. 그러하니 이 타파스는 무궁무진하다. 요리사의 창조성과 예술감각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모양과 맛을 창조해낼 수 있게 되고 2유로를 넘지 않는 단품이니 이것저것 골라가며 맛보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양이 얼마나 예쁜지! 타파스 마다 색깔과 모양을 감안하여 재료를 안배하고 그 위에는 고명과 허브를 살짝 얹어 마무리하는 셰프마다의 그 재치를 보면 이 사람들은 옷도 멋있게 잘 입더니 모두들 미술 전공하였나 하는 생각이 넌지시 들기도 하였다. 와인이나 맥주 한 모금 씩 마셔가면서 손으로 하나 씩 집어먹는 그 맛이 스페인 떠나려는 우리 발걸음을 너무나 무겁게 만들었다.
스페인을 가려면 당분간 체중은 잊고 갈 일이다.
3. 운전
가면서도 네일 걱정했던 일이 바로 운전이었다. 이 사람들 상당히 흥분 잘 하는 다혈질이라는데 운전은 얼마나 거칠까? 장기간 운전하는데 혹시 내비가 말썽부리면 어떡하나? 마드리드에서 5일간 머문 후, 드디어 예약해두었던 차량을 건네 받고 출발이다. 그런데 출발하여 몇 백 미터 가지마자 원형교차로 roundabout 가 나타난다. 영국 같은데서 보기는 많이 했지만 그건 다른 사람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갈 때이고 막상 내비의 음성안내를 듣고서 직접 운전하니 이거 상당히 헷갈린다. 스페인은 사거리 교차로가 거의 없고 모두 원형교차로이다. 그러나 좀 익숙해지고 보니 그것이 오히려 사거리 보다 신속하고 안전하며 편하다는 걸 알게되었다. 혹시 진입한 후에 진출할 길을 놓쳐도 당황 할 필요 없이 그대로 한 번 더 돌면서 빠져나가면 되니 그 후로는 원형교차로가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운전에서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사항은 그 사람들의 운전 매너이다. 가기 전의 내 걱정은 전혀 기우였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고속도로는 제한속도가 120km였는데 그 120km를 넘는 차량이 거의 없더란 말이다! 또한 고속도로는 거의 모두가 차량이 그리 많지 않고 한가하였는데도 차들은 좌측 차로는 비워두고 우측 차로로만 운전하는 모습이 우리와는 너무 달랐다. 1, 2 차로는 텅 비워두고 3차로 만 120km 이하로 가다가 추월할 때만 살짝 좌로 빠져나가 추월하고는 곧바로 3차로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들의 운전이었다. 틈이 나면 속도를 올려대는 우리나라의 운전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나로서는 텅 비어있는 고속도로의 유혹을 참기가 무척 어려웠다. 22일간 운전하는 내내 내가 거의 제일 빠른 속도로 운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과속단속이 심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단속 경찰은 단 한 명도 보지를 못했고 운전 내내 한국의 습관대로 유심히 단속 카메라를 살폈지만 단 2번 카메라를 보았을 뿐이다. 게다가 스페인은 대부분의 도로가 무료이다. 그러니 운전은 고생이 아니라 정반대로 무척 즐거웠다. 시원스레 뚫려있는 도로를 130km으로 오토 크루징 걸어두고 편히 달리니 어찌 즐겁지 아니 하겠는가?
물론 리스본이나 그라나다 같은 대도시 내에서 운전은 쉽지 않다. 수 백 년 건물을 그대로 두고 살려 쓰는 도시라서 길은 좁고, 일방통행이 많고, 도로 표지선이 매우 복잡하여 내비의 음성안내를 유심히 들어도 길을 놓치는 적이 수 차례 있었다. 그래도 조금 돌아서 다시 가면 될 일 아닌가, 또한 사람들이 점잖게 양보 운전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 사람들의 난폭운전을 걱정했던 내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워지면서 새삼 한국 생각이 또 든다. 난폭, 폭주, 좌우 정신 없는 끼어들기, 꼬리물기, 거친 언행, 걸핏하면 욕하고 싸우기… 매일매일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헤치고 살아 남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세계 어디 가더라도 운전은 걱정 없을 것임을 서글프게 자인하고 만다.
4. 도시 별 구경하기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톨레도, 빌바오, 그라나다 같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또한 많은 자료가 있는 도시들은 기록하지 않는다. 강에 물 한 바가지 더 붓는 것 밖에 더 되겠는가. 본 많은 것 중에서 따로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실 만 도시 별로 아주 간략하게 적어둔다.
어렸을 적에 책에서 보고 아주 깊게 각인된 사진들이 몇 장 있다. 마추피추, 이집트 피라미드, 로마의 판테온 … 그 중 하나가 로마의 수도교 水道橋 이다. 2,000년 전 사람들이 먼 곳의 마실 물을 끌어오기 위해 그런 거대한 석물을 세웠고 그것이 지금껏 남아있다는 사실은 나를 감동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바로 그 수도교를 만나러 간다. 세고비아를 드디어 간다!
아! 감동이다! 다 젇혀두고 우선 먼저 아름답다! 그 옛날 사람들이 마실 물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노력인데 그런 고력을 하면서도 미적 요소를 감안했을까? 아니면 그냥 건축공학적으로만 한 일인데도 이런 걸작이 우연히 탄생하게 된 걸까?
모르타르,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지었는데도 2,000년을 살아왔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무려 16km 떨어진 강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것이라니 다시 생각해보자.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을 곳으로 흐른다. 끌어오기 위해서는 조금씩 계속 낮아져야 한다. 시점과 종점의 고도를 안 후, 미세한 각도를 기울여 물이 흐르게 하여야 하는데 그 거리 차이가 무려 16km! 2,000년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계산이 가능했을까?
현재 남아있는 길이는 800m라니 그 끝까지 걸어 가본다. 갈수록 석교의 높이가 낮아지고 아치가 작아지더니만 결국 아치는 없어진다. 그 끝이 궁금하다. 드디어 끝 지점이다.
2000년 전의 원상태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저 홈 사이로 물이 흘러가서 고대 로마 사람들의 목을 축였으리라 생각하니 머리와 가슴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단지 고대 로마인이 아닌 우리 인류 옛 조상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노력과 지혜에 숙연한 기분이 들어서 한참을 그곳에 있었다. 아울러 편안한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의 수고와 고생이 한꺼번에 보상을 받는 뿌듯한 만족감이 올라왔다.
세고비아는 또한 알카사르 궁전이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다. 디즈니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되었다기도 하는데 그 외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안에 들어가서 내어다 본 밖의 경치가 무척 아릅다웠다. 밋밋한 평야가 아닌 약간의 웨이브 있는 언덕들과 수풀, 그 사이 점점이 박힌 옛 성들이 그냥 픽쳐레스크하다.
세고비아 가면서 집사람에게 기타 가게 있으면 기타 한 대 사준다고 약속을 했었다. 사주지 않아도 되었다. 기타 가게가 한 군데도 없었다.
부르고스Burgos는 산티아고 순례길 중앙에 있는 중요 중개도시이다. 시 외곽에 있는 미라플로레스 수도원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내부장식과 이사벨 여왕의 부왕인 후안2세의 왕묘가 무척 아름답다고 들어서 찾아가 보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왕묘는 역시나 대단하였다. 지금껏 본 석관 중에서 가장 화려하여서 먼 길을 일부러 찾아간 보상을 받는 듯 하다.
부르고스의 대성당은 세비야, 톨레도에 이어 스페인 제3의 규모이며, 1221년 건립되기 시작했으니 그 역사 또한 대단하다. 또한 부르고스는 옛 영웅 “엘 시드”의 본거지이어서 지금도 시내 곳곳에는 그의 이름을 많이 볼 수 있고 그 부부의 묘가 바로 부르고스 대성당 안에 있어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기도 한다. 그러나 엘 시드는 왕이나 성직자가 아니어서인지 지하에 묻혀있다.
부르고스는 순례길 중도에 있고 유명한 대성당이 있어 순례자들이 꼭 들르는 도시이고, 도시 또한 순례자들을 많이 배려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우리 호텔 바로 앞 길이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자 길이었는데 도로 한가운데 화살표와 조가비 동판으로 순례길임을 표시해두고 있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은 북부 해안에 위치한, 바스크 지역을 대표하는 항구도시이다. 부유하고, 경치가 좋고, 해산물이 풍부한 미식의 고장이다. 해안 경치와 음식은 과연 훌륭했지만 뚜렷한 구경거리는 없는 편안한 휴양도시였다.
전혀 이름 생소한 곳이었지만 가보고서 반해버린 곳이 산티아나 델 마르 Santillana del Mar이다, “델 마르”란 명칭이 스페인 곳곳에 많은데 바다와 관련 있다고 보면 된다. 가령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당 “산티아나 델 마르”는 선원들이 출연하여 만들었기 때문이고 산 알폰소 델 마르는 칠레의 해안도시이다. 그런데 여기는 바다와 가깝기는 하지만 해안도시는 아닌데도 그렇게 이름한 연유는 모르겠다. 이름을 보고서 바다를 기대하고 가면 낭패를 당하겠지만 그 뛰어난 매력이 그 낭패를 충분히 보상해주겠다고 느낄 만큼 이 도시는 예쁘다. 도시라 하기에는 너무 작다. 한 삼,사 백 가구 정도 될까 싶은 작은 마을인데 세월이 마치 500년 전에 딱 멈춘 듯 싶은 중세 마을이다. 중세 도시야 유럽 곳곳에 있지만 이 마을이 특별히 예쁜 이유는 아담한 규모, 시골스러운 포근한 분위기 때문이다. 마을 중앙에 아직도 남아있는 우물과 물길, 지금도 사람들이 밤이면 모여서 같이 TV축구를 보는 모이는 아담한 광장, 돌 길, 돌 담 등이 모두 어우러져 딱 그림엽서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유감스럽게도 내비 고장 때문에 도착이 늦어져 어둑해진 마을 만 볼 수 있었고 이 예쁜 마을을 제대로 카메라에 담지 못 한 것. 더구나 여기의 파라도르가 시골 외갓집 같은 아늑한 분위기에 아주 예쁜 곳인데 짜여진 일정상 더 있지 못하고 이침에 떠나야만 하는 점이 너무도 아쉬웠다.
부근에는 알타미라 동굴이 있다. 워낙 잘 알려지고 유명한 곳이라 무척 기대되었다. 그러나 원래의 동굴에 입장할 수 없음은 말 할 것도 없고, 바로 옆에 원 동굴과 똑같이 만들어 놓은 박물관에서의 사진 촬영 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30분 단위로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 모형마저도 훼손이 심해져 가고 있기 때문. 그러나 그 모형일망정 막상 들어가 보니 우리를 흥분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우선 먼저 알게 된 건 알타미라 벽화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천정화라는 점이다. 상당히 평평한, 높이 2~3m 정도의 천정에 그 유명한 들소 그림들이 있었다. 워낙 자주 보아왔기 때문에 그 그림들은 오히려 반갑고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3만 년을 기다리다가 현 인류를 맞아주었듯, 50년을 기다리다가 나를 맞아준다는 감격이 올라온다. 그 그림들은 단기간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최초의 것은 36,000년 전이고 가장 최근의 것이 14,500년 전 그림이라고 박물관 자료에 씌여 있다. 그러하니 이 천정화는 그 좁은 동굴 내에서 21,500년 넘게 사람들이 쭉 살아 오며 까마득한 옛 선조가 그린 그림을 보고 생활하면서, 또 그 위에, 그 옆에 덧붙여 그려놓은 오랜, 오랜 역사의 축적물인 것이다. 그 사실을 새삼 알고서 보니 만약 이 그림들이 설혹 훨씬 오래 전인 한 5만 년 전 일시 一時의 것이라고 했을 때 보다 더 크게 감동스럽다. 지금 이 천정화는 21,500년이라는 어마어마 긴 세월 동안 털복숭이 조상들이 그림 그리고, 그 위에 또 덧그린 장장 2만 년 세월이 누적되어 있는, 좁은 공간의 오랜 숨결이 그대로 녹아 배어있는 축적물이요, 위대한 역사책이 아닌가 말이다.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고 싶어졌다. 그 조상들이 뛰어 다니고, 사냥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그러면서 살았을 바로 앞의 땅들 말이다. 머지 않은 곳에 조그만 시골마을이 보인다. 이 알타미라 동굴 사람들의 친손자들일까? 마을이 그냥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