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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올해도 2달여 남짓이면 또 가려합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봄날이 그립고, 봄날이다 싶으면 무더운 여름이 기승을 부리고 지겹다 싶음 가을이 오고, 만홍의 계절을 좀 누릴까 싶으니 겨울이 시샘을 부리는지 빨리 다가오려 하고 있습니다. 멈추지 않고 순환해야 자연의 모든 생명력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치겠지요.
≪莊子(장자)≫ 山木篇(산목편)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자가 산길을 가노라니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가 있었다.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옆에 나무꾼이 있는데도 베려 하지 않는다. 장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자는 말했다. “이 나무는 좋지 못하기 때문에 그 타고난 수명을 다하게 된다.” ‘無用之物(무용지물)’이란 아무 데도 쓸모없는 물건을 말한다. 그 무용지물이 때로는 有用之物(유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상보다 쓸모 있는 것이 되는 것이 ‘無用之用(무용지용)’이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반대쪽에 항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道家(도가)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莊子(장자)는 逆說的(역설적)으로 무용지용에 대해 말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있는데 무용지용의 의미와 符合(부합)한다.
요즘 제 머리속에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사색의 계절에 함께 숙제좀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1. 일시 : 2015년 11월 8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출발
3. 답사지
1) 김재로 선생 묘 (인천 남동구 운연동 산64-13)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극형(克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징(澄)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구(構)이며, 어머니는 이몽석(李夢錫)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해 설서(說書)·검열(檢閱)·지평(持平)·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1716년 부수찬으로 선현(先賢)을 무고한 소론의 유봉휘(柳鳳輝)·정식(鄭栻)을 탄핵해 물러나게 하였다. 1718년 헌납(獻納)·동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대사성·승지를 거쳤으며, 전라도균전사(全羅道均田使)로 양안(量案 : 토지 대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호조참의·승지·부제학·이조참의 등을 거쳐, 이듬 해 대사간 및 병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내고 개성유수가 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이듬 해 울산으로 귀양갔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듬 해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1740년 영의정에 올라 1758년 관직을 떠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영의정을 지냈고, 그 밖에도 영중추부사를 역임해 세도가 매우 컸다. 1741년 신유대훈(辛酉大訓)이라 하여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사르고 특사하도록 하고, 5인의 역안(逆案 : 반역 죄인들의 죄를 기록한 문서)을 그대로 두도록 주장한 박문수와 이종성(李宗城) 등을 파직하게 하였다.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거의 절반을 상신(相臣 : 의정부의 삼정승)으로 지냈다. 결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박식하며 예학에 깊었고, 상하가 신망하는 재상으로서의 풍모를 지녔다. 벼슬을 그만둔 뒤 집에 있으면서도 국사를 잊지 않았다. 영조는 숙종의 뜻에 따라 그를 기용해 아꼈으며, 손수 쓴 글을 내려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봉조하(奉朝賀)로 78세에 죽으니 영조는 그 집에 직접 조문하고 제문도 친히 지어 보냈다. 죽은 이듬 해 기사대신(耆社大臣)이 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조정만 선생 묘 (인천 남동구 산46-3)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齋). 아버지는 합천군수 경망(景望)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식(寔)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94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어 공조·호조의 낭관, 제용감·군자감의 판관, 장악원정 등을 지냈다. 지방으로 나가서는 강서현령·평양서윤·광산현감·안악군수, 청송·성천의 부사, 나주·능주·청주·양주·상주의 목사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었고, 이어 영변으로 이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수원부사·충청도관찰사·호조참의·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경연에서 ‘알인욕(遏人慾)·존천리(存天理)’의 설을 반복하여 아뢰니, 임금이 경청하고 호피(虎皮)를 특사하였다. 1735년 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 및 공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있었고,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희조(李喜朝) 등과 친교가 깊었다. 저서로는 『오재집』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영일정씨 묘역(인천 연수구 동춘동 177)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영일정씨의 원조는 신라육촌(新羅六村의 하나인 자산진지부(觜山珍支部) 촌장인 지백호(知伯虎)이다. 지백호는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신라 건국에 공을 세운 인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府)로 개칭되면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지백호의 원손인 정의경(鄭宜卿)은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다가 영일현백(迎日縣伯)에 임명되어 후손들이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본관은 영일(迎日)의 옛 지명을 따라 연일(延日)로, 영일(迎日)에서도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烏川)으로 쓰기도 했다. ** 정우량 선생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자휘(子翬), 호는 학남(鶴南),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시성(鄭始成), 할아버지는 정인빈(鄭寅賓)이며, 판돈령부사 정수기(鄭壽期)의 아들로서 좌의정 정휘량(鄭翬良)의 형이다. 자녀로는 정원달(鄭遠達) 등이 있다. 32세 때인 1723년(경종 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9위로 급제하였다. 1727(영조 3)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백성들을 효유(曉諭)하는 왕의 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각 도에 반포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부수찬으로 시독관을 겸임하면서, 왕에게 주청하여 이황, 이이 등의 문집을 간행토록 하였다. 지평(持平)·대사성을 역임하였으며, 좌승지 때에는 공종수(孔宗洙)를 선성(先聖)의 후예로 추대하여 반궁(泮宮)에 두어 녹(祿)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1740년 이조 참판 재임 당시 민통수(閔通洙)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천 부사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며, 우참찬을 역임하면서 한성부 서북인의 등용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749년(영조 25)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뒤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글씨에 능하였다고 전해지며, 개성(開城) 계성사비문(啓聖祠碑文)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정휘량 선생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의 동생으로 자는 자우(子羽) 또는 사서(士瑞), 호는 남애(南崖)이다 1733년(영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시독관(侍讀官)·응교를 지냈다. 1755년『천의소감(闡義昭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이 되었으며, 이듬해 제학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그 뒤 호조·공조·이조·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61년 우의정이 되고 곧 좌의정에 올랐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乙亥獄事] 때 정휘량을 비롯한 소론계 온건파 대부분이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의 죄를 탄핵하여, 조태구·유봉휘는 노적(奴籍)으로 떨어뜨리고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도 추탈(追奪)되게 하였다. 이후 사도세자의 평양서행사건을 수습하며 자청해서 정승의 직위를 내려놓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직하였다. 정치달(鄭致達)의 숙부로서 안으로 정치달의 처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도움이 많았으며, 은밀히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의 일당과 통하여 무진·기사 연간에 사설(辭說)을 일으켰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송도신도시(인천 연수구 송도동 173-3) 송도국제도시(松島國際都市) 혹은 송도경제자유구역은 인천국제공항 인프라를 배후로 지어지는 경제자유구역이다. 사업면적 53,339,717.7㎡(약1,615만평)에 약 40조원의 민간 자본 조달로 지어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 도시 개발 사업이다. 1990년대부터 본격 시작된 상하이, 싱가폴, 두바이 등 도시들의 국제 도시 개발을 토대로 2003년부터 2020년까지 인천광역시 연수구와 남동구의 해안에 여의도의 12배에 해당하고 인근 경기도 부천시의 관할 면적보다 큰 55km²정도를 매립, 간척지위에 도시를 개발하고 있으며 현재도 간척은 진행형이다. 송도국제업무지구 개발은 게일 인터내셔널(Gale International)과 포스코가 함께 진행하고 있다. 도시의 마스터 플랜은 콘 페더슨 폭스(KPF)의 뉴욕 사무소에서 설계했다. 기반 구조의 개발, 인력, 그리고 개발은 주로 민간의 자금 조달을 통해 이루어진다.
5) 인천 중구청 및 차이나 타운 (인천 중구 관동1가 9-1 일원)
현 인천 중구청 건물은 1933년에 인천부 청사 용도로 지은 건물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축면적 694.2㎡, 연면적 2,014.7㎡ 규모이다(1970년대에 증축한 3층 부분 포함).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천부가 인천시로 명칭이 바뀜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 청사로 이용되었으며, 1981년부터는 인천직할시 청사였다가 1985년 인천직할시청이 이전함에 따라 지금까지 인천직할시 중구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인천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으로, 건축적으로도 1930년대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간결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지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등록문화재 제249호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환 거래규제, 무역 규제, 거주자격 심사 강화 등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관광쇼핑, 특화점, 예술의 거리 등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풍미, 자금성, 태화원, 태창반점, 신승반점 등이 중국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화교 2,3세들로 구성된 약 170가구, 약 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0 - 3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0 - 4234 - 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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