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계변무宗系辨誣’
단편 소설
연당 고 천 석
조선 왕실 파계의 잘못된 기록의 내력과 이를 바로잡기 위해 수차례에 걸친 조선 사신들이 주청하기위해 명나라에 드나들어야했다. 그런 역사적 불행의 뿌리는 고려말기 즈음 왕들의 치적과 그 왕들을 마음대로 죽이고 갈아치웠던 이성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공민왕恭愍王(31대)은 즉위하자 원元나라와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귀족 기 씨奇 氏일족을 살육 제거한다. 따라서 원나라가 점령했던 평안. 함경 두 도道를 실력으로 되찾는다. 그렇게 되니 당시에 원나라를 따랐던 연호와 관제官制(국가나 지방의 행정기관의 설치. 즉 명칭. 조직. 권한. 구성 등을 정하는 규칙)를 개정하게 된다. 문종文宗시대 이전의 제도로 복귀하였다. 말년에 그는 신돈辛 旽을 중용하여 정치를 그르치고 만다. 마침내 환관 최 만생崔萬生과 폐신嬖臣(임금에게 아부하여 신임을 받는 신하) 홍윤洪 倫에게 시해 당하고 말았다. 그가 피살되자 당시 공신이던 이인임李 仁 任이 나이어린 우왕禑王(32대)을 세우게 된다. 그는 신돈辛 旽의 시녀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우왕은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微行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모니노牟尼奴라고 했다. 그는 공민왕이 죽은 후 열 살에 왕이 된다. 그가 점차 장성하여 감에 따라 음탕한 생활을 하다가, 14(1388)년에 위화도威化島에서 돌아온 이성계李 成桂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江華로 귀양 보내어진다. 바로 다음해 강릉江陵에서 공양왕恭讓王(34대)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우왕은 13년이라는 허송세월의 재위를 유지했으나 25년이란 짧은 인생을 마감해야하는 고려의 불운한 왕이었다. 공양왕은 고려로서는 마지막 왕(34대)이 되는데, 그는 신종神宗의 7대손이었다. 그는 이성계 일파의 손에 의해 왕이 된 사람이었으나 그도 결국 4(1392)년에 이성계에 의해 쫓겨나 뒤에 처형되게 된다. 고려는 결국 패망의 기로에 들어서고 만 것이었다.
명나라 사신 채 빈이 본국에 돌아가 공민왕 피살 사건을 보고하면 이인임은 재상이던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염려되어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길목에 자객을 보내 지키고 있다가 채 빈을 살해하게 했던 것이다.
이인임은 정 도전鄭 道 傳. 권 근權 近. 이첨李 詹 등의 친명파親 明 派를 몰아내고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러나 얼마안가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이인임을 곧바로 유배 시켜 버린 것이다.
이성계의 정적인 윤 이와 이초가 명나라로 망명 해 이성계가 친 원 파親 元 派 권신. 이인임의 후사後嗣라고 모함하여 허위 보고를 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이 말을 듣고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해 버렸던 것이다. 명나라 제도를 기록한 책인 이‘태조실록’과 ‘대명회전’ 은1502년 이동양李 東 陽 등이 명나라 효종孝宗의 칙명勅命을 받들어 편찬한 180권의 책이었다.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다.’
라고 기록 되었다는 것을 안 이성계와 조선 조정은 그 심기가 어떠했을까. 이인임은 이성계 자신과 권력을 다투던 정적이었다. 조선은 이러한 말을 듣고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왕가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아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이 성계가 자신의 정적이던 사람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사신들을 여러 차례 파견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기록을 바로 잡아주기를 진정 했다.
이성계의 아버지는 이 자 춘 이라고 자신의 가계를 설명하고 또 이인임의 가계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기위해 명나라로 사신들과 그들 일행이 한번 행차 할 때 마다 수백 명을 보냈던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그 후로도 200여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대명회전’은 고쳐지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종계변무는 조선전기朝鮮傳記 최고 왕실외교의 현안이었다.’
명나라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공식적인 변명을 이렇게 늘어놓을지 모른다. 애초에 조선 사람이 전해준 내용을 그대로 기록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수정 본을 다시발행하려면 때가 있는 것이고 여건이 갖추어진 연후라야지, 국사의 기록을 사사롭게 아무 때나 고치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일 터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했던 기록 소지자가 조선 왕의 승인 하에 조정에서 선택하여 보낸 공식적인 사신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공식적인 절차가 아닌 조선의 반역자들의 말을 들어 사사롭게 기록했다는 것은 명나라의 엄연한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공식사절단을 보내 수차례에 걸쳐 사신들의 온갖 굴욕적인 수모를 당하면서 고치도록 강력하게 요구했건만 명나라 조정은 잘못된 기록을 좀처럼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명나라의 오만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조선 측에서 계속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명나라는 외교적으로 악용하려든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200년 동안 해결을 보지 못했던 ‘종계변무’ 이번엔 한 사람의 통역관이던 홍 순언洪 純 彦*이 이일을 떠 맞게 된 것이었다.
1584년 5월 홍 순 언은 주청사 황정욱黃 廷 彧 등과 북경 사행 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로서는 이번 사행 길은 혹 돌아올 수 없는 길이란 것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야말로 홍순언의 목숨은 풍전등화 격이었다.
그의 일행이 명나라를 향해 출발할 무렵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시정약속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반드시 수석 통역관의 목을 베리라.
홍 순 언은 통역관으로서 이미 10년 전 ‘종계변무‘의 임무를 띠고 북경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연경에 도착한 순 언과 주청사 일행은 명나라 예부상서(차관급 벼슬)를 만났다.
예부상서에게 순 언 이 말했다.
“ ‘대명회전’을 새로 편찬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잘못 기록된 부분을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예부상서가 대답했다.
“분명한 상황을 모르니까 조사해서 당신들이 갈 때 알려 주겠소. 절은 필요 없소. 돌아 들 가시오.
태조 이성계와 이인임의 가계를 자세히 적어 보냈지만 명나라 예부상서의 답변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 일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오. 그러니까 이미 황제께서 아는 내용을 또다시 아뢸 수가 없소.”
“한 번 더 여쭈어보시면 안되겠습니까?”
‘대명회전’을 다시 편찬하게 되면 귀국이 원하는 내용이 저절로 들어갈 것이니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이렇게 10년 전에도 겪었던 일이었다. 이번에도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 해 보였다.
1587년 유홍兪 泓 등 사신과 함께 ‘종계변무’를 해결하기위해 다시 한 번 북경에 도착한 순 언은 동악묘東 嶽 廟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곳은 산동 성山 東 省. 태안泰安 북쪽에 있는 태산泰山의 신을 모신 묘역이었다. 조양 문에서는 2리 밖에 있는 도교 사원으로 원나라 때 세워진 것이다. 명나라 때는 언제나 조선의 사신이 베이징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먼저 동악묘에 들러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자신의 여정이 평안하도록 제사를 지낸 후 조양 문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통역관 순 언은 북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조양 문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 않던 놀라운 사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이 바뀌는 찰나였다. ‘종계변무’사인 홍 순 언과 그의 일행. 그들을 반가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들에겐 냉대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애가 타게 홍 순 언을 찾는 이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명나라 장수였다.
“이번에 공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부의 석 시랑께서 부인과 함께 공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그동안 홍 통역관이 오는지 계속 찾았습니다.”
석성예부시랑은 지금의 외무부 차관급이었다. 홍 순 언을 맞이한 사람은 명나라의 예부시랑이 조선 역관을 맞으러 나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매우 극적인 접대였다. 당시 명나라의 예부 안에는 주객청리사主客淸吏司가 있는데 이곳의 통사판관通事辦管이라는 말단 직원이 조양 문으로 나와 조선의 사신을 맞이해 통관通關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었다. 그런데 예부시랑이 직접 나왔다는 것은 전례 없는 매우 파격적인 대접이란 것을 의미했다. 예부시랑은 순 언을 대면하자 선 뜻 이렇게 말했다.
“군은 통주通 州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내가 아내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요.” 라고 했다.
예부시랑이 조양 문까지 마중 나온 것도 당황스러운 일인데 그의 아내는 홍 순 언에게 절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예부시랑의 아내는 지난날 통주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바로 그 여인이었다. 예부시랑의 부인이 말했다.
“이것은 은혜에 보답하여 절하는 것이니 받으셔야합니다. 군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님 장례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감화에 마음이 맺혔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어느 날엔들 잊겠습니까?”
순 언으로서는 까마득히 잊었던 일이었다.
중국 예부시랑의 처가 된 부인은 순 언 이 주청사들과 지난번 명나라에 갔을 때 통주에서 만나지 않았던가. 그 때 만났던 여인과 순 언 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洪純彦少落䄷有義氣燕到通州夜有靑>
순 언은 젊어서부터 호방하고 의기가 있었다.
일찍이 명나라 연경에 가다가 통주에 이르러 그는 밤에 기생집에 들르게 되었다.
중국어 역관 홍 순언.
북경에 도착하기 하루전날 통주에 도착했다. 조선에서 출발한지 2개월 여 만 이었다. 순 언은 이곳 통주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길을 걷던 그의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한 기생집으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역사에 기록될 그의 운명적인 밤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홍 순 언에겐 정말 예상치 못한 여인이었다. 그 때를 회상한 순 언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생집을 찾은 그에게 한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가냘프고도 청순한 이미지의 소녀는 가련하게 보였다. 이 젊은 여인의 미모에 순 언은 황홀감보다 어쩐지 연민이 더 앞섰다. 미모의 소녀에겐 무슨 곡절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가 더욱 궁금했다. 순 언은 주인에게 그녀를 소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 여인은 소복을 입고 나와 순 언에게 살포시 초면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순 언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녀에게 사연을 물었다.
“제부 모는 본디 절강 사람인데 명나라 북경에 와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불행하게 돌림병에 걸려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이 지금 객사에 있습니다. 저는 외동딸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고향으로 모셔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마지못해 스스로 이곳에 나와야만 했습니다.”
조금 전 짐작대로 순 언은 그녀가 몹시 가여웠다. 여인에게 필요한 돈은 3백금, 적지 않은 돈이었다.
순 언은 전대纏帶를 풀었다. 그는 전대 안에 든 은전銀錢을 모두 털고 말았다. 그 돈은 나라의 공금이었다.
여인은 조선의 이 의인에게 이름을 물었다. 순 언은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대인께서 이름을 말씀 해 주시지 않으시면 저도 주시는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여인이 말했다.
그런 분위기에 순 언은 애절한 여인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순 언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성은 ‘홍洪’이라하오.”
그렇게 성만 말해 주었다. 동행인들은 그를 바보라고 비웃는 것이었다.
곤경에 처한 여인을 구해준 의로운 남자, 그리고 그를 비웃는 주위 사람들, 퍽 대조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에 돌아오자 순 언은 공금을 유용한 죄로 감옥에 같인 몸이 되고 말았다. 대체적으로 당시 역관들은 중국을 드나들 때 당상堂上은 포은 3천량, 당하堂下는 2천량을 정해 각자가 은을 꿰차고 북경으로 가서 무역을 하여 비용을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는 직급에 따라 정해진 양의 고려인삼 등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을 팔아서 비용을 충당했던 것이다. 이를 태면 무역상을 겸한 것이기에 금전은 여유 있게 융통할 수 있었다.
순언 덕분에 부모님 장례를 치르고 무사히 몸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 여인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석성은 순 언을 극진히 대접했다. 석성은 이번 사행의 목적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종계변무’는 마침 석성이 시랑侍郞으로 있는 예부의 소관이었다. 순 언은 북경에서 머무르며 답을 기다렸다. 석성은 칙명까지 어기며 애를 쓰지만 시간은 한 달이 넘게 흘러갔다. 순 언 이 사신들의 숙소인 회동관會同 館에 머무른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이었다. 이윽고 반가운 소식이 이곳 회동관으로 날아들었다.
<대명회전 만력 본1587>
‘대명회전’은 조선의 요구대로 바뀌었다. 수정 본인 ‘대명회전’ 만력 본에 그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이성계의 세계에 대해 매우 분명히 나와 있었다.
이성계는 함경남도 영흥永 興에서 태어났다. 고려의 무장武將이었으나 1388년 위화도威 化 島 회군回軍. 이후 삼군三軍 도총제사都摠制使가 되었다가 1392년 군신群臣에게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이성계는 전주의 혈통을 물려받았는데, 시조始祖인 이한李 翰의 가계家系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만력(1587) 본에는 이성계는 이 자 춘의 아들이다.
<子春是爲成杅之>라고 바르게 표기 되었다. 그러나 정덕 본(1510)에는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다.
<李仁人及子李成桂>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정덕 본에는 분명하게 이성계의 숙적이던 이인임의 이름이 있었다.
홍 순 언은 조선 200여년에 걸친 숙원사업을 이윽고 해결한 것이다. 그가 귀국길에 올라 압록 강가에 왔을 때 그의 일행을 뒤쫓아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석성의 부인이 보낸 선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전칠기螺鈿漆器로 만든 함 10개를 가져왔다. 그 속에는 석성부인인 그녀가 직접 짠 비단이 10필씩 들어 있었다. 보은報恩의 선물이었다. 모두 일백 필이나 되는 비단 옷감에 ‘報恩’이라고 새겨진 글자는 모두 부인이 직접 수놓은 것이었다.
사실 조선 조정은 역관 홍 순 언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선조는 이번에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다름 아닌 역관의 목을 베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중재자역할을 하는 역관들의 농간이 깔려 있지 않는지 선조는 의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끌어왔기 때문이었다. 역관들이 요령 것 수완을 잘 발휘했더라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옥에 갇혀 있어 살아남을지 보장되지 않은 몸, 목숨이 달아날 각오로 순 언은 지금 죽음의 명나라 사행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순 언 이 돌아왔을 때의 선조와 조선 조정 신하들의 기쁨이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광 국 지경 록光 國 志 慶 錄을 보면 당시 선조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선묘어제宣 廟 御製’에
<금수禽獸의 나라를 예의禮義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니 나라가 다시 만들어졌다.>
순 언은 이런 연유로 나라를 빛낸 공신이 되었다. 선조는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신료臣僚들에게 광국공신의 칭호를 내렸던 것이었다.
일등: 윤근수尹 根 壽. 황윤길黃 允 吉. 유홍兪 泓. (3명)
이등: 홍 성민洪 聖民. 이후백李 後 白. 윤두수尹 斗 壽. 한응인韓 應 寅. 윤 섬尹 暹. 윤 동尹 洞. 홍 순언洪 純 彦(이상 7명)
삼등: 김 주金 澍. 이양원李 陽 元 황 림黃 琳. 윤탁연尹 卓然. 정 철鄭 澈. 이 산해李 山海. 기대승奇 大 升. 유성룡柳 成 龍. 최 호崔 淏(이상 9명) 등 모두 19명이었다.
19명의 광국공신 중 통역관은 오직 홍 순 언뿐이었다. 이런 지위는 역관으로서는 오를 수 없는 자리였다.
선조는 순 언에게 우림위장羽 林 衛將(종2품)당 능 군唐 陵 君 호를 하사했다.
군호를 받는다는 것은 왕실과 핏줄이 같다는 뜻으로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로움이었다.
거기다 선조는 순 언에게 땅과 노비까지 하사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군이 상륙 하루 만에 동래성이 점령되고 20일후엔 서울까지 함락되었다. 선조가 치욕스런 피난길에 올라야 할 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명나라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조선 파병을 주저할 뿐이었다. <서애 집>에서는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은 외국입니다. 외국끼리 싸우는 것인데 우리 명나라가 도울 필요가 없습니다.
압록강을 굳게 수비하면서 현재나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선이 갑자기 새처럼 숨는 것은 분명히 스스로 초래한 재앙입니다. 우리가 멀리 외국까지 가서 돕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세도가 당당하던 한 신하가 말했다.
조선을 돕자고 주장하는 이는 오직 병부상서 석성 한 사람뿐이었다.
그 때 병부상서는 지금의 국방부장관이었다. 그가 말했다.
“조선은 중국에 외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사정은 우리의 사정입니다. 만일 왜적이 조선에 살게 되면 요동遼 東을 침범할 것이고 또 나아가 산해 관山 海關에 이르면 북경北京이 위태롭게 됩니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명의 조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 臣 秀 吉>가 조선에서 길을 빌려가지고 명으로 넘어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군사적인 최후의 공격목표가 명국明 國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략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명나라인 자신들이 공격의 최종목표라고 한다면 조선에 들어가 미리 일본군을 막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하는 차원에서 전략적인 결단을 서두르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석성의 주장은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라는 이른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였다. 일본이 만약 조선 땅을 점령하면 그 다음은 명나라로 향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명나라가 조선을 돕는데 주저하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명나라에서는 이미 일본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동시에 조선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과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려한다는 소문이 요동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1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1591년의 해이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하 북 성 동북 경계, 東端에 있는 도시) 산해 관에 홍 순 언 이 도착했다. 그 때였다.
“너희 나라가 왜놈들과 함께 배반을 한 주제에 무엇 때문에 여기를 왔느냐?”
명나라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해 가면서 욕을 퍼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지 불과 보름여 만에 선조가 평양까지 피난을 오자 명나라 조정의 의심은 더 해 갔다.
임금이 피난을 가장하여 왜군의 길잡이가 되어 북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사람을 조선 임금에게 보내 직접 확인을 하기도 했다.
송 국신 명나라 관리가 칙서勅書를 내밀면서 말했다. 칙서내용은 이러했다.
“그 대 나라가 모반을 도모한다는 말이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팔도 관찰사 중 누구 한사람도 한마디 말 하는 이가 없고, 팔도에서 누구하나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을 수가 있소? 이것은 명에 대한 음흉한 반역이 분명하오.......”
“제가 일찍이 국왕을 뵌 적이 있기 때문에 국왕이 실재로 피난 온 것인지 아닌지 확인 해 올 것입니다.”
라고 송 국신은 조정에 말한 뒤 피난처에 있던 조선 국왕을 만나러 왔던 것이었다.
명나라의 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선조로서는 암담한 일이었다.
사태가 다급 해 지자 병부상서 석성은 다른 고위 사신이 아닌 역관 홍 순 언을 급히 불렀다. 명나라가 조선을 믿게 하려면 조선에서도 움직임을 보여야했다.
석성이 말했다.
“당신 나라 일에 나 혼자 힘을 다하고 있소,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뜻은 나와 다르오. 당신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한다면 내가 힘을 쓸 것이오. 그래서 빨리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청하도록 하오.”
순 언은 석성의 말을 조선에 급히 전달하므로 서 결국 명나라는 원군을 파병하게 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게 된 대는 ‘종계변무’의 외교에서 한 실무 통역관의 숨은 역할이 컸던 것이다. 이 같은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 내는 데는 개인적인 우의와 두터운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어렵지 않게 20여만이 넘는 원군을 얻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홍 순 언 이 했던 것이다. 이것은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말하는 것이었다.
외교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역량에는 사람의 본성에서 근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 역관의 신분은 당시로선 중산계급에 한정되어 있었다. 언어통역을 다루는 한 가지 전문직이라고는 하지만, 중. 소상공업자나 소지주. 월급 생활자와도 같은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신분상승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는 무한정 상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역관이 되려면 까다로운 여러 가지의 시험제도를 통과해야만 자격이 주어지는 것 아닌가. 어느 특정국의 역관이 되려면 그 상대나라의 문화에 정통해야 했다. 법률과 관습까지도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순 언은 명나라의 윤리와 도덕에 관한 것도 몸에 젖어 있을 터였다.
그 기원이 960년대 송宋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야 할지 모르나 인성을 닦는 유학儒學에 뿌리를 둔 한 철학에도 순 언은 정통했는지 모른다.
보다 더 깊은 철학적 고찰을 통해 우주의 본체와 인성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한 주자朱 子학 의 가르침이었다. 고려 말에 조선에 들어왔다던가. 여하튼 조선왕조 때 국시國是가 될 정도로 조선 선비들 사회에 널리 퍼졌던 성리학이었다. 오늘 날 까지도 인간의 본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는가. 가르침 중에는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난다는 4가지 마음씨를 분석한 것이 있었다. 즉, 어진(仁)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측은지심惻隱地心. 의(義)로 움에서 우러난다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절이 밝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知)에서 나온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바로 그 것이었다.
이런 성리학의 가르침이 순 언의 몸과 마음에 젖어있지 않았다면 어찌 어진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어진 마음이 없는데 어찌 측은히 여겨지던 한 여인에 대해 연민憐憫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의 인격에 의義가 자리 했기에, 아니할 수 없어 의롭지 않는 것에 빠져드려는 한 여인. 그녀가 처한 환경에 대한 노함이 있었다. 불의不義에는 이를 배격하려는 인류人類의 동류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사나이로서 동류의식에서 나온 그의 부끄러움이 연약한 여인을 보호하겠다는 마음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녀의 절박한 처지가 순 언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순 언은 그녀의 어린 나이차이로 보아 오라비와 누이 터울이 아니라면 혹은 그 녀와 같은 아름다운 딸이 있을 것이었다.
그는 예(禮)절이 몸에 밴 선비였기에 꽃다운 소녀의 앞날을 위해 그녀의 간청을 사양했다. 한 여인의 정절貞節을 범접犯接하지 않고 지켜주었던 것이다. 부모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있는 가녀린 소녀를 보호하지 못할지언정 어찌 금수禽獸와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인가. 그것이 의로운 선비의 표상이 아닌가.
공자의 가르침에, 예의가 몸에 밴 선비인가의 판별은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어두운 곳에 있을 때의 몸가짐의 태도라 했다.
그는 지력知力 즉 지혜智慧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힘으로 도리道理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윽고 마음속의 미망迷妄을 끊고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순 언은 경비를 털어 무기재료를 구입한다.
명나라에서는 반출이 금지된 품목이지만 석성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활을 만드는 궁각弓角(물소 뿔) 천삼백여덟 편과 화약재료인 염초焰硝(화약재료)20근을 구할 수 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깊은 뜻이 헤아려진다.
순 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명나라 장군 이요성의 통역관이 되어 전쟁터를 따라 다녔다. 가장 시급한 일은 평양성의 탈환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 하면서 전세는 반전되었다. 이 후로도 일본과의 전쟁은 7년이나 계속 되었다. 이는 임진년에 이어 또다시 정유년에 일어난 전쟁이기에 정유재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명나라는 총 21만 명의 군사와 882만의 은화를 임진란 당시 조선에 지원했다 고한다.
마침내 1598년 조선의 재침략을 감행했던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해 9월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순 언은 왜란이 끝나가던 해에 자신의 책임도 다 끝낸 듯 세상을 하직한다.
다른 한편 파병을 주장한 명나라 국방부장관 석성은 막대한 군비를 소모했다는 책임을 물어 투옥되었다. 결국 석성은 그곳에서 옥사하고 만다.
본말이 전도 된 것 같지만 조선의 은인이었던 석성의 후손들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 본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리라.
그러니까 석성이 국방부 장관으로 병권을 휘두를 때였다. 그전에 그의 후처의 정절을 지켜주고 기생집에서 구출해 준 홍 순 언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던 차에 ‘종계변무’의 주청 차 자국 명나라에 들어온 순 언의 책무를 도와줌으로서 200여 년간의 조선 숙원을 풀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순 언에 대한 일차적인 보은이었다. 명나라는 도리의 종주국입장에서 보면 그들에게서 전해진 가르침에 대한 윤리적 행위가 조선의 한 통역관에게서도 발견 된 것으로 여길 터이다. 그것이 바로 지켜본 종주국의 자긍심이 아닐까.
인간의 본성이 갖추어야 할 인자仁慈함이라든가 의義로움, 예절禮節 또는 지혜智慧같은 속성을 그들은 주장하지 않았던가. 동이東夷 족에겐 그것으로 다져진 인격자가 흔치 않으리라 의심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동이 족 중에 그들의 가르침이 순 언 같은 인격자를 길러냈다는 것에 국록을 먹고 명을 대표하는 석성으로서는 명나라의 자존심을 높이고 자긍심에 한껏 취해 있을 터였다.
석성은 순 언과의 그런 개인적인 인과관계로 맺어진 두 번째 보은으로 중국은 조선에 많은 군사를 동원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결과 명의 조정으로부터 석성은 엄청난 국력을 낭비했다는 지탄을 받았다. 병부상서 석성은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다. 석성은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그는 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짊어진 그런 죄의 대가로 위험에 직면했던 석성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기관에서 우리나라 현지를 답사한 결과 석성의 후손들은 지금도 조선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후손들은 석성의 유언에 따라 조선에 귀화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석성은 그가 옥사하게 된 뒤의 후손들의 장래가 위태로워 질 것을 염려하였다. 그의 두 아들과 부인은 석성의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넘어 온 것이었다. 선조임금은 그들에게 해주海 州에 땅을 주어 정착하게 하였다. 그 때부터 해주 석씨가 시작 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곧 명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다시 청나라가 들어서자 해주 석씨 일가는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득세하니까 청나라에서 조선에 들어가 무조건 명나라 유민을 잡아들이라는 언명이 내려진 것이다. 그들은 행여 죽을까봐 그들 앞에 나가지 못했다. 피난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나라 국방부장관이었던 석성의 가족들은 피란처를 찾아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큰 산 골짜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지리산 산골이었던 것이다. 석씨 후손들은 그곳에서 지금까지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400여 년 전 어려움에 처한 한 여자, 그녀를 가엾게 여긴 의로운 또 한 남자가 역사를 바꾼 것은 공자의 어진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순 언 이 베푼 측은지심과 은혜를 잊지 않은 그녀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해주석씨 뿐만 아니라 같은 이유로 적강 신씨. 소주 가 씨. 상봉 마 씨. 절강 팽 씨 등등. 모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위해 싸운 명나라 장군들의 후손이었다. 조선의 역사가 된 조선의 과거이자 현재가 된 귀한 인연들이었다. 역사란 장대한 시간과 공간을 놓고 볼 때, 찰나에 불과한 그 짧은 인연이 그 들 개인과 가족은 물론 나라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았던 것이었다.
역사란 이렇게 수많은 인연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 필의 비단과 같은 결과를 만드는 과정이 아닌가.
그 씨줄과 날줄의 교차점엔 조선시대 외교의 최전방에서 활약했던 나라의 역관이 있었던 것이다.
|
첫댓글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알려면 고려사를 모르고는 결코 안다고 할수 없듯이 사백님 이제 역사의 소설을 쓰시는군요 ! 종계변무 조선시대인 1394년(태조 3)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 간 명(明)나라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잘못 기록된 세계(世系)를 시정해달라고 주청(奏請)했던 아주 중요한 사건이였지요 ! 수없는 경계에 서서 발이 절이도록 더러는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강열한 아픔이 있기에 조선시대를 맞이한 후손들의 숨가쁜 소리를 들을수 있는가 봅니다 의로운 남성이 역사를
한 수 배우고 갑니다
공석선생님,,오랜만에 들어와 잘 읽었습니다. 홍순언과 결초보은, 임진왜란과 홍순언의 활약, 해주석씨의 유래에 이르기까지...홍순언의 높은 활약과 품성을 칭송한 글은..그대로 공석선생님을 느끼게 해줍니다..안녕하세요? 서한경이예요. 뵙고 인사드려야 할텐데..늘 건강하세요..유익한 글 정말 재미있게도 읽혀지네요...
잘 되었군요. 심향! 그리고 로덴 .맥심, 서한경 선생! 정말 오랜만입니다. 왜 그리볼수 없었나요? 서한경선생,그동안 어디가 불편하기라도 하셨는지요? 소설코너로 옮겨주신 심향 고맙습니다. 여기 등장한 홍순언은 장편중에 나오는 한 인물에대한 이야기입니다. 진부하게 느껴질지도모를 역사 한편을 상정한 것인데, 읽고 재미 있으셨다니 마음흐믓합니다. 그러고보니 답글이 너무 늦었군요. 연당. 08.11.04.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