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닥불 아침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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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回 大韓民國演劇祭出品作品(제8회 대한민국연극제출품작품)
劇團 女人劇場 第七二回 公演 作品(극단 여인극장 제72회 공연 작품)
모닥불 아침이슬
尹朝炳(윤조병) 作(작)
姜由楨(강유정) 演出(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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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아침이슬
[때] 현재
[곳] 탄광 막장
나오는 사람들
김만석 ...... 조장, 예순살쯤
강진호 ...... 채탄부, 쉰 살쯤
이덕수 ...... 채탄부, 마흔살쯤
장태철 ...... 운반부, 서른 다섯살쯤
한병국 ...... 운반부, 스무 다섯살쯤
갈대밭 ...... 병국의 약혼녀
섬 네] ...... 덕수의 처
다산댁 ...... 진호의 처
미쁜네 ...... 마을 술집주모
강용재 ...... 강진호의 아들
무대
탄광의 갱내 막장이다.
좌표번호가 1000~2700인 것으로 보아 지하 일천미터-갱도거리
이천칠백미터-다섯째 막장임을 알 수 있다. 지하 깊숙히 있는 작업장이라
천장과 벽이 갱목과 철주로 덧대에 있다. 바닥엔 협궤선로가 두쌍의
유선형으로 무대 앞에서 좌우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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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좌측이 동갱구, 우측이 서갱구이고, 무대 전후는 채탄장이다.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막장 안에서 이루어 진다. 무대장치 역시
막장뿐이고, 그 외의 추억이나 회상 장면은 이 막장에 최소한의 소도구를
설치해서 나타내거나 막장 벽을 열고닫는 식으로 설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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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장
음악이 흐르면서 막이 오른다.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면서 굴착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굴착기 소리가 가볍게 귀청을 때리면서 막장이 들어난다.
김만석, 강진호, 이덕수가 저만큼 채탄더미에서 곡괭이, 해머, 굴착기로
탄맥을 파헤치고 있다. 막장을 밝히는 것은 막장램프와 광부의 헤드램프
불빛뿐인데 그 불빛이 움직일 때마다 막장 구석구석을 채워 너울대는 탄진이
선명하게 들어난다. 장태철, 한병국이 서갱구에서 갱목과 동바리를 실은
탄차를 밀고 들어온다. 그들이 막장 한가운데에 이르러 탄차를 세우더니
싣고온 짐을 막장 바닥에 부려놓는다. 다섯명의 광부들은 모두 헬멧과
방독면을 쓰고 작업을 한다. 이윽고, 만석이 곡괭이질을 멎고 손을 털면서
나와 막장램프 옆에 걸려있는 종을 친다. 종소리에 덕수와 진호가 굴착기와
해머를 놓고 손을 털며 나오고, 태철과 병국도 일을 멎는다. 막장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병국이 호스를 끌어다가 채탄더미와 작업장에 물을 뿌린다.
그들은 바닥이나 갱목에 앉거나 탄차에 기대어 탄진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멀리서 폭발음이 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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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이 방독면을 벗자 모두 방독면과 헬멧을 풀어 땀을 닦고, 수통을 꺼내
가글을 해서 탄더미에 뿌린다.
[김만석] (물을 맛있게 마시고, 병국에게) 밤차에 서울에서 약혼녀가
내려오신 다구요? 갑작스런 질문에 한병국은 물론 다른 광부들도 물을
마시거나 수통을 기울인 대로 의아하게 바라본다.
[김만석] 한 선생님은 그만 출갱을 하세요. 그래야 약혼녀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지요.
[이덕수] 그렇구만유.
[한병국] 아닙니다.
[김만석] 그믐이라 하늘두 칠흙으로 캄캄한데 기차에서 내리면 정거장에
쌓인 탄더미가 새까맣구 산두 새까맣구 길두 집두 새까매서 음산한데다가
마중나온 사람조차 없으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장대철] (앞질러) 조상님두 임을찾아 천리길도 멀다잖고 달려오는건데
새까맣다구 새까맣게 보입니까? 푸른산, 맑은 물일 겝니다.
[이덕수] 그렇구먼유
[김만석] 초행인데 기차역서 기숙사까지 혼자서는 쉽지않지 (병국에게)
밤일은 우리 넷이서 어금니 한번씩 더 물면 지장 없으니 출갱하세요. 선생님,
어서요.
[한병국] 아닙니다. 조장님 그리구 그저 한군으로---아니면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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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주십시요.
[장대철] 조장님이 깎듯이 존대하니까 우리가 말을 놓기가 난처합니다.
[김만석] 현장 사무소서 서무일을 보실땐 우리모두 선생님, 선생님했어
처지가 바뀌었다구 마음까지 바꾸는게 아닐세
[한병국] 장형 얘긴 그게 아니지요.
[장대철] 그때 배알이 틀려서 한병국---( 호칭 때문에 망설이다가 ) 시를
공구 창고로 끌고 들어가서 몇대 쥐어패긴 했지만--- 그리고 아직도 한병국씨
속을 모르긴 하지만 사무소에 있다가 막장에 들어왔다고 그러는건 아닙니다.
한 막장서 같이 궂은일하는 처지에 호칭때문에 서먹하게 빗돌고 싶지 않은
거에요.
[김만석] ( 병국에게 ) 어떻든 출갱하세요. 교대하면 새벽인데 여자분을
밤새 어디서 서성거리게 하겠어요.
[강진호] 예는 여관이 없으니까 읍내루 나가야 허지유
[이덕수] 우리집서 하루이틀 묵어두 되는디유
[한병국] 걱정하지 마세요. 주막 주모에게 부탁을 해놨읍니다.
[장태철] 뭐? 미쁜네에게 부탁을 했어?
[한병국] 네.
[강진호] 하필 사내들만 우글거리는 주막에유?
[김만석] 사내들이래두 죄 막장 식구들이니께 관계는 없지만---
[장태철] 내 얘긴 그게 아니구---주모가 당신을 좋아한단 그말이오.
[김만석] 그분은 학교 선생님이시라는 말이 있든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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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국] 네
[이덕수] 그럼 운반부라는 걸 숨겨야겠구먼유
[한병국]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지난번 편지에 그간 사정을 죄 알렸지요.
이해할 여잡니다.
[장태철] 술집여자지만 미쁜네도 달동네엔 어울리지 않는 여잡니다. 예서
썩긴 아까운 여자예요 이까짓 흑똥에 비길 여자가 아니라구요. 그들은 모두
불없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건 담배가루를 잘근잘근 씹는건데 김만석이
시작하자 강진호와 이덕수가 조금 빗겨서 피우고, 장태철과 한병국은
돌아앉아서 피우는데 그 예의와 질서가 철저하다.
[김만석] ( 헬멧을 쓰면서 ) 이번 탄질은 썩 좋아.
[강진호] ( 역시 헬멧을 쓰며 ) 야 탄맥결이 좋아서 일두 수월하구먼유.
[이덕수] ( 일어서며 ) 까스도 안 나오구 물두 스미지 않으니까 이참은
갱목두 아끼고 시간도 많이 벌겠어유.
[강진호] 버력은 벨루구 죄 감돌이라 일허는 맛이 나는먼유.
[이덕수] 일허구 지나간 자리가 무명옷 곱게 다듬어 놓은 것처럼
개운하구먼유
[강진호] ( 역시 돌아보며 ) 그려어
장태철, 한병국도 일어선다.
[김만석] 깊으니까 영근게야.
[장태철] 이 갱달기가 제일 깊다면서요?
[김만석] 죄 겁냈지만 이 좋은 탄맥을 놔두고 겉만 핥아서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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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이덕수] 야, 막장두 덧대기를 듬성듬성 혔는디두 울매나 틈실헤유. 그들은
방독면을 허리에 매달고 헬멧만 쓰고 일을 시작한다. 만석, 진호, 덕수는
지랫대와 해머를 이용해서 덧대기를 해나가고 병국과 태철은 채탄더미의 탄을
탄차에 싣는다. 그들은 부즈런히 손을 놀리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김만석] 예는 지하 일천미터구 갱도거리가 이천칠백 미터야 덧대기를
단단하게 해야해 ( 계속 일손을 놀리며 ) 탄을 부리구 올때 갱목허구
동바리를 있는대로 죄얻어 싣고오게
[한병국] 녜
[장태철] ( 퉁명스레 ) 주어야 싣든지 말든지 하죠
[김만석] ( 못 들은듯 해머질을 하고는 ) 장씬 왜 또 심통이 났어?
[장태철] 탄질이 좋다구 정신없이 파내니까 미처 운반할 틈이 없어요.
[김만석] 잘하면서 그러는군
[장태철] 잘하는게 아니구 난리예요.
[김만석] ---?
[한병국] 그게 아니구요 천오백 막장은 일번부터 이십번 까지가 한탄맥인
모양이예요 막장마다 탄이 쏟아져 나오니까 수갱에서 미처 올리지 못하고
있어요. 갱목, 동바리, 철주, 쇠파이프까지 동나구요.
[장태철] 그것도 쌈질해서 겨우 얻어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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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호] 이 머드레기 탄맥을 눈앞에 놔두구 굿문 밖으루 나오라는 건
아닐티지.
[장태철] 자연조건은 괜찮은디 공기압축 모터, 연결호스, 통풍갱구,
선풍기, 갱목할 것 없이 죄 모자라요. 예 빼서 제 박고, 제 빼서 예 박는
식으로 하다간 큰 사고---
[강진호] 장씨---
[김만석] 맞는 말여 ( 허리를 폈다가 다시 일을하며 ) 굿반수 말로는
다른데서 더 보충해온다구 했어 그렇군! 굿반수 말이 맞는구먼 이건 예
있던게 아냐 보충해온 것일세.
[한병국] 인원도 배를 늘려서 사오백명씩 들여보낸답니다.
[강진호] 그렇게 해야할 거유
[이덕수] 야
[김만석] 너무 급하게 서두는것 같구먼 그들은 말없이 일에 열중한다. 삽,
해머, 힘주는 소리만 들려오다가 이덕수가 약간 당황하는 소리로 김만석을
부른다.
[이덕수] 조장님, 이거 보세유.
[김만석] 왜?
[이덕수] 동바리가 땀을 흘리네유
[김만석] 뭣이?
[덕 수] 아적은 손땀만 흘리는디 곧바루 비지땀을 흘릴것 같어유
김만석이 다가간다.
강진호가 뒤따른다.
한병국과 장태철이 삽질을 멎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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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수] 보세유 이쪽은 죄 축축허게 젖었구먼유
[김만석] ( 살펴보고 ) 별일은 없어도 돌아가며 갱달기를 해두는게 좋겠네
모두 삽을들고 막장가에 둘러서서 도랑을 파기 시작한다.
[장태철] 바닥은 건하잖아요?
[강진호] 어쨌든 굿꾸리는 잘하는게 안전하니께
[김만석] 쉿.
모두 삽질을 멎고 귀를 기울인다.
[김만석] 동바리가 울고있어.
[이덕수] ( 대수롭지 않게 ) 눈시울을 적신것 뿐인디유
[김만석] 아냐 ( 고개를 젓는다 )
[강진호] ( 급히 동바리를 다시보고 ) 눈물을 쏟아낼것 같은디유
[김만석] 동바리가 소리를 내고있어.
( 이때 땅울림이 엷게 들려온다 )
[한병국] 땅울림이예요!
[모 두] 맞아요 땅이 울어요!
[김만석] 너무 마구잽이로 파내구 있어. 방독면을 쓰게
(모두 급히 깨스마스크를 쓴다. 그와 동시에 싸이렌이 요란스레 울린다0
[장태철] 비상이예요! 탈출 신홉니다!
[김만석] 당황하지 말고 연장을 챙겨 탄차에 오르게
모두 달려가서 삽이나 괭이를 챙기는데 폭음과 함께 막장이 뒤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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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철] 깨스폭발이다!
[김만석] 엎드렷!
동시에 반사섬광이 번쩍이고 광부들의 아우성이 터진다. 지진이거나 거대한
산이 무너져내리듯 소용돌이치다가 서서히 쓰러지면서 땅울림으로 변한다.
아직 어두운 무대에 한 광부가 엎드린 그대로 얼굴만 들어 주위를 살핀다.
그의 캡램프가 막장내부를 하나씩 비춰나간다. 넘어진 탄차, 퉁겨진 덧대기
갱목과 철주, 나둥그러진 해머, 곡괭이, 삽--- 여기저기 엎드려서 움직이지
않는 광부들
땅울림과 자욱하던 탄연이 조금 가시고 무대가 조용해진다.
[김만석] ( 엎드린 그대로 방독면만 벗고 ) 움직이면 안돼 내가 부르는
대로 얼굴을 들어 생사만 확인해 주게.
( 사이 ) 강진호 ( 탄더미에서 얼굴을 든다 ) 이덕수 ( 바닥에서 얼굴을
든다 ) 장태철 ( 바닥에서 얼굴을 든다 ) 한병국 ( 반응이 없다 ) 한병국씨!
( 탄차 밑에서 얼굴을 드는데 헬멧과 깨스마스크가 벗겨지고 피가 흐른다.
그러나 반갑다. ) 한선생--- 그대로 엎드려 계세요!
김만석이 조심스런 동작으로 퉁겨진 철주, 갱목, 동바리 따위를 바로
세우거나 안전도를 확인하고 한병국에게 다가간다.
[김만석] 모두 날 도와주게!
광부들이 기거나 걸어서 다가가서 탄차에 깔린 한병국을 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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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국] 다리, 다리가--- 아---
[김만석] ( 살펴보고 ) 골절이야 대단찮아 맞추자구 자, 어서들 잡아 (
당긴다 )
[한병국] 아--- ( 아픔을 참느라고 이를 악다물고 몸을 뒤튼다 )
[김만석] 아프고 말구요 자, 조금만--- 됐어요!
광부들이 탄차를 바로 세운다.
[김만석] 한 선생을 태우세
광부들이 한병국을 탄차에 뉜다.
[김만석]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요.
[한병국] 아--- ( 아픔을 참는 것으로 대답을 한다 )
[장태철] 천장이 곧 내려앉겠어요!
[만 석] 이웃 막장에서 폭발한게야 어서 챙겨서 나가자구
( 광부들이 공구들 챙겨 탄차에 싣는다 )
[덕 수] 책임량은 어떻게 하죠?
[진 호] 나갔다가 들어와야지
[만 석] 강씨는 동갱구로, 이씨는 서갱구로 앞서게
[강 이] 네
[만 석] 수직갱도가 나오거든 광차들 내려보내라고 신홀 보내고 우릴
부르게
[강 이] 야
진호와 덕수가 좌우 갱구로 나간다.
만석과 태철이 지랫대를 이용해서 탄차와 바퀴를 맞춰 선로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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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가 헐떡이듯 들어온다.
[진 호] 조장님, 마--- 막혔구먼유!
[태 철] 뭐라구요?
[만 석] --- ( 생각에 잠길 뿐이다 )
[진 호] 수직갱도허구 우리 막장 중간에서 막혀버렸어유 지금두 천장서
탄가루가 떨어지구 갱도가 이쪽으루 조금씩 무너져오고 있구먼유. 덕수가
역시 겁에 질려서 들어온다.
[덕 수] 조장님--- ( 그러나 말을 잇지 못하고 바라볼 뿐이다 )
모두 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다.
그 시선들이 서서히 만석에게 모아진다. 한병국이가 탄차에서 상체를
일으켜 넘겨본다.
침묵이 흐른다.
만석이 객석쪽 저만큼 위를 바라본다.
[만 석] 탄차를 밀고 앞으로 나가게
[모 두] ---?
[만 석] 통풍구가 보이잖나 저 통풍구로 오르는 걸세.
[모 두] 녜?
[만 석] 벽에 발판을 만들면서 올라가면 돼
[태 철] 일천미텁니다. 머리도 들어가지 않구요.
[만 석] 파내리면서 올라가는 거야.
[덕 수] 한 사람만 실수허믄 죄 우르르 떨어지구 마는디유.
[만 석] 십미터 간격으로 수평갱이 있어. 앞사람이 뚫고 올라가서 그 갱에
도착하면 다음 사람이 오르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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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철] 우린 오른다고 하지만 한씬 어떻게 하죠?
모두 탄차에 시선을 보낸다.
[병 국] 저도 할 수 있어요 어서 탈출하세요.
[만 석] 한선생은 내가 맡겠네 ( 구석에서 밧줄을 찾아내어 한끝을 허리에
맨다 ) 어서 차를 앞으로 밀게.
광부들이 탄차를 앞으로 민다.
탄차가 무대끝에 왔을때 앞을 응시하던 한병국이 소리친다.
[병 국] 잠깐! ( 탄차가 멎는다 )
[태 철] 왜그래? 뭐가 뵈나?
[병 국] 쉿, 소리가 들려요!
모두 귀를 기울인다.
[진 호] 갱이 무너지는 소리구먼유---
[덕 수] 야 우리 막장두 잠깐이유---
[만 석] 강씨는 장씨허구 동갱구를 막고 이씨는 내허구 서갱구를 막세
탄더미가 더 들어오지 못하게 쐐기를 박게.
강씨. 장씨가 갱목과 동바리와 해머를 들고 동갱구로 나가고, 만석과
덕수도 갱목과 동바리와 곡괭이를 들고 서갱구로 나간다. 이어서, 한병국이
갑작스레 일어선다. 그러나 다리의 통증으로 그대로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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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국] ( 소리친다 ) 장형, 장형! ( 그러나 막장이 울릴뿐 대답이 없다.
서갱구를 향해 ) 조장님, 조장님! ( 그러나 대답이 없자 탄차 난간을
넘으려다가 막장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 조장님, 조장님!
[만 석] ( 달려나오며 ) 아니, 뭡니까?
[병 국] 이쪽 나사갱도 입구에 도시락하고 압축공기통이 있어요!
[만 석] ( 부축하며 ) 알았어요 어서 올라가세요!
[병 국] 그것부터 가져와야 해요. 벽을 쌓기전에 파내야 해요! 어서요!
만석이 동갱구로 달려간다.
병국이 다리를 끌면서 기어가다가 쓰러진다.
무대가 서서히 어둬진다.
( 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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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장
[무대] 무대
중앙 전면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면 만석, 진호, 태철 세사람이
똑바르게 서서 고개를 젖혀 통풍구를 주시하고 있다. 그들 앞에는 탄차가
있는데 위에서 탄가루가 쏟아져 쌓이고 있다. 덕수가 통풍구를 오르면서
탈출구를 뚫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눈을 번뜩이면서 위를 응시할 뿐 아무도
입을 떼지 않는다.
[진 호] ( 시계를 보고 ) 벌써 자정이구먼유.
[만 석] ( 미동을 않는다 )
[태 철] 다섯 시간입니다.
[만 석] ( 역시 미동도 않는다 )
[진 호] 미끄러져서 세번이나 떨어지구유.
[태 철] 쏟아진 탄가루가 이 탄자루 스물다섯 찹니다.
[진 호] 스물다섯 톤이구먼유.
[태 철] 십미터 오르는데 다섯시간이면 천 미터 오르는데 오백시간입니다.
[진 호] 쉬지 않구 계속해서 파올락두 스무날 걸리느만유.
[태 철] 선발대는 한번씩이지 더 못합니다.
[진 호] 우린 지금 도시락 다섯 개, 압축공기 한 통, 식수 세 수통 밖에
없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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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철] 저 통풍구가 위로 올라가면서 계속 살아있다고는 못합니다.
[진 호] 지금도 공기가 바뀌지는 않는디유.
[태 철] 이 상황에서 스무 날을 일하면서 견딜 수는 없읍니다.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만 석] ( 비로서 ) 살아있는 갱도 인터폰이나 신호선이 있는 비상대기소,
아니면 곧바로 구조대와 만날수도 있어.
[태 철] 빛이 흔들립니다!
[진 호] 막장에 도착했구먼유!
[태 철] 올라오라는 신홉니다!
[만 석] 덕수 내 말이 들리나?
[덕 수] ( 위에서 소리만 ) 야, 들리는구먼유!
[만 석] 수평갱에 들어섰나?
[덕 수] 야.
[만 석] 막장인가?
[덕 수] 야.
세 사람의 눈에 빛이 솟는다.
[만 석] 누가 있나?
[덕 수] 아무도 없는디유!
[만 석] 피신한 통로가 있단 말인가?
[덕 수] 예두 죄 맥혔는디유.
[만 석] 거기 광부들은?
[덕 수] 예는 더 무너졌구먼유!
[태 철] ( 만석에게 ) 묻힌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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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석] ( 덕수에게 ) 위를 보게. 통풍구가 뚫렸나 ?
[덕 수] 야. 뚫려 있구먼유.
[만 석] 올라가겠네!
[덕 수] 야. 조심허세유!
[만 석] (태철에게) 올라가게.
태철이 도시락 보따리를 집어든다.
[덕 수] 몸만 오르게.
태철이 탄차에 올라선다.
그가 팔을 위로 뻗으면서 오른다리를 들어올리면 스포트.라이트가 나가고,
저쪽 탄더미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병국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진다. 그가
낡은 수첩에 뭔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통증이 심한듯 아픔을 견디지
못해 엎드린다. 이 라이트가 나가고 중앙전면 라이트가 들어오면 만석과
진호가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태철이 통풍구를 타고 오르고 있어서 탄가루가
간혹 탄차 위로 부스러기처럼 떨어진다.
[진 호] 불빛이 흔들리느먼유!
[만 석] 올라가게.
[진 호] 조장님이 먼저 올라가세유.
[만 석] 어서 오르게.
[진 호] 지가 한 선생을 부축해서 오르것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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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석] 쉰 일이 아냐.
[진 호] 허니께유.
[만 석] 자넨 나가야 해.
[진 호] 죄 같지유.
[만 석] 올라가서 밧줄을 만들어 내려보내게. ( 사이 ) 올라가는 곧바로
자네가 선발대로 통풍구를 오르게.
[진 호] 야. ( 그러나 그대로 서 있다 )
[만 석] 어서.
진호가 탄차에 올라선다. 그가 팔을 위로 뻗으면서 오른 스포트.라이트가
나가고 병국에게 라이트가 들어온다. 병국이 엎으려 있다가 상체를 이르켜
아픔을 견디며 수첩에다 무엇인가를 기록한다. 병국의 라이트가 나가고, 다시
중앙 전면 라이트가 들어오면 만석이 혼자서 통풍구로 오르고 있는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역시 탄가루가 부스러기처럼 떨어지기도 하고 뭉턱
쏟아지기도 한다. 신호로 빛이 흔들린다. 만석이 도시락 보따리와 물통과
공기통을 모아온다. 이윽고, 위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작업복을 꽈서 만든
밧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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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이 도시락, 물통, 공기통을 밧줄 끝에 매달고 흔들자 밧줄이 위로
올라간다. 만석이 병국을 부축해서 탄차에 오른다. 위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그 밧줄을 흔들어 그냥 올려보내고 허리의 끈으로 병국의 허리를 묶는다.
만석이 팔을 올리고 오른 다리를 들자 라이트가 아웃된다. ( 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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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3장
바로 위에 있는 막장이다. 막장 구조는 다를 바 없고, 더 무너져서 공간이
훨씬 좁다. 무대 한 곳에 스포트.라이트가 좁게 떨어지면 억수와 태철이가
통풍구로 올라오고 있는 만석과 병국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은 작업복을
벗어버린 알몸에 팬티만 입고 있으며, 헬멧과 수통을 착용하고 있다. 그들은
작업복을 벗어 밧줄을 만든 것이다. 그들의 구리빛 육체가 땀에 번들거리고
아직은 탄가루가 간혹 묻어 있는데 태철의 양 어깨에는 짙은 신발자국이
있다. 만석과 병국이 가까와진듯 그들이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린다. 서로 묶은
밧줄을 풀자 병국은 느러진다.
[만 석] 몹시 고통스러울 게야. 네 차례나 떨어졌으니까. ( 태철에게 )
물을 주게.
태철이 수통을 꺼내 병국에게 물을 먹인다.
[태 철] 조장님하고 병국씨가 올라오는데 다섯시간 반 걸렸습니다.
[만 석] 밖은 새벽이겠군.
[덕 수] 마을 앞산이 뿌옇게 밝아온것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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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석] 그래. 우리두 그 해를 다시 보자구.
[덕 수] ( 고개를 푹 떨구고 ) 죄 맥혀버렸어유.
[만 석] ( 본다. 그대로 둔다. ) 강씨는?
[덕 수] 저 통풍구루 다올라가구 있지유.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스포트가 떨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그동안
파내린 탄더미가 꽤 높게 쌓여 있다.
[태 철] 이 막장 사람들이 출갱한 걸 보면 어딘가 길이 있을 겁니다.
[만 석] 우리 막장보다 더 무너졌는데--- 출갱을 못했네.
[태 철] 탄차가 없읍니까?
[만 석] 그야 운반부들이 탄을 싣고--- ( 하다가 덕수의 시선과 마주치자
말을 멎는다 )
덕수의 눈길이 구석으로 가고, 만석이 그 눈길을 따라 막장 구석으로
걸어간다. 덕수와 태철이도 따라서 다가간다. 만석이 탄더미 속에서 삽을
꺼낸다. 그 삽으로 탄더미를 파헤치는데 시신의 발이 나온다. 덕수와 태철이
뒤로 물러선다. 그들의 신음 소리에 병국이 눈을 뜨고 그쪽을 본다. 만석이
삽과 손으로 조심스레 탄더미를 벗겨내자 시신이 나온다. 만석이 시신이 쓰고
있는 헬멧과 방독마스크를 벗기고, 시신이 허리에 차고 있는 수건을 빼내서
얼굴을 닦아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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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덮어준다. 상의 단추와 허리의 물통혁띠와 작업화를 벗겨 몸을 편하게
해준다. 주머니에서 소지품을 꺼내 확인하면서 잘 보관시킨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차례로 세 구의 시신을 찾아내 모두 같은 절차를 밟아 나란히
뉘운다. 만석이 통풍구 아래로 다가가고, 태철과 덕수도 그리로 다가간다.
지금도 진호가 오르는 중이다. 탄가루가 계속 쏟아지기도 하고 뿌리기도
하면서 바닥에 쌓인다. 이윽고, 위쪽에서 신호빛이 흔들거린다.
[덕 수] 다 올라간 신호구먼유.
[만 석] 여보게 진호! ( 대구가 없다 ) 진호, 님 말이 들리나?
[진 호] ( 소리만, 가까스로) 야 조장님---
[만 석] 막장이 성한가?
[진 호] ( 역시 ) 아니구먼유---
[만 석] 천장에 통풍구는 뵈나?
[진 호] ( 역시 ) 뵈지 않는디유---깨스---깨스---
[만 석] 진호, 왜 그러나?
[진 호] ( 역시 ) 올라오지 마솅기---
[만 석] 뭐라구?
[진 호] 깨스--- 깨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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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석] 깨스가 차 있다구?
[진 호] ( 가까스로 ) 야---
[만 석] 내려오게 내려오라구!
[진 호] ( 역시 ) 못 내려가겠어유---꼼작 못해유---
[만 석] 여보게, 진호, 정신차리게! 정신차려!
[진 호] --- (대구가 없다 )
[만 석] 진호, 정신을 차리게. 사람이 올라갈 테니 정신 차리게!
(덕수에게) 자네가 방독면을 쓰게.
[덕 수] 야.
덕수가 방독면을 착용한다. 태철이가 쏟아져내린 석탄 위에 올라가서 목말
태울 준비를 한다. 만석이 덕수의 배에 밧줄을 매고 그 끝에 진호의
까스마스크와 압축공기통을 매단다. 덕수가 태철의 어깨에 올라간다. 태철이
중심을 잡으며 가까스로 일어선다. 덕수가 손을 위로 뻗고 오른 발을
들어올린다.
[만 석] 호흡을 시키고 방독면을 씌워 즉시 내려보내게.
통풍구 쪽의 스포트가 나가고 한병구 쪽 스포트가 들어온다. 한병국이
상체를 세우고 앉아 수첩에 뭔가를 쓰고 있다. 만석이 다가온다.
[만 석] 편지를 쓰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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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국] 네.
[만 석] 제 편지도 한 장 써주세요.
[병 국] 네?
[만 석] 전 글을 몰라요.
[병 국] 네.
한병국 쪽 라이트가 나가고, 통풍구 쪽 라이트가 들어온다. 덕수가
올라가는 대로 느릿느릿 밧줄이 오르고 있다. 이윽고, 방독면과 압축공기통이
밧줄 끝에 매달려 올라간다.
[만 석] 후퇴할 준비를 하게.
[태 철] 아래로 내려간다구요?
[만 석] 예도 머지않아 깨스가 차네. 폭발은 더 윗쪽에 일어났는데 깨스가
바로 윗층까지 오지않았나.
[태 철] 그럼 우린---
[만 석] ( 동문서답으로 ) 내려가는 건 쉽겠지. 밧줄을 타면 되니까.
[태 철] ( 바라보다가, 체념한듯 ) 밧줄이 사람을 태우긴 약합니다.
[만 석] 보태야지.
만석이 작업복 상의를 벗어 찢는다. ( 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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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4장
다시 1000 - 2700 - 5 번 막장이다. 모두 팬티 차림으로 안거나 엎드려서
쉬고 있다. 그들은 방금 통풍갱구를 타고 내려온듯 온몸이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되어 있다. 한병국의 상처가 수건에 말렸는데 상당히 부어 있다.
[만 석] ( 모두에게 ) 우리가 살아나느냐, 갱살 당하느냐 하는 건 우리가
이 속에서 얼마나 오래 견디느냐에 달렸네. 예서 오래 견뎌낼려면 지금 부터
모든 걸 최소한으로 아끼면서 시간을 벌어야 하네. 공기, 물, 도시락, 그리고
마음까지도 아껴야 하네. 죽는다고 겁을 먹거나 초조해하면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일세.
[태 철] 구조대가 올까요?
[만 석] 만일 밖에서 우리와 통화를 한다면 그게 뭐겠나? ( 사이 )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벌란 걸세.
[태 철] 아무것도 공급이 안되는데 어떻게 견딥니까?
[만 석] 내 경험으로 봐서 이 도시락은 열여덟 숟갈일세. 우린 도시락을
사흘간 나눠먹어야 해. 하루에 여섯 숟갈이니까 한 끼니에 두 숟갈을 먹되
밥알을 세서 먹게.
[모 두] --- ( 긴장할 뿐 말을 않는다 )
[만 석] 한 숟갈이 삽백 톨일세. 한 끼니에 육백 톨씩 세서 먹는 걸세.
세서 먹는 동안 우린 시간을 버는 거네.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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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염기를 나눠 섭취해야 하니까 맞춰서 먹도록 하게.
광부들이 도시락에 시선을 보내면서 식사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만 석] 이씨, 이 물통에 각자 차고 있는 수통의 물을 모두 모으게.
[덕 수] 야. ( 그대로 한다 )
[만 석] ( 다른 사람이 움직이자 ) 필요없이 움직이지 말게. 물이 얼마나
되나?
[덕 수] 절반이 채 안 되는 디유.
[만 석] 먹고 싶은 대로 마시면 하루치도 안 되네. 이레는 견뎌야 해.
[모 두] 이레들!
[만 석] 각자 빈 수통에 소피를 보게. ( 사이 ) 그걸 먹어야 하네.
[태 철] 오줌을 먹으라구요?
[만 석] ( 계속해서 ) 막장엔 환기가 안 되고 있어. 우리가 뱉어내는
개스를 뽑아내지 못해. 고통스럽겠지만 호흡도 최소한으로 줄어야 하네.
[모 두] ( 서로의 시선을 주고 받는다 )
[만 석] 먹는 게 없으니까 나올 것도 없겠지만 배설을 억제하게. 배설물은
저쪽 채탄장에 구덩일 파고 보는데 그일을 심심풀이로 하게. 광부들이
채탄장을 바라보면서 배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만 석] 이제 우린 참고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 모두 편히 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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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이 막장 바닥에 앉는다. 진호가 앉고, 덕수가 앉고, 사이를 두었다가
태철이 불만스레 철푸덕 주저앉는다. 병국은 다리의 고통이 심한듯
신음하면서도 갱목에 엎드려 수첩에 뭔가를 쓴다.
[만 석] 잊은 게 있었구만. ( 모두의 귀가 쫑긋한다) 이 막장에 빛은
캡램프 뿐이네. 구조될 때 까지 빛도 아껴야 하지. 한 사람씩만 켜도록 하세.
만석이 캡램프를 끈다.
무대가 조금 어두워진다.
[진 호] 조장님, 식사 때가 지났구먼유.
[만 석] 어젠 저녁을 먹고 입갱했으니까 오늘 아침 식사는 않네. 진호가
캡램프를 끈다.
무대가 조금 더 어두워진다.
사이.
[덕 수] 조장님, 목이 타는데 물을 먹을 까요?
[만 석] 탈수가 그렇게 빠른 건 아닐세. 덕수가 캡램프를 끈다.
무대가 꽤 어두워진다.
사이.
[태 철] ( 시계를 본다 ) 제기럴!
모두 생각난듯 시계를 본다.
[만 석] 장씨, 시계를 죄 거둬오게.
[태 철] 네?
[만 석] 시계는 시간을 늦출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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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철이 서서히 움직여 시계를 모두 거두어다가 만석에게 건네주고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만석이 바닥을 손으로 극히 서서히 판 다음 시계를 넣고
덮는다. 모두 그러는 만석을 바라보다가 서로의 시선을 마주친다.
[만 석] 우린 아무하고도 시간 약속을 하지 않았네. 구조대가 올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니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견뎌내야 하네.
광부들이 앞을 바라보는 자세로 꼼짝하지 않는다. 석고상 같다. 무대가
어두워진다. ( 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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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5장
광부들의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콧노래가 어둠 속에서 느릿느릿
들려온다. 한 사람의 것이다가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의
합창이 된다. 무대가 서서히 밝는다. 다섯 명의 광부가 빈 도시락을 들고
막장 바닥에 주저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만 석] 쉿!
광부들이 합창을 멎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기대가 무너진다.
[태 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만 석] 구조대가 갱을 파들어오고 있다고 해서 소리가 계속 들리는건
아냐.
[태 철] 나흘이에요.
[만 석] 마음을 아껴.
침묵이 흐른다.
[덕 수] 도시락이 비었어요.
[만 석] 이 도시락에 밥을 가득 채우세. 따끈따끈하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찰밥을 채우세.
[진 호] 채울 밥이 없구만유.
[페이지] 030
[태 철] 빈 도시락에 탄가루만 쏟아지고 있어요.
모두 도시락에 떨어지는 탄가루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 시선들이
만석에게 모아진다. 만석이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받아준다.
[만 석] ( 엉뚱하게 ) 이렇게 찬찬히 얼굴을 보기도 처음인 것 같구먼.
정말 이렇게 한가롭게 앉아 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애. ( 사이, 다시
하나씩 돌아보고 ) 다들 그만그만 생겼구먼. 죄 살아나서 다시 이 막장에
돌아올 것 같아. 헤어지지 않구 말야.
[태 철] 다신 들어오지 않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만 석] 좋은 일이지. 탄광촌에서 떠나버릴 수만 있다면. ( 허공에
보냈다가 ) 헌데, 모두. 다시 돌아왔어. 나도 몇 차례나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고 침을 뱉은 광산촌 우물에서--- ( 한참 쉬었다가 ) 손을 씻고, 땀을
씻고, 갈증나는 목을 축였어.
[태 철] 난 달라요! 절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 벌떡 일어선다 )
미쁜네하고 열 떠나기로 했다구요!
갑작스런 선포에 모두 의아해한다.
[태 철] ( 한병국을 향해 ) 한병국 당신만 아녔으면 말야!
그 소리에 또한번 의아해한다.
[태 철] 당신은 야비해! 당신은 위선자! 비러먹을! ( 헬멧을 벗어 휙
던진다 )
헬멧이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서 탄벽에 부딪친다. 그 순간 탄벽 앞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면 미쁜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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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노에 앉아 있고, 간이탁자에는 돼지저금통, 주전자, 대접이 한 개씩
놓여있다. 대접은 엎어놓았고. 그 앞자리에 태철이 앉는다. 이때부터
광부들이 헬멧을 쓰면 현실이고, 헬멧을 벗으면 회상 ( 허구 ) 이 된다.
그러니까, 극 속의 극으로 현실과 허구가 뚜렷이 구분되기도 하고, 뒤섞여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태 철] 이름이 없어? 하하하.
[미쁜네] 오늘이 첫날이에요. 댁이 첫손님이구요.
[태 철] 다니는 곳마다 이름이 다르다 그 말이군.
[미쁜네] 산 다르고 물 다르니까요.
[태 철] 사내도 다르고!
[미쁜네] 물론이죠.
[태 철] 이름이 몇 개였지?
[미쁜네] 그걸 다 어떻게 세요?
[태 철] 세지 말고 읊어.
[미쁜네] ( 두말않고 읊는다 ) 화자, 청자 정자, 영자, 순자, 치자, 준자,
춘자, 추자, 숙자, 미자, 해서 자자돌림 열두개 얻고, 숙희, 상희, 영희,
정희, 순희, 미희, 경희, 송희, 선희, 가희, 차희, 춘희 해서 희자돌림
열두개 얻고, 주리, 미리, 애리, 오리, 천리, 만리, 돌고 돌아 예 왔는데---
( 갑자기 가락을 빼고 말로 ) 이름 하나 선물하세요.
[태 철]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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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쁜네] 미워도 예쁜 이름으로요.
[태 철] 미쁜네!
[미쁜네] 미쁜네?
[태 철] 좋지!
[미쁜네] 해명 좀 하세요. 꿈보다 해몽이니까요.
[태 철] ( 갑자기 더듬는다 ) 저--- 미운 것 같으면서 예쁘고--- 아니,
밉지만 예쁘고--- 아니, 밉도록 예쁘고!
[미쁜네] 오늘 아침부턴 임자가 없다구요. 미쁜이면 미쁜이지 왜 네가
붙어요?
[태 철] 난 널 처음 보는 순간부터 사랑했어. 지난 임자는 이름버리듯
버리고--- 넌 오늘부터 미쁜네야. 네 임자는 나야!
[미쁜네] 대담하구, 발포력 좋구, 박력있구, 새까맣구, 홋호호.
[태 철] 그래. 여긴 있을 데가 아냐. 우리 함께 예를 떠나자. 예서 묶이기
전에 떠나자구.
[미쁜네] (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
[태 철] 새까맣게 염색되고 싶니?
[미쁜네] ( 고개를 젓는다 )
[태 철] 예가 좋으냐?
[미쁜네] ( 고개를 젓는다 )
[태 철] 아는 사람 쫓아왔니?
[미쁜네] ( 고개를 젓는다 )
[태 철] 빚을 졌니?
[미쁜네] ( 고개를 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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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철] 옌 떠나고 싶지 않니?
[미쁜네] ( 고개를 젓는다 )
[태 철] 그럼 우리 떠나자! 난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미쁜네가 태철이를 빤히 바라본다. 그 시선히 수긍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태철이 서서히 입술을 가져간다. 미쁜네 역시
그것을 원하듯 꼼작않고 바라보기만 한다. 태철이 잠간 망설이듯 아더니
끝내는 입맞춤을 해댄다. 그러나, 그러나 곧 떼고 소리친다.
[태 철] 아냐! 아냐! 이때--- (헬멧을 급히 찾아 쓴다 )
태철이 헬멧을 쓰자 그 자리의 스포트.라이트가 나가고 막장에만 라이트가
떨어진다. 태철이 한병국에게 다가온다.
[태 철] 입맞추기 직전에 한병국 당신이 들어왔어, 십분 아니 일분만 늦게
나타났어도 난 그여자와 옌 떠나는 건데 당신이 나타났단 말야. 어서
나타나라구! 어서! ( 일으켜세운다, 생각난듯 ) 그래--- 당신 그때--- (
도시락 가방을 들려주며 ) 가방을 들고 있었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말야. ( 탄가루를 손가락에 묻혀 병국의 가슴에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그려댄다 ) 넥타이를 이만큼 풀어내리구 말야. 자, 어서 나타나라구!
태철이 병국의 헬멧을 벗겨 탄벽 쪽으로 던져버리고, 자신의 헬멧도 벗어
던져버리자 그 자리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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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쁜네가 목노에 앉아 있는데 태철이 마주 앉으며 끝부분을 반복한다.
[태 철] 옌 떠나고 싶지 않니?
[미쁜네] ( 고개를 젓는다 )
[태 철] 그럼 우리 떠나자! 난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미쁜네가 태철이를 빤히 바라본다. 그시선이 수긍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태철이 서서히 입술을 가져간다. 미쁜네 역시
그것을 원하듯 꼼작않고 바라보기만 한다. 태철의 입술이 더 다가간다. 이때,
병국이 가방을 들고 들어온다. 미쁜네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있다.
[태 철] 손님이야.
[미쁜네] ( 시큰둥 돌아보다가, 갑자기 반기며 ) 오, 선생님이 오시는군요.
만나리라 생각했어요. 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어서
앉으세요. 왜 거품내는 꽃붕어처럼 멀뚱하게 서계세요.
병국의 반응은 아랑곳않고 가방을 받고, 손을 끌어다가 의자에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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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국과 태철의 시선이 마주친다. 서로 눈으로 첫대면을 하는데 미쁜네가
끼어든다.
[미쁜네] 저녁 기차로 오셨지요.
[병 국] 네. ( 그렇다고 )
[미쁜네] 저도 그 기차를 탔어요.
[병 국] 네. ( 그렇구나 싶어 )
[미쁜네] 기차냐구 느린 데다가 달리는 시간보다 서는 시간이 더 많고,
고갯길 오르느라고 숨가빠해서 예정하고는 달리 종일 기차를 탄 셈이죠.
지루할 것 같았는데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병 국] 네?
[미쁜네] ( 생글거리며 ) 염소를 만났거든요.
[병 국] 기차에서요?
[미쁜네] 그럼요, 홋호호, 하약 염소--- 뿔 달린 하약 염소! 고게 까만
염소가 될지 모르지만은!
[병 국] 동화하구 있네.
[미쁜네] ( 무시하고 ) 나도 염소였거든요. 할머니하고 엄만 나더러 늘
새끼염소라고 했어요.
[병 국] 염소보다는 미인인데요.
[미쁜네] 종이를 좋아했거든요.
[병 국]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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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철] 종이만 보면 염소처럼 잘근잘근 씹어댄단 말이지?
[병 국] 아, 녜---
[미쁜네] 염소나 그러죠.
[태 철] 네가 염소라면서.
[미쁜네] 난 종일 보면 글씨만 썼어요.
[태 철] 어쭈!
[미쁜네] 기어다닐 땐 종이에 직직 그어대구, 어렸을 땐 그림을 그리구.
소녀 적엔 작문을 짓구, 처녀 적엔 낙서를 하구, 지금은 편지를 쓰고
싶은데--- ( 다시 생긋 웃으며 ) 고개 잘 안되거든요.
[태 철] 본론을 얘기 하라구. 우표값 달래는 거야?
[미쁜네] ( 개의잖고 ) 오늘 기차에서 종이만 보면 글씨를 쓰는 염소를
만났단 말예요. 고걸 지켜보느라고 지루한 걸 몰랐어요.( 병국에게 진지하게
) 뭘 그렇게 쓰셨어요?
병국과 태철이 동시에 의아해한다.
[미쁜네] 홋호호. 정말 염소구나. 염소는 제가 종이를 씹으면서도 제가
종이를 씹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선생님은 꼭 염소예요. 뿔달린 하얀
염소, 홋호호.
[태 철] 술장사를 하는 거냐 입장사를 하는거냐?
[미쁜네] 그야 물론 술장사죠. 선생님--- 아니 손님, 무슨 술을 하실까요?
막걸리? 소주? 맥주?
[병 국] 아무거나.
[미쁜네] 안주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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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국] 아무거나.
[태 철] 손님은 지조가 없군요. 여자 지조는 절개에 있고 남자 지조는 술에
있는 건데 소주면 소주, 막걸리면 막걸리, ( 앞의 주전자를 치며 ) 맥주면
맥주지 아무거나가 뭡니까? 안주야 우린 ( 돼지 저금통을 가리키며 ) 이
돼지고기지만 형씨야 이쪽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술에 대해선 남성의
지조를 지키십시요.
[병 국] 소주 주시오.
미쁜네가 대접을 엎어진 그대로 병국 앞에 밀어놓고 주전자의 위치만 조금
틀어 놓는다. 그러니까, 소주병, 맥주병, 주전자등 술의 용기를 구분하지
않고, 소주잔, 맥주잔, 막걸리잔도 구분하지 않고, 따르고 마시는 것도
구체화 ( 사실화 ) 하지 않는다.
[병 국] ( 태철에게 ) 한잔 드시겠읍니까?
[태 철] 난 맥줍니다.
병국이 대접을 태철 앞으로 민다.
[태 철] 고맙습니다.
미쁜네가 이번에는 주전자를 툭 건드리는 정도로 술 따르기를 끝낸다.
[미쁜네] 나 좀 봐! 초면인데 구면으로 착각하고 인살 안 드렸어요.
전---미쁜이에요.
[병 국] 미쁜이?
[태 철] 미쁜이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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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쁜네] 미쁜이에요.
[병 국] 미쁜이보다는 미쁜네가 좋읍니다.
[미쁜네] ( 돌변해서, 상큼하게 ) 미쁜네에요.
[태 철] 요것이--- ( 눈을 흘긴다 )
[병 국] 어차피 붙백이 이름 아니고 철새 이름인데 부담이 없어야죠.
[미쁜네] 철새라구요? 철새라구 하셨죠! 난 철새를 좋아했어요 자연 따라
계절 따라 날고 날아서 산 넘고 물 건너 구름나라 저쪽도 가고 무지개 솟은
산 넘어 마을도---
[태 철] 읊지마라. 네 신세도 고달프겠다.
[병 국] 이런 마을에서는 더군다나죠.
[미쁜네] 왜요? 예가 어때서요?
[병 국] 나그네 쉬어갈 작은 둥지 하나 없잖소.
[태 철] 없어요. 읍내까지 나가야 있죠.
[병 국] 새벽에 현장사무소까지 올라가려면 가까운데서 묵었으면 싶군요.
사무소엔 전 임자가 아직 짐을 꾸리지 않아서 내려왔죠.
[태 철] ( 벌떡 일어선다 ) 새로 오시는 서무계 한 선생님 아니십니까?
[병 국] ( 일어서며 ) 녜.
[태 철] 반갑습니다. 그 탄광 막장서 일하고 있읍니다. 장태철입니다.
[병 국] 한 병국입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읍니다.
[태 철] 저희들이야--- 모든 게 선생님께 달렸지요. 저--- 실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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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 너무 밀려놔서 선생님이 오시길 학수고대들 하고 있읍니다.
[병 국]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읍니다.
[태 철] 그러실 겁니다. 허지만 저흰 다 알고 있읍니다.
[병 국] 뭘 말씀이지요?
[태 철] ( 빙그레 웃으며 ) 앉으십시요. 천천히 드십시요. 전 새벽
근무조라 가서 한숨 자겠습니다.
[병 국] 나도 나갑시다. 같이 일어섭시다.
[미쁜네] ( 잡으며 ) 둥지가 따로 있나요. 아무 풀숲이고 비비대면 둥지가
돼죠.
[태 철] 잘 되셨읍니다. ( 그러나 미쁜네에게 다짐을 준다 ) 내가 한말
명심해.
[미쁜네] ( 빤히 바라본다)
[태 철] 알았어?
미쁜네는 긍정하는 것도 같고 부정하는 것도 같은 시선을 보낼 뿐 대답을
않는다. 태철이 그런 미쁜네를 계속 쏴보다가 나간다.
[미쁜네] ( 활짝 웃으며 ) 손님, 뭘 그렇게 쓰셨지요? 시? 아냐, 시는
그렇게 길지 않아. 그래, 소설이다. 소설이죠?
[병 국] ( 고개를 젓는다 )
[미쁜네] 긴 시도 있어. 시!
[병 국] ( 고개를 젓는다 )
[미쁜네] 기행문이구나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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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국] ( 고개를 젓는다)
[미쁜네] 편지?
[병 국] ( 고개를 끄덕인다 )
[미쁜네] 어마, 그렇게 긴게 편지에요?
[병 국] ( 고개를 끄덕인다 )
[미쁜네] 누구한테 보내요?
[병 국] 갈밭.
[미쁜네] 갈밭?
[병 국] 갈대밭.
[미쁜네] 거기서 누가 살아요?
[병 국] 이름이 배당
[미쁜네] 여자에요?
[병 국] ( 끄덕인다 )
[미쁜네] 애인?
[병 국] ( 고개를 젓는다 )
[미쁜네] 부인?
[병 국] ( 고개를 젓는다 )
[미쁜네] 딸?
[병 국] ( 고개를 젓는다 )
[미쁜네] 친구에요?
[병 국] ( 젓는다 )
[미쁜네] 갈밭이 남자 이름이죠!
[병 국] 약혼녀.
[페이지] 041
[미쁜네] 왜 갈밭이에요?
[병 국] 그 여자를 처음 보는 순간 저 만큼 산그늘에 덮인 강변 갈대밭
같았죠.
[미쁜네] ( 싱겁게 ) 분위기판가 보다.
[병 국] ( 그 갈대밭을 보듯 ) 바람이 불어올 때 햇빛이 환하게 스며들 때
사람의 마음을 싸아하게 아프게 하는 저 갈대밭이 그 여자고, 그 여자는
갈대밭이죠.
[미쁜네] ( 끌려든다 )
[병 국] 저 강변 갈밭에 산그늘이 짙게 덮혀오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닢,
물결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갈대꽃, 스며드는 어둠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듯 그 여자의 어딘가에 늘 그런 구석이 자리잡고 있어요.
[미쁜네] ( 얼굴을 흔들어 그 상념을 떨쳐 버린다 ) 편진 짧고 간단해야
해요. 길면 쓰는 사람은 괜 분위기를 잡고, 받는 사람은 그만 속아넘어가요.
[병 국] 미쁜네는 편지를 안 쓰나요?
[미쁜네] 다 썼어요. 헤어질 때 다 쓰고 말아요. 오늘 아침에 키스하고
웃고 또 키스하고 웃고--- 그렇게 다 써버렸어요. 영원히 쓸 편지를 몽땅
아침에 다 써버리고 말았죠. 만날때 하듯 말에요. 나하고 만남 남자들은 거의
편지같은 거 안써요. 나도 안 쓰고요. 써도 소용없어요. 서로 주소도
모르니까요. 그게 편해요. 홋호호. ( 그러나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조용하게 아픔을 참는다 )
[페이지] 042
[병 국] ( 사이를 두었다가 ) 손을 떼봐요.
[미쁜네] ( 얼굴에서 손을 뗀다 )
[병 국] 눈을 떠봐요.
[미쁜네] ( 눈을 뜨고 앞을 본다 )
[병 국] 왜 눈물을 흘리죠?
[미쁜네] 미안해요. 사실 간밤에 이별연습 하느라고 한숨도 못 잤거든요.
그래서 하품을 한 거예요. ( 그 음성이 아픔으로 떨린다. 억지로 웃음 지으며
) 손님은요?
[병 국] 우린 재회연습하느라고 밤을 새웠어요.
[미쁜네] 그럼 잘 됐네요.
[병 국] ( 바라본다 )
[미쁜네] ( 시선을 마주하며, 속삭이듯 ) 내 둥지에서 함께 자요. 둘이 다
누우면 곯아떨어질 테구 깨나면 아침일 걸요, 뭐.
[병 국] 괜찮을까요?
[미쁜네] 괜찮아요. ( 사이 ) 탄광촌 첫밤이 너무 어두워요. 저 빈 방에
혼자 들어가면 외로울 것 같아요.
[병 국] 곯아떨어질 텐데요.
[미쁜네] ( 맑게 웃으며 ) 염소처럼 종이를 좋아하니까 십리장서 쓸
거에요.
[병 국] 나는 낮에 쓰던 편지를 끝내야 하구요.
[미쁜네] 그래요, 염소 손님! 홋호호.
[병 국] 그래요, 새끼 염소! 핫하하.
두사람은 아이들처럼 좋아라 웃는데 스포트.라이트가 갑
[페이지] 043
자기 흐려져서 낮은 조도에서 멎으면, 두 사람의 동작도 그 상태에서
멎어버린다. 동시에 막장 어둠 속에서 태철이 소리를 친다.
[태 철] 불을 끄지마! 그 다음을 봐야해! 그 뒤가 수수께끼야! 불을
끄지마!
이때, 완전히 어두어지면서 막장에 불이 들어오면 장태철이 열을 올리고
있다.
[태 철] 영원한 수수께끼란 말야! ( 그러나, 서서히 진정한다 ) 보셨죠.
우린 떠났을 거에요. 그때 한병국씨만 아녔으면--- ( 안타까와 울먹이며 )
우린 탄광촌을 떠났고--- 난 막장에 갇히지 않았어요---. (마치 눈앞에
미쁜네가 있기라도 하듯 ) 난 보았어요--- 첫눈에 알아냈어요. 미쁜이가
산속의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누구든---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듯 미쁜이도 두려워 했어요. 뵈지도 않는 두려움의 끈에 묶이기 전에
우린 함께 내 끈을 끊고 떠날 수 있었어요. 한병국씨 당신은 반 년,
덕수형님은 십오년, 강씨 아저씬 삼십년, 조장님은 평생을--- 결국 스스로는
떠나지 못해요. 왜 우린 떠나지 못하죠? 왜 우린 떠나지 못하고 갇히길
원하죠? 왜 우린 갇히죠? ( 땅을 치며 울부짖는다 ) 왜, 왜, 왜---
( 암전 )
[페이지] 044
[장] 6장
어둠속에서 광부들이 수수께끼 놀이를 하고있다. 일문일답이 아니고 두세
사람이 묻고 두세 사람이 대답하는 형식이 되어 소리만 들여온다. 꽤 재미를
느끼고 있는듯 하다.
[질문] 거꾸로 자라는 건?
[답] 고드름!
[질문] 둑에 치는?
[답] 말뚝에 까치!
[질문] 묵에 사리는?
[답] 여울목에 송사리!
[질문] 마를수록 무거워지는 건?
[답] 늙은이 다리!
[모두] (까르르 웃는다)
[질문] 세계에서 제일 빠른 건?
[답] 미사일로 막가!
[모두] (까르르 웃는다)
[질문] 어둠을 비추는 건?
[답] 불빛!
[질문] 하늘 치고 땅 치는 건?
[답] 절구댕이
[페이지] 045
[질문] ( 반복해서 ) 어둠을 비추는 건?
[답] 불빛!
[질문] 하늘 치고 땅 치는 건?
[답] 절구댕이!
반복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가 막장에 꽤 넓게 스포트가 떨어지면
다섯명의 광부들이 둥글게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당 놀이에 재미를 붙여
조금은 상기되어 있기도 하다.
[만 석] ( 틈을 주지 않기 위해 ) 땅뺏기!
( 하면서 주먹을 번쩍 든다 )
모두 주먹을 번쩍 든다.
[만 석] 가위, 바위, 보!
덕수가 검지로 돌말을 튀기고 뺌을 돌려 땅을 차지한다.
[덕 수] 가위, 바위, 보!
태철이가 이겨 땅을 차지한다.
[태 철] 가위, 바위, 보!
진호가 이겨 땅을 차지한다.
[진 호] 가위, 바위, 보!
병국이 이겨 땅을 차지한다.
[병 국] 가위, 바위, 보!
비긴다.
[모 두] 가위, 바위, 보! ( 비긴다 ) 보! ( 비긴다 ) 보! ( 비긴다 ) 보! (
비긴다 ) 보--- ( 하다가 )
[만 석] 쉿. 모두 가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뿐 조용하다. 침묵속에 실망이 흐른다.
[태 철] ( 침묵을 깨고 진호에게 ) 담밸 얻어 씹었으면 좋겠는데는.
[진 호] ( 담배갑을 꺼내며 ) 용재가 넣어준 건데--- 이게 마지막이구먼.
담배 한 개비를 뜯어 다섯이서 나누어 냄새를 맡거나 잘근잘근 씹는다. 그
맛에 순간의 고통을 벗어버리려듯 음미하면서.
[만 석] 용재가 몇 살인가?
[진 호] 열아홉이구먼유.
이때, 막장의 조명이 나가고 탄벽 저쪽에 스포트가 떨어지면 창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한 여인이 나타난다. 광산 사택이라 창틀은 크지만 희뿌옇게
퇴색된 보잘것없는 것으로 유리창 대신 비닐인데 그 창문을 열고 순하디
순하게 뵈는 오십 대 여인이 미소같기도 하고 주름같기도 한 얼굴을 상처만
보이게 서 있다. ※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용재에게 하는 말인데 마치 허공과
이야기하듯 한다. 그 뒤로 파르스름한 하늘이 보인다.
[다산댁] 사람들은 저기 눈 앞에 우뚝 서있는 흠집투성이 산 하나에 달라
붙어서 숨쉬고 꼼작거리믄서 살아간단다. 저 거대한 산 뱃속 밑바닥서 어둠을
끄집어내다가 배를 채우믄서 예서 사는 어머니들은 시상서 젤루 깜깜한
어둠허구 결혼을 혔구, 느이들은 젤루 납작헌 처마 밑서 살고 있는
[페이지] 047
건디--- 어쩌냐. 아부지를 도와드리거라.
[용 재] 어머니는 나보구두 예서 아부지 일을 맡어서 살아가라는 거래유?
[다산댁] 찬찬히 따져어. ( 사이 ) 느이 아부지를 봐아라.
이때, 그 옆 다른 곳에 역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면 진호가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고 있다. 다산댁은 용재를 보고, 용재는 진호를 바라보는데,
진호는 새빨갛게 오르는 화덕에 쇠를 달구고 있다.
[다산댁] ( 계속으로 ) 안색은 누르디누르다 못해 납빛이구 막대기같은
어깨는 굽다못해 꺽였는디 폐가 굳어서 그런 거여. 너만 알고 있어.
[용 재] 누나들두 죄 아는디유.
[다산댁] 용재 니가 쬐금 일찍 나왔으믄 지집애 여섯이나 뽑지 않았을틴디
말여.
[용 재] 그게 지 맴대루 되는 일인감유.
용재가 대장간으로 간다. 해머를 집어든다.
[용 재] 아부지, 그거 내놔유.
[진 호] (의외의 일에) 뭔 일이여?
[용 재] 지가 쎄게 내리칠 테니께유.
진호가 반신반의하면서 화덕에서 달구어진 쇠붙이를 꺼내 쇠판에
올려놓는다. 용재가 쎄게 내리치고 진호는 쇠붙이를 굴린다. 화덕에선
코오크스탄의 열기가 뿜어오르고, 그 열기에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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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맨몸인 진호는 물론 용재의 얼굴이 붉게 노동의 열기를 발산한다.
[용 재] ( 치면서, 드문드문 묻는 말로 ) 아부지는 왜 고향서 일거리가
떨어졌을 때 다른 일 찾지 않구 똑같은 일 찾아 예까지 왔대유?
[진 호] 그건 왜 묻냐?
[용 재] 글쎄유.
[진 호] 엄니헌티 묻거라.
[용 재] 아부지가 남잔디유.
[진 호] 나는 그런 생각 안 혔어.
그는 말없이 일손을 놀린다.
[용 재] 없는 살림인디 왜 식구는 많이 낳았대유?
[진 호] 오늘은 벨걸 다 묻는구나. 뭔 일이 있었남?
[용 재] 아니유. ( 사이 ) 야?
[진 호] 꼭 대답을 혀야 아니?
[용 재] 야.
[진 호] 느이 엄니만 따른 건디.
[용 재] 엄니가 그러자구 허셨어유?
[진 호] 느이 엄니는 나를 따른 거구.
[용 재] 이상허네유.
[진 호] 내 막장에 들어가믄 쉬는 참에 곰곰 생각해보자마. ( 사이 )
그려두 쓰겠지?
[용 재]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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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말없이 작업을 한다.
[용 재] 아부지.
[진 호] 물어싸도 내는 대답을 못혀. 느이 엄니헌티 물어라.
[용 재] 이전 안 돌아다니구 대장간 일을 지가 허께유. 막장 일은 나이
땜에 안 되구유.
[진 호] ( 너무 의외여서 ) 그게 뭔 말이여---
[용 재] ( 주머니에서 솔 담배 한 갑을 꺼내 놓으며 ) 아부지 막장 가시믄
쉬는 참에 씹으쎄유. 이런 담밴 첨이시잖유.
[진 호] 이게 뭔 담배여.
[용 재] 지두 오늘 첨으로 산 거유. 지가 한 개비 없애봤구먼유. 허지만
인전 안 싸돌아다니께유---
[진 호] ( 의외의 것이 감동으로 변하는데 )
[용 재] 엄니가 기다리셔유.
진호가 감동을 천성대로 안으로 누르고 다산댁이 서 있는 창문으로
다가간다. 다산댁이 도시락을 넘겨준다.
[진 호] ( 평소와 같이 ) 내는 모르겠으니께 임자가 생각혀 갖구
대답해줘어.
[다산댁] 간밤 꿈이 답답혀서 걱정혔는디유.
[진 호] ( 바라보다가 ) 용재 참이나 헤줘어.
[다산댁] 헐라구 물 끊이구 있구먼유.
진호가 나간다. 다산댁이 용재를 바라본다. 용재가 풀무질을 해댄다. 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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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소리에 화덕의 불꽃이 이끌거린다. 그럴수록 용재가 미친듯 풀무질을
해대고 화덕의 불꽃은 그 열기를 펑펑 쏟아낸다.
[다산댁] ( 용재에게 울부짖는다 ) 용재야, 안돼!
동시에 막장에 스포트가 들어오고 다산댁과 용재 장면은 꺼져버린다.
진호가 솔의 빈 갑을 움켜쥐고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들어내지
않는다.
[만 석] ( 진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 용재 그놈이 철들었내. 시간이
남아돌아 갈 때 대답할 생각하면 되겠구먼.
[태 철] 가만! ( 시선이 쏠린다 ) 문제는 말입니다! ( 사이 ) 밖에서 우릴
구조해줄 의사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만 석] 구조해 줄 뜻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만 석] ( 시선을 피하고 ) 그게 무슨 소린가! 사람이 다섯인데 구출을
않겠나!
[태 철] 만일 굿문부터 파들어와야 한다면 그 비용이 엄청납니다.
[진 호] 맞구먼!
[덕 수] 차라리 위로금 주고---
[만 수] 덕수!
모두 주춤한다. 그러나 만석이는 자신있는 말을 못하고 수통의 물을 입술에
축이듯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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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철] 보세요. 조장님도 그걸 알고 있어요!
[만 석] 여긴 질이 좋은 석탄이 산더미로 묻혔어. 구조대가 오고 있어.
[대 철] 아닙니다. 안 옵니다.
[진 호] 그려, 이대로 죽는 거여!
[덕 수] 안돼! 죽을 수 없구먼유!
[진 호] ( 이성을 잃고 폭발한다 ) 그려! 살아야 혀! 우리가 왜 죽어!
그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면서 곡괭이, 해머, 삽 등을 휘두르며 좌우로
달려간다.
[만 석] 안돼! 무너져! 돌아와! 돌아와!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좌우 갱도에서 해머소리와 광부들의 힘쓰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병국이 절룩이며 만석에게 다가간다.
[병 국] ( 침착하게 ) 조장님. ( 만석이 마주본다) 구조되나온? ( 만석이
허공을 본다 ) 이럴 경우 밖에서 어떻게 하나요? ( 만석이 병국을 본다)
진실을 알려주세요, 조장님
[만 석] 기대를 무너버릴 순 없지요.
[병 국] 준비를 하게 해야죠.
[만 석] 예기찮고 죽어야 해요.
[병 국] 모두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어요.
[만 석] 이 속에 들어오면 누구든 저승의 문을 생각하고 있지요.
[병 국] 죽음을 거역하지 않기로 해요.
[페이지] 052
[만 석] 포기해선 안됩니다.
[병 국] 우린 모두 자기 의지로 죽음을 극복해야 해요. 떳떳하게 죽어야
해요.
[만 석] 한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될 수가 없지요. 우린 모두---
이 때, 갱도 쪽에서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덕수의 비명이 들린다.
[만 석] ( 일어서며 ) 덮쳤어요!
만석이 급히 달려간다. 병국도 쫓아 뛰다가 다리의 통증 때문에
주저앉는다. 무대가 어두어 진다.
( 암전 )
[페이지] 053
[장] 7장
막장 구석에서 희미한 빛을 받으며 이덕수가 수통을 들고 마시기를 꺼리고
있다. 그는 왼팔을 다쳐 끈으로 목에 걸었다. 그 옆에서는 진호가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수통에 소변을 보고 있다.
[덕 수] 못 마시겠구먼유.
[진 호] 약이다 허구 마셔야지. 약은 소태맛이래야 효험이 있는 게
아닌가베.
[덕 수] 쓰기나 했으믄 좋겠는디 쓰지두 않구, 맵지도 않구, 시지두
않구---
[진 호] 찝지름헐 티지. ( 소변을 끝낸다 )
[덕 수] 냄새만 맡아두 오장육부가 넘어 올라구 허는디유.
[진 호] ( 핀잔으로 ) 오줌 냄샐 몰라서 맡어? 숨을 멎고 눈을 딱
감어베려.
덕수가 수통을 들고 숨을 멎고 눈을 감는다. 그러자, 뒷쪽에 스포트가
떨어지면서 만삭이 된 섬네가 나타난다. 순하디순하게 생긴 삼십 대 후반의
여인이다.
[섬 네] 미안혀유. 죄송허구먼유.
덕수가 급히 눈을 뜬다. 섬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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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가 다시 눈을 감는다.
[섬 네] ( 나타나서 ) 미안혀유. 죄송허구만유. 죄 지 때문이지유.
[덕 수] ( 눈을 뜨고, 바라보다가 ) 성님, 눈을 감으믄 집사람이 떠
올라유. 생시랑 똑같이 미안혀유, 죄송허구먼유, 죄 지 때문이지유,
허는구먼유.
[진 호] 사실 동생헌티는 내가 여간 미안헌 게 아니구먼.
[덕 수] 성님두유. 지가 좋아서 예루 왔지 지가 싫으믄 성님이 오랜다구
왔겠어유.
[진 호] 섬서 살믄 햇빛허구 바람은 좋을틴디 그렀어.
[덕 수] 햇빛허구 바람이 밥멕여 주지는 않잖어유.
[진 호] 이렇게 갇히지는 않을 것이니께 하는 말이여.
[덕 수] 진즉 물 속에 잠겼을지두 모르지유.
[진 호] 동생은 그게 좋아 넘 원망은 눈꼽만큼두 안 허니께.
[덕 수] 왜 넘헌티 원망을 헌대유. 예 오기 발써 전부터 집사람은 뭍으로
가자구 혔지유. 결혼 이레만에 배가 뒤집혀서 죽다 살았는디 그때
놀랬겠지유. 더위먹은 소 달만 보구두 놀래니께 섬서 견딜 재간이 있나유.
그것보담두 오늘이 몇일째래유?
[진 호] ( 떼놓은 석탄조각을 세고) 닷새째구먼.
[덕 수] 산일이 낼모레했는디---.
[진 호] 무자식이 상팔잔디 뭣 땜이 늦게 애를 갖게 혔댜?
[덕 수] 욕심을 내서가 아니구 대를 잇겠다구 그러는디 모르겠구먼유.
[페이지] 055
[진 호] 내두 갈증이 심해오는구먼.
[덕 수] 야, 견딜 수가 없어유.
[진 호] 우리 가글 부텀 하세. 두 사람이 동시에 한 모금씩 입에 넣는다.
진호가 가글을 시작하자 덕수도 뒤따라 가글을 한다. 덕수가 왈칵 뱉어내면서
토악질을 해댄다. 뒤이어 진호도 토악질을 한다. 덕수가 창자를 넘길듯
요란스럽고, 진호는 그보다 덜하게 해대다가 진호가 먼저 멎는다.
[진 호] 쉿.
[덕 수] ( 겨우 참으며 ) 왜유?
[진 호] 소리가 났어.
[덕 수] 소리유! ( 귀를 기울인다 ) 아무 소리두 안 들리는디유.
[진 호] 가까운 데서 났어. 구조대가 파들어오는 소리여.
[덕 수] 정말!
[진 호] 성한 갱도가 가까이 있으면 빠를 수 있어.
이때, 달그락소리가 들린다.
[진 호] 쉿, 들렸어.
[덕 수] 야, 들었구먼유.
달그락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덕 수] 저기 물통 있는 디서 나는디유.
[진 호] 뭣여?
그쪽으로 다가가며 캬램프를 켜서 비춘다. 태철이 물통을
[페이지] 056
기울여 도시락에 물을 따르다가 주춤한다.
[진 호] 뭔 짓이여!
태철이 고개를 숙인다.
[진 호] 조장님 허락을 받았남?
[태 철] --- (대꾸를 않는다)
[진 호] 조장님두, 한 선생님두, 우리두 죄 오줌을 마시고 있어. 벌써부텀
흔들리믄 어쩌!
[태 철] ( 쏴보며 ) 빌어먹을! ( 물통을 세운다 )
[진 호] 옛날부텀두 오줌은 약이었어. 단식허믄서 오줌을 마시면---
[태 철] 당신이나 실컷 처먹어!
[진 호] 뭐여? ( 다가간다 )
[덕 수] ( 잡으며 ) 성님이 참으세유. 물이 없으믄 몰러두--- 놔두구
오줌을 마실라니까 쉽지 않구먼.
[태 철] 내 말이 바로 그거요!
[진 호] ( 감정을 누르고 ) 조장님은 인간두더지 마흔 해여. 다섯번을
갇혔구, 길 적엔 이레였는디 게서 죄 견디셨어. 나중엔 내 오줌 네 오줌
가리잖고 마셔댄데. 난 두번 갇히고 긴게 사흘이어서 이번 첨이지만 말여.
[태 철] 난 먹어야겠소. ( 물을 입으로 가져간다 )
[진 호] 장씨!
[태 철] ( 쏴본다 )
[진 호] 물을 통에 쏟어!
[태 철] ( 여전히 쏴본다 )
[페이지] 057
[진 호] 자넨 산전수전 다 겪었다구 혔네. 빈농 아들루다가 취직차
상경해서 서적외판원, 전자제품 월부사원, 공사판 막일군 노릇하다가 예루
왔다구 혔잖나벼.
[태 철] 그게 어쨌어?
[진 호] 그렇게 고생헌 사람이믄 말여. 이럴수가 없는거여.
[태 철] 뭐야, 이 새끼!
태철이 물이 담긴 도시락을 던지려고 높이 치켜든다. 순간, 어둠 속에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병 국] ( 소리만 ) 무슨 짓이오!
조명이 그쪽을 비추면 병국이 서서히 일어서고 있다. 그는 아직 절룩이는
다리를 이끌고 몇 걸음 다가온다. 모두 그에게 시선을 보낸다. 태철은
도시락을 치켜올린 그대로.
[병 국] 우리의 기대는 허물어지고 있읍니다. 우린 곧 죽습니다.
[모 두] 뭣이?
[병 국] 두렵습니까? 그걸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죽어야 하는가는
알아야 하지만 죽음의 공포는 이겨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한 방울의 물,
한 순간의 생명이 귀한 게 아닙니다.
[태 철] 난 당신의 말을 믿지 못해.
[만 석] ( 어둠의 구석에서 나오며 ) 장씨 말이 맞아. 우린 구조돼.
구조대가 오고 있어. 늦는 거야.
[태 철] 난 당신이 막장에 들어오는 것부터 싫었어. 틈만나면 늘
[페이지] 058
끄적거리는 것부터 기분나빴어. 당신은 노임을 떼먹고 내뺀 그놈들의
앞잽이였어.
[병 국] 장형! ( 사이 ) 나도 이젠 더 참지 않소.
[태 철] 보여줘. 당신이 이 안에서 쓴게 뭔지 보여줘.
[병 국] 이건 내 기록이오.
순간, 장태철이 병국의 수첩을 빼앗는다. 병국이 되빼앗으려고 덤비자
수첩을 저만큼 휙 던진다. 수첩이 떨어진 곳에 라이트가 비치면 다섯개의
목노의자가 한줄로 놓여있다.
[병 국] 좋습니다, 보십시요.
태철, 덕수, 진호, 만석이 헬멧을 벗고 그리로 가서 의자에 순서 대로
앉고, 마지막 한 개가 빈 대로 남는다.
병국이 헬멧을 벗고 다가가서 태철 앞에 선다.
태철이는 수첩을 펴들고 있다.
[태 철] 이 회산 묘한데가 있읍니다. 실무자인 우리끼리 먼저 인수인계를
끝내고나서 위로 올라가면서 인사를 하게 되어 있료. 하옇든 반갑습니다.
정확히 도착하셔서 광부들이 한형에게 대단한 기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너무
믿지 마십시요, 나도 그랬으니까. 어떻든 빨리 뜨쇼. 사정이 있어 대학
졸업하고 예까지 오셨겠지만 빨리 손 빼고 뜨는 게 상숩니다. 노조지부장한테
먼저 가시오. ( 수첩을 덕수에게 넘긴다 )
병국이 그 옆 덕수앞에 선다.
[덕 수] ( 수첩을 받아 펴들고 ) 반갑소. 난 어느 편이나 하면---
[페이지] 059
어떻든 잘 협조합시다. 적당하게 눈치껏 하면 별일 없이 책임을 완수할 수
입을 게요. 윗사람 앞에선 눈치놀음으로 때우고, 두더지들 앞에선 똥배짱으로
밀어붙이시오. 뭐 그런거 이미 세상서 다 배워서 알고 있을 게요. 그런거요.
보안과장에게 가시오. ( 수첩을 진호에게 넘긴다 )
병국이 그 옆 진호에게 간다.
[진 호] ( 수첩을 펴들고 ) 무식한 것들과는 대화가 안 돼요. 선동하는
놈이 있소. 주의깊게 살피면서 그놈들을 집어내시요. 수금만 되면 왜 노임을
밀어놓겠소. 경영을 조금만 알아도 파업하겠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거요.
소장님께 가시오. ( 수첩을 만석에게 넘긴다 )
병국이 만석 앞에 선다.
[만 석] 우리가 사람을 채용할 땐 서로 돕기 위해서네. 우린 편리상
광부들에게 자네를 새 운영주의 조카라고 했네. 한 삼개월 수익성을 진단해서
적격으로 판정이 나면 대대적 투자로 노임인상은 물론 후생복지시설을
현대적으로 확충한다고 했네.
[병 국]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만 석]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있네. 다만 몇몇 선동자가 있어서 채불노임
지급조건으로 파업을 계획하는 모양인데 그걸 자네가 책임져주게. 운영주가
외국에서 귀국하면 곧 해결될 것을 파업을 한다면 수많은 광부와 그 가족들이
큰 피해를 보는 걸세. 물론 잘 해내겠지만 노래 소리를 달콤하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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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주게. 그래도 안 통하면 칼을 보여주는 걸세. 감원이 있을 거라면 옴싹
못하네. 자네 월급도 삼개월 후불로 하겠네. 그 대신 숙식은 특별히
제공하겠네. 무료로 말일세. 어떻든 파업만은 막아야 하네. 모든 사람이
직장을 잃는 거니까. 가서 일하게.
병국이 헬멧을 쓰고 돌아선다. 다른 사람들도 헬멧을 쓰고 의자에서 일어나
막장 가운데로 돌아오는데 태철이 병국을 잡는다.
[태 철] ( 빈 의자를 가리키며 ) 다음이 중요하오. 당신이 서울서 내려올
때 그놈들과 무슨 약속을 한 거요.
[병 국] 아무 약속도 없었소. 나는 내가 만난 사람이 누군지 모르오.
제대후 직장없는 외로움, 직장을 갖고 있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따분함,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명찰처럼 길게 붙어다니는 게 지겨워서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상대가 지도를 펴놓고 가리키는 대로 찾아온거요.
취직이 되리라는 믿음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소.
[태 철] 지난번엔 왜 그말을 하지 않았소?
[병 국] ( 수첩을 가르키며 ) 그 넘어에 있소.
장태철이 수첩을 넘겨 찾더니 헬멧을 벗는다. 그는 병국의 헬멧도 벗긴다.
다른 광부들도 헬멧을 벗고 스포트.라이트 안으로 들어와 병국을 에워싼다.
[태 철] ( 광부들을 향해 ) 문 닫아! 창고 문 닫아! 이 새끼를 죽여야 해.
( 병국의 멱살을 쥔다 ) 그놈들 죄 어디로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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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삼 개월씩 두 번 육 개월 작업한 석탄 팔아처먹고 노임 죄 떼먹고
어디로 갔느냔 말야!
[병 국] ( 입을 열지않는다 )
[태 철] 좋아, 이 새끼! 이 새끼! ( 마구 치고 차고 쓰러뜨려 밟는다 )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태 철] 사기꾼의 앞잽이! 이 새끼! 이 더러운 새끼! 위선자! 배신자! 네가
처먹은 걸 내놔! 얼마 처먹었냐? 내놔! 이 새끼야!
이때,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다산댁] 아이구, 이 노릇을 워쪄유, 용재 아부지, 워쪄느냐구유---
아이구---
[섬 네] ( 덕수에게 ) 미안혀유--- 죄송허구먼유--- 죄 지 때문이유---
[용 재] 그려서 속진말라구 혔잖유. 석달치 밀렸을 때 끝내야 허는디 저
사람이 왔다구 또 믿었으니께 여섯달을 헛일허구 등신들 된 거유.
가족들의 아우성으로 진호와 덕수도 흥분을 한다.
[진호.덕수] 쥔여, 쥔여, 쥔여---( 밟는다 )
[태 철] 잠간! 폭약창고!
[모 두] ( 바라본다 )
[태 철] 다이나마이트! 이 창고를 폭파시키는 거야!
태철이 달려간다. 진호, 덕수도 뒤따르고 우르르 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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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석] ( 말리며 ) 안돼, 안돼, 사람을 다쳐선 안 되는 것여---( 그러나
밀려서 함께 나가며 계속 만류한다.)
병국은 그대로 누워 있다. 미쁜네가 숨가쁘게 들어온다.
[미쁜네] 여보세요, 선생님, 정신차리세요. ( 일세운다 ) 저예요,
미쁜네여요, 어서 도망치세요. 죄는 밉지만 전 선생님을 미워할 수 없어요.
어서 갈대밭 곁으로 가세요, 어서요.
[병 국] (고개를 젓는다 )
[미쁜네] 폭약이예요. 그 사람들 못 말려요!
[병 국] 난 아녀---
[미쁜네] 네 ? ( 사이, 바라보다가 ) 그럼 왜 그 말을 하지 않아요!
[병 국] 믿지 않어. 나도 믿어지지 않으니까.
[미쁜네] ( 빤히 보다가 ) 정말 한패가 아니에요 ? 앞잽이가 아니에요 ?
[병 국] 봐, 미쁜네도 믿지 못하잖아---
[미쁜네] 상관없어요. 난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요. 난 선생님을 미워할 수
없어요 ! ( 하면서 포옹을 해댄다 )
이쪽 스포트가 나가고, 막장 쪽 스포트가 들어오면 만석, 진호, 덕수가
둘러섰는데 아직 헬멧을 벗고 있다.
[만 석] ( 만류한다 ) 생각들 해보라구. 한패 같으면 새벽에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왜 안 갔겠어. 왜, 해가 기울도록 종일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겠느냔 말일세.
[태 철] 단수가 높아서 그런 거에요. 큰 놈들 도망가는 시간을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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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제놈은 동정으루 풀어지리라고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어요.
[만 석] 사람을 보면 모르나 !
[태 철] 어떻든 의자 한 개가 비었어요. 그 인물하고 어떤 모의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그걸 알아내야 합니다. 수첩엔 그 기록이 없읍니다.
태철이 헬멧을 쓰자 모두 헬멧을 쓴다. 동시에 병국이 헬멧을 쓰고
나타난다.
[태 철] 빈 의자 임자가 누구요 ? ( 대답을 않는다 ) 기록은 없겠지만 우린
당신이 그동안 계속해서 보고서를 쓰는걸 보았어. 사기꾼 압잽이의
보고서였어 ? ( 역시 대답을 않는다 )
[만 석] 나는 한 선생님을 믿지만 그게 궁금하긴 했지요. 숨김없이 얘길
하세요.
[병 국] 내 개인에 관한 일이요. 극히 개인적 기록이오.
[태 철] 그래도 알아야겠어.
이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면 빈 의자에 갈대밭이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다. 그녀 앞에는 오십여통의 편지가 담긴 상자가 놓여있다.
[갈대밭] ( 편지를 쓰는 소리로 들린다 ) 병국씨, 지독하군요. 당신에게
졌어요. 육개월 동안 쉰 다섯통의 편지는 나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앗아갔어요. 이제 당신에게 감추거나 망설일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걸 드리겠어요. 모레 밤에 도착할 거에요. ( 사이 ) 언젠가, 병국씨가
떠난 이후 석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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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스무일곱 통의 끈질긴 편지를 받고 찾아갔을 때, 현장에 사고가
생겼다고 해서 새까만 역사에서 혼자 밤을 새고 되돌아온 기억을 되씹으면서
가겠어요. 이번에도 일박이일의 짧은 여정이에요.
그쪽 스포트라이트가 나간다. 만석, 진호, 덕수, 태철은 입을 꽉 다물고,
병국은 아픈 마음을 달래느라고 멀리 시선을 던진다. 납덩이같은 침묵이
흐른다.
[병 국] 서무계론서 무력한 고독감만을 갖고 그때 떠났다면 난 지금도
육신만 살아서 돌아다닐 겁니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만은 나 자신이 어둠의,
산의, 마을의 한 부분이 되어있는 듯 합니다.
[태 철] 약혼자가 기다리구 있는데두요?
[병 국] 그녀가 왔읍니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만 석]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는군요.
무대가 서서히 어두워진다.
( 암전 )
[페이지] 065
[장] 8장
어둠속에서 태철, 진호, 병국이 무릎을 꿇고 갈증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 물, 물---
그들에게 스포트 라이트가 떨어진다.
[태 철] 조장님 오줌도 나오지 않아요. 저 물을 한 모금만 먹게
해주십시요. 마지막으로 한번만 마시면 죽어도 원이 없어요. 녜?
만석이 이를 악물고 대꾸를 않는다.
[진 호] 목에 가루가 가득찼어요. 탄가루가 목구멍을 꽉 메웠어유.
한모금만 ---녜? 조장님.
만석은 역시 대꾸를 않는다.
[병 구] 조장님 한 방울씩만 축이게 해주세요. 축이기만 해도 살겠어---
만석이 물통으로 간다.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본다. 만석이 물통을
흔들어보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은 도시락을 꺼내들고 무릎으로 기어서
제비새끼처럼 모여든다.
[만 석] 한 방울씩밖에 안 돌아가겠어. 마시지 말고 혀로 찍어서 오오래
굴리게.
태철, 진호, 병국의 순서로 물을 배급한다. 받은 사람은 빼앗길가 겁내듯
기어가서 아끼듯 혀로 찍는다. 물이 병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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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서 바닥이 난다.
[병 국] ( 아쉬운듯 내밀며 ) 이걸 드세요.
[만 석] ( 고개를 젓고, 수통을 꺼내며 ) 아직 있지요--- ( 오줌을 마신다.
)
태철이 도시락을 혓바닥으로 싹싹 해아내더니 기어와서 물통을 들어올린다.
그걸 입에 대고 조금씩 일어서며 쏟아넣다가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자
냅다 던진다. 물통이 나가떨어지면서 막장이 요란스레 울려댄다.
[만 석] 엎드렷!
모두 엎드린다. 천장에 균열이 생기면서 탄가루가 쏟아진다. 울림이
깊어지다가 서서히 멎는다. 이때,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려오면서 저쪽
벽에 라이트가 들려오면 다산댁, 갈대밭, 이쁜네, 용재, 섬네가 비를 맞으며
차례로 나타난다. 그들의 환상이다.
다산댁과 용재가 우의 조각을 함께 쓰고 나타난다.
진호가 한 걸음 기어간다.
갈대밭이 우산을 쓰고 나타난다.
병국이 한 걸음 기어간다.
이쁜네가 양산을 쓰고 나타난다.
태철이 한 걸음 기어간다.
섬네가 부서진 비닐우산을 쓰고 산봉우리처럼 솟아오른 배를 안고
나타난다.
덕수가 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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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석] ( 부른다 ) 덕수, 덕수---
덕수의 대답 대신 섬네 쪽 라이트가 꺼지고 광부들은 환상에서 깨어난다.
동시에 쿵하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뭔가가 탄차로 떨어진다.
라이트가 비추면 위에서 밧줄이 내려와 흔들거리고 탄차에서 덕수가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그의 입에는 피와 살이 묻었고 그의 손에는 몇개의
물통이 들려있다.
[만 석] 덕수, 자네 위에서 뭘 먹었나?
[덕 수] 괴기를 먹었구먼유.
만석과 병국이 놀라는데, 태철과 진호는 돌아선다. 만석과 병국이 태철과
진호의 얼굴을 각각 살펴본다.
[만 석] 강씨 자네두?
[진 호] 그 사람들 도시락허구 수통을 가질러 갔다가--- 죄 비구 웁어서---
[병 국] 장형이 시작했소?
[대 철] ( 엉뚱하게 ) 쉿. 소리가 들려!
덕수와 진호가 귀를 기울인다. 삭도소리, 콘베이어소리, 콤푸레사 소리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온다. 태철, 진호, 덕수에게만 들리는 환청이다.
[태 철] 들려요?
[진 호] 그려, 들려.
[덕 수] 구조대가 파들어오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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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철] ( 한쪽 벽으로 가서 ) 구조대가 가까이 왔어.
[진 호] ( 다른 벽으로 가서 ) 그려 가까이 왔다구!
[덕 수 } ( 다른 벽으로 가서 ) 예까지 왔구먼유!
그들은 벽을 끌어안고 희망에 찬 모습으로 즐거워 한다.
[태 철] 오, 우린 살았지.
[덕 수] 우린 살았구먼유.
[진 호] 인전 우린 살았어유.
[태 철] 저 해머 소리!
[덕 수] 저 곡괭이 소리!
[진 호] 저 콤푸레사 소리!
[함 께] 구조대가 왔어. 우린 살았어. 핫하하, 으흐흐---
그들은 탄벽에 몸을 부비고, 얼굴을 부벼 입맞추고, 울고 웃고 하다가
갑자기 뚝 멎는다. 환청이 사라진 것이다.
[덕 수] 안 들려유, 소리가 안 들려유---
[태 철] 멎었어. 멎어버렸어!
[진 호] 여기두! 다른데도 가버렸나벼!
[함 께] 안돼! 살려줘! 여기야 여기! 여기야 여기! 여기란 말여---
그들은 손톱이 뭉그러져 피가 나도록 벽을 그러어댄다. 탄벽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우뚝 버티고 서있다. 그들은 하나씩 쓰러지면서 꺼억꺼억
울어댄다. 드디어, 잠들어버렸는지 조용해 진다.
[병 국] ( 다가가려다가 휘청해서 탄차에 기대며 ) 어떻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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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석] ( 역시 움직이려다가 휘청해서 탄차에 기대며 ) 정신을 잃지 않게
해야 되는데요.
[병 국] 늦었어요.
[만 석] 그래도 해야 돼요.
[병 국] 모두 지쳤어요. 까물까물 해요.
[만 석] 한 선생님까지 그러면 안 돼요.
[병 국] 네, 조장님--- ( 탄차에 기댄채 고개를 떨군다 ) 숨이---
만석이 힘들여 구석에서 공기탱크를 가져다가 병국의 코에 대준다. 병국이
정신을 차린듯 그것을 힘들여 끌고 가서 덕수, 진호, 태철에게 대준다.
그들은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헛소리를 한다.
[덕 수] ( 촛점없는 시선으로 갱도를 바라보다가 ) 입을 벌리고 있구먼유.
[만 석] 뭐가?
[덕 수] 저 갱이 아가리를 쩍 벌리구 있어유.
[만 석] 늘 그랬어.
[덕 수] 무서워유.
[만 석] 무섭긴. 우린 늘 저 입으로 드나들었어.
[덕 수] 사람밥을 떠놓고 입을 쩍 벌려 우리를 삼켜버릴 것 같은디유---
[만 석] 날아가자. 큰 새처럼 날아가자. 그럼 우릴 못 삼켜. ( 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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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 공기통을 활짝 열어요. 새놀이, 새놀이를 하자구--- 자, 어서,
어서, 어서 날자구---
만석과 병국이 세 사람을 일세우고 병국, 덕수, 진호, 태철 그리고 만석
순으로 활강하는 새처럼 날개를 펴고 날기시작한다.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막장을 날다가 하나씩 하나씩 쓰러진다. 무대가 어두워진다.
( 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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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9장
어둠속에서 미쁜네 노래가 들려온다.
[미쁜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날에 마지막 밤을---
한쪽에 스포트.라이트가 꽤 둥글게 떨어지면 주막에 갈대밭, 다산네,
섬네와 미쁜네가 목노에 앉아있다. 그들 앞에는 막걸리, 소주, 맥주, 음료수
한 병씩과 그에 맞는 잔이 제대로 놓여 있다. 다른 가족들은 슬픔에 잠겨
있는데 미쁜네는 노래를 불러댄다.
[미쁜네] ( 계속되는 )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채 우린 헤어졌지요 - 우 -
그날에 쓸쓸했던 표정이 그의 진실인가요---
이때, 막장에 흐린 스포트. 라이트가 떨어지면 병국이 희미해진 캬램프
빛에서 뭔가를 꼬물꼬물 쓰고 있다. 그러니까 지상과 막장이 동시에
연결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설정이다. 미쁜네에겐 장난기가 있다.
[미쁜네] ( 노래를 뚝 멎고, 갈대밭에게 ) 뭐라구요?
갈대밭은 그대로 있을 뿐이고, 병국이 마치 그 소리를 들은듯 고개를 들고
앞을 본다. 병국이 다시 꼬물꼬물 쓴다.
[미쁜네] 뭐라구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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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갈대밭은 그대로 있고 병국이 다시 고개를 든다.
[미쁜네]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구요! 아이까지 하나 있다구요! 처녀때
병국씨가 짝사랑했는데 미망인이 되니까 다시 구애를 한다구요! 열열히---
열열히--- 열열히!
이때, 갈대밭이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듯 뛰쳐나간다. 병국에게 비추던
라이트도 나간다.
[미쁜네] ( 아무 일도 없는듯 노랠 부른다 )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은 사정을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 뚝 멎고, 다산네에게 ) 딸 다섯에 아들 하나믄 너무
많구먼유.
다산네는 고개를 숙인채 말이 없고, 막장 진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면 멍한 얼굴로 허공을 보고 있다.
[미쁜네] 아저씬 아줌니헌티 정성이 지극허구 알뜰혔는디 딸들은 죄
물려와갖구 보상금 땜이 아이구땜을 헌다구유? 대장간 화덕불은 언제 피우는
건지 모르겠네유.
다산댁이 뛰쳐나간다. 진호의 라이트도 나간다.
[미쁜네] (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가 우리가 가--- ( 뚝 멎고, 섬네에게 ) 바다두 무섭고
산도 무섭지유.
섬네는 솟아오른 배를 움켜쥘 뿐 대답을 않는데, 덕수에게 라이트가
떨어지면 밧줄로 뭔가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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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쁜네] ( 흉내로 ) 미안혀유. 죄송하구먼유. 죄 지 때문이유. 홋호호.
섬네가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뛰어나간다.
덕수 쪽 라이트가 나간다. 미쁜네가 잔에 막걸리를 따른다. 그 사이에
만석에게 라이트가 떨어진다.
[미쁜네] ( 혼자소리로 ) 양자가 매몰사고로 죽자 양메느리는 다 살 자식
내버리구 떠나구, 조장영감은 그 양손자 땜이 막장에 들어가구---홋호호---
헌데, 그 메느님이 보상금 타러 오셨다--- 홋호호---
미쁜네가 다시 술을 한잔 더 따르더니 담배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여
입에 문다.
그 사이에,
[만 석] 한선생님, 지가 부탁한 거 다 됐나요.
[병 국] 예. ( 쪽지를 준다 ) 어떻게 전하시겠읍니까?
[만 석] ( 꼬물꼬물 바닥에 묻으며 ) 파내갈 거예요. 탄질이 썩
좋으니까---
만석 쪽의 라이트가 나가고, 미쁜네가 술잔을 바라보다가
[미쁜네] 그 사내가 술은 호탕하게 마셨어.
이때, 태철에게 라이트가 떨어진다.
[미쁜네] ( 젓가락 장단을 치며 )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동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 ( 뚝 멎는다 ) 쥐뿔두 없는 주제에---
태철이 고개를 푹 꺾는다.
[미쁜네] 없다 없다 해도 보상금 타갈 피붙이도 없을까. ( 생각해보고 )
홋호. 내가 나서볼까! 살 몇번 부벼줬으니까 안 될 것도 없지. 외상값도
있구, 홋호호. ( 막걸리가 가득 담긴 대접을 배에 엎어대고 ) 이렇게 씨를
뿌렸으니까, 홋호호---
( 뚝 멎고 ) 씨는 씬데 그 씨는 아녀.
대철쪽의 라이트가 나간다.
[미쁜네] ( 술을 다시 따르다가 ) 왜 이렇게 갑자기 서럽지--- 그 많던
사내들--- ( 흑흑 느낀다 ) 사내들--- 새끼들--- 개새끼들--- 뭣같은
새끼들--- ( 그러다가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으며 ) 더러운 년, 쌍년,
개같은 년, 갈보--- 갈보--- 갈보---
울부짖다가 탁자 위에 쓰러진다. 탁자가 넘어질듯 흔들흔들 하면서 조명이
서서히 어두어지다가 완전히 어두어진 순간에 쿵쾅 소리를 내면서 넘어지는
미쁜네의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동시에, 한 줄기 엷은 조명이 막장 구석을
비추면 천장갱목에 이덕수의 시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자살한 것이다.
무대가 밝아진다.
만석과 병국은 손을 들어 덕수의 시체를 가리키며 소리치려고 애쓰는데
입이 굳어서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다. 진호와 태철은 한걸음쯤 뒤에 앉아서
표정없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수척한데 입술과 코가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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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트거나 이미 터져서 마른 딱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 덕수, 진호,
태철의 손가락은 벽을 긁어낼 때 뭉그러져서 비참한 몰골이다.
[만 석] ( 다가와서 ) 갱 아가리가 그렇게도 무서워, 쯔쯔. ( 자신도
정신을 가다듬으며 ) 저 목이나 풀어줘야지---
만석이 탄차에 조금 빗겨난 탄차를 밀어넣는다. 병국이도 같이 움직인다.
둘은 탄차에 오르려고 실갱이를 한다. 결국 수통을 벗어 버리고 겨우
올라간다. 둘이 애써 시체를 내려 탄차에 뉜다.
[만 석] ( 눈을 감기며 ) 못난 사람--- 먼저 죽는다고 먼저 나갈 수
있는감---
[병 국] ( 바라보다가 ) 부럽군요, 조장님.
한편 진호와 태철은 두 사람이 벗어놓은 수통을 한개씩 차지해서 입에
들어붙는데 빈 통이다, 그래도 빼앗길까 걱정되어 슬금슬금 피하면서
환상으로 다 마시고 수통을 허리에 겹찬다. 진호와 태철이 동시에 흰 이빨을
환하게 들어내 웃더니 힘이 솟은듯 떠들기 시작한다.
[진 호] 어이, 삭도가 돌아가는디! 덜덜덜, 힛히히.
[태 철] 그래, 덜덜덜! 덜덜덜!
[진 호] 바람이여, 시원헌 바람이여!
[태 철] 우리도 일을 하자, 죄 일을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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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탄차를 밀기시작한다. 마침, 탄차에서 쉬었다가 내려오려고
꼬물거리던 만석과 병국이 갑작스런 움직임에 굴러 떨어진다. 그들은 계속
막장을 움직인다. 한쪽에 부딪혀 쾅 소리를 내고 멎으면 바꿔서 다시 밀곤
한다. 그렇게 하면서.
[진 호] 힘을 내여!
[태 철] 기운 세다고 소가 왕이 될까!
[진 호] 힘을 내여! 착실해야 복이 온다는디!
[태 철] 우리 팔자야 뻔한디!
[진 호] 홍두깨에 꽃피는걸 봤는디!
[태 철] 어느 시러배가!
[진 호] 내 엄마가!
[태 철] 자식 복 엄니가 가졌구먼!
[진 호] 그려서 내가 생긴 건디!
[태 철] 뭐? ( 쉰다 )
[진 호] 쉬지 말고 혀! 착실혀야지.
[태 철] ( 다시 밀며 ) 이번 얼마나 나올까?
[진 호] 뭔디?
[태 철] 간주 말야.
[진 호] 잊혀. 일허믄 돈 버는 거여.
[태 철] 한 가락 뽑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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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호] ( 두말않고 뽑는다 ) 서라벌 밝은달에
[태 철] ( 추임새로 ) 영차.
[진 호] 밤이 들어 노니다가
[태 철] 영차.
[진 호] 들어와 자리를 보니
[태 철] 영차!
[진 호] 다리가 넷이여!
[태 철] 영차!
[진 호] 둘은 내 것이고!
[태 철] 영차!
[진 호] 둘은 뉘 것인고!
[태 철] 영차!
[진 호] 본디 내 것이다만
[태 철] 영차!
[진 호] 앗아가거늘 어찌하리!
[태 철] 영차!
[진 호] 다 왔다!
[태 철] 영차, 영차---
그들의 착각이 절정에서 현실로 떨어지면서 탄차의 속도를 따르지 못해
쓰러지며 비명을 지른다. 만석과 병국이 눈을 뜬다. 탄차는 관성으로 달려가
벽에 부딪쳤다가 쓰러진 두 사람을 향해 되살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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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과 병국이 위기를 느끼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못해 안타까와 하는 두
사람의 헬멧을 치이고 멎는다. 만석과 병국은 겨우겨우 다가가서 탄차를
빗겨놓는다.
[만 석] ( 확인하고 ) 인생은 어차피 모닥불이지요.
[병 국] ( 역시 확인하고 ) 아침이슬이구요.
[만 석] 영혼은 아직 몸을 떠나지 않았어요.
[병 국] 네.
[만 석] 보내주십시다---
녜.
두 사람이 벌레같이 꼬물꼬물 움직여 두 시체를 탄차에 싣는다. 앞뒤에서
끌고 밀어 겨우겨우 움지겨간다.
[만 석] ( 호흡장애를 받으며 ) 한 선생님.
[병 국] ( 역시 숨을 몰아쉬며 ) 녜, 조장님---
[만 석] 우리가 잘못한 거 같아요.
[병 국] 우린 잘 했어요.
[만 석] 구조대를 기다릴 게 아니구 그냥 파올라갈걸 그랬나봐요.
[병 국] 너무 높았어요.
[만 석] 모두 그렇게 생각할까요?
[병 국] 녜, 그럴 거예요.
[만 석] 그랬으면 쓰겠어요.
그들 잠시 멎고 가쁜 숨을 몰아쉬어 힘을 만들며,
[만 석] 겁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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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국] ---
[만 석] 죽어서 원혼에 쫓길 것 같아요. 그런 일이 없으면 쓰겠어요.
육신이 썩구 혼이 흩어져버리구 아무것도 남지 않는게 죽음이면 쓰겠어요---
[병 국] 녜, 그게 죽음일 거예요.
그들이 다시 움직인다.
[만 석] 이렇게 정신이 또렷해지는건 웬일이지? 한번 들여다봤으면
쓰겠어요.
[병 국] 살아서도 앞을 못 보는 걸요.
[만 석] 그래, 그랬어요.
그들이 다시 멎어가쁜 숨을 몰아쉬어 힘을 만들며,
[만 석] 그래도 죽는 자리니까 앞을 쬐금만 보여줬으면 쓰겠어요.
[병 국] 이 어둠처럼 시작이구 끝일 거예요.
[만 석] 그래. 그랬으면요.
이때, 막장 구석에서 갱목과 철주가 소리를 내며 비어지고 탄가루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만 석] 어머니가 선탄부로 일생을 보내시다가 돌아가실 때 유언을
하셨지요. 어떻게 해서든 탄광을 떠나거라. 그렇잖으면 처자를 갖지
말거라--- 그래서 그 말씀을 따르다가 뒤늦게 양자를--- 양손주가 보고
싶군요.
[병 국] 녜---
[만 석] 죽어서는 인연이라는게 없으면 해요. 인연은 아프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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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하고의 인연 때문에--- 우린 --- 더 힘들었어요---
[병 국] 녜, 힘들었어요. 이젠 괜찮아요. 죽음은 모든 인연을 태워버리는
걸 거여요.
[만 석] 태워도 재가 남으면 어쩌지요.
[병 국] 물건이 타면 재가 남지만 정이 타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만 석] 그래, 그랬으면 쓰겠어요.
이 때, 천장이 더 무너진다. 그들은 모른다.
[만 석]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어요. 죽어선 모르게 짓는 죄도 없으면
해요.
[병 국] 죄의 끈은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가 봐요.
[만 석] 그걸 끊었으면 쓰겠군요.
그들, 멎는다.
[병 국] 자고 싶어요. 눈을 감고 깊이깊이 자고 싶어요.
[만 석] 안 돼요, 잠들면 안 돼요.
[병 국] 쏟아져요, 쏟아져요---
[만 석] ( 다시 끌며 ) 오늘이 몇일이지요---
[병 국] 열--- 열나흘 까지는 셌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병국이 더 따르지 못하고 쓰러진다. 만석은 그 사실을 모르고 탄차를
느릿느릿 끌어간다. 탄차가 멎는다.
[만 석] 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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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국] ---
만석이 서서히 돌아선다. 병국이 뵈지 않자 찾으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휘청하면서 탄차에 기댄다.
[만 석] 한 선생님--- 어디 ---계시지요--- 대답을 허세요--- 잠들면 안
됩니다---
만석의 손이 풀리면서 그의 몸뚱이가 허깨비처럼 구겨져 내리더니 마침내는
막장 바닥에 코를 박고 움직이지 않는다. 삭도 돌아가는 소리가 덜덜덜
한가롭게 들려온다. 그 소리를 타고 광부들의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콧노래가 들려온다. 그건 한 사람이다가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의 합창이 된다.
무대가 서서히 어두어진다.
<막>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