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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영 루이델랑드 신부님(1895~1972) 조명 인터뷰
―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포항KBS, 인터뷰 2022.8.4, 방송 2022.9.12.
*** 남대영 신부님에 관한 제 첫 인터뷰(포항KBS, MBC, CBS 등)은 2012년 말 ~ 2013년 초에 걸쳐 3차례 있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4번째입니다.
이 4번째 인터뷰는 파일 용량이 67MB가 넘어서 여기 카페는 업로드가 안 됩니다(20MB까지 가능).
1. 루이델랑드 신부님을 연구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 크게 보면 과거세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성숙되어온 필연의 ‘인연’으로 그렇게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신부님 공동체에서는 이런 경우를 ‘섭리’라 부릅니다. 1996년 위덕대학교 개교와 더불어 인근 포항의 신부님 공동체를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대업을 성취한 대인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저 장엄한 공동체는 누가 설립하였는지,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하고 있는지 늘 관심이 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위덕대학교 사회복지학부에 수녀님 두 분(마리아, 세실리아 수녀님)이 편입을 왔습니다. 두 분 수녀님과 대화하면서 신부님의 자취가 어린 곳을 일일이 방문 답사하고, 신부님 관련자료를 요청하여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25종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수 년이 경과하면서 연구도 진행되었고, 마침내 2012년 11월 신부님 선종40주년을 맞아 학술 심포지움이 열리게 되었는데, 거기서 130매에 달하는 논문 “남대영 루이델랑드 : 생애와 사상, 좌표와 위상”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심포지움은 이 한 편의 논문만 발표된 자리였습니다. 시절인연이 익고 때(카이로스)가 차서인지 지역사회에 반향이 있어 당시 지역 신문과 방송에서 주목해 주었습니다. 포항KBS를 비롯한 여러 방송 인터뷰를 제가 다 한 기억이 납니다. 이 심포지움을 계기로 이듬해인 2013년 신부님이 ‘포항을 빛낸 인물’ 제6호로 선정되셨습니다.
【자료】
가톨릭 신문(2012.11.25)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52599.
경북일보(2012.11.14) ;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2939.
2. 남대영 루이델랑드 신부가 ‘남대영’이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남대영(南大榮)’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신부님에게 부여한 현지이름입니다. 아시다시피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선교를 사명으로 설립되었고, 선교사들이 파견된 아시아 그 나라의 현지문화에 부합하기 위하여 전교회 차원에서 현지 이름을 부여하였습니다. 전교회는 신부님을 일제 강점기에 조선 남쪽으로 파견하면서 ‘남쪽의 큰 영광’이 되라는 의미로 ‘남대영’이라 현지명을 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부님 공동체와 포항제철의 연관성을 크게 생각하는 분들은 ‘남쪽의 큰 용광로 불빛’이라 확대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3. 루이델랑드 신부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이는게 좋을까요?
▶ 저는 2012년 학술 심포지움에서도 그랬고, 다른 자리에서도 신부님을 말할 때 저도 모르게 울컥해지곤 하는 자신을 발견해 왔습니다. 그분을 생전에 뵌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신부님의 삶과 정신을 연구하면서 제 내면에 자리잡은 그분의 ‘진실함’에 크게 감명받아서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부님의 삶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우리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하늘이 내려 주신 분이 아닌가 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상처 많은 조선과 조선인들과 함께하고,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 그리고 근대화 초기의 한국의 역동성과 함께한 가장 진실한 이름 가운데 한 분이라 하겠습니다.
먼 이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하나같이 절실한 삶을 사셨고,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만, 신부님은 순교 이상의 궁극적 삶을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일관되게 사셨습니다. 이 지상에서의 78년 간의 생애 중 근 50년을 한국인들을 위해 한국에서 사셨고, 서거하여서도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포항 땅에 묻혀 계십니다. 이분은 단지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지 직접 체현해 보이셨습니다. 대중들을 깨어나게 하는 영성 지도자로서도 풍부한 내용을 보이셨고, 사회사업가로서도 누구에 견줄 수 없는 자애의 화신(化身, 성육신)이었습니다. 수도회 예수성심시녀회와 사회복지법인 성모자애원의 설립자가 되셨는데, 이것은 본당 사목에 머물 수 없는 거대한 카리스마가 신부님에게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영성과 자애의 거인’이라 존념(尊念)하여 불러 드리고 있습니다.
4. 다른 많은 외국인 신부가 한국에 왔는데, 특히 루이델랑드 신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 남대영 신부님은 몇 가지 점에서 거대합니다. 그래서 ‘거인’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에는 신부님의 삶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① 탁월한 자질 ② 비범한 직관력 ③ 끝까지 헌신하는 의지력 ④ 일에 대한 악착스러움 ⑤ 깊은 신앙심 ⑥ 모범적인 청빈생활 등입니다. 저는 이것을 남대영 루이델랑드의 ‘육덕(六德)’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만, 이 육덕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제가 특별히 현출(顯出)시켜 말씀드리고 싶은 세 가지는, 첫째는 시스템을 확립한 분이라는 점입니다. 동양고전 「예기」 악기편 제13장의 표현을 빌리면 ‘작자지위성(作者之謂聖)’이시다는 겁니다. 시스템을 확립한 분을 ‘성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예수성심시녀회와 성모자애원이라는 빛나는 공동체 시스템을,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가오는 인연에 따라 무심무위(無心無爲)로 설립하여, 신부님 아니 계신 속에서도 거룩한 어머니[聖母] 사업이 이어지게 한 ‘성자’이십니다. 이렇게 영성과 자애의 양 시스템을 확립한 선교사는 신부님 외 달리 없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선교사들이 세계 여러 곳에 파견되어 빛나는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만, 신부님과 같이 양 시스템을 확립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런 사례는 잘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풍부한 사상과 거대한 실천을 하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영성과 자애의 거인’을 달리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신부님의 <희망과 용기, 섭리와 낙관, 신뢰와 의탁, 사랑과 행복>에 관한 영성의 사상은 풍부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정리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는 영성의 사상 알맹이들은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습니다. 신부님의 자애의 실천은 질과 양에서 공(共)히 거대해서 짧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한국 사회복지 발달사와 함께한 이 땅 복지 역사의 첫 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사회복지의 전 영역을 생전에 실천한 종합복지의 원형이십니다. 「논어」 옹야편 제28장은 “이웃들에게 널리 베풀고 능히 대중들을 구제하는(博施於民 而能濟衆)” 이를 성인이라 하였습니다만, 신부님이야말로 ‘박시어민 이능제중’의 오롯한 이름입니다.
셋째는 진실함의 당체(當體)라는 점입니다. 동양고전 「중용」 제20장은 “진실함은 하늘의 도이고(誠者 天之道也), 진실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도이다(誠之者 人之道也)”고 하였습니다만, 신부님은 오직 진실하고자 하는 ‘성지자’의 삶을 여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외출도 잘 않으시고 아이들의 식단을 챙기고 우는 아이를 달래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설립자의 권위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갈평으로 은퇴하시고도 다리를 9개나 놓고 당시 오지였던 그곳의 청소년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은퇴하여서도 일을 벌리는 신부님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의 성모사업 자애사업에 은퇴란 없었습니다. 「맹자」 고자하편 제6장에는 “군자의 행위를 일반인들은 본래 잘 알지 못하는 법이다(君子之所爲 衆人固不識也)”고 하였습니다만, 신부님은 역사상의 성자들이 그랬듯이 언제나 고독하셨는데, 신부님은 고독을 ‘기도와 인내와 침묵’(「365일, 언제나 희망 속에서」, 1월 6일자)으로 감당하셨습니다.
5. 송정에 있다가 포항제철이 들어올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의 선택에 대해 원장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 신부님은 영천에서의 15년에 걸친 사목을 정리하고, 동쪽 포항으로 1950년 3월에 옮겼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불과 3개월 전이었습니다. 이 점도 섭리의 역사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포항은 형산강전투(1950년 9월)로 알려진 격전지였고, 더구나 신부님의 공동체가 자리잡은 송정리 바닷가는 북한군이 향하는 부산 방면에 위치한 포항 남쪽이었습니다. 거기에 신부님의 커다란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영천에서의 사목은 신부님 사목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지만 여러 고난 속에서 정리되었는데, 고향 노르망디를 연상시키는 포항에 마음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송정리에서도 떠나야 했습니다. 영천에서도 그랬고, 그 이전 부산에서도 그런 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를 ‘영점토대(零點土臺)’라 부릅니다. 일구어 놓으면 제로 베이스로 돌아가는 안타까움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섭리의 뜻임을 신부님은 아셨고 특유의 강인한 의지로 이겨 나갔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한국사회의 발전, 이를 위해 꼭 필요한 제철소가 당신의 공동체가 머물던 자리에 입지함을 진심으로 수용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마련하실 모양인데마는”이라고 설하셨습니다. 1968년 12월 송정리를 떠나 현재의 대잠동으로 800여 명의 대가족이 옮겨 왔습니다. 18만 평에 걸친 35채 이상의 건물은 그렇게 역사 속에만 남았고, 현재 포스코 그 자리에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6. 신부님이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된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야기와 그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 청년 루이델랑드는 1914년 10월 꾸땅스대신학교(대학교)에 입학하는데, 당시 대신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 7월)로 꼬와니로 피난해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1915년 2월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1880년부터 사제와 신학생도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하는 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으로서 전쟁에 나아가게 된 것이지요. 인간세계의 폭력성과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한 번민이 컸을 것입니다. 생사의 문제도 체감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 세상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보다 자각한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가 역설적이게도 선교사로서의 성소(聖召)을 깊게 한 시간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919년 9월 동원해제되어 대신학교로 복학할 때까지 신부님은 야전군 운반병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운전병으로 부상병들을 나르면서 위생병의 역할도 자연스레 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보직활동은 후일 사목을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천 용평본당에서 무료진료소를 열었고, 포항에서 나환자진료소와 성다미엔피부병진료소 등을 운영하였습니다. 사제성소가 아닌 선교성소로의 완전한 결심은 대신학교를 찾아와 해외선교의 뜻을 가진 신학생을 모집하는 파리외방전교회 드삐에르 신부의 강의를 듣고서입니다. 루이델랑드는 이를 하느님의 섭리의 징표로 받아들이고, 주저없이 파리외방전교회신학교로 편입하였습니다(1921년 9월). 1922년 12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게 됩니다.
7. 한국과 프랑스에서 훈장을 받았는데, 그것의 의미를 짚어 주고 싶습니다.
▶ 훈장은 현실세계에서의 큰 영광이지만, 사제에게는 진리세계에서 인정되는 완덕(完德)을 보였기에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신부님은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1962년, 제72호, 현 상훈법으로는 국민훈장 동백장에 해당함)을 받았고, 프랑스정부로부터는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장(1969년)을 받았습니다. 송정리 성모자애원은 당시 국내 최대 복지현장이었기에 장면 총리의 방문(1960년 10월 9일), 육영수 여사의 방문(1965년 6월 16일)이 잇달았습니다. 신부님은 살아서 진리세계로부터, 현실세계로부터 다 인정을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톨릭 복자와 성인으로 시복과 시성이 되는 것입니다.
8. 신부님이 포항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그의 선택인지 알고 싶습니다.
▶ 영천에서의 고난은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 파멸기에 고조된 발악적 박해와 감시입니다. 1941년 12명의 정녀들이 간첩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고, 신부님도 12월 보름 봉안 투옥되었습니다. 둘째, 해방 이후 좌익과 우익의 심각한 이념적 갈등과 내란적 상황에서의 고군분투입니다. 1946년 1월 ‘별십자구호회’를 조직하여 일본과 만주로부터 귀향하는 동포들을 구휼하였고, 공산주의자로 잘못 낙인찍힌 자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면서 보람과 함께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셋째, 1949년 시행된 농지개혁법으로 영천에서 일군 농토를 다 손실 당하였습니다. 이 점이 130여 명의 가족들을 이끌고 포항으로 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섭리로 받아들인 신부님의 신심과 결단이 포항으로 향하게 하였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포항에서의 또 다른 섭리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9. 포항에서 신부님을 지역을 대표하는 위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보시는요? 지역에서 신부님의 위상 같은 걸 말씀해주심 좋겠습니다.
▶ 남대영 신부님은 유사 이래 빛을 발하고 있는 포항을 빛낸 인물 가운데서도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서도 한국과 포항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고, 서거하여서도 모국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포항에 묻혀 한국을 영원히 지키고 있습니다. 포항은 신부님의 큰 은덕을 입었기에 그를 기억하고 기려야 합니다. 그 작은 징표가 ‘포항을 빛낸 인문’ 제6호입니다. <영성과 자애의 거인, 종교지도자와 사회실천가로서의 모범, 리더십과 경영력의 탁월, 지방화와 세계화의 통합> 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등불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