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찰의 명필(名筆) 편액(扁額)①47점, ②55점. ③ 48점
◈한국 사찰의 명필(名筆) 편액(扁額). ①47편,②55편. ③ 48점. 한국 사찰의 명필(名筆) 편액(扁額)① 47점 ◐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 書 10 점 ◐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7~2007) 書 7 점 ◐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 書 10 점 ◐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書 20 점 |
편액(扁額)이란 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로서 널빤지나 종이 또는 비단 등에 글씨나 그림을 그린 것이다. 대부분 가로로 길죽하여 횡액(橫額)이라고도 하고, 보통은 현판(懸板)이라고 부른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글씨의 경우 대개 대형이므로 대자(大字)라는 별칭도 있다.
편(扁)은 서(署)의 뜻으로 문호 위에 제목을 붙인다는 말이며, 액(額)은 이마 또는 형태를 뜻한다. 즉,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붙여서 건물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 주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때 건물 명칭을 표시한 것을 서서(署書)라고 한 것이 편액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 건물은 물론 도성과 문루, 궁궐 전각, 지방관아와 향교·서원·일반주택에까지 붙여졌다.
여기에 쓰이는 한자는 전서와 예서·해서·행서·초서 등 매우 다양하며, 요즘에는 한글로 된 편액도 많아졌다. 건물의 얼굴이므로 건물 격식에 어울리는 글씨와 장식을 더한다. 글씨의 경우는 당대 명필과 고승·문인의 것이 대부분이나, 더러는 옛 선현의 글씨를 모아 만들기도 하고 활자체나 특별히 만든 글씨로 장식하기도 한다. 글씨는 금니와 은니·먹·분청·호분 등으로 쓰고, 틀은 무늬와 색채를 넣어 주련(柱聯)과 함께 건물의 중요한 장식 수단이 된다. 이렇게 편액은 건물에 멋을 내는 수단임과 동시에 건물 명칭과 내력, 역사와 인물, 일화 등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1921~2006) 書- 그는 일찍이 한글 쓰기에 관심을 두어 여건이 어려운 일제시기에 [우리글씨 쓰는법]이라는 궁체 쓰기에 대한 저서를 냈고, 궁체 쓰기 작품을 창작하였다. 궁체 작품활동과 더불어 국내 유명기념물의 글씨를 많이 써서 남기는 등 국내외에 그의 한글 궁체의 금석문이 많이 있다. 한편 한자 예서체 느낌의 판본체를 최초로 창안하여 보급하여 초중등 교과서의 모범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천왕문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書-
경북 문경 운달산 김룡사 봉명루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書- 일중 김충현 선생님 특유의 예서체입니다.
경기 양평 용문산 용문사 일주문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1986년 書-
경기 양평 용문산 용문사 일주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86년 書-
양평 용문산 용문사 관음전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書-
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書- 일중 김충현은 대학강사, 교육기관 이사장, 서예단체장, 예술원 회원 등으로 활약하면서 한문서예와 한글서예의 일가를 이룬 서예가이다.
대구 팔공산 파계사 일주문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書- 일중 김충현 선생님 특유의 예서체입니다.
경남 양산 천성산 홍룡사 요사채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
전북 정음 내장산 내장사 범종각 -일중(一中)김충현(金忠顯)-
강화도 낙가산 보문사 일주문 -여초(如初)김응현(金膺顯) (1927~2007) 80세書- 여초 선생은 1956년 서예단체인 ‘동방연서회’를 창립해 반세기 넘게 한국 서예계를 이끌어 왔으며, 작년 11월 타계한 친형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과 함께 20세기 후반 한국 서예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다
강화도 낙가산 보문사 일주문 -여초(如初)김응현(金膺顯) (1927~2007) 80세書- 수많은 대가들을 길러낸 스승이었기에 선생은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을 떨쳤다. 중국 서단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그의 글씨를 접하고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일화는 서단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필법이지만, 한국 대가의 손에 의해 완성된 서법미학의 경지가 오히려 중국인들을 매료시킨 셈이다. 중국서협 학술위원이며 중국서법대가인 종명선 서안교대 교수는“고졸하나 우둔하지 않고 활달하나 법도가 있고, 염미하나 속되지 않고 웅혼하나 패도하지 않아 강과 유가 서로 돕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다”고 그의 글씨를 극찬했다.
경남 남해 망운산 화방사 일주문 -여초(如初)김응현(金膺顯)(1927~2007) 書- 명지대 진태하 교수도 “여초의 세계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넘치는 가운데 원숙과 창로의 경지에 들어 혼연천성하고 묘합자연하여 자신만의 서법언어를 향유하고 있다”며 “추사(秋史) 이후 여초(如初)”라고 평한 바 있다. 선생의 경지는 이미 법을 떠나 있었다. 법을 떠난 그의 필법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지난 2000년과 2001년 조선일보미술관과 중국 북경의 300년된 박물관 ‘영보재(榮寶齋)’의 개명(開名) 100주년 기념 초대전에서 열린 ‘좌수서전(左手書展)’을 통해서였다. 당시 교통사고로 오른팔이 골절상을 입어 더 이상 글씨를 쓸 수 없게 되자선생은 왼손으로 붓을 잡았다. 선생이 선보인 좌수서법에는 오른손으로 써내려간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로움과 부드러움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대구 팔공산 파계사 -여초(如初)김응현(金膺顯)書 (1927~2007)- 여초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서단의 대표적인 거목이었다. 지난해 11월 19일 타계한 친형 일중 김충현 선생과 함께 한국의 근대서단을 이끌어왔다. 형 일중 선생이 ‘일중묵연회’를 통해 후학을 양성해 왔다면, 여초 선생은 1956년 설립한 ‘동방연서회’를 통해 지금까지 7000여 명에 달하는 서예가들을 직접 길러왔다. 때문에 한국 서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예가들의 대다수는 여초 선생과 일중 선생의 제자라는 말도 전해진다.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여초(如初)김응현(金膺顯)書 (1927~2007)-
전남 해남 두륜산 일지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書(1927~2007)-
영광 불갑산 불갑사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書-
속초 설악산 신흥사 사천왕문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 특이하게도 편액의 오른쪽 위 귀퉁이에 한반도 지도가 두인(頭印)으로 찍혀 있고, 그 지도 안에는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통영 미륵산 관음선원의 보광루(普光樓), 양산 통도사의 범종루(梵鐘樓), 화성 용주사 천보루(天保樓) 안의 홍제루(弘濟樓)의 편액 글씨도 김찬균의 작품이다. 설악산 신흥사, 두륜산 대흥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도 그가 글씨를 쓴 편액들이 많이 있는데, 그 편액들에는 모두 '일체유심조'가 새겨진 한반도 지도가 있다고 한다. 일종의 낙관인 셈이다.
속초 설악산 신흥사 사천왕문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우리나라 지도 內 一切惟心造
부여 만수산 무량사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우리나라 지도 內 一切惟心造
부산 태종대 태종사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통영 미륵산 관음암 강성대 보광루-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통영 미륵산 관음암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우리나라 지도 內 一切惟心造
여주 봉미산 신륵사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주자서체(朱子書體)를 즐겨 썼으며 한반도 지도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여주 봉미산 신륵사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양산 영축산 통도사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수정사대광전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書 (1910 ~ ? )-
해인총림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英親王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천연당'(天然堂) 사진관 개관.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妙境을 이루었으며, 그림은 山水와 花鳥를 특히 蘭竹이 절묘 했다.
해인총림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편액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彌勒佛) 예서, 내금강의 大下奇絶)초서, 법기보살(法起菩薩) 해서 등 각서(刻書)가 남아 있다.
가야산 해인사 구광루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대적광전』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법보전』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가야산 해인사 『대방광전』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가야산 해인사 『금강계단』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노악산 남장사 일주문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금강산 건봉사 불이문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상왕산 서산 개심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고불총림 백양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재약산 밀양 표충사 대광전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태화산 공주 마곡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부소산 고란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조계산 순천 조계총림 송광사 -해강 김규진 (1868~1993)書-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운제산 포항 오어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정족산 전등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삼신산 하동 쌍계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발본산 영월 금몽암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발본산 영월 우화루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8세 때부터 외삼촌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청나라에 가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서화미술회,서화협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다.
------------------------------------- ◈ 한국 사찰 명필 편액 모음 ② 40점. .
부산 금정산 선찰대본산 범어사 조계문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912년 78세 書 - 조선 후기 海士 金聲根(해사 김성근 :1835~1919). 조선 후기1862년 정시문과에 급제해, 성균과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규장각직제학, 홍문관제학,이조판서,예조참만등의 벼슬을 지냈다. 또한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대학제국 수립 후에는 법부대신, 탁지부대신 등을 지냈다. 해사는 송나라의 명필 米?(미불)의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부산 금정산 선찰대본산 범어사 조계문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912년인 78세 書 -
부산 금정산 선찰대본산 범어사 조계문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912년인 78세 書 -
해남 두륜산 대흥사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書-
해남 두륜산 대흥사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書- 해남 두륜산 대흥사 명부전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書- 대구 팔공산 동화사 영산전 -조선후기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 71옹書-
대구 팔공산 동화사 산신각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書-
순천 조계산 선암사 삼성각 -근원 구철우(槿園 具哲祐 :1904~l989) 書- 전남 화순 출생. 양곡 이승복과 후석 오준선의 문하에서 경사를 배우고 서울 배제학당에서 수학.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 선원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천불전 용화당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1871~1936)書- 성당 선생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산 분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공숙(公叔). 호 성당(惺堂)이다. 어려서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배우다가 황정견(黃庭堅)의 행서(行書)를 배웠으며, 예서(隸書)에도 능하였다. 서화협회 회장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서법 연구기관인 상서회(尙書會)를 설치하여 후진 지도에 힘썼으며, 일제시대에 검사(檢事)를 거쳐 중추원(中樞院) 촉탁을 지냈다.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강선루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1871~1936)書-
대구 팔공산 파계사 진동루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1871~1936)書-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경남 양산 천성산 홍룡사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1871~1936)書-
공주 태화산 마곡사 대광보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書-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시,서,화를 썩 잘하는 삼절(三絶)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자하(紫霞)신위(申緯)의 그림 스승이시다. 조선조 22대 정조때의 문신·서화가, 자는 광지. 호는 표암(豹庵), 본은 진주. 정조 2년(1778) 병조 참지로 문신정시에서 장원, 한성부우윤, 남양 부사· 한성부 판윤 및 호조참판·병조 참판을 거쳐 기로소에 들어갔음. 서화에 뛰어나 멀리 청나라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졌음. 특히 산수화와 사군자로 유명하며, 그의 화풍은 정 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격이 있고 개성이 뚜렷하였음. 시호는 헌정. 저서로는 <표암집>, 작품은 <산수도> <난죽도> 등이 있다.
강진 만덕산 백련사 -통일신라의 서예가인 김생(金生, 711~790, 성덕왕 10~?)글로 추정- 청량산 경일봉 아래 위치한 김생폭포 동굴이 있다. 김생은 이 굴 앞에 암자를 짓고 10여 년간 글씨 공부를 하여 기암괴석을 이루어진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김생필법'을 확립하였다. 그는 당시 왕희지체, 구양손체가 유행하던 시기에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독특한 서법을 구사합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서풍을 이끌어냈으며, 이로 인해 해동서학의 종조로 여겨져 한국서예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진나라 왕희지를 능가하는 海東書聖으로 추앙.
안동 천등산 봉정사 -동농 김가진(金嘉鎭.1846∼1922)書- 조선말기 문신ㆍ독립운동가. 본관 안동. 호 동농(東農). 10년에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로부터 남작(男爵) 작위가 주어졌으나 받지 않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3ㆍ1운동에 참가하고, 그 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고문에 추대되었다. 20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하다 병사하였다. 한학에 능통하고 글씨에 뛰어났다
안동 천등산 봉정사 덕취루 -동농 김가진(金嘉鎭.1846∼1922)書-
안동 천등산 봉정사 덕취루 -동농 김가진(金嘉鎭.1846∼1922)書-
문경 운달산 김룡사 -동농 김가진(金嘉鎭.1846∼1922)書-
순천 조계산 선암사 육조고사 - 傳 서포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의 글 (1614~1636)-
영주 봉황산 부석사 안양루 -1944년소남 김종호書-
부안 능가산 개암사 -김석천(金石川 9歲 書-
부안 능가산 개암사 -김례산 8세 書-
익산 함라산 숭림사 일주문 -여산 권갑석 2001년書 -
정읍 내장산 내장사 정혜루 『천하명승내장산』-월담 권영도 (1914~2004)書-
양산 영축산 통도사 해장보각 -이재 권돈인(?齋 權敦仁:1783~1859)書 - 이수(??)는 ?齋 權敦仁의 별호로, 그가 69세 되던 1851년. 권돈인은 병조판서, 영의정 등을 지냈고 글씨와 문인화에 능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예서를 ‘東國(동국)에서는 전혀 없었던 神合(신합)의 경지’라고 평가했다. 문경 운달산 김룡사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書-
문경 운달산 김룡사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書-
문경 운달산 김룡사 절하당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書-
문경 운달산 김룡사 설선당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書-
문경 운달산 김룡사 해운암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書-
원주 치악산 구룡사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書-
해남 두륜산 대흥사 화장법해 -권재철書=
해남 두륜산 대흥사 무량수각 -노완(老玩1840년)書 -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786~1856 자:元春. 호:추사 외 200~300課의 관지로 추정. 추사(秋史) ·완당 ·노완(老阮). 金正喜印,소봉래학인(小蓬萊學人),염(髥,丙午老人,추사심정(秋史審正), 예당(禮堂),천보재(天寶齋),대한천상(大閒天上), 추사진장(秋史珍藏).완당(阮堂). 승련노인(勝蓮老人).즉과(卽果).과노(果老).노과(老果).병과(病果.노완(老阮) 등.
순천 조계산 선암사 무량수각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786~18560)書-
부산 금정산 원효암 무량수각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786~18560)書-
양산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무량수각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786~18560)書-
영천 팔공산 은해사 대웅전 -추사 김정희1850梗 書-
용문산 용문사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786~18560)書-
영천 팔공산 은해사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786~18560)書-
양산 영축산 극락암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786~18560)書-
밀양 표충사 사천왕문
밀양 표충사 편액
밀양 표충사 관음전
밀양 표충사 팔상전
밀양 표충사 무량수각
밀양 표충사 서래각
밀양 표충사 보화루
밀양 표충사 편액
----------------------------------------- ◈ 한국사찰 명필 편액 모음 ③ 48 점.
-편액(扁額)- 서울 성곽의 남문인 숭례문에는 崇禮門이라는 글씨가 액자에 들어 세로로 걸려있다. 사찰의 각 전각에는 大雄殿, 極樂殿 등의 액자가 엮시 굵은 글씨로 쓰여 걸려있다. 이렇게 전각이나 문 위에 걸린 액자를 편액(扁額)이라고 하며, 흔히 현판(懸板)이라고 부른다. 대개의 경우 편액은 가로로 걸리며, 숭례문의 경우와 같이 세로로 걸리는 수도 있다. 편액은 널빤지나 종이 또는 비단 등에 글씨를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건다. 편액에 쓰이는 글자는 대부분 한자로 쓰여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가지 글씨체가 다양하다. 또 요즈음은 한글로 된 편액을 걸기도 한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전각이나 건물에 걸린 편액의 글씨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매우 많다. 이는 당시의 명필에게 글을 부탁하여 귀중하게 얻어 서각을 하거나 액자화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주요 사찰의 전각이나 누.정 등에 걸린 편액 가운데는 주련과 함께 서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들이 되는 것이 많다. 또 이들 편액은 사찰의 사적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경우도 많다. 《한국 사찰의 주련》(권영한.전원문화사)
지리산 화엄사 인조 14년(1636)- 의창군 李珖 書 - ※ 편액에 글쓴이의 이름이 들어간 효시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 1589~1645)은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의 여덟번째 서자로 호를 기천(杞泉)이라 했으며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편액에는 “숭정구년 세사병자중추 의창군 광서 (崇禎九年 歲舍丙資仲秋 義昌君 珖書)라는 관지가 있어 의창군이 1636년에 쓴 글씨임을 알수있다.
지리산 화엄사 대웅전 - 의창군 珖 書(1589~1645) - 의창군은 글씨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 중에서도 부친인 선조가 즐겨 썼다고 하는 석봉 한호(石峯韓濩)체의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 대자(大字)에 뛰어 났다고 한다, 그가 쓴 사찰 편액으로는 구례 화엄사<대웅전><지리산 화엄사> 전주 송광사<대웅전> 편액등이 전하며, 이 외에도 전에 결렸던 수덕사<대웅전>편액이 그의 글씨였다.
송광사 대웅전 전경 - 의창군 珖 書(1589~1645) - 그는 판서를 지낸 허성(許筬)의 딸과 혼인했는데 1618년(광해군 10년) 처족 허균(許筠)이모반죄로 주살되자 그에 연루돼 훈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는 비운을 겪었다,그러나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인조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의창군 이광의 친필편액인 송광사 대웅전 현판 (송광사 대웅전 한석봉체 닮은 조선중기작품) 전주 송광사 <대웅전>편액은 좁은 변죽에 세로 열개의 쪽판을 이어 붙이고 액판에도 문양을 넣어 장식한 보기드문 형식을 취했다. 액판 좌측에는 의창군 광서(義昌君 珖書)라는 붉은색과 흰색의 관지가 있다. 편액의 글씨는 결구가 건경(健勁)하고 운필이 청수(淸秀)한 해서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글씨이다.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형조참판 성암 省菴 李震休 (1657~1710) 숙종 29년(1703)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백기(伯起), 호는 성재(省齋)·성암(省菴).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이수광은 그의 문장(文章)이 당대에서 필적할 자가 없다고 찬양했다고 한다.
도솔산 선운사 정와 - 원교 이광사 書(圓嶠 李匡師 : 1705~1777) -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서,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이다. 해서 초서 전서 예서에 두루 뛰어났고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 인물 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화풍을 이루었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書 (1705~1777) -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서,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이다.
강진 백련사 만경루 -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書 (1705~1777) -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서,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이다.
지리산 천은사 - 원교 이광사書 (1705~1777) -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서,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이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대웅보전 - 원교 이광사 書 (1705~1777) - 동국진체로 조선 서체의 맥을 가르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침계루 - 원교 이광사 書 (1705~1777) - ‘계곡을 베개 삼은 누각’ 이라는 이름의 침계루(枕溪樓). 큰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세상의 온갖 티끌 쓸어버리듯 한 숨에 휘둘렀다. 침(枕)자를 쓰고 호방한 기운을 이어 계(溪)자를 쓴다. 삼수변의 점 하나 먼저 찍고 붓을 살짝 들어 다음 점으로 연결하면서 큰 파도가 몰아치듯 단숨에 계자를 써 내려가고는 숨을 멈추는 듯 마는 듯 마지막 점을 가다가 중간을 약간 휘어서 앉혔다. 마지막 루(樓)자 에서는 그야말로 면면부절(綿綿不絶) 휘휘 내둘러 획과 획 사이의 공간을 혹은 좁게 혹은 넓게 교묘하게 어울려 가면서 마음따라 움직이는 붓 놀림이 방일하고 호쾌하다. 특히 계집녀(女)의 마지막 획을 휘둘러 왼편 변의 나무목(木)까지 휘감아 끝 맺음을 한 것은 가히 놀랍다. 세상의 일상적 개념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듯 파격적이며 호방한 기운이 하늘까지 닿을 듯한 대범 독특한 결구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하나도 어색하지 않는 장법에 놀라울 뿐이다.
영암 월출산 도갑사 일주문 (덕해문 - 국중제일선종대찰)
강진월출산 무위사 사천왕문
강진월출산 무위사 극락보전
순천 개운산 동화사 봉황문 편액 秋堂
조계산 조계총림 송광사 승보종찰조계총림 일중 김충현(1921~ ) 일중 김충현은 대학강사, 교육기관 이사장, 서예단체장, 예술원 회원 등으로 활약하면서 한문서예와 한글서예의 일가를 이룬 서예가이다. 그는 일찍이 한글 쓰기에 관심을 두어 여건이 어려운 일제시기에 [우리글씨 쓰는법]이라는 궁체 쓰기에 대한 저서를 냈고, 궁체 쓰기 작품을 창작하였다. 궁체 작품활동과 더불어 국내 유명기념물의 글씨를 많이 써서 남기는 등 국내외에 그의 한글 궁체의 금석문이 많이 있다. 또 한편 한자 예서체 느낌의 판본체를 최초로 창안하여 보급하여 초중등 교과서의 모범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조계산 조계총림 송광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청나라에 가서 8년간 書畵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운달산 김룡사 일주문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상왕산 개심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정족산 전등사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 ~1933)- 본관:남평(南平). 자:용삼(容三), 호: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익산 함라산 숭림사
영광 모악산 불갑사 일광당 -남재철書 -
여수 돌산도 향일암 -원광 경봉(1892~1982)書- 경남 밀양 태생이다. 속명은 김용국(金鏞國), 법명은 정석(靜錫), 경봉(鏡峰)은 법호며, 원광(圓光)은 시호다.스님은 한시와 필묵에도 뛰어나 많은 선화를 남겼으며, 특히 18세부터 85세까지 67년간 쓴 일지는 한국불교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수 영취산 흥국사 해동선관 ( 동치11년 1872 )
여수 영취산 흥국사 공북루 -이순신 친필 1593년 수군통도사 書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순천 조계산 태고총림 선암사 강선루 - 性堂 김돈희 書 ( 1871~1937)- 성당 선생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산 분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공숙(公叔). 호 성당(惺堂)이다. 어려서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배우다가 황정견(黃庭堅)의 행서(行書)를 배웠으며, 예서(隸書)에도 능하였다. 서화협회 회장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서법 연구기관인 상서회(尙書會)를 설치하여 후진 지도에 힘썼으며, 일제시대에 검사(檢事)를 거쳐 중추원(中樞院) 촉탁을 지냈다.
조계산 선암사 강선루 -石邦 尹用求(1853~1936)書- 석촌 윤용구(石村, 石邨 尹用求·1853∼1937) 는 문신·서화가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석촌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난죽(蘭竹)과 구양순(歐陽詢) 풍의 해서, 수경(瘦勁:가늘면서 힘찬)한 행서, 그리고 금석문(金石文)을 즐겨 썼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 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 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전라남도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 후면편액 고청량산해천사 - 楓觀散人 安宅熙 (1761년)書 - 전서로 쓴글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범종루 (秋水)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목인 전종주 (木人 全鍾柱)書 - 목인 전종주님 1951년 전남 여수 출생 호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조계산 선암사 해천당
조계산 선암사 원통전 대복전 ( 1801년 순조어필)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純祖, 1790~1834)의 어필이다. 해서(楷書)체로 붓글씨에 힘이 느껴진다. 원래 선암사 원통전에 모셔졌던 글씨로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의 세 개의 편액이 같이 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법당안 정면에 대복전만이 걸려있고 인(人)천(天)의 편액은 선암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조의 어필이 선암사에 걸려있는 이유는 정조가 후사가 없자 전국의 이름난 기도처에서 정성을 다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1788년 아교궁관(校宮官)을 선암사에 보내어 세자탄생의 기도를 당시의 고승 눌암스님과 해붕스님께 분부하게 되었고 이에 눌암스님은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은 대각암에서 각각 100일 기도를 하여 세자인 순조가 탄생하였다 한다. 이에 정조가 1796년에 금병풍·은향로·쌍용문가사·대복전편액 등을 하사하고 다시 순조가 즉위한 1801년에 순조의 친필인 인, 천 두 글자를 하사하여 대복전의 글과 함께 걸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인천대복전’의 의미는 이곳 원통전이 6도의 세계 중 상위 세계인 하늘과 인간 세상에 큰 복짓는 밭으로서 누구나 스스로 짓는 복만큼 스스로 거둔다는 뜻이다.
태고총림 선암사 호남제일선원 訥庵대사 (1752~1830) 庚申1800 書 눌암(訥庵) [조선후기] : 눌암(訥庵) 활동년대 : 조선후기 1조선 후기의 스님. 이름은 전(全)식활. 순천 율촌면 삼산리 사람이다. 1768년(영조 44) 17세에 순천 선암사에 출가했다. 묘향산 범왕봉에 있으면서 평안감사 윤사국(尹師國)의 귀의를 받았다. 1796년(정조 20) 국일도대선사 대각등계홍제존자라는 호를 받았다. 1797년 선암사(仙巖寺) 칠전에서 수행하는 선객들을 위해 열 두 가지의 절목(節目)을 작성하였다. 1830년(순조 30) 나이 79세, 법랍 62년으로 입적하셨다.
능가산 내소사 봉래루 歲在丁酉
능가산 내소사 요사
부안 능가산 개암사 대웅보전
방장산 천은사 -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1958~ ) 1998년書 - 전라도를 대표하시는 서예가담양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입문, 송곡 안규동 선생을 사사하고,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등 한국서예의 전통을 계승한 서예가로 잘 알려져 있다. 독창적 서체인 鶴亭體를 이뤄내는 등 한국 서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켜오고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천은사 회승당 -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書 (1770~1847) - 창암은 순조 30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글씨에만 몰두하여 평생을 곤궁하게 지낸 선비였다. 그는 어렸을 때 당대의 명필 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배웠으며 병중에도 하루에 천 자씩 썼다고 하는 이야기와 벼루를 세개 맞창내었고 천 자루의 붓을 몽그라뜨렸다는 일화(磨穿十硯 禿盡千毫)를 볼 때 그가 글씨에 매진하였던 정열은 상상을 초월하였던 것이다. 창암은 특히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고 전하는데 그리하여 거침없는 '창암체(流水體)'를 이루었다. 그것은 글씨이면서 그림이고 동시에 붓으로 추는 춤(筆舞)이었다고 한다. 뱀 같은 미물도 놀랄 지경의 神筆이라고 한다. 그래서 立春榜에 '李三晩'이라고 써서 문지방 아래 거꾸로 붙였다고도 한다. 그러면 뱀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정읍의 說話가 되었는데 뱀에 대한 이야기와 약방의 物目記로 인해 중국에 까지 알려진 이야기와 부채장수가 잠든 사이 부채에 몇자 적었더니 이삼만 글씨라 하여 모두 팔린 이야기와 양반집 墓碑文의 墨痕이 지워지지 않던 이야기 등 많기도 한데 그만큼 그의 글씨는 유명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전주를 중심으로 호남에서는 이삼만 글씨의 애호가들이 많고 또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는 學童들에게 體本으로 글씨를 써서 나누어 주었을 뿐아니라 원하는 知人들마다 선선히 글씨를 써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돈을 받고 써주진 않았다고 한다.
전남 구례 방장산 천은사 수홍루 -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書 (1873~1943) - 전라남도 화순 동북면 사평리 출신
전남 구례 방장산 천은사 수홍루 -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書 (1873~1943) - 염재는 구한말에 태어나 동몽진사에 합격하여 최연소로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시작(詩作)경연이 있을 때는 맡아 놓고 장원을 하였으며, 임금께 상소문을 올릴 때나 글을 짓고 쓰는 일은 염재의 몫이었다.
전남 구례 방장산 천은사 설선당 -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書 (1873~1943) - 구한말 염재는 책을 덮어 버리고 붓과 벼루를 벗삼아 아픈 심경을 달래기 위하여 낙향. 주로 고창지역에서 활동,특히 고창고보에서 한문과 서예를 가르치면서 민족정신을 일깨운 선각자이다.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장경각 - 염재 송태회書 (1873~1943) - 편액으로 고창 문수사.고흥 능가사. 월출산 도갑사.조계산 선암사 장경각.방장산 천은사 있다.
전남 영암 월충산 도갑사 해탈문 -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書 (1873~1943) -
영암 월출산 도갑사 해탈문 - 염재 송태회 書(1873~1943) -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1873∼1943)는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서화가이다. 그는 일찍이 송사호(宋沙湖)에게 글씨를 배웠고, 글씨는 물론 사군자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후에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입선을 하기도 했다.
영암 월출산 도갑사 편액 -염재 송태회書 (1873~1943 ) - 영암 도갑사 해탈문 앞쪽에 걸린 <월출산도갑사> 편액에는 두인과 ‘송태회인(宋泰會印)’, ‘염재(念齋)’라는 방인 도서 2과가 있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이 해탈문은 1473년 중건된 것으로, 1960년 해체 보수시 중도리 밑에서 발견된 묵서(墨書) 상량문(上梁門)을 통해 건립 연대가 확인되었다. 이 편액은 그가 많은 활동을 했던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지금은 없어진 <대웅보전> 편액과 함께 써서 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송(宋) 황정견(黃庭堅) 풍의 수일(秀逸)한 서미(書味)가 엿보이는 글씨이다.
전남 고흥 팔영산 능가사 대웅전 -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書 (1873~1943) - 염재의 글씨는 영암 도갑사 <월출산도갑사>, 장성 백양사 <청운당>, 순천 선암사 <장경각>, 순천 송광사 <향수원>, 구례 천은사 <설선당>, <수홍루> 편액 등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찰에 특히 많이 남아있다. 이는 그의 서화 활동 지역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불우(佛宇)에 글씨를 많이 남긴 것과 함께, 1900년에 성용(成鏞)이 쓴 안양 삼막사 <망해루> 편액에 염재의 부탁으로 글씨를 썼다는 부기(附記)가 보이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가 불교와도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남 고흥 팔영산 능가사 대웅전 편액 -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書 (1873~194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