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위 참된 교회, 시련 이기고 복음의 꽃 피워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한국가톨릭교회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73권이나 되는 신·구약 성경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면서 이 일들을 증언하고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복음서를 썼다(요한 21,24 참조)고 고백한다. | ▲ 사도 베드로 |
베드로 위에 세워진 참된 교회 가톨릭교회의 시작은 ‘예수는 그리스도(구세주)이시다’는 신앙 고백에서 출발한다. 이 교회는 인류 가운데 첫 번째로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기초로 그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직접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하며 사목권을 주셨다. 아울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참조)고 세 번씩이나 당부하며 수위권을 주신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맡겨진 교회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지는 신앙과 사랑의 일치를 간직한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참된 교회’(폴리카르포 교부 고백)로 이해되는 가톨릭교회는 그래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 50일 되는 날 성령강림을 통해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증언하면서 교회는 시작됐다(사도 2장).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땅끝까지 가서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선포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안티오키아인들은 ‘온 인류를 위한 구원과 신앙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아 가장 먼저 교회를 ‘보편적’ 즉 ‘가톨릭’이라 고백했다. | ▲ 가톨릭교회 시대별 주요 역사 |
박해와 신앙자유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탄생부터 박해를 받았다. 급속한 교세 성장으로 정치적 불안감을 느낀 로마 제국 황제들은 200여 년간 신자들을 잡아다 십자가형에 처하고 맹수들의 먹이로, 검투사의 놀잇감으로 처형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테르툴리아누스)이 되어 마침내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됐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가톨릭을 국교로 선언했다. 박해를 딛고 이겨낸 교회에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정통과 이단 사이의 격렬한 교리 논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주요 쟁점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 인간 구원에 대한 문제였다. 가톨릭교회는 사도단의 전통에 따라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련의 공의회를 개최,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교리를 정립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미사 때 신앙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신경’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믿을 교리 12가지를 나열한 이 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 구원을 위해 강생하시어 수난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과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과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중세교회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유럽의 새 주인으로 게르만 민족이 등장하면서 유럽은 중세 시기로 접어든다. 이 시기에 교회는 성 베네딕도회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한 신앙 위에 일치된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새 기원을 열었다. 교황청과 프랑크왕국이 융합해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을 창설한 가톨릭교회는 8세기 성화상논쟁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적 충돌로 1054년 동방교회와 완전히 결별했다. 이후 교회는 클뤼니수도회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교회 쇄신운동으로 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키고 평신도 영성 강화에 영향을 미쳐 11세기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을 일으켰다. 청빈운동은 교회의 쇄신을 불러일으켰지만 극단적 근본주의와 이단으로 변질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종교재판이 생겨났고,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가 생겨나 이단자 개종과 선교활동에 힘썼다. 교회분열과 쇄신운동 14~15세기 교황의 아비뇽 유배와 서구대이교로 인한 교황권 약화로 공의회 우위설이 확산됐고,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신심에 치중돼 개혁의 요구가 확산됐다. 그 결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되는 시대(1500~1650년)가 왔다. 이 시대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자극받아 1545년 12월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돼 교회를 재정비하고 종교개혁 바람을 수습했으며, 예수회와 맨발의 가르멜회가 설립돼 ‘밖으로의 개혁이 아니라 안으로의 쇄신’을 이끌었다. 또 신대륙 발견으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예수회가 중심이 되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의 선교활동을 펼쳐 가톨릭교회가 동서양에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됐다. 근대와 현대교회 17세기 후반 유럽에 몰아닥친 국가지상주의와 경건주의, 엄격주의를 내세운 얀세니즘 이단,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종교 보편주의 확산, 프랑스대혁명,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사회주의운동으로 강력한 도전을 받은 교회는 제1차 바티칸공의회와 노동헌장이라 불리는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반포로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20세기 들어 가톨릭교회 안에 전례쇄신과 교회일치운동, 평신도 운동 등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교회 내적 개혁과 외적 대화와 개방을 통한 쇄신을 도모했다. 그 역사적 사건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다. 가톨릭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며 자신을 쇄신했으며, 갈라진 형제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비그리스도교 종교와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 새로운 교회법(1983년)과 「가톨릭교회교리서」(1992년)를 탄생시켰다. 한국가톨릭교회사 한국가톨릭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서적을 통한 교리 연구로 신앙을 받아들인 전세계 유일무이한 교회이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베드로)이 이벽을 비롯한 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교회가 탄생했다.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 신자들은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라 여겨 거부하고, 신분제도를 무시, 양반과 천민까지 함께 어울리자 곧바로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4차례 대박해를 거치면서 1만여 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교회는 1831년 조선교구가, 1962년 교계제도 설정되면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아시아 대륙 복음 선교의 몫을 한국교회에 맡긴다’는 사명을 받은 한국교회는 내적으로는 토착화와 쇄신을 통해, 외적으로는 인적ㆍ물적 나눔을 통해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고 있다. 한국가톨릭교회는 2013년 12월 말 현재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16개 교구에 신자 544만 2996명으로 인구 대비 10.4%의 교세를 이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