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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목록>
(1) 나너이즘 주석질 1. 큰장사꾼/작은장사꾼
(2) 나너이즘 주석질 2. 나너이즘 간지럽히기
(3) 나너이즘 주석질3. 나너 할배에 대한 예의(fellowship論)
일주일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연재란 연속성이 있어야 하는데 워낙 먹고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여의치 않네요.
오늘의 문체는 거칠고 산만할 것입니다.
최근의 사회상에 대한 심경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감성은 이성을 고양시키고 이성은 감성을 고양시킵니다. 이것이 반복되는 횟수에 따라서 고매한 인격이 다듬어집니다.
이 인격은 사회와 긴밀한 끈으로 이어지는데 사회의 아픔을 지나치게 아파하는 사람들은 작가와 지식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이렇게 '앓이'를 하는 지식인들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나너이즘의 주창자인 나너너나 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주석질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주석질은 '나너너나'님의 기본 사상이지만 본질적으로 '나' 스스로에 대한 주석질입니다.
독서를 하다 보면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에서 '나 오(吾)'를 쓰지 않고 '我'를 쓴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나너너나 님 아이디의 비밀도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我는 보편적인 의미의 '나'이며, 吾는 이와는 반대로 개별적인 의미의 '나'입니다. 나너너나에서 '나'가 두 번 들어가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나'를 읽는다고 할 때의 '나'란 물론 '我'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너이기도 하고 우리이기도 합니다.
나는 나너너나 님의 추종자가 아니라 나너너나 사상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주석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향신문 2006년 4월 11일자 만평입니다.
나너너나 할배를 정몽구 같은 노인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실례일 수 있지만 양해 바랍니다.
현대기아차 그룹의 정몽구 회장은 비자금 혐의로 2006년 구소 수감돼 짧게나마 '수의'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만평에서 보듯이 현대차의 구심점은 정몽구 회장 한명이기 때문에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현대차 관계자가 “해외 대형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정회장이 주도해왔다”라고 언급하는 부분이나 "구심점을 찾지 못해 일정기간 경영공백은 불가피해 보인다." 등의 분석이 많았습니다. 현대기아차는 대기업 가운데서도 구식이기 때문에 그 흔한 의사구조의 분산조차도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현대기아차를 예로 든 이유는 fellowship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리더십(leadership)에 의존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근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주석질 1편에서 언급했던 새로운 인간형이 아니라 구식 인간형의 잔재입니다.
<난세에 답하다>(알마)라는 책을 쓴 국내 유일의 현역 사마천 연구가인 김영수 씨는 fellowship의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권력에의 의지가 강하고 권력자가 어떻게 해주기를 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의존적 성격이 정치에 대한 환멸을 낳았고 군인이나 기업가 등 좀 신선하다 싶은 소재를 자꾸 찾습니다. 싫증을 잘 내는 것이 리더십 신봉 국민들의 특징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도 이러한 근성에 기인합니다.
자율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일하기는 쉬워도 설득하기가 무지 어렵다. 올바른 길이 아니라면 제아무리 설득을 해도 결코 설득되지 않는다.... (반면에) 작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일하기는 어려워도 납득시키기는 쉽다. 비록 올바른 길이 아니더라도(편법이라도) 설득을 잘하면 납득한다.... (공자, <논어> 자로편)(번역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사계절)를 따랐습니다)
子曰: 「君子易事而難說也: 說之不以道, 不說也; 及其使人也, 器之. 小人難事而易說也: 說之雖不以道, 說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
공자가 우리들의 특징을 잘 간파했습니다. 사마천이 시대의 표상으로 내세우고자 한 대표적인 철학은 바로 fellowship이었습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포숙아입니다. 관포지교에 나오는 포숙아가 맞습니다. 왕위를 다투는 공자를 보위하다가 왕위다툼에서 관중이 따르던 공자가 패배해 처형당하자 환공은 관중마저 죽이려고 하자 포숙아는 "공께서 제나라 같은 한 개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저 하나만으로도 소용이 되겠지만, 천하를 제패하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관중을 발탁하셔야 합니다." 포숙아는 관중의 목숨을 건져주었을 뿐만 아니라 관중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항상 관중의 2인자 역할을 하면서 보필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관중은 부모님 못지 않게 포숙아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숙아의 펠로십을 나너이즘 주석질에 데려온다면 아고라정의포럼 회원들 개개인이 각자 해야 할 역할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와 그의 추종자로 이루어진 집단은 지나친 가분수이기 때문에 멸망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를 상대하는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간편한 상대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의 정신적 지분을 나눠 가지고 있다면 상당히 강력한 조직이 됩니다. 공자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72명의 현인이 있었고, 10명의 수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3단계에 걸친 펠로십이 형성된 것입니다. 공자가 죽어서도 그의 사상이 백면서생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펠로십' 때문입니다.
언론환경은 최악으로 달했습니다. 우리가 만들려는 '성(城)'은 정권의 아주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게 될 것입니다. 많은 출혈이 예상되는 위험한 진로가 예상됩니다. 그래서 좀 쎈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이명박만큼 집요하지 않으면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므로 독해지셔야 합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 기원전 554-548) 때의 일입니다. 실권을 장악한 집정대부(執政大夫) 최저(崔杼)는 군주를 시해하기에 이릅니다. 서슬퍼런 시절에 이에 대해서 감히 언급할 수 없었던 상황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춘추좌전> 노양공 편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하면
이때 태사(太史)가 죽간(竹簡)에 이같이 썼다.
"최저가 그의 군주를 시해했다."
그러자 최저가 태사를 죽였다. 태사의 아우 중 두 사람이 계속해 이 같이 기록하다가 연이어 죽음을 당했다. 태사의 또 다른 아우가 또 그렇게 기록하자 최저는 더 이상 죽일 수 없었다. 남사씨(南史氏 : 나라 밖에 있던 제나라 사관)가 태사의 형제들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간을 가지고 갔다가, 이미 사실대로 기록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내 돌아갔다. - 춘추좌전2(한길사) 노양공 편, 317쪽
최저의 서슬퍼런 칼 앞에서도 정사를 남기기 위해 글자를 고치지 않은 사관의 정론직필이 위대하지만 최저가 어쩌지 못하게 하는 집요함과 펠로십은 이 대목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나너너나 님이 직접 남긴 글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뮬라크르 얘기를 처음에 했던 건...
아고라의 정신에 충실한 사람들이 모인
이 공간에서 얻은 지식과 기술들만 있으면
더 이상 영웅화, 신격화 되는 미네르바는 필요없으며
나아가 모두가 미네르바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취지에서.......
시뮬라크르들이 역설적이게도
시뮬라크르의 정체성과 본질을 찾아가길 바랬던거야.
- 나너너나 아고라 경방의 글 "시뮬라크르의 역설적인 정체성과 본질"
나너너나 님의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영웅화나 신격화를 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고 서로 연대하자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습니다. 카페의 글들을 보면서 '천민'이라는 말을 만날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천민'이라는 뉘앙스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시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고라정의포럼에 가입했다면 분명히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천민이라는 단어에 자기 자신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악의 경우 나너 님이 가고 백면서생도 가고 운영진들도 가겠지만, 누군가는 남아서 진지를 지켜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가치는 바로 펠로십입니다.
현대사회가 펠로십의 시대인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노사모라는 단체는 펠로십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당시 정몽준 의원이 단일후보 파기 선언을 했을 때 노사모 회원들은 밤새 전국을 돌며 조선일보를 수거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리더십이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역시 펠로십의 승리입니다. 어느 국가를 가든 진보진영은 좀처럼 정권을 얻기 어려우며 진보진영이 정권을 얻은 나라는 분명히 그들만의 펠로십 전략이 갖춰져 있습니다.
작년 촛불이 타오른 것도 리더십이 아니라 펠로십의 작용이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주변을 보면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 극우세력의 펠로십이 그 반대진영을 훨씬 능가합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이나 공정언론시민연대(약어 공언련) 같은 곳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위하기 위해서 펠로십을 발휘합니다. 조중동 간에도 펠로십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헐뜯으며 시장의 절대 강자가 되고자 하지만 하나로 모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섭게 단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역시 리더십이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최근 관계사를 살펴보신 분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익을 위한 펠로십일 뿐입니다.
정의를 위한 펠로십의 전형은 세계아고라정의포럼에서 만들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막으로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스또옙스끼)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김수환 추기경 돌아가셨을 때 이것과 관련해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돌멩이맞을까봐 참았던 글입니다. 저는 죽은 추기경을 만나기 위해 명동길을 가득 채운 행렬을 보았을 때 마치 전체주의의 전조를 보는 듯해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날이 밝아 오자 몇몇 사람들이 읍내에서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집안의 환자,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심으로 인해 얼른 치유의 신통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일부러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
수도사들 중에서 흥분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빠이시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는 그토록 성급한 기대는 경솔한 것이며, 세인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우리들한테는 온당치 못한 처사요>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며 빠이시 신부도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그 사실에 주목했다. ...
동이 트기 전에 매장 준비를 마친 장로의 시신을 입관시켜서 관을 전에 응접실로 쓰던 첫번째 방에 옮겨놓았을 때, 관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는 방안의 창문을 열어 놓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로 슬쩍 내비쳤던 이 문제는 대꾸하는 사람도,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다. 혹시 참석자들 중 몇몇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마음속으로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그것은 고인의 시신이 부패하거나 썩는 냄새가 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난센스이자, 그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절대적으로 부족한 신앙심과 경솔함은 동정받아 마땅하다는(그것이 만일 냉소가 아니라면) 의미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정반대의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오가 지나자마자 어떤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채면서도 입을 다문 채 혼자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을 뿐 두려워하면서 다른 누구에게도 자기 생각을 내비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 세 시경에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났으므로 현장의 소식은 암자 전체와 암자를 찾아온 수많은 수도사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고, 이어서 수도원에 전해져 모든 수도사들을 충격에 빠뜨렸으며, 결국 읍내에까지 알려진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모든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몹시 기뻐했으며, 신자라 하더라도 신자가 아닌 사람들 이상으로 기뻐하는 자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고인이 된 장로가 그의 유훈 중에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의인의 타락과 그의 수치를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중략)
물론 보다 중요한 것은 생전부터 확고하게 자리잡은 고인의 신성함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는데, 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금기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왜냐하면 고인이 된 장로가 기적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고, 자기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든 비공개적으로든 과격했던 장로의 적들은 수도원 내부뿐만 아니라 속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장로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으나, ,어째서 그 사람이 성인 대접을 받은 거요?>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질문 하나가 점차 반복되어 가면서 마침내 채울 길 없는 증오심의 구렁텅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장로의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풍긴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빨리(장로가 죽은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므로) 끝없이 기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까라마조프가 형제들 일부)
<펠로십을 위한 캠페인 "책은 미래를 여는 문이다">
펠로십을 위한 실천방향을 마련하기 위해 책 목록을 작성하려고 합니다.
책은 미래를 여는 문입니다. 제가 미래의 비전을 장님 문고리 잡듯 만지작거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나름대로 독서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펠로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독서력이 받쳐줘야 합니다.
일단 나너이즘 주석질에 소용된 책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해서 읽을 필요가 있는 책들로 목록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언론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화두를 던져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완결짓는 것은 책으로 단련된 철학입니다.
하나의 책을 열고 주석질을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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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 나너님께서 짊어진 짐이 점점 무거워져 보입니다. 우리 모두 끝까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철푸덕입니다!!!!
잘읽고가요.. 고맙습니다.
보편적 아(我) 자와 개인적 오(吾) 자의 차이를 잘 배웠습니다. - 아차, 연재글 중 1번 글을 연결하는 주소(Link)가 변경되어 있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덧붙입니다. 1번 글이 [우리들 토론] 방으로 옯겨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번 글을 연결하는 주소는 [ http://cafe.daum.net/naneoneonaism/K3jX/66 ]입니다. 2번 글과 3번 글에서 1번 글을 연결하는 주소(Link)를 수정하셔야 할 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백면서생님.
감사합니다. 항상 제가 흘린 것을 바로잡아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꾸벅~~
잘 읽고 배웠습니다. 꾸~우벅... 내공이 무척 깊으십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매일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이글을 읽고 어깨에 벽돌하나 올리고 가는 기분입니다...(부담을 안고 간다는 말과는 다르다는걸..다 아실테지만 덧붙입니다;)...잘 배우고 갑니다..
예전에 본 영화 '은밀한 유혹'에서 나온 대사가 떠오르네요.. 건축학을 강의하던 주인공이 학생들에게 여러 멋진 건물의 슬라이드를 보여주다가 벽돌 한 장을 들어올리며 하던 말이었지요.. 영화 속에서 전혀 중요한 장면은 아니었고, 영화의 내용도 사실 가물가물한데 이 하나의 대사가 가슴에 꽂혀 오랫동안 가슴에 남네요.. "even a brick wants to be something special...." 하나의 벽돌일 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벽돌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은 건축물이죠... 멋 없는 돼지우리보다는 이왕이면 아름다운 건축물이 되기를 벽돌도 원하겠지요... 펠로우십 가슴에 담아두겠습니다.. 누군가는 남아서 이 공간을 이어가야 한다는 님의 가르침..
정의를 위한 펠로우십의 전형을 세우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내공을 쌓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책으로 단련된 철학이라는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던 미네르바 십만양병설을 이루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래봅니다.. 십 만의 미네르바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힘이라면 대한민국을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해보는 밤 입니다... 이 곳에 스승이 많아서 행복하네요..ㅎㅎㅎ
여긴 왜 이렇게 좋은글이 많은 것이야!!!~ ^^
백면서생님 글 찬찬히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님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요?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추천하신 도서목록 좀 어렵고... 그래도 읽어야 할것 같은 의무감이 듭니다. 님의 글 넘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짝짝~~~~~~~~~~
이런 글을 읽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