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에 범거경(范巨卿)이라는 선비가 있어 낙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다가 돌림병에 걸려
여관에서 쓰러졌으나 아무도 무서워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마침 함께 투숙한 선비 장소(張昭)가
용감하게 나서 약을 지어주고 미음을 먹이는 등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병구완을 하여 10여일
만에 쾌차하였지만 두사람 다 과거날짜를 놓치고 말았다.
범거경은 너무나 미안하여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탄식했는데, 장소는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며 오히려 위로하니 두사람은 금방 가까워져 의형제를 맺기에 이르렀다.
나이가 몇살 많은 범거경이 형이 되고 장소는 아우가 되어 얼마동안 낙양을 유랑하며 참으로
의리와 인정이 넘치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과거를 그르치고 허송세월만 할 수 없어 범거경은 초주(楚州)로 장소는 여주(汝州)로
천리간의 거리를 둔 채 아쉽게 작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석별의 자리에서 범거경은
"내년 오늘 내가 여주로 가서 어머님께 인사 드리겠네" 하고 말했고, 장소는 " 그러면 저는 닭을
잡고 기장으로 밥을 지어놓고 형님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범거경은 처자식의 부양을 위해 고된 장사를 해야했고 힘들게 지내다보니
세월가는 줄도 모르고 1년이 흘렀고 약속한 날짜인 중양절(9월9일) 아침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땅을 치며 탄식할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람 걸음은 느리지만 혼백은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말이 언뜻 생각나 망설일 겨를도 없이 스스로 자기 목을 베어 한 줄기
혼이 되어 급히 여주로 날아갔다.
한편 장소는 오래전부터 살찐 닭을 고르고 좋은 술 한 단지를 빚어놓았으며, 당일 아침에는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꽃병에 국화를 꽂고 어머니께 맛있는 기장밥을 지어
달라고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장소는 새 의관을 갖추고 마을어귀로 나가 엄숙한 태도로 손님을
기다렸다. 가을 하늘은 높고 공기는 상쾌했으며 만리에 구름 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이 되어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고 3경(밤12시)이
되자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데, 장소는 취한 사람처럼 대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 때 홀연히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바람과 함께 마을길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장소는 자세히
보고 범거경이라는 걸 확신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 넙죽 절을 했다.
한쪽은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귀신이어서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장소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범거경은 <닭과 기장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영혼이 되어 하루
만에 천리길을 달려와 장소의 믿음과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귀신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그는 실로 천지간에 가장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 이 이야기는 중국소설가 리루이(李銳)가 쓴 소설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에 나오는 것인데
鷄黍之約이라는 것이 고사성어인가 하여 국어사전과 중국어사전을 다 들춰봐도 없다.
아마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일부를 소설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 서(黍)는 모르는 글자라 옥편을 찾아 보았는데 '기장 서'라고 나온다. 禾部 7획
기장과 조를 합하여 한자어로 黍粟(서속: 기장서, 조속)이라고 하는데 어릴적 엄마가
'서숙'이라고 말씀하시던 것이 바로 이 단어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첫댓글 옛 중국인들은 약속과 우정을 중히 여겼는데 최근 중국의 행보는 좀 다른 느낌
뜨뜨미지근보다 대국, 앞으로 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하기위해 여러먼에서 접근방법을 좀 다르게 할 수는 없을까하는 아쉬운 맘을 가져본다.
범거경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현실에 주어지는 무게와 같을까.
백년 못살며 천년걱정하는게 우리네 인생이라고, 어쩌면 혼이되어 약속을 지킨 범거경이 훌륭하기도 하지만 좀더 여유를 가지고 미리 살핀다면 살아 지킬 약속아닐까
감명 깊은 이야기네! 나도 그 책 함 봤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