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 분 |
용 어 |
비 고 |
빠알리어 |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
|
전재성박사 |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 |
|
각묵스님 |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 |
|
일아스님 |
여덟 가지의 거룩한 길 |
|
영역 |
the Noble Eightfold Path |
빠알리 ‘ariyo’는 ‘성스럽다’는 뜻이고, ‘aṭṭhaṅgiko’는 ‘여덟’, ‘magg’o는 ‘길 또는 도’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여덟가지 성스런 길이라는 뜻이 된다.
반면 각묵스님의 경우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라 하여 괄호를 포함하여 무려 28글자에 달한다. 그런데 빠알리 원어에 보이지 않는 용어가 많이 쓰여 있다는 사실이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라는 말과 ‘성스런 진리’라는 말이 그렇다. 이들 용어의 결합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ariyo aṭṭhaṅgiko maggo)의 뜻풀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한 번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라고 언급하였다. 그래서 직역이 아니라 ‘의역’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도닦음’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말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로서 각묵스님이 만든 ‘신조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이나 ‘여덟 가지의 거룩한 길’은 원어에 잘 들어 맞는다. 영어로도 ‘the Noble Eightfold Path’라 하여 원어의 뜻을 잘 살리고 있다.
설명문식 번역어
빠알리 원문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보았다.
구 분 |
용 어 |
비 고 |
빠알리어 |
katamo ca bhikkhave,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īdaṃ: |
|
전재성박사 |
수행승들이여,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
|
각묵스님 |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
해설식 이중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음 |
일아스님 |
그대들에게 '여덟 가지의 거룩한 길인가? 그것은 |
|
영역 |
“Monks, I will tell the Noble Eightfold Path and detail it, |
각묵스님의 경우 ‘katamo ca bhikkhave,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īdaṃ’에 대하여 문답식으로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라 하였다.
이는 불필요한 이중 번역에 지나지 않는다. 빠알리 ‘seyyathīdaṃ’은 우리말로 ‘그것은, 이와 같이, 즉’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단지 ‘그것은’ 이라고 하면 될 것을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라 하여 사성제의 도성제를 설명한 듯한 번역이다. 이와 같은 이중 번역은 원문과 무관한 주석식 번역 또는 해설식 번역으로 보여 진다.
한자어를 병기한 번역어
8정도의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에 대한 용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견 |
정사유 |
정어 |
정업 |
빠알리어 |
sammādiṭṭhi (삼마딧티) |
sammāsaṅkappo (삼마산깝뽀) |
Sammāvācā (삼마와짜) |
Sammākammanto |
전재성박사 |
올바른 견해 |
올바른 사유 |
올바른 언어 |
올바른 행위 |
각묵스님 |
바른 견해[正見] |
바른 사유[正思惟] |
바른 말[正語] |
바른 행위[正業] |
일아스님 |
바른 견해 |
바른 생각 |
바른 말 |
바른 행동 |
영역 |
right view |
right thought |
right speech |
right action |
빠알리 삼마(sammā)에 대하여 전박사는 ‘올바른’이라고 하였고, 각묵스님과 일아스님은 ‘바른’ 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올바른’과 ‘바른’의 차이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올바르다’라는 말은 ‘옳고 바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반면 ‘바르다’라는 말은 제1의 뜻이 ‘표면에 고루 묻히다’라는 뜻이고, 제2 뜻이 ‘언행이 규범이나 도리에 맞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삼마(sammā)’의 번역어는 ‘올바른’이라는 뜻이 정확하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전재성박사의 번역어가 가장 정확하다.
한편 각묵스님은 번역어에 한자어를 병기하였다. 우리말 번역어에다 대괄호를 이용하여 한자어를 집어 넣은 것이다. 정견의 경우 ‘바른 견해[正見]’라 하였는데, 이와 같은 방식은 장단점이 있다. 우리말 번역어에 한자어를 병기함으로서 다시 한번 설명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번거롭게 보인다. 마치 한글 번역어의 의미가 잘 전달 되지 않아 중언부언 하듯이 보여지기도 한다.
사띠 번역어, 새김과 마음챙김
8정도의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에 대한 용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명 |
정정진 |
정념 |
정정 |
빠알리어 |
Sammāājīvo (삼마아지워) |
Sammāvāyāmo (삼마와야모) |
Sammāsati (삼마사띠) |
Sammāsamādhi (삼마사미디) |
전재성박사 |
올바른 생활 |
올바른 정진 |
올바른 새김 |
올바른 집중 |
각묵스님 |
바른 생계[正命] |
바른 정진[正精進] |
바른 마음챙김[正念] |
바른 삼매[正定] |
일아스님 |
바른 생활수단 |
바른 정진 |
바른 마음챙김 |
바른 |
영역 |
right livelihood |
right endeavor |
right mindfulness |
right concentration |
위 번역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삼마사띠(Sammāsati)이다. 사띠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 하였고,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으로 번역 하였다. 그렇다면 원어에 가까운 번역어는 어느 것일까.
전재성박사는 니까야 해제에서 사띠 번역어 대하여 설명하였다. 기본적으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실라경(S45.1.3)에 있는 ‘anussarati anuvitakketi’가 사띠의 뜻을 가장 잘 표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의 뜻이라 한다. 그래서 그 둘 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 말 ‘새김’이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한 각묵스님에 따르면, 마음챙김이란 ‘마음이 대상’을 챙김으로 정의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번역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그것은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사띠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빠알리어 사띠가 기억이라는 의미가 가장 큰데, 번역어 마음챙김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 사띠라는 말에 ‘마음’이라는 어원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챙긴다’는 것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에서 수행법인 ‘화두를 챙긴다’에서 ‘챙김’이라는 말을 따와가지고 ‘마음챙김’이라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둑카니로다가미니야 빠띠빠다야(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다음으로 팔정도의 각 용어에 대한 정형구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견정형구이다.
구 분 |
정견 정형구 |
빠알리어 |
Yaṃ kho bhikkhave, dukkhe ñāṇaṃ dukkhasamudaye ñāṇaṃ dukkhanirodhe 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ñāṇ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
전재성 |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 |
각묵 |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
일아 |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근원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 는 것이다. |
영역 |
Monks knowledge of unpleasantness, its arising, its cessation and the path and method for its cessation is called right view. |
빠알리어 ‘둑케 냐낭(dukkhe ñāṇaṃ)’에 대하여 전박사는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괴로움에 대한 지혜’라고 하였다. 일아스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라 하여 전박사와 같은 번역임을 알 수 있다. 영역을 보면 ‘knowledge of unpleasantness’라 하였는데, 여기서 ‘knowledge’는 일반적으로 ‘지식’ 또는 ‘알고 있음’의 뜻으로 명사형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각묵스님의 번역과 유사하다.
다음으로 ‘둑카니로다가미니야 빠띠빠다야(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인데,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 하였다. 일아스님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 하여 전재성 박사와 같은 방식의 번역이다. 영역은 ‘the path and method for its cessation’라 하여 ‘the path’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길(道)’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빠띠빠다(paṭipadā)’에 대하여 ‘길’이라고 번역한 것은 ‘완성된 도’로 보여지고, ‘도닦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도닦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 보여진다.
아위힝사(avihiṃsā)
정사유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사유 정형구 |
빠알리어 |
nekkhammasaṅkappo avyāpādasaṃkappo, avihiṃsāsaṅkappo,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saṅkappo. |
전재성 |
출리하는 사유, 악의가 없는 사유, 상해가 없는 사유를 행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 |
각묵 |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
일아 |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생각,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을 말한다. |
영역 |
thoughts for giving up, non anger and not hurting are called right thoughts. |
정사유가 ‘출리’ ‘악의 없음’ ‘상해 없음’에 대한 사유를 말하는 것인데, 세 번째 ‘상해없음’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해코지 않음’이라 하고 괄호를 쳐서 ‘[不害]’라고 이중으로 설명하였다. 일아스님은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것으로 번역하였고, 영역은 ‘not hurting’이다.
빠알리어 아위힝사(avihiṃsā)는 ‘잔혹하지 않음’ ‘상해하지 않음’ ‘폭력을 여윔’ ‘불살생’ ‘자비’ 의 뜻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해코지 않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해코지 하다’라는 표현은 ‘정신적으로 괴롭히다’는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에 신체적 폭력이나 상처를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한자어 [不害]를 사용하여 보충설명식의 문구 ‘해코지 않음[不害]’이라고 번역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간질과 중상모략
정어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어 정형구 |
빠알리 |
musāvādā veramaṇī pisunāya vācāya veramaṇī pharusāya vācāya veramaṇī samphappalāpā veramaṇī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vācā. |
전재성 |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언어라고 한다. |
각묵 |
거짓말을 삼가고 중상모략을 삼가고 욕설을 삼가고 잡담을 삼가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
일아 |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악담 하지 않고, 잡담[쓸데없는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영역 |
words spoken abstaining from telling lies, slandering, rough unkind and frivolous words are called right words. |
한역의 불망어(不妄語), 불양구(不兩口),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에 대한 것이다.
망어와 관련하여 세 번역자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여 같은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구(pisunāya)와 관련하여 전박사는 ‘이간질’이라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중상모략’이라 하였다. 각묵스님이 중상모략이라고 보는 것은 한 입으로 두 말하기 때문이라 한다. 한자어 양구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 보여 진다. 일아스님은 전박사와 같이 이간질이라 번역하였고, 영역으로 ‘slandering’이라 하였다. Slandering은 ‘중상하다’ ‘명예를 훼손하다’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각묵스님의 번역어 중상모략은 영역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악구와 관련된 ‘파루사야(pharusāya)’의 경우 ‘거친’ ‘귀에 거슬리는’ ‘난폭한’ 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pharusāya 에 vācā가 붙으면 거친말, 욕, 악어라는 뜻이 된다. 전박사는 ‘욕지거리’로 번역하였고, 각묵스님 역시 욕설로 번역하여 같은 번역어임을 알 수 있다. 일아스님은 악담으로 번역하여 욕지거리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기어와 관련된 ‘삼팝빨라빠(samphappalāpā)’는 영어로 ‘frivolous’라는 뜻인데, 천박한, 하찮은, 사소한, 무의미한 이야기(senseless talk) 등으로 표현된다.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아첨하는 말’로 옮겼고, 각묵스님은 ‘잡담’으로, 일아스님은 ‘잡담[쓸데없는 말]’로 옮겼다. 영역은 ‘frivolous words’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각묵스님과 일아스님의 번역은 영역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ā)
정업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업 정형구 |
빠알리 |
yā kho bhikkhave,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adinnādānā veramaṇī abrahmacariyā veramaṇī,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kammanto. |
전재성 |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행위라고 한다. |
각묵 |
살생을 삼가고 도둑질을 삼가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
일아 |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영역 |
actions done refraining from destroying living things, taking the not given and misbehaving sexually are called right actions. |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불사음에 대한 빠알리 문구가 아브라흐마짜리야(abrahmacariyā)이다.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ā)는 일반적으로 ‘청정범행’을 뜻하기 때문에 아브라흐마짜리야(abrahmacariyā)는 청정하지 못한 삶을 의미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전박사의 번역어 ‘청정하지 못한 삶’이라는 말은 원어를 직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각묵스님과 일아스님은 공통적으로 ‘삿된음행’이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영역 ‘behaving sexually’와 같은 뜻이라 보여 진다.
지위까(jīvika)는
정명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명 정형구 |
빠알리 |
idha bhikkhave, ariyasāvako micchāājīvaṃ pahāya sammāājīvena jīvikaṃ kappeti,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ājīvo. |
전재성 |
이 세상에 거룩한 제자가 잘못된 생활을 버리고 올바른 생활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생활이라고 한다. |
각묵 |
성스러운 제자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
일아 |
잘못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고, 바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
영역 |
Here the noble disciple giving up wrong livelihood, makes his livelihood rightfully, this is called right livelihood. |
빠알리 지위까(jīvika)는 생활, 생계라는 뜻으로 세 번역자의 번역의 뜻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찌땅 빡간하띠 빠다하띠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정정진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정진 정형구 |
빠알리 |
bhikkhu 1)an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anuppād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i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2)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pahān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i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3)An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uppād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i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4)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asammosāy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chandaṃ janeti vāyamati vi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vāyāmo. |
전재성 |
이 세상에 수행승이 1)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생겨나게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하고, 2)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하고,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근하고, 4)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성만하게 하여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하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정진이라고 한다. |
각묵 |
여기 비구는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2)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4)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
일아 |
1)악한 생각이 장차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 2)악한 생각을 버리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 3)선한 생각을 일으키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4)선한 생각을 더욱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는 것이다. |
영역 |
1)for the not arising of non arisen demerit the monk arouses interest, makes endeavor and yokes the mind. 2)For dispelling arisen demerit the monk arouses interest, makes endeavor and yokes the mind. 3)For the arising of not arisen merit the monk arouses interest, makes endeavor and yokes the mind and 4)for the non deluded establishment, development and completion of arisen merit the monk arouses interest, makes endeavor and yokes the mind. Monks to this is called right endeavor. |
초기불교에서 정진은 선법과 불선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선법이면 증장시키고 불선법이면 걷어 내는 것을 정진이라 한다.
빠알리어 빡간하띠(paggaṇhāti)는 영어로 ‘rebuke’로 표현 되는데, ‘몹시 비난하다’ ‘질책하다’ ‘훈계하다’라는 뜻이다. 또 빠다하띠(padahati)는 영어로 ‘strive’로서 ‘노력하다’ ‘분투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찌땅 빡간하띠 빠다하띠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에 대하여 전박사는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하다’라고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라고 번역 하였다. 일아스님은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한다’라고 번역하였다.
영역은 ‘yokes the mind’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yoke는 소의 멍에를 말한다. 타동사로 쓰이면 ‘소나 말에 멍에를 메우다’ ‘생각등을 한데 묶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영역‘yokes the mind’는 ‘마음을 묶다’ ‘마음을 잡다’라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은 표현은 각묵스님의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에서 ‘마음을 다 잡는다’와 유사하다.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도마낫상(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정념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념 정형구 |
빠알리 |
bhikkhu 1)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2)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3)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4)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sati. |
전재성 |
이 세상에 수행승이 1)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에 대하여 몸의 관찰을 행하고, 2)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감수에 관해 감수의 관찰을 행하고, 3)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대하여 마음의 관찰을 행하고, 4)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법에 대하여 법의 관찰을 행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새김이라고 한다. |
각묵 |
여기 비구는 1)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2)느낌들에서 … 3)마음에서 … 3)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
일아 |
열성적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1)몸을 몸으로 있는 그대로 관 찰하며, 2)느낌을 느낌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3)마음을 마음으로 있 는 그대로 관찰하며, 4)담마 를 담마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머문다. |
영역 |
1) Here, monks the monk, abides mindfully reflecting the body in the body to burn and destroy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in the world. 2)The monk abides mindfully reflecting feelings in feelings, to burn and destroy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in the world. 3)The monk abides mindfully reflecting the mental states in the mind to burn and destroy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in the world. 3)The monk abides mindfully reflecting thoughts about the Teaching to burn and destroy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in the world. Monks, to this is called the establishment of right mindfulness. |
빠알리어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도마낫상(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가 있다. 위네이야(vineyya)는 위네티(vineti)의 opt.로서 ‘포기하다’의 뜻이고, 아빗자(abhijjhā)는 ‘탐냄이나 갈망이 없는 상태 (absence of covetousness or desire)’를 말한다. 그래서 정신적 고통을 뜻하는 도마낫사(domanassa)와 결합하면 아빗자도마낫상(abhijjhādomanassaṃ)이 되는데, 이는 탐냄이나 갈망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도마낫상(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라고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라고 하였다. 영역은 “to burn and destroy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in the world.”라 하였다. Covetousness는 탐냄, 갈망을 뜻하므로 “세상에 대한 갈망과 불만을 파괴하고 태우고”라는 뜻이 된다.
전박사와 각묵스님의 번역어 차이는 ‘근심을 버리고’와 ‘싫어 하는 마음을 내면서’ 이다. 각묵스님의 번역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를 보면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으로 압축 된다. 이때 ‘싫어 하는 마음’은 무슨 뜻일까. 무엇을 싫어 하는 마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만일 ‘세상에 대한 싫어 하는 마음’이라고 하면 ‘세상에 대한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가 되어 ‘염오, 이욕, 해탈’ 할 때의 정형구와 맞지 않는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
정정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구 분 |
정정 정형구 |
빠알리 |
bhikkhu 1)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2)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3) Pītiyā ca virāgā upe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Yantaṃ ariyā ācikkhanti upe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ṃ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4)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gamā adukkhaṃ asukhaṃ upe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samādhīti. |
전재성 |
이 세상에 수행승이 1) 감각적인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홀로 명상하며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2)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과 무사유와 무숙고와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3) 희열이 사라진 뒤 평정하고 주의 깊고 세삼하게 육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주의 깊고 행복하다' 고 표현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4)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불쾌를 없애고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주의 깊은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집중이라고 한다. |
각묵 |
여기 비구는 1)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2)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3)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게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4)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 |
일아 |
1) 감각적 쾌락과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것 에서 벗어나, 사유와 숙고가 있으며 홀로 명상함에서 오는 환희와 기 쁨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머문다. 2) 사유와 숙고을 멈추고 안으로의 평 온함과 마음의 집중됨이 있으며, 사유와 숙고가 없이 삼매에서 오는 환의와 기쁨이 있는 두 번째 선정에 머문다. 3) 환희가 사라진 후 평정한 마음과 분명한 알아차림과 육신의 행복을 느끼며 머문다.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평정과 마음 챙김에 머무는 사람은 행복하게 머문다.' 고 하 는 세 번째 선정에 머문다. 4) 고통도 쾌락도 버리고 전에 있던 행복도 불 |
영역 |
the monk 1) secluding the mind from sensuality and demerit accompanied with reasoning and investigation and with joy and pleasantness born from seclusion abides in the first high stage. 2) Overcoming reasoning and investigation and the mind in one point, internally calmed without reasoning and investigation and with joy and pleasantness born from concentration abides in the second high stage. 3) Abides mindful and aware in joy, fading away and equanimity alternately, experiencing pleasantness with the body too. To this the noble ones say abiding mindful and aware in equanimity, thus one abides in the third high stage. 4)Dispelling pleasant and unpleasant feelings and earlier having dispelled pleasure and displeasure one purifies mindfulness with equanimity, so that it is neither unpleasant nor pleasant and abides in the fourth high stage. Monks this is called right concentration.” |
먼저 용어를 살펴 보았다. 흔히 잘 알려져 있는 심사희락정으로 구분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심(尋) |
사(伺) |
희(喜) |
락(樂) |
정(定) |
빠알리 |
Vitakka (위딱까) |
Vicara (위짜라) |
Piti (삐띠) |
Sukha (수카) |
Upekhā (우뻬카) |
전재성 |
사유 |
숙고 |
희열 |
행복 |
평정 |
각묵 |
일으킨 생각 |
지속적인 고찰 |
희열 |
행복 |
행복 |
일아 |
사유 |
숙고 |
환희 |
기쁨 |
평정 |
영역 |
reasoning |
investigation |
joy |
pleasantness |
equanimity |
희-락-정에 대한 번역어는 큰 차이가 없으나 심과 사에 대한 번역어의 차이는 크디. 심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와 일아스님은 ‘사유’로 번역하였으나 각묵스님은 ‘일으킨 생각’으로 번역하였다. 영역은 reasoning로 되어 있는데 ‘추리’ ‘추론’이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사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지속적 고찰’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박사와 일아스님은 숙고라 번역하였다. 영역은 ‘investigation’으로 되어 있다. 조사, 연구, 탐사 한다는 뜻이다.
각묵스님의 번역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과 같은 용어의 특징은 주어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의 뜻을 보충 설명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이것도 부족해서 인지 한자어까지 붙여 주고 있다. 그래서 위딱까 (Vitakka)에 대하여 ‘지속적인 고찰[伺]’이라고 본문에 표기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보충설명 형식의 수식적 용어는 각묵스님의 번역어 특징중의 하나이다. ‘마음챙김’이나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예를 또 하나 볼 수 있다.
우뻬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
사선정을 설명하는 문구 중에 ‘우뻬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평정하고 주의 깊은’이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의 경우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사선정의 상태에 대한 것을 말하는데,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였다. 위빠사나 수행도 아닌데 사마타명상수행에서 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일까.
각묵스님이 언급한 ‘사념청정(捨念淸淨)’대한 자료를 찾아 보았다. 인터넷 검색결과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경문(經文)을 보면 초선(初禪)의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의 장애가 끊어지고 마음을 선정의 대상에 집중하여 마침내 감각적 욕망이 없어지고 불선법(不善法)을 떠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아직 대상에 대해 분별하고 사려하는 마음이 있어 고요히 가라앉지 못하는 단계다.
제이선(第二禪)에서는 각(覺)과 관(觀)이 없어져 분별적인 사유작용이 그치고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게 되어 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제삼선(第三禪)에서는 제이선(第二禪)에서 생긴 희락(喜樂)의 감정까지도 버리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로써 신체가 가볍고 편안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끝으로, 제사선의 단계에 와서는 신체의 편안함까지도 사라지고 완전히 고락(苦樂)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이 더욱 순화(純化)되어 부동(不動)이 되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사선(四禪, Cattari jhanani), 부다피아 ,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현대불교신문의 부다피아에 실려 있는 용어 해설에 대한 것이다. 한역 아함경에 실려 있는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자료에서 ‘사념청정(捨念淸淨)’이란 마음의 평정이 순화 되어 부동이 되는 단계라 한다.
이와 같은 용어의 설명으로 보았을 때 사념청정이라는 말은 한자문화권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용어라 볼 수 있다. 각묵스님은 이런 한자 용어를 차용하여 ‘우뻬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에 대하여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이라고 한자용어와 함께 번역하였다.
그러나 부다피아의 한자용어 설명에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아마도 upekhāsatipārisuddhiṃ안에 사띠(sati)라는 용어가 있어서 일 것이다.
이런 마음챙김에 대한 용어는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영역에서는 ‘purifies mindfulness’로 번역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mindfulness는 사띠의 영어 번역이다. 따라서 ‘purifies mindfulness’의 뜻은 단순하게 번역하면 ‘마음챙김을 정화하다’라는 뜻이 된다. 일아스님도 이와 같은 번역방식을 사용하여 ‘마음챙김의 순수함이 있는’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 박사는 사띠에 대한 언급 없이 단지‘평정하고 주의 깊은 네 번째 선정’이라고 표현하였다.
“분명히 거기에는 마음챙김이 있습니다”
합성어‘우뻬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에 대하여 더 알아 보기 위하여 각묵스님의 ‘초불연’ 카페에 들어 가 보았다. ‘묻고 답하기’ 코너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였다.
상좌부 아비담마에 의하면 만일 그것이 유익한 마음이라면 거기에는 늘 sati가 있다고 이해해야합니다. 마음챙김 뿐만 아니라 촉 작의 수 상 사 신 집중 등등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시작한 수행에서의 마음챙김은 약하겠지만 그러나 분명히 거기에는 마음챙김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초선 등의 본삼매에서는 강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제4선에서는 평온(upekkhaa) 때문에 사띠가 지극히 청정하게(parisuddhi)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뼄가사띠빠리숫디라하고 중국에서 사념청정(捨念淸淨)으로 옮겼습니다. 상좌부 주석서들은 사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청정 즉 평온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청정으로 합성어를 풀이합니다.
(각묵스님, http://cafe.daum.net/chobul/1ApY/1777)
각묵스님에 따르면 4선정에서는 ‘평온으로 인하여 사띠가 지극히 청정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중국에서 ‘사념청정(捨念淸淨)’으로 옮겼다고 한다. 또 테라와다 주석서에서도 ‘평온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청정’라 설명 되었다는데, 이는 합성어‘우뻬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에 대한 풀이라 한다.
각묵스님은 선정상태일지라도 마음챙김(sati)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정삼매 상태는 유익한 마음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선법으로 분류 되는 ‘촉, 작의, 수, 상, 사, 신, 집중’ 등과 함께 사띠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띠(sati)란 무엇인가
하지만 사띠는 위빠사나 수행 용어로 알고 있다. 그런 사띠는 어떤 것일까. 사띠에 대한 용어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사띠(sati)는 √smṛ(기억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PED에서 ‘memory, recognition,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 of mind, mindfulness,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conscience, self-consciousness.’라고 설명되듯이, 그 1차적인 의미는 ‘기억(記憶), 억념(憶念), 유념(留念)’이고, 2차적인 의미는 ‘깨어있는 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각성, 명료한 마음, 침착함, 자각, 의식’ 등이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파지하고 대상에 확립하고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는 것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가능하게 하는 선한 마음의 작용이다. 그리고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능력(五力, pañca-bala) 중의 하나이며,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 bojjhaṅga)중의 하나이다. 또한 넓은 의미로는 선한 과보의 마음(kusala-vipāka-citta)과 아름다운 과보의 마음(sobhana-vipāka-citta)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마음의 작용(cetasika)들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염(念)이나 억념(憶念)으로 번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mindfulness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과 함께 경에 빈번히 등장하는 술어로 삼빠쟌나(sampajañña)가 있다. PED에서 ‘attention, consideration, discrimination, comprehension, circumspection; Often combined with sati, with which almost synonymous.’라고 설명되듯이, ‘주의, 사려분별, 판별, 이해, 세밀한 주시’이란 뜻이고 종종 거의 유사한 의미를 지닌 사띠와 함께 쓰인다. 중국에서 정지(正知)로 옮겼고, 영어권에서는 clear comprehension, full awareness, clarity of consciousness 등이라 한다.
그리고 이 사띠와 삼빠쟌나는 경에서 sati-sampajañña와 같이 둘이 결합된 형태로 자주 나오며 중국에서 정념정지(正念正知)로 옮겼다. 본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삼빠쟌나는 ‘분명한 앎’으로 옮기고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
주석에 따르면 사띠는 ‘기억’의 의미가 가장 크고 다음으로 ‘알아차림’이라 한다. 이처럼 기억과 알아차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띠는 대상과 매우 관련이 깊다. 감각 접촉의 대상과 부딪쳤을 때 그 대상을 파악하고 알아차려서 마음을 보호 하기 때문에 선한마음(선법)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사띠 번역어 ‘새김’과 ‘마음챙김’ 두 가지를 놓고 보았을 때 ‘새김’에 더 가깝고, 마음챙김은 단지 대상에 접촉 하였을 때 대상을 확립 하는 의미에 더 가깝기 때문에 ‘2차적인 의미의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사띠가 사마타 수행에 사용될 경우
이와 같이 사띠는 알아차리는 역할이 강하기 때문에 사마타 보다 위빠사나 수행에 사용되는 전용술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사띠가 사마타 수행에 사용될 경우 복합어로 사용될 때라 보여진다. 좋은 예가 청정도론에서 보는 불수념일 것이다. 불수념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라 번역한 붓다누사띠(buddhānussati)는 buddha+anussati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아누사띠(anussati)는 다시 anu(~를 따라서)+sati(念, 알아차림)으로 분해된다. PED에서 ‘remembrance, recollection, thinking of, mindfulness.’라고 설명되듯이, 이 아누사띠는 ‘기억, 회상, 생각함, 주의 깊은 알아차림’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10가지 대상들에 대한 공덕이나 특성 등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사마타 수행법 중 하나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
불수념은 부처님에 대한 숙고를 말하며 40가지 사마타 수행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런 불수념에 대한 빠알리어는 ‘붓다누사띠(buddhānussati)’이다. 부처님과 아누사띠(anussati)의 결합어로서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아누사띠(anussati)라는 말을 보면 아누(anu)와 사띠(sati)의 결합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계속하여 알아 차리는 술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사띠의 일반적 의미는 기억과 관련이 매우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은 부차적인 것이라 본다.
아누사띠와 관련된 사마타명상주제
이렇게 사띠가 사마타 명상주제의 결합어로 사용된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 buddhānussati)
(2) 법에 대한 숙고(法隨念, dhammānussati)
(3) 승가에 대한 숙고(僧隨念, sanghānussati)
(4) 계에 대한 숙고(戒隨念, sīlānussati)
(5) 보시에 대한 숙고(布施念, cāgānussati)
(6) 천인에 대한 숙고(天隨念, devatānussati)
(7) 죽음에 대한 숙고(死隨念, maraṇasati)
(8) 몸에 대한 알아차림(身隨念, kāyagatā-sati)
(9)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出入息念, ānāpānasati)
(10) 고요함에 대한 숙고(寂靜念, upasamānussati)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
위 사마타명상 주제 모두가 사띠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 ‘결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열가지 ‘숙고(anussati, 隨念)’라 한다.
사마타 명상주제 40가지
이와 같은 10가지 숙고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사마타 수행대상에 속한다.
(1) 열 가지 까시나(kasiṇa): 땅,물, 불, 바람, 푸른색, 노란색,빨간색,흰색,광명,한정된 허공.
(2) 열 가지 더러움(不淨, asubha): 부었고, 검푸르고,굶고, 끊어지고,갈아먹고,흩어지고,난도질하여 뿔뿔이 흩어지고,피가 흐르고,벌레가 버 글거리고,해골이 됨.
(3) 열 가지 숙고(隨念, anussati): 부처님, 법, 승가, 계, 보시, 천인, 죽음, 몸, 들숨날숨, 고요함.
(4) 네 가지 무량(appamaññā):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더불어 기뻐함(muditā), 평온(upekkhā)의 사범주(四梵住, brahma-vihāra).
(5) 한 가지 인식(saññā):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paṭikūla-saññā).
(6) 한 가지 분석(vavatthāna): 사대(四大)를 분석하는 것.
(7) 네 가지 무색(ārupa):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
위 7종류의 사마타 주제와 앞서 언급한 수념(숙고)을 합하면 모두 40가지 사마타 명상 주제가 된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표를 보면 까시나를 주제로 한 사마타 수행의 경우 선의 경지가 초선부터 5선까지임을 알 수 있다. 5선은 논장의 분류방식이다. 경장의 분류 방식은 4선까지이다.
4종선과 5종선 분류방식
경장과 논장의 분류 방식에 대한 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장에서 말하는 네 가지 색계선[四種禪] | |
초선(初禪) |
일으킨 생각(尋, vitak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
이선(二禪) |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
삼선(三禪) |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
사선(四禪) |
평온(捨, upekkhā), 집중(定, samādhi) |
논장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색계선[五種禪] | |
초선(初禪) |
일으킨 생각(尋, vitak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
이선(二禪) |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
삼선(三禪) |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
사선(四禪) |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
오선(五禪) |
평온(捨, upekkhā), 집중(定, samādhi) |
4종선이든 5종선이든 가장 마지막 단계는 평온(捨, upekkhā)과 집중(定, samādhi)만 남는다. 여기서 집중은 초선부터 계속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오로지 마지막 단계에서만 남아 있는 것은 ‘평온’이다.
어떻게 해야 평온이 유지될까
이런 평온이 유지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띠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사마타수행에서의 사띠는 위빠사나 수행의 사띠와 다른 것으로 본다.
위빠사나의 경우 대상을 분리하여 관찰하기 때문에 순간 순간 알아차려야 한다. 하지만 사마타의 경우 대상에 대하여 명상하기 때문에 한 가지 선택된 대상에 고착해야 한다. 이런점이 위빠사나와 사마타의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사마타 수행에서 사띠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위 사마타 명상주제를 보면 사띠가 사마타에 사용 되었을 경우 단독으로 또는 능동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결합어로 볼 수 있듯이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아누사띠라 하고 수념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최종선에서 평온과 집중만 남았을 때 이를 경에서는 ‘우뻬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이라 하는데,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라고 번역 하였다. 마치 마음챙김(sati)가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온이라는 대상에 마음챙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경에서 사띠는 결합어로 쓰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띠가 수동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마치 불수념과도 같은 역할이다.
사띠가 결합어로 사용되어진 이유
사띠가 능동적으로 작용할 경우 오온에서 일어 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마타 상태에서는 대상과 고착 된 상태이므로 결코 오온이 일어 나는 현상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최종선에서 평온이 일어 났을 때 사띠가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수념처럼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띠가 사마타명상에서는 독립어로 쓰이지 않고 항상 결합어로 쓰인다고 볼 수 있다. ‘우뻬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에서도 사띠가 결합어로 쓰여 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각묵스님의 번역어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와 일아스님의 번역어 “평정에 의하여 도달한 마음챙김의 순수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에 머문다.”와 영문번역어인 “one purifies mindfulness with equanimity”문구 역시 부적절 해 보인다.
차라리 전재성 박사의 번역어 “평정하고 주의 깊은 네 번째 선정”과 같이 사띠에 대한 내용이 일체 들어가 있지 않은 번역어가 더 낫다고 보여진다.
좋은 번역서의 조건은
이상 팔정도에 대한 빠알리 정형구의 번역을 살펴 보았다. 번역자 별로 특징이 발견 되는데, 전재성 박사의 경우 문장이 매끄럽고 원문에 충실한 번역위주임을 알 수 있었다. 각묵스님의 경우 보충설명식 번역이 특징인데 번역어 옆에 대괄호를 치고 한자용어를 넣어서 이중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일아스님의 경우 전재성박사의 번역 스타일과 비슷하지만 간소한 번역이 특징이다.
현재 두 종류의 빠알리 니까야가 번역 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와 같은 번역 비교는 피할 수 없다. 많은 비교가 이루어져 개선 된다면 더 좋은 번역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 생각된다. 한글 번역된 문장을 다시 빠알리어로 번역하였을 때 비슷해야 좋은 번역이라 생각한다. 어느 것이 좋은 번역서인지는 자신의 취향에 달려 있다.
2012-09-01
진흙속의연꽃
첫댓글 역시 아주 유용한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원어와 비교를 해나가는 일이 답답함을 줄일듯 합니다
유익한 자료 감사합니다
싸티는 위빠사나와 사마타의 원인과 조건이 되며
신수심법을 닦는 방법이 있으므로 그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떻게 다르게 적용되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