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축제의 시간이란 온몸으로 자신을 느끼는 시간을 이름이지.(7)
외로움이 깊어질 때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은 밤새워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빈 술병을 보며 운다. 지니간 시절의 유행가를 몽땅 끄집어내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이의 집에 전화를 걸어 혼곤히 잠든 그의 꿈을 흔들어놓기도 한다. (18)
구룡포의 골목길을 떠돌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서울의 달동네라고 말한 어느 서양 건축학자의 매력적인 지적이 이곳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알게 된다. (22)
파도와 그들이 내는 소리들이 꽃처럼 발밑에 쌓이고 갈매기들의 비상은 색종이처럼 머리 위에서 쏟아진다. (23)
선창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혼자 먹는 밥맛의 깊이를 아는 이는 예술가가 아니면 육체 노동자다. (23)
앙겔로플러스 감독의 영화 "율리시스의 시선" 생각이 난다. 헬리콥터가 매달고 가던 거대한 형상의 손. 지향점을 상실한 채 쓸쓸한 형상으로 바다를 넘어가던 손.(24)
그럴 때 나는 어젯밤 군산 시내의 한 비디오방에서 본 영화 한 편을 얘기해줄 수도 있다. "탱고 레슨". 쉘리 포터라는 나이 든 여자가 주인공이다. 그가 극본도 쓰고 연출도 하고 영화음악도 맡았다. (31)
나는 장자도로 걸음을 옮겼다. 선유도에는 길이가 똑같이 268미터인 두 개의 다리가 있다. 한 다리는 무녀도와 이어지고 다른 한 다리는 장자도로 연결된다. 세 개의 섬이 두 개의 다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37)
무녀도로 들어가는 선유교 다리 위에서 세 개의 가로등 불빛을 보았다. 나는 그중의 한 불빛 아래 다리를 뻗고 앉았다. 불빛이 내게 말했다. 조금 외로운 것은 충분히 자유롭기 때문이야. 나는 불빛을 보며 씩 웃었다. (38)
소금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갯바람, 드문드문 개펄 위에 주저앉은 낡은 목선들, 치렁치렁 쏟아지는 가을 햇살 속을 나는 천천히 걸어갑니다. '동화'라고 쓰여진 표지석이 보입니다. (41)
향기 자욱하던 보라색의 풀꽃 - 그 꽃의 이름이 배초향이라는 것을 여행에서 돌아온 뒤 식물도감을 뒤져 알았지요 - 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44)
언젠가부터 나는 동화마을이 자리한 1010번 도로를 1004번 도로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45)
선창의 한 골목길에 '젤소미나'라는 커피숖이 있지요. (45)
당신에게 보여드릴 마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세포라는 갯마을이지요. 1018번 도로를 타고 해금강을 지나 다시 14번 국도를 타고 학동과 구조라 마을을 지나면 닿는 곳이지요. 지세포.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사람의 원칙과 슬픔과 근원의 뼈아픔들을 다 알고 있는, 그 포구의 이름이 오랫동안 가슴에 닿아왔습니다. (49)
아침 아홉 시. 나는 어청 훼리호에 올랐다. 군산 여객선 터미날에서 출항하는 이 배를 타기 위해 새벽의 고속도로를 세 시간 동안 달렸다. (53)
세 시간의 항해 끝에 배는 어청도에 닿는다. (58)
느릿느릿 나는 갈매기의 비행에 보폭을 맞추고 천천히 선창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서해 다방, 군산 다방, 연민 다방, 웬 다방이 이리 많지... 엔돌핀 커피숍이라고 써진 가게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웃었다. (59)
나는 1003번 지방도로에 들어섰다. 삼천포를 거쳐 충무로 가던 길에 몇 차례 들른 적이 있는 이 길의 입구를 그들이 아니었으면 놓쳤을지도 모른다. 영복마을은 그 길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68)
이 도시의 해안 언덕바지에 있는 관광 호텔의 커피숍에서 바라보았던 늑도의 불빛은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72)
마을의 작은 고샅길을 다니다가 한 작은 초등학교를 발견했다. 삼천포초등학교 늑도분교. 운동장보다 훨씬 넓은 바다가 운동장 너머에 펼쳐진 그곳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팽나무 중 가장 아름다운 팽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72)
무엇보다 인생의 됨됨이, 성실성, 진지성 들에서 나는 결함투성이였다. (77)
번개탄 불 위에 석쇠를 얹고, 그 위에 살이 피둥피둥해 얼른 꽁치 새기(끼)쯤으로 보이는 싱싱한 멸치들을 얹은 뒤, 굵은 천일염을 고루 뿌린다. 그리고 화덕 주위에 쭈그리고 앉아 언 손에 군불을 쬐며 소주 한 잔씩을 나누는 것이다. (83)
구룡포읍에서 장기곶의 맨 끝마을인 구만리로 가는 911번 지방도로는 파도소리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길입니다. 동해안의 어촌 마을들치고 파도소리가 귀에 부시지 않는 곳은 없을 터이나 석병리, 다무포, 강사리로 이어지는 이곳 길 위에서 듣는 파도소리는 봄 언덕에 무더기로 피어난 조팝나무나 산당화의 꽃사태를 대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꽤 많은 바닷가를 지나온 적이 있지만 파도소리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88)
밤을 새워 파도소리를 듣고, 등대의 불빛을 보고, 제일 먼저 육지에 닿아오는 아침 햇살을 맞고... (93)
나는 그 여행에서 노인의 고향 대신 노인의 격 깊은 소리의 한 근원을 만났다. 지산면 인지리에서였다. 마을 뒷산에 등굽은 소나무가 한 줄로 늘어선 마을 풍경은 얼핏 범상해 보였다. (103)
나는 남도 석성이 자리한 남동리로 길을 잡았다. 인지리가 내게 비범한 예술가들의 혼의 느낌으로 남아 있다면 남동리 쪽은 평범한 예술가들의 소박한 마음결로 남아 있는 땅이다. (107)
이럴 때 순천만의 하늘 위에는 무수한 별빛이 빛난다. 과거를 회상하는 버릇은 가슴 안에 깊은 말뚝을 지닌 모든 슬픈 짐승들의 운명 같은 것이다. (119)
불빛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저 불빛은 화포의 불빛이고, 저 불빛은 거차의 불빛이고며, 저 불빛은 와온 마을의 불빛이다. (120)
순천에서 벌교로 가는 17번 국도변에 선 이정표에서 화포라는 이름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어느 봄날이었다. (125)
다시 '거차'에 왔다. 순천만에 자리한 작은 갯마을. 개펄 냄새가 자욱하다. (136)
거차의 선착장은 썩 길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속에 한 갯마을이 지닌 삶의 이력의 깊이를 선착장의 길이로 가늠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141)
향일함으로 향하는 길에 돌산초등학교 대신분교에 들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153)
오직 해맞이를 위해 여수행 밤열차를 타고 나라 안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세상을 살아내기가 다들 녹녹치 않을 것이다. 절망과 잡념, 증오와 굴욕, 쓸쓸함의 시간들 또한 깊을 것이다. (160)
나는 가능한 터벅터벅 걸으며 선창에 늘어선 간판 하나하나를 읽어나간다. 추억만들기, 약속, 황제, 금수, 무등, 샛별, 명... 내가 읽어나가는 간판들은 찻집의 이름들이었다. 그 무렵 회진에는 내 기억으로 꼭 한 군데의 찻집이 있었다. 건화다방. 눈보라가 펄펄 날리는 겨울날 건화 다방에는 톱밥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갯일을 끝낸 바닷사내들이 톱밥난로 주위에 모여들어 불을 쬐었다. 화력이 좋은 톱밥난로는 그들의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었고 따뜻한 피가 도는 그 손으로 커피가 아닌 소주를 마셨다. 사이다 잔에 2홉들이 소주병을 붓고 거기에 고춧가루를 얼마쯤 타서는 두 세잔 거푸 마셨다. (167)
김준임씨(59)의 팥죽집은 회진 장터 한 귀에 자리하고 있다. 다 떨어진 양철지붕에 비닐로 군데군데 비 가림을 한 허름한 이 팥죽집에 우연히라고 들른 여행자라면 그는 지극히 큰 행운을 잡은 사람이다. (167)
지금부터 한 시간 전, 나는 이 포구에 도착했다. 왕포. 표지석에 새겨진 포구의 이름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186)
부안읍에선 한 공동묘지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두 개의 무덤을 보았어. 매창이라는 기생의 무덤과 이중선이라는 소리꾼의 무덤이었지. (191)
내변산은 예부터 산림이 우거진 곳으로 알려져 있지. 골짜기가 아주 깊어. 전쟁 같은 때 숨어 지내기에 좋은 열 군데 땅 중의 하나로 옛 지리책에 적혀있어. 그곳에서 직소폭포를 보았지. (191)
구시포의 개펄색 모래밭도 '명사십리'로 불리운다. 구시포의 왼쪽 고리포에서 오른쪽의 장호와 동호까지 합한다면 삽십리도 넘을 터이지만 사람들은 그냥 명사십리라고 편하게 부른다. (201)
공항에서 차 한대를 빌려 곧장 12번 국도를 달린다. 제주의 가장 바깥쪽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전장 181킬로미터의 이 일주도로는 제주도의 자연풍광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누구든 한 번쯤은 달리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는 길이다. (209)
나는 제주바다에서 산방산이 자리한 사계포 앞바다를 많이 사랑한다. (212)
나는 중문의 모래밭을 좋아한다. 석영질이 전혀 없는 이곳의 모래들은 햇빛을 받아도 반짝이지 않는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제 스스로의 살빛으로 파도를 만나고 바람을 만나고 바닷새의 울음을 만나는 그 수더분함이 좋은 것이다. (217)
한 아가씨에게 연북정가는 길을 물었지요. (232)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 서해대교가 시작되는 지명이다. 맞은편 지명은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복윤리. 나는 천천히 서해대교를 달린다. (239)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사천시로 이름이 바뀐 옛 삼천포의 오래된 동네, 실안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동네의 언덕배기에 선 이 여관은 바다 전망이 화사했다. 특히 밤바다의 전망이 그러했다. (249)
나는 1010번 지방도로를 타고 고성 쪽으로 가는 바닷가 길을 달렸다. 작은 마을들이 굴껍질처럼 해안선 여기저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 상발, 맥전포, 용암포, 동화와 같은 마을 이름이 길 곁의 지석에 새겨져 지나갔다.(252)
내가 처음 충무항에 닿았을 때 나를 제일 기쁘게 했던 것은 선창에서 만난 두둥실이라는 이름을 지닌 배 한 척이었다. 배의 이름이 두둥실이라니. (253)
거제도 서쪽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1018번 지방도로의 수수한 풍경 또한 마음에 새길 만하다. 호세 쿠라를 들으며 나는 그 길을 천천히 달렸다. 아르헨티나의 토속적인 서정이 짙게 배인 그의 음악이 이 길과 썩 잘 어울린다. (254)
나는 반도의 초입에서 곧장 부사방조제로 차의 방향을 잡압다. 방조제는 이웃의 보령시를 한길로 이어놓았다. 4킬로미터 가까운 길이 바다 한가운데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을날 이 방조제 길을 걷는 것은 참으로 시원한 운치가 있다. 탁 트인 바다의 모습에 가슴이 열리며, 바닷바람 속을 한 걸음 두 걸음 걷다 보면 뒤에 두고온 세상 풍경이 어느 순간 절로 잊혀지는 것이다. (264)
오후 다섯 시. 나는 금강 하구둑을 건넜다. 장항읍까지는 6킬로미터의 거리. 길목에는 몇 해 전부터 나라 안에서 눈길을 끌만한 카페촌이 형성되었다. 작은 영혼, 물꽃나무, 베네치아, 보스포러스, 헤임웨이, 구름모자, 도둑과 시인... (268)
나라 안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도시가, 그것도 도계를 이루면서 마주 보고 있는 경우는 군산과 장항 외에는 없다. (270)
낯선 길 위에 서서 이정표를 바라보고 섰노라면 유독 나그네의 귀소본능을 자극하는 지명들이 있다. 13번 국도를 따라 해남 길을 달리다 813번 지방도로를 바꿔타고 바다쪽으로 10킬로미터쯤을 더 나아가면 닿는 송지면의 '어란'이 그런 곳이다.(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