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落花流水
조 진 태
(6)
다음 날 아침도 역시 운당 선생은 아내가 마련한 아침식사를 단 둘이 만이 끝내자 아내 와 함께 집을 나섰다.
유난히도 광활하게 펼쳐진 파란 하늘을 이고 가로수가 길길이 널어선 애비뉴 거리를 걸었다. ‘애비뉴(Avenue)' 나 ‘불바아드(boulevard)' 처럼 캐나다의 거리는 어디를 가나 단풍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어 ’가로수길’이란 말이 실감나게 한다. 마침 토요일이라 주5일제 근무를 하는 이 도시의 사람들은 벌써 어젯밤에 연휴를 즐기기 위래 별장이나 호수 등 유원지로 다 떠나버리고 거리는 한산하였다.
“하이, 나이스 투데이!”
마주 걸어오던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한 부부가 눈이 마주치자 웃음 띤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하이, 굿 데이!”
운당 선생 내외도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지나갔다. 캐나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눈만 마주치면 인사를 했다. 한국 같았으면 시골이야 별게로 치더라도 도시에서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빤히 보고도 인사할 줄 모르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따라 날씨가 무척 쾌청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불바드 스트리트에서 애비뉴 로드로 꺾어 들어 조금 걸어가노라니 올차얼드 광장이 있었다. 거기서 마침 자동차 전시회가 있어서 구경을 싫건 하고서 조금 돌아 나오니 ‘비치모얼 팔크’란 제법 넓은 공원이 나왔다. 개를 몰고 들어가지 않는 한 누구나 들어가 산책할 수 있는 잘 가꾸어진 공원이었다. 빈틈없이 손질된 잔디밭과 곳곳에 형형색색으로 핀 꽃들, 아름답게 가꾸어진 관상수에다 각종 놀이 시설과 앉아 편히 쉴 수 있는 롱벤치, 테니스와 배구, 농구, 간이야구 등의 운동을 할 수 있는 넓은 장소가 녹음 속 군데군데 있었다. 운당 선생 내외는 단풍나무 그늘 아래 놓인 벤치에 가 앉았다.
좀 떨어진 농구 코트에서는 아이들이 여 남 명 모여 농구를 하고 있었고, 바로 앞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두 사람이 테니스를 열심히 치고 있었다.
“ 부부인가 본데 참 건강해 보이구먼.”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몸이 날씬해 보여요. 무리한 다이어트 보다는 역시 운동이 좋겠지요?”
“물론 그럴 테지.”
“역시 이 나라 국민들은 더 많이도, 보다 서두름도 없이 여유롭게 사는 모습이 부러워.”
운당 선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벤치에 느긋이 기데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이 나라는 희한한 나라이다. 며칠마다 한 번씩 비가 내리면 하늘엔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선다. 회색 빛깔의 스모그 속에 서던 서울 하늘의 무지개와는 다른 아름다운 무지개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나라. 무지개와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에 불쾌지수가 높을 리 없는 이 나라. 이 나라 사람들은 게으름을 한껏 즐긴다. 그들은 언제나 푸른 하늘을 이고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푸른 잔디밭 광장에서 멍청히 시간을 보내며 현실의 삶을 만끽한다.
아이들에겐 천지 사방에 놀 거리가 널려 있다. 그들은 집에서 놀고, 학교에 가서도 논다. 호수와 푸른 잔디와 울창한 숲과 넓은 운동장과 크고 작은 공원이 가는 곳마다 널려있다. 호수와 초원과 목장에서 아이들은 뛰놀기 일쑤다. 어른들 또한 숯불 바비큐에 맥주를 들이키거나 홀짝이며 자연에 묻힌다. 뉴욕, 런던, 로마 같은 메트로폴리탄적이 아닌, 아늑한 초원!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들판, 숨이 막힐 만큼 아스라이 치솟은 설산하며, 거울 같이 맑은 빙하의 호수에다 낚싯대라도 드리우면 일분도 채 안 돼서 두 자가 넘는 물고기들이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온다. 그 짜릿한 맛과 유쾌함을 어디에다 비기랴! 그들은 즐기기 위해 살고,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면서 자연
속에 묻혀 산다. 그야말로 웰빙생활이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오로라가 캐나다의 한 중소도시이긴 하나 그 중심부에 있는 오차얼드는 서울의 위성도시의 변두리 끝자락을 연상케 하는 마을 같다. 그 마을에 오늘도 오전 한 때 늦여름의 이슬비가 살금 뿌리고 지나갔다. 그리곤 맑은 청 하늘에서 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퍼지기 시작하자 이 마을의 광장에는 자동차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주민의 가호 수래야 6백여 호 정도이겠는데 그래도 각종 마켓이 즐비한 번화가의 중앙에 있는 이 광장은 주말이면 각종 전시회나 공연 등 행사가 있기 마련이었다. 오늘 열린 자동차 전시 역시 촌스럽고 화려하지 못한, 소박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으나 출품자의 멋과 여유와 유머가 있고, 부(富)를 자랑하기보다 고풍스런 미(美)의 공유를 위한 제공만으로 출품자들은 만족하고 있었다. 전시품은 모두가 비매품이었다.
롤스로이스 팬텀을 내어놓은 파우스트 씨는 영국에서 왕실가문의 귀족들이 전용했던 차로 ‘환희의 여신’이란 닉네임을 갖고 있으며 실내장식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폭스바겐을 전시한 엘리스 헤이스트 씨는 독일제로 세계 각국에 2천3백만 대나 팔린 인기 만점의 차라고 자랑했다. 또 1930년대의 캐딜락을 내놓은 스태프 크루츨리 씨는 어떤 부호가 꼭 7년 동안만 사용했던 차로 완전 새 차와 같은 고급차라고 했고, 크리스틴 힐리언 씨는 멕나렌M16의 경주차를 ‘시간 속의 문명의 꽃’라고 소개하면서 우아한 디자인의 제큐어와 함께 선을 보였다. 이 날 행사를 주최한 가히 왓슨 씨는 세단 형과 리무진 형의 두 종류 시보레와 부가티, 그리고 리무진 푸린세스, 오스틴 푸린세스 외에도 엠블름 등 각종 스포츠카와 여러 가지 오픈카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설명해 주고 있었다. 전시회에 내놓은 차 댓수를 모두 합쳐도 쉰 여대 남짓 했고, 삣가번쩍하게 광택을 내서 출품된 차들 옆에는 출품자가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메이플 시럽을 홀짝이며 구경꾼을 맞고 있었다. 밝은 햇살이 무더기로 쏟아지지만 살랑거리는 산들바람에 더위를 느끼지 못한다. 더구나 단풍나무 그늘에는 싱그러운 그린의 풀 향기가 오로라 시민들의 삶을 촉촉이 적시어 준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대도시의 문명과 생존경쟁에서 고소득의 포기와 소모적 삶을 벗어 던지고 자연과 더불어 질 높은 삶을 택해 모여든 오차얼드의 마을 주민들, 그들에겐 이곳이 사막의 오아시스만큼이나 소중한 장소로 여기며 소박하고 느리면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우선해서 산다.
운당 선생 내외는 무려 서너 시간을 자동차 전시장에서 보냈기에 약간 피로를 느꼈다.
(7)
운당 선생 내외는 숲이 우거진 공원으로 가 테니스를 치는 한 부부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잠시 여기 좀 쉬었다 가시죠.”
“그러자구나.”
한 젊은이가 노인 두 분을 모시고 운당 선생이 앉아 있는 롱 벤치에 와서 나란히 앉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한국말을 하는 40대 중반의 한 중년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말을 건넸다.
“한국에서 왔소?”
“예, 어르신께서 도요?”
“ 그렇소. 경기도 와부라오.”
“예, 그렇습니까? 저는 이민 온지가 이십 년 가까이 됩니다만 대구가 고향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레이크 심코를 다녀 오다가 오늘 마침 이곳 오로라 광장에서 자동차 전시회가 있다 기에 거기서 구경을 하고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 왔죠.”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역만리에서 만나는 반가움은 대단했다.
중년의 사내는 민성동이라고 말한 후 자기의 부모를 운당 선생 내외에게 소개를 해 줘서 양쪽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금방 십년지기처럼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운당선생이 민성동에게 언제 캐나다로 이민을 왔느냐는 질문이 게기가 되어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민성동의 그간 살아온 내력을 듣게 되었다.
20대에 군복무를 마치고 가난 때문에 결혼식도 못 올린 채 부모를 남겨 두고 아내와 더불어 비행기 표만 사서 이민을 왔다는 민성동은 이민생활 20년의 애환을 대충 털어놓기까지 했다.
“그 때만 해도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었고, 그렇다고 취직도 어려웠던 70년대에 무작정 건너왔지요. 다행히 교회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의 도움으로 그 댁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농장에 다니며 날품팔이를 해서 한 일 년을 그럭저럭 살았어요. 그러다 첫 아이를 낳고는 아파트멘트(이 나라에서는 저소득층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공동주택}를 구해 살았지요.”
“젊은 시절 참으로 고생도 많이 했겠구먼.”
운당 선생은 민성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기도 차지 않았지요. 이제 겨우 첫돌 지난 애를 우유 한 통 안겨서 혼자 방에 가두어 두고 우리 내외는 화장품 원료가 되는 지렁이를 캐야만 일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거든요. 그런데 사흘이 지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경찰이 찾아 왔더라 구요. 아이를 왜 때려서 울리 너냐 구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아이를 때려서 우는 소리에 시끄럽다고 이웃에서 신고를 했다는 거에요. 다행히 사정을 이야기해서 무마됐지만 아기를 업고 일하려 갈 수도 없어 참으로 난감하더라구요. 그런데 같이 일하러 온 부부가 자기는 목욕탕에 가두어 두고 온다며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더군요. 그러면 아기가 울더라고 바깥에 소리가 나가지 않을 거라 구요.”
“저런! 그래서 당신네도 그렇게 했소?”
“물론이었죠. 그렇게 해서라도 일당을 벌어 와야 살 수 있었으니까요.”
“저런, 그런 일이 있었어도 언제나 편지마다 잘 있다고만 써 보내고......”
민성동의 어머니가 하얀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면서 자기 아들을 빤히 쳐다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런 이야기는 생전에 부모님 앞에선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토록 고생을 했으면서도 이 날까지 통 이야기를 했어야 말이지. 알았더라도 별수가 없었지만”
그의 부친 유초 씨의 말이었다.
“먹을 우유와 장난감을 안겨서 목욕탕에다 두고 일을 하려 다녔지요.”
“ 그래. 애는 아무 탈이 없었던가?”
누가 먼저 말했는지 모르게 한꺼번에 물었다
“예, 며칠간은 저녁에 집에 돌아와 목욕탕 문을 열면 언제나 우유병을 굴려 둔 채 엎디어 잠들어 있곤 했지요.”
“ 쯔쯔...딱해라. 휴-“
민성동의 어머니가 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기식이 녀석 듣는 데는 절대로 이 이야기는 하시지 마세요! 원망할는지도 모를 테니까요.”
“뭐, 이제 다 컸는데.”
“요즘 애들은 이해 못 하거든 요.”
민성동은 자기 부모께 특별히 다짐을 해 놓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루는 일이 끝나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역시 기식이 녀석이 걱정되어 목욕탕 문부터 열어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식이 녀석이 손가락을 물고 모로 누어서 반쯤 눈을 뜨고도 기척을 안 하더라 구요. 손가락과 입가에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고. 얼른 안아 자세히 보니 문을 열고 나오려고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도어를 얼마나 긁었던지 손톱이 닳아 피투성이였고 또 울다가 지쳐서 끌어안아도 소리가 없더란 말입니다.”
민성동은 그 때의 참담함이 새삼 되새겨졌던지 잠시 말을 끊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민성동의 아버지가 엉덩이를 슬쩍 비틀어 할멈의 얼굴 쪽으로 눈길을 던진다. 할멈은 어느새 충혈이 된 눈에 가득히 고인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영감도 아들의 이야기에 느긋이 듣고만 있는 듯 태연한 체 하고 있지만, 그토록 기막힌 삶의 질곡을 헤쳐 온 아들에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아 할멈을 쳐다본 것뿐이었다. 비렁 박토 전. 답 몇 뙈기 붙이면서 겨우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했던 당시 대구시 변두리의 생활이어서 자식 결혼식도 못 치려 주고 이역만리 떠나보냈던 것이 민유초 씨 내외의 한이었는데, 오히려 부모 도리 다 못한 것도 덮어 두고 부모 위해 지극정성 다해 주는 성동이 눈물겹도록 고마울 뿐이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 지금은 저택을 장만했고, 오십 여 명의 친인척을 이민 시켜 레이크 심콤 근처에서 레저와 관광객을 위한 숙박업, 레스토랑, 프리센트 스토아, 커피 점, 그러서리(식품. 잡화점),코인 란들이(동전이용세탁소), 아이스크림 점, 페스트 푸드, 케이크스토아, 토산품 점, 모텔, 민박 시설, 슈퍼마켓, 턱샵(매점) 등 다양한 사업을 벌여 그것을 알차게 경영해오는, 재 캐나다 교민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입지전적인 인물이 바로 민성동임을 알고 운당 선생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고국으로부터 부모를 모셔 온지도 5년이 넘는다. 민성동이 교민사회에 기여한 점이 많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듯이 그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소문나 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언짢은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유초 씨는 가만히 말했다. 그런 아들을 둔 유초 씨 내외는 요즈음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한다. 그는 운당 선생의 자녀들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그러나 운당 선생의 속마음을 털어놓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해 그저 출세해서 잘 살며 부모의 섬김도 남들 같이 잘 하노라고 헛말을 지껄여대고 나니 스스로 낯 뜨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소 운당 선생의 성품으로는 마음 속 깊이 담아 둔 속마음도 오래 담아 둘 줄 모르고, 있는 대로 뱉고 토해내던 것과는 달리 목구멍까지 울컥 넘어 오려는 속마음을 눌러 삼켰다. 그러고는 말없이 정오의 태양에 하얗게 빛바래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휴- 하고 한숨을 살짝 토해 냈다. 그 모습을 옆에 앉은 아내 김선영 여사 외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니 벌써 점심때가 넘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해야죠. 어르신네도 같이 가세요?”
“원 별말씀을…….우리들이야 괜찮으니 부모님 모시고 어여 들어가 보시구려.”
“특별한 약속이 없으시면 같이 들어가세요. 오랜만에 고국 분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도 매우 뜻 깊고 즐거운 일이 될 테니까요.”
민성동은 굳이 함께 갈 것을 권했고 그의 부친 유초 씨 내외도 운당 선생 내외를 붙잡아 끌기 까지 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나왔던 운당 선생 내외는 그들의 권고에 못 이승용차에 동승하고 말았다. 민성동이 모는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비치모얼 팔크를 뒤로 하고 애버뉴 로드를 빠져나와 400번 하이웨이에 올라서더니 마치 스케이트를 타듯 쾌적하게 달리기 시작한다. 멀티레인으로 된 하이웨이였지만 차들은 붐비지 않았다. 날씨는 참으로 화창했고, 캐나다의 하늘은 언제나 그러하듯 높고 푸르렀다. 그 푸른 하늘을 이고 달리는 민성동의 메르세데스 벤츠 300GL은 갈매기의 날개를 지붕에 얹고 멋진 디자인을 자랑이나 하듯 광활한 대지 위에 직선으로 뻗어간 프리웨이를 날아가듯 달린다.
“노스 욕(North York) 이니까 한 시간 정도는 걸리겠지만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닙니다. 워낙 넓은 나라라서 슈퍼마켓을 다녀오는 데도 한 두 시간 씩 걸리는 게 보통이 아니던가요.”
민성동은 운당 선생 내외가 불안해 할 가봐 자기 집이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음을 강조하며 차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운당선생은 안락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고급 승용차 안에 몸을 푹 담고는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문득 ’70년 대 초 시계생산(케이스 만 생산해 조립한 시계였지만)으로 돈을 번 어느 재벌가의 부인이 저녁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차를 몰고 온 적이 있었다. 6년 전에 졸업을 시켰던 제자가 S대하게 합격했다며 초등학교 때 담임이었던 운당 선생이 잘 가르쳐 준 은공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 했다. 그 때 탄 차가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리무진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고급 승용차는 부(富)를 상징한다.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는 브루나이, 그 나라의 국왕이 취미생활로 자동차를 수집할 정도라면 그의 재력은 과히 상상을 초월하겠지만, 어쨌든 고급 승용차는 일반 서민으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메르세데스는 확실히 승차감이 좋았다. 그래서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민성동의 집은 과연 주인에게 걸 맞는 저택이었다. 일만 평이 넘는다는 정원을 바라보고 앉은 써티벳 저택(서른 개의 방)의 응접실에서 본 정원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본 중편소설 제 1부 끝>
조진태
약력
*1976년 월간문학에 단편<雨滴>발표로 등단.
*저서로 동화집.소설집.수필집 등 다수,
*문인협회회원.소설가협회 중앙위원.중앙문인회 이사.
*신문사 기자.잡지사 주간 등 역임.
*음성신문논설위원,작가원원장(현)
|
첫댓글 구박사. 소설 제목이 <무정세월>이라던데....? 이 소설도 재미는 있는데 중간에 끊어서...
무정세월은 작년에 올렸던 게 아니라서
원고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