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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핸들 핸드백, 모카씨노(mocassino), GG로고, 녹색-빨간색-녹색과 파란색-빨간색-파란색의 줄무늬. 이는 모두 「구치」를 연상케 하는 단어들이다. 「구치」는 역사와 문화와 수공예품으로 가득한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1920년대 초 가죽제품과 승마용 액세서리, 여행용 가방을 직접 생산해 판매했던 작고 초라한 상점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제품의 우수성과 소재의 기발함으로 고객들의 입을 통해 유명해진 브랜드.
50년~60년대 헐리우드 영화붐으로 많은 스타들이 예술의 도시 피렌체를 찾았고 이탈리아 하이패션계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소렐레 폰타나를 비롯 파비아니에 시모네타, 이레네 갈리치네는 당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유명한 디자이너들로서 이들을 통해 이미 미국 헐리우드 영화계에 ‘Made in Italy’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안겨주게 됐다.
이런 가운데 「구치」 역시 헐리우드 배우에서 모나코 황실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캘리(Grace Kelly)와 피터 셀러스(Peter Sellers),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윈저의 공작부인 등 ‘특별한 여성’들을 통해 「구치」브랜드의 세계적 명분을 확고히했고 더 나아가 이탈리아 패션의 자존심을 안고 프랑스 패션과 당당히 겨루게 됐다.
1920년 피렌체 작은 상점으로 탄생
그 후 여러가지 사회적 배경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다양한 품목들을 소량 생산하는 반면 제품의 질을 향상시켜 소수에게 명품만을 제공한다는 생각으로 소비자의 레벨을 한층 더 올려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잡게 됐다. 80년대 들어서면서 가족내의 심한 이권다툼으로 경영주가 있어도 그의 역할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한 채 90년대 초 구치가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미국 「구치」 사장이였던 도미니코 데졸레(Domenico De Sole)에게 모든 것을 위임함으로써 창립자 구치오 구치의 모든 직계 아들과 손주들은 정식으로 「구치」경영에서 멀어졌다.
90년대 초에는 파산의 위험까지 넘겨야 할 정도로 경영상의 문제와 재정상의 어려움이 더해 갔지만 새로운 경영주 도미니코 데졸레의 타고난 경영력과 그의 오른팔 디자이너 톰 포드(Tom Ford)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사장으로 위임된 그 다음해부터 꾸준한 성장을 보여왔다. 그는 90년대말 「구치」 단독브랜드가 아닌 PINAULT PRINTEMPS-REDOUTE(PPR그룹)사와 전략적 연합관계와 패션업체 매입을 통해 멀티브랜드를 취급하는 지금의 패션 대 그룹 구치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伊, 프랑스 영국의 생산 기지로 명맥
「구치(Gucci)」의 창립자인 구치오 구치(Guccio Gucci)는 1881년 피렌체(Firenze)에서 태어나 밀 제조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젊어서는 18세기~19세기 산업혁명의 성장으로 많은 일거리와 보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소일거리를 시작으로 그 나라의 산업구조를 배워갔다. 특히 런던에서는 최고급 사보이 호텔(Savoy Hotel)에서 엘리베이터 안내원(Liftboy)으로 근무하면서 이 호텔을 찾는 최고의 고상하고 세련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선진화된 문화와 사고방식, 스타일, 미적 감각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하이패션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파리에서는 이미 1900년 초부터 코코 샤넬을 비롯, 스키아파렐리, 몰리네, 맹보쉐, 마들렌느 비오네 등 패션업이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길 정도로 활성화되고 있던 반면 이태리는 르네상스의 문화유산으로 직물, 의류의 생산력을 확보했음에도 불구 이를 뒷받침할 국가적 기량이나 기업의 자금수완 능력의 부족으로 18C~19C의 산업혁명에도 프랑스나 영국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산업혁명을 통해 급성장함에 따라 늘어나는 물품들을 그들로부터 하청받아 가내 수공업 생산으로 꾸준한 맥을 이어왔지만 어려운 상태는 그대로 지속됐다.
피렌체 가죽제품 파는 구치상점 오픈
사실상 1940년 이전까지도 이탈리아 업체 대부분이 가내 수공업 수준이였고 이러한 곳조차도 불과 30여군데 밖엔 없을 정도로 미비한 상태였다. 이런 어려운 시대적 배경을 뒤에 두고 구치오 구치는 고향인 피렌체로 다시 돌아와 선진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1923년 작은 규모의 상점을 얻어 이곳에서 가죽제품과 승마용 안장, 여행용 가방을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디자인으로 가내수공업의 진수를 선보이게 됐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다는 생각이 길게 15년까지 지속됐지만 그 기간 동안 구치오구치는 낙심하지 않고 한가지 우물을 판다는 생각으로 한결같이 고급 소재와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핸드백과 여행용 가방, 승마용 안장 만들기에 정성을 쏟아왔다. 그의 뛰어난 손재주와 성실함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구치상점의 제품들로 채워졌고 이태리 최고의 가죽 전문상점으로 자리를 굳히게 됐다.
피렌체는 당시 다양한 예술과 수공예품의 발달로 항상 많은 외국인들과 무역업을 하는 무역업자들로 도시는 늘 붐볐다. 이들은 구치상점에 진열된 디자인과 품질이 우수한 상품들에 매료당했으며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하여 구치상품의 우수성이 널리 퍼지게 됐다. 이것을 계기로 1938년 로마 비아 콘도티(Via Condotti) 거리에 제 2의 구치 상점을 오픈했다.
시대적 빈곤함으로 인해 충분한 제품의 재료들을 구하지 못한 가운데 구치오 구치는 오히려 이것을 역이용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는 「구치」브랜드의 중요한 아이콘 프로덕트(Icon Product)를 탄생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 면에서도 저렴한 삼나무의 일종인 대마와 린넨, 대나무를 이용해 여러가지 아이디어 제품을 생산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죽에 손잡이만 대나무를 사용한 ‘대나무핸들 핸드백’을 생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영국과 미국의 패션이 시민계급에 의해 주도된 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패션 흐름은 귀족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던 시기라 많은 귀족의 구치 고객들은 대나무핸들 핸드백의 생소한 소재가 다소 싸구려 같다는 우려로 구매가 주춤했지만 오히려 손에 들었을 때 한층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점에 매료돼 처음 선입견과는 달리 많은 사랑을 받는 제품이 됐다. 지금까지도 이 제품은 「구치」의 아이콘 프로덕트(Icon Product)로서 계속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작은 규모로 시작한 구치상점은 늘어나는 고객과 주문량으로 더 큰 매장으로 옮겨야 했고 다음해인 1939년에는 개인상점 규모에서 구치오 구치의 네아들인 알도(Aldo), 바스코(Vasco), 우고(Ugo), 로돌프(Rodolf)를 공동 경영자로 공식적인 회사를 설립하게 됐다.
세계 2차대전, 패션업계에 불어닥친 붐
세계 제2차대전으로 의류산업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다소 주춤한 상태였으나 오히려 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불어온 패션업계의 급성장으로 이탈리아의 값싼 노동력과 문화유산인 직물 생산력의 다양함, 거리상 가깝게 있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업체들에게 보다 폭넓은 수공업적 하청 생산이 맡겨졌다. 이것은 이탈리아 패션업계가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됐으며 이후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졌다.
이탈리아 패션의 본격적인 성장은 2차 대전 이후 부터 직물무역과 관광, 수공예품, 예술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 피렌체를 중심으로 몰려들게 됐고 이때부터 이탈리아 패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소렐레 폰타나를 비롯 카르사, 파비아니에 시모네타, 이레네 갈리치네와 핸드백, 가죽제품의 명가 「구치」는 빼놓을 수 없는 이 시대 패션계를 이끌어 가는 선두주자가 됐다. 이들의 범위는 1950년대 헐리우드 영화의 붐을 이뤘던 미국 대 스타들에게까지 전달됐고 이들의 가내수공업 형태로 이뤄진 꼼꼼한 바느질과 창조적인 디자인으로 ‘Made in Italy’의 이미지를 미국시장에 드러내게 됐다.
이것을 증명하듯 헐리우드의 배우에서 모나코 황실의 왕비가된 그레이스 캘리(Grace Kelly)와 피터 셀러스(Peter Sellers),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와 윈저의 공작부인은 「구치」제품을 늘 애용했고 이후 세계적으로 고품질의 유명 브랜드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됐다.
그레이스캘리 오드리햅번 애용 기폭제
「구치」는 유명 디자이너들과 경쟁상대가 아닌 협력자로서 이제까지 프랑스와 영국의 하청업자로 낙인찍인 이탈리아 이미지를 세계시장에 당당히 ‘Made in Italy’ 제품으로 권위와 품위를 선전하게 됐다. 이를 위한 시발점으로 1950년 처음 「구치」를 대표하는 아이콘 무늬를 만들었다. 이것은 말 안장의 뱃대끈 (webbing)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제품의 색상이 천연 가죽색일 경우 녹색-빨간색-녹색으로, 제품의 색상이 천연 가죽색이 아닌 컬러일 경우에는 파란색-빨간색-파란색으로 크기가 다른 줄무늬를 이용 「구치」각 제품에 부착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구치」의 전통적인 무늬가 됐고 어느 브랜드 제품인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구치」 브랜드의 심볼이 되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며 인기를 얻고 있다. 제 2의 「구치」아 이콘 프로덕트는 모카씨노(mocassino)라는 구두끈이 없는 신발에 메탈을 이용해 장식한 깔끔하고 독특한 제품이다. 모카씨노 역시 처음에는 대나무 손잡이 핸드백 만큼이나 생소한 제품이였으나 이 제품의 신선함과 새로움은 많은 고객들의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몬테나폴레오네에 「구치」 매장 오픈
「구치」는 고급스러움과 우아함, 품위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지켜 나가며 「구치」만의 심플하면서 세련되고 고급스런 디자인, 우아한 전통미의 조화로 많은 고객들을 유치하게 됐다. 두번째 「구치」매장이였던 로마점 을 마지막으로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했고 13년이 지난 1951년에 밀라노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에 3번째의 매장을 오픈했다.
이 거리는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주위의 냉대와 시선을 피하기 위한 가난한 예술가들과 동성 연애자들의 클럽이 많았던 곳이였다. 세계적으로 패션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섬세한 감각을 필요로 하는 여성스런 직업의 특성상 대부분이 동성연애자들이였고 이들은 이 거리에 주로 모여 그들만의 사랑과 고독, 더 나아가 비즈니스를 교류하게 됐다.
이 거리의 특징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자주 모이게 됐고 따라서 이 주위를 토대로 그들의 의상실이 하나씩 오픈되면서 앞으로 이탈리아 패션을 주도할 중심지로 주목을 받았고 구치는 곧이어 이곳에 3번째의 매장을 오픈했다. 「구치」의 몬테나폴레오네 거리 입점은 상당한 광고효과를 가져왔고 이를 계기로 유럽진출에 커다란 발판이 됐다.
구치오 구치의 죽음…새로운 전성기로
1953년 「구치」창립자 구치오 구치는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을 아들들에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동시에 「구치」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해 이탈리아 시장이 아닌 세계 시장에 눈을 뜨게됐다. 같은 해 뉴욕에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구치」상점을 오픈한다. 이것은 미국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나라는 아니지만 막대한 소비를 하고 있는 나라임을 감안할 때 결코 작지 않은 시장임을 인식하게 됐고 이것이 「구치」 매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후 1961년에는 유럽에서는 첫번째 국가인 런던에 매장을 오픈했고 이어 1963년에는 세계패션의 선두 자리와 자존심을 지키고있는 파리에, 그리고 1961년에는 팜 비치(Palm Beach)와 1968년 베버리 힐즈(Beverly Hills)에 각각 새로운 구치 매장을 오픈했다. 이때부터 「구치」는 이탈리안 브랜드 보다는 인터내셔널 브랜드로 자리잡을 준비를 하게 된다.
「구치」가 처음 미국시장 개척시 어려웠던 점은 만만치 않던 미국시장의 소비형태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비싼 한 종류의 의상 보다는 편하고 실용적이고 관리하기 쉬운 저렴한 옷을 몇 벌 구입한다. 이것은 고품질의 창조성이 강한 제품을 소량 생산하는 이탈리아 가내수공업적 형태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었고 이 경우 현재까지의 모든 생산기술을 대량 생산에 맞춰야 한다는 개념이 부과된다. 또한 이들에게 미국인들은 패션에 전혀 감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고가수준의 「구치」명 제품들이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어필될 것인가?’가 커다란 숙제로 대두됐다.
재키 케네디의 ‘Jackie O’ 가방
결국 미국인들의 소비형태에 맞출 수 없는 「구치」는 오히려 이탈리아의 독특한 스타일과 취향을 그들에게 잘 이해시키는 방향을 택했고 이 방향은 당시 「구치」제품의 애용자였던 미국의 헐리우드 대스타들과 고위관리층 부인들을 통해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됐다.
1966년 「구치」는 모나코 황실의 왕비인 그레이스 캘리를 위해 가죽제품이 아닌 꽃무늬 실크를 소재로 「구치」 스카프를 만들어 액세서리 부분에도 뛰어난 감각과 재능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키 케네디는 어깨에 매는 「구치」가방(shoulder bag)을 착용해 「구치」의 ‘대사 아닌 대사’ 역할을 충분히 하며 세계만방에 「구치」의 우수성과 브랜드 이미지를 알리게 됐다. 지금까지 이 가방은 ‘재키 오(Jackie O)’라는 고유상품명을 갖고 「구치」의 또 하나의 아이콘 제품이 됐다.
구치오 구치 기념 ‘GG 로고’ 탄생
60년대 후반에는 GG라는 로고를 만들어 제품의 다양성과 신선함을 줬다. 「구치」의 로고인 GG는 창립자인 구치오 구치(Guccio Gucci)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이름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었고 고급스러움과 세련된 이미지의 브랜드 컨셉을 아주 잘 반영해 준다. 특히 천 위에 GG로고를 새긴 ‘지지 캔버스(GG Canvas)’라 불리는 천을 사용해 지갑과 가방, 의류 제품에 폭넓게 쓰여 클래식하면서도 심플하고 세련된 품위를 표현하는 아주 큰 역할을 하게 됐다.
「구치」 로고 탄생의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구치」를 비롯 의류산업에 기여하고 있던 많은 이탈리아 업체들은 기존의 단순 하청생산 수준이 아닌 이제 독자 브랜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기업의 규모도 점차 확대돼 세계 시장에 당당히 ‘Made in Italy’ 를 붙여 이들만의 독자 브랜드를 광고하게 됐다.
가내수공업서 대량생산시스템 도입
1966년 가을 피렌체에 불어닥친 홍수재해로 인해 「구치」는 비아 델라 비냐(Via della Vigna) 거리에 있는 상점을 닫은 후 비아 토르나부오니(Via Tornabuoni) 거리에 매장을 오픈했다. 1971년 피렌체에서 약간 떨어진 스칸디치(Scandicci) 지역에 새로운 기계설비와 대량생산 기술이 도입된 공장 가동을 통해 「구치」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제품의 대량생산 시스템은 제품의 표준화와 공정간소화, 다양화로 오히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구치」브랜드가 해외시장을 활성화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72년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도쿄에 매장을 오픈했고 74년 홍콩에 제 2의 매장을 오픈 아시아 시장에 발을 뻗치게 됐다.
73년 1차 석유파동 인한 어려움도
전체적으로 이탈리아 섬유, 의류산업은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지만 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세계 시장의 침체로 마이너스 성장이 이탈리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다. 임금 인상으로 제품 경쟁력이 저하됐으며 급격한 수요감소에 따라 대량 생산위주의 업체들에게 적잖은 타격을 줬다. 「구치」 역시 과감한 투자로 첨단 설비와 기술을 도입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수요의 감소로 힘든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이에 「구치」는 최첨단 설비와 기술을 도입한 강점을 최대한 살려 최고 품질의 고가품 생산에 집중하게 됐다. 또한 소품종을 대량 생산하는 차원이 아닌 본래의 가족 전통인 가내수공업의 기본이념을 재평가해 제품의 품질과 다양한 디자인에 초점을 두어 다시 소량생산체제를 갖추게 됐다.
특히 「구치」 제품중 가장 유명하고 첫번째 제품인 가죽에 대나무 손잡이가 있는 가방과(47년), 구치오의 네 아들 중 하나인 로돌포 구치(Rodolfo Gucci)에 의해 디자인 된 구두끈이 없이 매끈한 모카씨노 구두(52-53년), 영화배우이자 모나코의 여왕이 된 그레이스 캘리에 의해 유명해진 플로라 실크의 스카프(66년) 등은 구치의 아이콘 프러덕트로 생산에 주력했다.
구치 가문 마지막 사장 마우리치오 구치
82년 초 「구치」의 대규모화로 주식회사에 상장되면서 더 이상 가족공동운영이 불가피한 상태에 창립자 구치오 구치 손자이자 로돌포(Rodolfo)의 아들 마우리치오 구치(Maurizio Gucci)가 사장으로 선출된다. 또한 미국시장의 확대로 84년에는 미국 「구치」사장으로 도미니코 데졸레(Domenico De Sole)가 선출된다.
80년대 구치 가문의 형제 이권다툼은 대대로 물려오는 가족전통기업의 틀을 깨버린 비극으로 변하게 됐다. 구치형제간의 경영권 싸움으로 가족내 갈등은 심해지고 결국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한 채 구치형제들은 서서히 「구치」 경영에서 멀어져 갔다. 실제로 89년 구치오 구치의 아들 중 하나인 알도(Aldo)는 그와 그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던 50%의 「구치」 주식을 아랍국가인 바레인 투자전문 기업인 INVESTCORP에 모두 매각함으로 「구치」에서 물러났다.
당시 사장이였던 마우리치오가 소유하고 있던 나머지 50%의 지분도 93년 최악의 경제 어려움으로 같은 기업인 INVESTCORP에 모두 매각했다. 이로서 창립자 구치오 구치의 뜻에 어긋난 가족물림기업은 끝이난다. 97년 6월 16일 마우리치오의 피살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아있지만 이것은 가족사의 최악의 비극을 남겼다.
80년대 제 2차 정체기로 위축
「구치」는 70년대 석유파동으로 한차례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으나 어김없이 80년대에도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쳤다. 무엇보다도 미국 시장에 강하던 「구치」는 미국 달러가치의 하락으로 수출시장에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극동 지역 국가로부터 대규모 저가 위조상표 제품과 디자인들이 카피돼 국제시장에 범람하게 됐고 이미 고품격의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던 「구치」 역시 그들의 카피 타깃이 됐다.
또한 밀라노를 중심으로 유능한 프레타 포르테 디자이너인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크리치아(Krizia), 쟌 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 지아니 베르사체(Gianni Versace), 미소니(Missoni), 루치아노 소프라니(Luciano Soprani)들의 대거 등장은 「구치」를 위축하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도 구치 가족간의 갈등을 계속됐고 뚜렷이 「구치」의 문제점을 정확히 끄집어내 새롭게 이끌어갈 지도자가 없이 공중에 떠있는 상태였다. 그후 3년이 지난 93년 사장 마우리치오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분을 매각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구치가문의 「구치」를 떠났고 이어 새로운 사장을 선출해야 하는 숙제를 남기게 됐다. 결국 바레인의 투자전문 업체인 INVESTCORP는 「구치」의 주식을 100% 손에 쥐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