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금마면 기양리 32-2
사적 제150호
백제역사유적지구
창건 및 연혁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430m) 아래 넓은 평지에 자리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역이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백제 30대 왕 600~641) 때 창건한 사찰이다. 1966년 미륵사가 있던 자리(익산 미륵사지)를 정부에서 사적 제150호로 지정했다. 2015년 7월 열린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 가운데 한 곳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충남 공주와 부여, 전북 익산에 분포되어 있다. 이 유적지구에는 공주 웅진성 관련 유산인 공주 공산성・송산리 고분군, 부여 사비성 관련 유산인 부여 관북리 유적・부소산성・정림사지・나성, 사비 시대 두 번째 도읍지인 익산의 왕궁리 유적・미륵사지 등 총 8곳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제2, 무왕)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고자 용화산 밑 큰 못 가까이 이르렀다. 그때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났다.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였다. “여기다가 꼭 큰 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한 소원입니다.” 왕이 이를 승낙하였다. 지명 스님을 찾아가서 이 연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스님은 신력(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미륵삼존을 모실 전각과 탑과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국사(國史)에는 왕흥사(王興寺)라 한다]라는 현판을 붙였다. 진평왕이 여러 장인을 보내어 도와주었다.
이러한 설화에 의하면, 미륵사는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자 신라의 기술까지 합쳐진 가람이다. 그리고 3탑 3금당식 가람 배치는 미래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제한다는 경전의 내용에 근거한다. 이러한 사항은 1974년부터 이어진 23년간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사찰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기인 7세기 초이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륵사의 가람 배치
미륵사는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이른바 백제식 <1탑-1금당> 형식의 가람 세 동을 나란히 병렬시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양쪽의 동원과 서원보다는 가운데 중원의 면적과 금당 및 탑의 규모가 더 커 중심을 형성하였다.
동중서 3개 원은 각기 긴 회랑으로 구획되어 독립된 공간을 이루지만, 북쪽으로는 1동의 큰 강당터로 연결된다. 즉 예불공간을 3개 원으로 분화되었지만, 강당은 하나로 전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강당과 연결된 북·동·서 회랑터에는 후대 승방(僧房)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렇듯 백제는 1탑 1금당의 사찰구조를 바탕으로 불교의 미륵신앙을 구현하기 위해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사찰구조로 미륵사를 만들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로, 높이 395cm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
미륵사지의 발굴과 복원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에는 목탑이, 동원과 서원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힘든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최근까지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있었다.
미륵사지석탑은 발굴 조사 때 동탑지에서 노반석과 없어졌던 지붕돌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서탑과의 비례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계산하여 복원한 결과 9층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결론에 따라 1992년 미륵사지 동원에 석탑을 복원하였다. 복원된 높이는 총 24m다.
서원의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안정성이 우려되어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석탑의 해체조사 및 보수정비를 추진하였다. 2002년부터 본격적인 해체조사 및 학술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2018년 6월에 복원공사가 완료되었고, 그 후 주변 정리를 거쳐 이듬해 4월 30일에 준공식을 개최하였다.
한편 2009년 서원의 석탑에 대한 1층 해체조사를 진행하던 중 심주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은 사리공 안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 다양한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되었다. 사리봉영기의 판독 결과 석탑은 639년 사리를 안치하면서 건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미륵사가 백제 무왕 집권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해 준 보기 드문 사례이다.
무왕과 선화공주, 그리고 미륵사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왕이 미륵사를 세운 이유는 왕후가 사찰 창건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때 왕후는 선화공주로 읽힌다. 그런데 발굴된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무왕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씨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귀족 가문인 대성팔족 중 사택씨 가문의 인물로 후기 백제에서 왕후를 배출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고 추정한다. 사택왕후는 원래부터 백제 사람이기 때문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와 다르다. 이에 따라 선화공주와 관련하여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